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의 중심성

2. 十字架의 중심성

그리스도교 信仰 實存의 뿌리는 十字架이다. 본 단락에서는 十字架가 오늘날 그리스도교를 象徵하는 記號로 통하게 된 사연과 죽음에 대한 예수의 견해를 다루겠다. 이어서 예수의 죽음과 復活을 체험한 사도들의 태도와 끊임없는 반대에도 불구하고 주장되어온 十字架야말로 그리스도교 信仰 實存의 중심에 자리매김하고 있음을 보겠다.

1) 十字架의 記號와 象徵

모든 종교 사상에는 시각적인 象徵이 있어서, 그것의 역사나 신념의 중요한 특징을 드러내 준다. 그리스도교도 시각적인 상징을 지니는데 있어서 예외는 아니다. 전세계가 어떤 記號를 그리스도교의 상징으로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그 기호가 예수 그리스도를 분명하게 나타내야 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런 기호가 될 수 있는 것으로 十字架가 선택되었다. 十字架의 두 막대기는 이미 오랜 옛날부터 하늘과 땅 사이의 축을 나타내는 우주적 상징으로 쓰여지던 것이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이 이것을 선택한 데에는 좀더 특별한 설명을 더할 필요가 있다. 그들은 예수의 탄생이나 그의 젊은 시절, 또는 그의 가르침이나 그의 봉사, 또는 그의 復活이나 그의 통치, 또 그의 聖靈의 선물 등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중심으로 삼은 것은 바로 그의 죽으심, 곧 그가 十字架에 못 박히신 일을 중심으로 삼아 기념하기를 바랐던 것이다. 적어도 2세기 이후부터 그리스도인들은 十字架를, 그들의 믿음을 그림으로 나타낸 상징으로서 그리거나 색칠하거나 또는 조각으로 새겼을 뿐만 아니라 그들 자신 또는 다른 사람들에게 聖號를 긋기도 하였음이 분명하다. J. STOTT, 앞의 책, 25-27면은 이러한 관행에 대한 증거로 떼르뚤리아누스, 히뽈리뚜스, 치쁘리아누스 등의 사료들을 가지고 설명한다.
十字架라는 상징의 사용을 더욱 촉진시킨 것은 콘스탄티누스 황제였다. 그가 그렇게 한 것은(에우세비우스에 따르면) 그에게 서방세계의 패권을 쥐도록 해준 밀비언 다리의 전투(AD312) 전날 밤, 그는 하늘에서 빛의 十字架를 보았는데 그때 “이 표시로 승리하리라”는 음성도 들렸다는 것이다. 그는 즉시 이 十字架를 그의 군대의 깃발에 그것을 그려넣게 하였다. 위의책, 27면 참조 ; A. FRANZEN, 「교회사」, 최석우 역, 분도출판사, 1990, 82-83면 참조.
콘스탄티누스와 콘스탄티누스 이후의 ‘그리스도교 세계’의 발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든지간에, 적어도 敎會는 十字架를 그 중심 상징으로서 충실하게 보존해 왔다. 그리스도인의 출생으로부터 그리스도인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敎會는 十字架로써 우리의 신분을 밝히고 우리를 보호하려고 한다. 그리스도인들이 十字架를 자기의 믿음의 상징으로 선택한 사실은, 고대세계의 十字架 처형 HERODOTOS, 「역사」, 박광순 역, 범우사, 1991, 278. 296. 424. 554면 등에서는 十字架 처형에 대하여 여러번 언급하고 있다. 여기에 근거하여 일반적으로 十字架형이 페르시아인들 사이에서 비롯되었다고 보고 있으나, 다른 고대 자료들에 따르면 十字架형은 야만민족들 즉, 인디안족, 앗시리안족, 스키타이족, 타우리안족등이 사용하였던 일종의 처형 양식이었다고 한다. M. HENGELl, 「十字架의 처형」, 김명수 역, 대한기독교서회, 1982, 39-41면은 十字架형의 역사적 고찰 뿐 아니라 十字架형의 처형 절차를 다루고 있다.
이 얼마나 두려운 형벌이었나를 생각해 볼 때 훨씬 놀라운 일이 된다. 우리는 바울로의 ‘十字架의 메시지’가 그것을 듣는 사람들에게 ‘미련한 것’ 이었고, 심지어 ‘미친 짓’(1고린 1, 18.23참조)이라는 말을 들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는 분위기를 이해할 수 있다.

