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오로 3세 교황 Paul 3.

 259. 바오로 3세 교황  Paul Ⅲ.  1534~1549

교황 바오로 3세의 원래 이름은 알레산드로(Alessandro Farnese)였다. 그는 아마도 1468년 로마에서 출생하였으리라 추정되고 있다. 그는 교황 알렉산데르 6세에 의해 추기경으로 서임되었고(1493년), 1519년에 사제로 서품되었다. 1524년 이후 오스티아의 주교 추기경으로 재직하였고, 추기경단의 의장으로 활약하였다. 1534년 10월 13일 바오로 3세라는 이름으로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교황 바오로 3세의 재임 기간은 교황사의 신기원을 이루는 시기에 해당하였다. 한편으로 교황 바오로 3세의 재임 기간은 친인척 중용주의에 의해 각인되었고, 교황은 네 명의 자녀와 여러 명의 손자들을 보살펴야만 하였다. 그는 14살과 16살 사이에 해당하는 세 명의 손자들을 추기경에 임명하였다. 다른 편으로 교황 바오로 3세는 교회의 개혁을 자신이 해결해야 할 시급한 과제로 파악하였다. 교황 바오로 3세는 신앙의 분열로 말미암은 파급 효과를 줄이기 위해 교회의 내적 쇄신을 도모하는 데 앞장섰다. 교황으로 선출된 후 즉각 교황 바오로 3세는 공의회의 준비에 착수하였고, 1535년 초부터 자신의 계획을 실현에 옮기기 시작하였다. 그 결과 1535년 만토바에서 공의회를 소집한다고 공표하였으나, 공의회 개최 장소를 비첸차(Vicenza)로 변경하였다. 하지만 정치적인 여건으로 공의회는 소집되지 못하였다.


  1541년 독일의 황제는 독일에서 공의회가 개최되기를 바랐던 제후들의 요구를 빌미 삼아 공의회 개최 장소로 트리엔트를 제안하였다. 교황 바오로 3세는 1542년 11월 1일 트리엔트에서 공의회가 소집될 것이라는 사실을 공고하였다. 그러나 이 공의회의 소집 역시 독일에서 발생한 정치적인 여건 때문에 실현되지 않았다. 이에 교황 바오로 3세는 공의회의 소집을 중지하였다. 새로운 소집 일자로서 1545년 5월 15일이 확정되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1545년 12월 13일 공의회가 개막되었다.


  1547년 초에 공의회는 장소를 볼로냐로 옮겼다. 왜냐하면 트리엔트에는 발진티푸스가 발생하였기 때문이었다. 독일의 황제는 공의회의 장소를 – 독일의 제후들은 이탈리아로 가지 않을 것이라는 이유로 – 다시금 트리엔트로 옮길 것을 요구하였으나, 교황 바오로 3세는 이 요구를 거절하였다. 그사이 볼로냐에서 공의회는 속개되었다. 하지만 교황 바오로 3세는 다시금 공의회를 중지시켰다.


  교회 내적으로 교황 바오로 3세는 개혁에 열정적으로 몰두하였다. 교황 바오로 3세는 교회의 개혁과 쇄신에 앞장설 수 있다고 판단되는 여러명의 추기경을 임명하였고, 교회의 개혁과 쇄신을 집중적으로 다루게 될 위원회를 구성하기도 하였다. 교황 바오로 3세는 수도회의 쇄신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특히 교황 바오로 3세는 주교의 상주 의무를 강화시켰다. 이탈리아까지 침투하였던 신앙의 분열 여파에 대적하기 위해 종교 재판소의 운영을 명령하였다. 아울러 6명의 추기경으로 구성된 위원회를 조직하였고, 이 위원회는 전체 교회의 신앙의 순수성을 지키고 보호하는 임무를 지니고 있었다. 교황 바오로 3세는 1543년부터 1549년 사이에 천사의 성을 프레스코회로 장식하도록 하였다. 1549년 11월 10일 교황 바오로 3세가 서거하자 교회의 개혁은 이미 준비의 상태에 돌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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