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오 13세 교황 Leo 13.

 295. 레오 13세 교황  Leo ⅩⅢ.  1878~1903

교황 비오 9세 서거 후에 시작된 교황 선거는 3일 만인 1878년 2월 20일 조아키노(Gioacchino Vincenzo de’ Pecci)를 교황 – 레오 13세 – 으로 선출하였다. 교황 레오 13세는 1810년 3월 2일 아나니(Anagni)에서 출생하였고, 1837년 사제로 서품되었으며, 1843년부터 브뤼셀 주재 교황 대사를 역임하였고, 1846년부터는 페루자의 주교로 재직하였다. 1853년 교황 레오 13세는 추기경에 서임되었다. 벨기에에서 교황 대사로 재직하면서 교황 레오 13세는 산업화가 안고 있는 문제점을 경험하였고, 의회주의를 기본으로 하는 정부의 형태에 대해서도 경험을 축적하였다.


  교황 레오 13세는 고등 교육을 받았고, 자신의 의무에 충실한 인물이었다. 교황 레오 13세는 1878년 4월 21일 발표한 첫 번째 회칙을 통해 재임 중에 자신이 관심을 기울여야 할 주요 과제로서 교회와 문화 사이의 화해를 지적하였다. 독일의 재상 비스마르크는 교황 레오 13세의 등극으로 ꡐ문화 투쟁ꡑ을 중지할 명분을 얻었다. 독일의 영주들 역시 비스마르크의 노선을 따랐다. 프랑스에 대한 교회의 관계는 교황 레오 13세가 재임 초기에 프랑스에 대해 우호적인 태도를 보였음에도 불구하고 프랑스가 견지하고 있던 반(反)교회적인 법률로 말미암아 매우 불편하였다. 이 때문에 프랑스에서 교회의 위상을 회복하기 위한 교황 레오 13세의 노력은 별다른 성공을 거두지 못하였다.


  1870~1871년 사이에 이탈리아는 국왕을 중심으로 통일을 이루는 데 성공하였다. 그 결과 교회 국가는 해체되었다. 교황은 자신의 선임자와 마찬가지로 ꡐ바티칸의 포로ꡑ로 생활하였다. 그 결과 교황은 수십 년 동안 바티칸을 떠나 여행할 수 없었다. 1881년 7월 13일 밤, 교황 비오 9세의 시신을 베드로 대성당으로부터 라우렌시오 성당으로 이동시키려 하였을 때 이탈리아의 광신도들이 교황의 시신을 탈취하여 테베레 강에 던져 버리려고 시도한 바 있었다. 교황 레오 13세는 독일의 재상 비스마르크의 지원하에 여전히 이탈리아 정부와의 화해를 희망하였다. 하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오히려 1890년 이후로 이탈리아와의 관계는 더 악화되었다.


  교회 내적으로 교황 레오 13세는 제1차 바티칸 공의회로부터 자극을 받은 개혁 작업을 계속하였다. 교황 레오 13세는 여러 회칙을 통해 신학이 안고 있는 문제에 대해 태도를 표명하였고, 토마스 아퀴나스를 신학과 철학의 연구에 있어서 본보기로 삼을 것을 권고하였다. 아울러 성서에 대한 연구의 필요성을 강조하였고, 성서 연구를 뒷받침하기 위한 목적으로 1902년에는 교황청에 성서 위원회를 구성하기도 하였다.


  교황 레오 13세는 1891년 유명한 사회 회칙 Rerum navarum(새로운 사태, 1891년 3월 15일)을 발표하였고, 이 회칙을 통해 노동자와 사용자 사이의 중재자 역할을 수행할 것을 모색하였다. 아울러 교항 레오 13세는 신앙 때문에 갈라져 나간 형제들과의 일치 문제에 대해서도 깊은 관심을 보였다. 그래서 1896년 교히 일치에 대한 회칙을 발표하기도 하였다. 교황 레오 13세는 학문 연구자들을 격려하였고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1903년 7월 20일 93세의 고령으로 교황 레오 13세가 서거할 무렵, 매우 드물게 교황 등극 25주년을 기념하는 은경축 행사를 지내기도 하였다. 교황 레오 13세는 19세기의 교황 가운데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한 한 분으로 평가받고 있다. 교황 레오 13세는 가톨릭 교회의 위상을 전 세계에 드높였고, 교회와 개별 국가 사이의 장애물을 제거하는 데 성공하였다. 교회와 현대 인류 사이의 화해는 교황 레오 13세가 남긴 지대한 공로로 역사가들은 평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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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95. 레오 13세 교황  Leo ⅩⅢ.  1878~1903