2) 예수의 견해

十字架가 그리스도교의 상징이 되었다는 사실, 그리고 세상 사람들의 비웃음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인들은 十字架 대신, 좀 덜 모욕적인 다른 무엇으로 바꾸려 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오직 한 가지 사실만으로 설명될 수 있다. 그것은 十字架의 중심성이 예수 자신의 마음 속에서 생겨났다는 것이다. 그의 추종자들이 그렇게도 완강하게 이 상징에 집착한 것은 바로 그에 대한 충성심에서 연유된 행동이다. 복음사가들이 전하는 세 차례의 수난 예고를 볼 때 죽음이 예수 자신에게 닥치리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실상 예수께서 정말로 당신의 죽음과 당신의 復活을 이렇듯이 분명하게 예고하셨다고 한다면, 제자들의 도주와 그들의 환멸, 그리고 예수께서 復活하셨다는 증언을 듣고도 믿으려 들지 않았던 그들의 태도가 잘 납득이 안가는 점도 배제할 수는 없다. “마르코 복음(8, 31 ; 9, 31; 10, 33-34)과 마태오, 루가 복음의 병행 부분을 보면 ‘사람의 아들’에 대한 운명을 예고하는 장면들이 아주 상세히 나온다. 그러나 예수가 발설한 말씀들이 사도들과 복음사가에 의해 성서로 기록되기 전에 해석되고 확장되었다는 교회의 공식 가르침을 우리는 알고 있기 때문에, 그 수난 예고가 정확한지 아닌지를 물어 봐야 한다”( R. E. BROWN, 「十字架에 처형된 그리스도」 이재수 역, 성바오로출판사, 1995, 19면). “자신의 죽음에 대한 예수 자신의 해석이 어떠한 것이었는지 말하기는 매우 어렵다”(W. KASPER, 앞의 책, 202면 ; 참조. A.George, “자신의 죽음에 대한 예수의 예고와 이해”, 「신학전망」 17호(1972년 6월), 광주가톨릭대학교 전망편집부, 112-131면.
하지만 그것은 우리 모두는 언젠가 죽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는 그런 의미에서가 아니라, 그는 난폭하고, 때아닌 죽음, 그러면서도 어떤 목적에 부합하는 죽음을 자신이 당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그런 의미에서이다. 그 뿐 아니라 예수는 서로 얽혀 있는 그 자신의 죽음의 불가피성에 대한 세 가지 이유를 제시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J. STOTT, 앞의 책, 36-40면은 세가지 이유에 대한 설명을 하고 있다.
. 첫째, 예수는 유대 국가의 지도자들의 적의 때문에 자신이 죽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둘째, 예수는 그의 죽음이 성서의 메시야에 대한 언급에서 분명히 기록된 것이기에 자신이 죽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세째, 이는 가장 중요한 이유인데 바로 자기 자신의 의도적인 선택 때문이다. 예수는 아무리 苦痛스럽더라도 메시야에 관한 성서의 말씀을 성취하시기로 굳게 결심하였던 것이다. 이것은 운명론도 아니었고 순교자 심리 같은 것도 아니었다. 이것은 그가 단지 구약 성서를 자기 아버지의 啓示로 믿고 있었고 또한 그가 자기 아버지의 뜻을 행하며 자기 아버지의 일을 완성하기로 완전히 결심했다는 것이다. 그뿐 아니라 그의 고난과 죽음은 아무 목적이 없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잃어버린 자를 찿아 救援하려”(루가 19,10) 온 것이다. 그가 자신의 죽음에 대하여 말할 때에는 “해야한다”라는 표현을 분명히 하고 있다(마르 8, 31 ; 루가 24, 44 ; 마태 26, 54 ; 루가 24, 26 참조). 이와같이, 비록 예수는 자신이 죽어야 할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 죽음은 그를 대항하여 연합한 惡한 힘들, 혹은 그에게 작정된 어떤 피할 수 없는 운명 앞에서 그가 무능한 희생자가 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성서에 啓示된 바대로 罪人을 救援하려는 그의 아버지의 뜻을 그가 자발적으로 맞아 들였기 때문이었다. 이것이 예수가 자신의 죽음을 바라본 방식이었다. 그의 교훈, 그의 모범, 그의 능력의 일들이 매우 중요하긴 하지만, 이 중의 그 어느 것도 그의 사명의 중심은 아니었다. 삶가운데 그의 마음을 지배했던 것은 자기의 목숨을 내주는 것이었다. 이 최후의 자기 희생인 十字架상의 죽음, 이것이 바로 그가 이루기 위해 세상에 오신 바 그 “때” 였다. 네 명의 복음사가들은 지상에서의 예수의 최후의 며칠간, 곧 죽음과 復活의 이야기에 균형이 맞지 않을 정도의 많은 지면을 할애했는데 이는 바로 그들이 그 “때”의 의미를 이해하고 있었음을 말한다. 예수의 十字架상의 죽음이야말로 예수가 살았던 공적활동의 결과요, 바로 죽음 자체가 그의 메시지와 활동의 요약, 총괄이라고 말할 수 있다. W. KASPER, 앞의 책, 209면은 예수의 지상 생활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神性과 人性을 동시에 지닌 예수에게는 두 性 모두 지니지만, 人性을 지닌 인간으로서 예수가 하느님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최종적 삶의 완성은 十字架상의 죽음에서 종결지워 진다. 부활 사건은 그의 神性 때문에 가능하며 이는 하느님에 의하여 일으켜지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부활을 희망하는 우리 “인간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자세”는 十字架를 지는 삶인 것이다.

