클레멘스 7세 교황 Clemens 7.

 258. 클레멘스 7세 교황 Clemens Ⅶ.  1523~1534

교황 하드리아노 6세 서거 후의 교황 선거는 약 2개월간 계속되었다. 1523년 11월 19일에 줄리오(Giulio de Medici)가 클레멘스 7세라는 이름으로 교황직에 등극하였다. 교황 클레멘스 7세는 1478년 5월 26일 피렌체에서 출생하였고, 그의 사촌 교황 레오 10세의 측근으로 활동하면서 교황청 내부의 사정에 밝았다. 교황 클레멘스 7세는 교황으로 선출된 후 자신이 시급하게 해결해야 할 과제로서, 루터와의 갈등 해소, 그리스도교를 신봉하는 군주들 사이의 평화 그리고 터키의 위협 방지 등을 지적하였다. 이들 과제 가운데 신앙의 분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가장 시급하였다. 그래서 교황 클레멘스 7세는 로렌초 추기경을 교황 특사로 독일에 파견하였다. 1524년 뉘른베르크에서 개최되었던 제국 의회는 공의회의 소집을 요청하였고, 공의회의 개최 장소로는 트리엔트를 추천하였다. 하지만 교황 클레멘스 7세는 공의회 지상주의가 다시금 득세할까 봐 두려워한 나머지 공의회의 소집에 동의하지 않았다. 교황 클레멘스 7세는 터키의 위협을 방지하기 위해 유럽의 군주들의 동맹을 모색하였으나 별다른 성공을 거두지는 못하였다. 그 결과 터키는 헝가리를 공경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사이 독일 황제의 군대가 로마로 진군하였으나 그들은 로마를 약탈하는 데 혈안이 되어 있었다. 1527년 5월 6일에 황제의 군대가 로마에 도착하였고 군사들은 로마를 노략질하여 황폐화시켰다. 교황 클레멘스 7세는 천사의 성으로 도피하지 않으면 안 되었고, 1527년 6월 5일 체포되었다. 동년 12월에 이르러서야 거금을 지불하고 교황 클레멘스 7세는 겨우 풀려날 수 있었다. 이러한 사태는 하느님의 심판인 것처럼 여겨졌다. 그리고 이러한 사태는 로마에 엄청난 결과를 초래하였다. 독일의 황제 칼 5세는 체포된 상태에 있던 교황에게 공의회를 소집하고 교회를 개혁하며 이단을 극복하도록 압력을 가하였다. 하지만 교황 클레멘스 7세는 공의회의 소집 요구에 순순히 응하지 않았다. 1530년 2월 24일 교황 클레멘스 7세가 황제 칼 5세에게 황제 대관식을 치러 줌으로써 교황과 황제 사이의 화해가 이루어졌다. 1530년 4월 8일 황제 칼 5세에 의해 아우크스부르크에서 소집된 제국 의회는 신앙의 분열로 말미암은 문제를 해결해야 할 실마리를 제공해야 했다. 하지만 ꡐ아우크스부르크 신앙 고백ꡑ은 공의회를 통해 문제를 해결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재확인시켜 주었다. 교황 클레멘스 7세는 1534년 9월 25일 서거하였다. 교황 클레멘스 7세는 절박하게 요구되었던 공의회의 소집을 거부함으로써 교회에 부담감을 남겼고, 많은 사람들은 교황의 서거를 교회를 위해서는 다행한 일이라고 생각하였다. 교황 클레멘스 7세는 르네상스 교황에 속하는 전형적인 인물이었다.


 


이 글은 카테고리: 예비신자교리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고유주소를 북마크하세요.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