    교황 비오 9세 서거 후에 시작된 교황 선거는 3일 만인 1878년 2월 20일 조아키노(Gioacchino Vincenzo de’ Pecci)를 교황 – 레오 13세 – 으로 선출하였다. 교황 레오 13세는 1810년 3월 2일 아나니(Anagni)에서 출생하였고, 1837년 사제로 서품되었으며, 1843년부터 브뤼셀 주재 교황 대사를 역임하였고, 1846년부터는 페루자의 주교로 재직하였다. 1853년 교황 레오 13세는 추기경에 서임되었다. 벨기에에서 교황 대사로 재직하면서 교황 레오 13세는 산업화가 안고 있는 문제점을 경험하였고, 의회주의를 기본으로 하는 정부의 형태에 대해서도 경험을 축적하였다.

      교황 레오 13세는 고등 교육을 받았고, 자신의 의무에 충실한 인물이었다. 교황 레오 13세는 1878년 4월 21일 발표한 첫 번째 회칙을 통해 재임 중에 자신이 관심을 기울여야 할 주요 과제로서 교회와 문화 사이의 화해를 지적하였다. 독일의 재상 비스마르크는 교황 레오 13세의 등극으로 ꡐ문화 투쟁ꡑ을 중지할 명분을 얻었다. 독일의 영주들 역시 비스마르크의 노선을 따랐다. 프랑스에 대한 교회의 관계는 교황 레오 13세가 재임 초기에 프랑스에 대해 우호적인 태도를 보였음에도 불구하고 프랑스가 견지하고 있던 반(反)교회적인 법률로 말미암아 매우 불편하였다. 이 때문에 프랑스에서 교회의 위상을 회복하기 위한 교황 레오 13세의 노력은 별다른 성공을 거두지 못하였다.

      1870~1871년 사이에 이탈리아는 국왕을 중심으로 통일을 이루는 데 성공하였다. 그 결과 교회 국가는 해체되었다. 교황은 자신의 선임자와 마찬가지로 ꡐ바티칸의 포로ꡑ로 생활하였다. 그 결과 교황은 수십 년 동안 바티칸을 떠나 여행할 수 없었다. 1881년 7월 13일 밤, 교황 비오 9세의 시신을 베드로 대성당으로부터 라우렌시오 성당으로 이동시키려 하였을 때 이탈리아의 광신도들이 교황의 시신을 탈취하여 테베레 강에 던져 버리려고 시도한 바 있었다. 교황 레오 13세는 독일의 재상 비스마르크의 지원하에 여전히 이탈리아 정부와의 화해를 희망하였다. 하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오히려 1890년 이후로 이탈리아와의 관계는 더 악화되었다.

      교회 내적으로 교황 레오 13세는 제1차 바티칸 공의회로부터 자극을 받은 개혁 작업을 계속하였다. 교황 레오 13세는 여러 회칙을 통해 신학이 안고 있는 문제에 대해 태도를 표명하였고, 토마스 아퀴나스를 신학과 철학의 연구에 있어서 본보기로 삼을 것을 권고하였다. 아울러 성서에 대한 연구의 필요성을 강조하였고, 성서 연구를 뒷받침하기 위한 목적으로 1902년에는 교황청에 성서 위원회를 구성하기도 하였다.

      교황 레오 13세는 1891년 유명한 사회 회칙 Rerum navarum(새로운 사태, 1891년 3월 15일)을 발표하였고, 이 회칙을 통해 노동자와 사용자 사이의 중재자 역할을 수행할 것을 모색하였다. 아울러 교항 레오 13세는 신앙 때문에 갈라져 나간 형제들과의 일치 문제에 대해서도 깊은 관심을 보였다. 그래서 1896년 교히 일치에 대한 회칙을 발표하기도 하였다. 교황 레오 13세는 학문 연구자들을 격려하였고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1903년 7월 20일 93세의 고령으로 교황 레오 13세가 서거할 무렵, 매우 드물게 교황 등극 25주년을 기념하는 은경축 행사를 지내기도 하였다. 교황 레오 13세는 19세기의 교황 가운데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한 한 분으로 평가받고 있다. 교황 레오 13세는 가톨릭 교회의 위상을 전 세계에 드높였고, 교회와 개별 국가 사이의 장애물을 제거하는 데 성공하였다. 교회와 현대 인류 사이의 화해는 교황 레오 13세가 남긴 지대한 공로로 역사가들은 평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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