3) 사도들의 강조

사도행전에 있어서 사도들의 설교의 강조점은 예수의 죽음보다는 復活이며, 어느 곳에서도 사도들은 그의 죽음에 대한 교리적 설명을 제공하지 않았다고 한다. W. G. KÜMMEL, 「신약정경개론」, 박익수 역, 대한기독교출판사, 1988, 170-177면은 사도행전에 있는 사도들의 설교의 기원에 대하여 분류 언급하고 있다. L. MORRIS, 「신약의 十字架」, 이승구 역, 기독교문서선교회, 1987, 115-155면은 “사도행전에 나타난 十字架”에 관해 신학적 해설을 한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에 뒷받침할 만한 증거는 없다. 사도들은 그때마다 각각의 설교를 행하는 접근 방법에 변화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몇가지 중요한 점들이 나타난다. 첫째, 비록 사도들이 예수의 죽음을 인간의 惡에 의한 것으로 돌리긴 하지만, 동시에 그들은 그것이 또한 하느님의 뜻에 의한 것이라고 선포한다(사도 2, 23; 3, 18; 4, 28 참조). 더욱이 하느님께서는 자기가 미리 아신 바를 예언해 놓으셨다. 그래서 사도들은 예수의 죽음과 復活이 ‘성서대로’ 일어났다는 사실을 반복해서 강조했다. 둘째, 비록 전면적인 救贖 교리가 빠져있긴 하지만, 그렇다고 사도들의 十字架 전파가 교리적이지 않은 것만은 아니었다. 셋째, 우리들은 사도들이 復活을 설명한 방식을 숙고해 볼 필요가 있다. 그들이 復活을 강조하고 있지만, 그들의 메시지를 전적으로 復活만의 복음이라고 부를 수 없다. 復活을 강조하는 이유는 復活에 의하여 무효화되고 정복 당한 그 죽음에 관한 그 무엇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J. STOTT, 앞의 책, 41-44면 참조.

우리가 사도행전에 기록되어 있는 사도들의 초기 설교에서 눈을 떼어 보다 성숙된 그들의 편지들을 보면, 그들이 十字架에 부여한 탁월한 위치가 더욱 두더러지게 나타난다. 아주 짧은 몇몇 편지들은 十字架에 관하여 전혀 언급하고 있지 않은 것이 사실이며(필레몬서, 유다서, 요한 2서, 요한 3서 등), 또한 야고보가 기록한 윤리적인 설교에도 十字架를 언급하고 있지 않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은 아니다. 하지만 신약 성서 서간의 주요 발신자인 바울로와 베드로와 요한은 十字架의 중심성을 증언함에 있어서 일치하고 있으며, 히브리서와 요한묵시록에 있어서도 이점은 마찬가지다. 위의 책, 44-50면을 참조하라.

4) 반대에도 불구하고 주장함

앞에서 보았듯이 우리는 신약 성서의 주요 저자들이 그리스도의 十字架의 중심성을 믿었다는 사실과, 그들의 확신은 바로 주님 자신의 마음으로부터 나온 것임을 그들이 믿었다는 사실을 전혀 의심할 수 없다. 그러므로 초대의 사도 이후 시대의 敎會가 十字架를 그리스도교의 표시와 상징으로 삼은 데에는, 이중의 굳건한 근거가 있었는데 그리스도의 교훈과 그의 사도들의 교훈이 그것이었다. 그래서 우리 信仰의 근거는 十字架상의 죽음과 부활을 체험한 사도들의 증언으로부터 유래한다.
이 점에 있어서 敎會의 전통은 성서를 충실하게 반영한 것임이 입증된다. 더욱이 우리는 그들의 괄목할 만한 끈기를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 그들은, 하느님의 아들을 十字架에 못박은 자들이 그를 “지독히 욕을 보였다”는 사실을 알았으며, 또한 그 十字架를 참기 위하여 예수는 자기를 낯추고 “수모를 개의치 않았다”는 사실을 알았다(히브 6, 6 ; 12, 2 ; 필립 2, 8 참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를 비난한는 사람들에게는 수치스럽게 여겨지고 심지어 가증하게까지 여겨지던 十字架가 그의 추종자들에게는 가장 영광스러운 것으로 여겨졌던 것이다. 예수가 그러하였듯이 자기들에게도 고난은 영광에 이르는 수단임을 배웠다. 信仰과 不信仰이 가장 크게 갈리는 곳은 바로 十字架에 대한 각자의 태도이다. 信仰이 영광을 발견하는 바로 그 자리에서 不信仰은 수치를 발견하게 된다(1 고린 1, 18-25 참조). 그리스도의 十字架에 대한 信仰이야말로 바로 그리스도교를 實存하게 하는 중심자리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제 그리스도교 信仰 實存을 가능게 하는 “十字架”의 심층을 살필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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