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오 10세 교황 Pius 10.

 296. 비오 10세 교황 Pius Ⅹ. 1903~1914

교황 레오 13세 서거 후 시작된 교황 선거에서 교황청의 마지막 국무장관인 람폴라(Rampolla) 추기경기 가장 유력한 후보자로 부상하였다. 람폴라 추기경은 대부분의 이탈리아, 프랑스 그리고 스페인의 추기경들의 지지를 받았다. 람폴라 추기경의 선출이 점점 유력한 가운데 크라코프(Krakau)의 추기경이 오스트리아의 황제 프란츠 요제프의 이름으로 거부권을 행사하였다. 대부분의 추기경들은 교황 선거에 오스트리아가 개입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항의하였다. 하지만 람폴라 추기경의 교황 선출은 실현되지 않았다. 1903년 8월 4일 실시되었던 제7차 투표에서 추기경이자 동시에 베네치아의 총대주교로 재직하고 있던 주세페(Giuseppe Sarto)가 교황 – 비오 10세 – 으로 선출되었다.


  교황 비오 10세는 베네치아에서 소작 농부의 아들로 출생하였다. 보좌 신부와 본당 신부를 거쳐 1875년 트레비소(Treviso)의 주임 신부로 재직하였고, 1884년 만토바(Mantua)의 주교로 임명되었으며, 1893년부터 추기경에 서임되어 베네치아의 총대주교로 재직하였다. 베네치아에서 교황 비오 10세는 사목자로서 봉사하기 위해 교구의 개혁을 추진하였다.


  교황 비오 10세는 교횡 내의 쇄신을 주요 과제로 삼았다. 교황 비오 10세의 선거 표어는 ꡐ모든 것을 그리스도 안에서 쇄신시키는 것ꡑ이었다. 교황 비오 10세는 자신의 다양한 개혁 작업을 먼저 교회 음악으로부터 시작하였고, 그 다음 교회의 법전을 새롭게 정리하였다. 1905년 12월 20일 반포된 교령을 통해 교황 비오 10세는 이미 제1차 바티칸 공의회도 권장하였던 매일의 성체 배령을 장려하였다. 이 교령은 1910년 8월 8일 반포된 어린이의 조기 첫영성체에 대한 교령을 통해 보완되었다. 교황 비오 10세는 전례 운동을 통해 강한 자극을 받아 신자들이 매일 미사에 참례하도록 권고하였다. 1911년에는 성무 일도서에 대한 개편 작업이 이루어졌고, 1904년 교황 비오 10세는 1903년에 있었던 교황 선거를 회상하면서 교황 선거에 국가의 개입을 금지시켰다. 이 금지를 어길 경우 파문의 처벌을 내릴 것이라고 선언하였다.


  1904년 교황 비오 10세는 교황 선거에 대한 규정을 종합하고 보완하였다. 1908년 교항청의 기구도 개편하여 성성의 숫자를 축소하였고, 업무 분담도 새롭게 조정하였다. 교황 비오 10세는 교황청의 공식 기관지인 Acta Apostolicae Sedis 를 발행하여 1909년 1월 1일 이후 발표된 교황청의 문헌을 공개하였다. 1909년 교황 비오 10세는 5년마다 로마를 방문해야 한다 – Ad limina – 는 주교들의 의무를 새롭게 정리하였고, 교회의 재판소 – Rota Romana – 를 재정비하였다. 1909년 5월 7일 교황 비오 10세는 성서 연구에 대한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해 로마에서 성서 대학을 설립하였다. 1907년 교황 비오 10세는 베네딕토 수도회에 불가타 본의 새로운 교정 작업을 위임하였고, 이탈리아의 신학교에서 실시되어 왔던 신학 연구를 개선시켰다. 사제들에게는 적어도 3년마다 피정에 참석해야 한다는 의무를 부과하였고, 종교 교육을 돕기 위해 새로운 교리서를 편찬할 것도 지시하였다.


  교황 비오 10세의 재임 기간 중 교회 개혁과 근대주의에 대한 갈등이 발생하였다. 독일의 신학 교수들 가운데 일부는 독일의 가톨릭주의를 시대의 요청에 따라 쇄신해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 이렇게 주장하는 교수들을 근대주의자들이라 불렀다. 하지만 그것은 오해였다 – 자신들의 주장을 관철시켜 나가는 과정에서 불가피하게도 교회의 교도권과 갈등을 야기하였다. 실제로 근대주의를 부르짖는 엄밀한 의미의 ꡐ근대주의자ꡑ들은 교회가 지니고 있는 신앙의 명제는 종교적 진리를 상징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하였고, 주로 프랑스, 영국 그리고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교황 비오 10세는 1907년 7월 3일 바룦한 교령을 통해 근대주의자들의 주장과 견해를 단죄하였고, 1907년 9월 8일에 발표한 교령 Pascendi dominici gregis를 통해서는 근대주의를 온갖 이단의 저수지로 비판하였다. 그래서 1910년 9월 1일부터 모든 서품 후보자와 사목자들은 반(反)근대주의 서약을 이행해야만 하였다.


  교황 비오 10세의 재임 마지막 기간은 제1차 세계 대전의 발발 위협으로 어두운 그늘에 덮여 있던 기간이었다. 교황 비오 10세는 1914년 8월 2일 백성들에게 평화를 위한 기도를 호소하였고, 한 서한을 통해 ꡒ만일 유럽의 평화를 보장받을 수 있다면 나의 온 목숨도 기꺼이 내놓겠다ꡓ고 기록하기도 하였다. 교황 비오 10세는 1914년 8월 19일로부터 20일로 건너가는 밤에 서거하였다. 교황 비오 10세의 재임 기간은 교황 자신의 특유한 개성으로 각인되었다. 1954년 교황 비오 12세는 그를 시성시켰고, 그의 전례 기념일은 8월 21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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