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에 드러나신 하느님

Ⅱ. 十字架에 드러나신 하느님

하느님의 절대성과 그분의 사랑은 구체적인 예수의 역사안에서 일회적이면서도 영원한 사건으로 계시되었다. 그것도 十字架사건 안에서 계시의 절정을 이룬다. 오직 十字架사건으로부터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신지, 인간 구원을 위한 하느님의 사랑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정의되어질 수 있다. H. U. VON. BALTHASAR, The von Balthasar Reader, ed KEHL, M. & LÖSER, W., New York : The Crossroad Publishing Company 1982, 26면.
十字架에는 그것을 ‘원하신’ 하느님 아버지, 그것을 적극 ‘받아들이신’ 그리스도, 그것을 ‘저질렀던’ 인간이 다 함께 깊이 연루되어 있다. 하느님은 十字架에 달리신 그리스도의 결정적 啓示를 통하여 당신 자신을, 그리고 당신 앞에 서있는 인간의 적나라한 모습을 결정적으로 드러내셨다. 十字架는 하느님과 인간, 그리고 세상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특유한 시각이다. 본 단원은 그리스도교적 인간학에 초점을 맞추어 十字架에 대한 신학적 반성을 체계화 시킨, M. FlLICK – Z. AISEGHY, Il Mistero della Croce, Brescia 1978, 233-390면에 의존하여 쓴 최영철, “十字架와 하느님”, 「현대가톨릭사상」 5호(1991). 대구효성가톨릭대학교 가톨릭사상편집부, 75-94면을 정리하는 방식으로 전개하겠다.

十字架는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화해를 위한 예수 그리스도만의 사건은 아니다. 十字架는 무엇보다도 하느님 자신과 직결된 사건이다. 우리는 十字架에서 苦痛을 겪고 죽으신 분이 하느님이셨다는 사실을 인간의 救援이라는 측면에만 국한시킬 수 없다. 왜냐하면 十字架는 하느님 아버지와 그 아들 사이에서 발생한 하느님 자신의 사건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하느님 자신의 수난이고 죽음’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 그자체는 하느님을 증거하고 선포하는 온전한 啓示였다. 하느님을 궁극적으로 나타내 보이는 그분의 삶이 十字架에서 완결되었기에 요한 19, 30 참조 : “예수께서는 신포도주를 받으신 다음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시며 영을 넘겨 주셨다”.
十字架는 그분의 삶을 요약한다. 이렇게 볼 때 十字架는 하느님의 완전한 자기 啓示이다. 十字架 안에서 하느님이 어떤 분인지가 결정적으로 啓示된다. 본 단원에서는 먼저 예수의 十字架상의 죽음이 三位一體 하느님의 결정적 자기 啓示 사건 심상태, “삼위일체론의 어제와 오늘”, 「사목」 75호(1981년 5월),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88-90면은 “몰트만의 十字架의 삼위일체론”이 요약되 있다. 몰트만은 그리스도의 十字架 사건에서 삼위일체의 신비가 계시되었음을 강조한다. 그래서 그는 十字架 신학이 삼위일체론이며, 삼위일체론은 十字架 신학이 되어야 한다는 명제를 내세운다. 몰트만은 삼위일체를 十字架에서 성부와 성자 사이에서 발생하는 사건, 즉 미래를 열어주고 삶을 창조하는 성령이 생성되어 나오는 사건으로 이해한다. 이어서 그는 하느님의 내적 삶을 헤겔의 말을 빌어서 ‘하느님의 역사’로 표현하는데, 바로 이 하느님의 역사는 하느님의 버림받음과 절대적인 죽음 그리고 하느님 아닌 것의 모든 심연을 그 속에 내포한다고 말한다. “十字架의 죽음 속에 구체적으로 나타나는 ‘하느님의 역사’는 인간 역사의 모든 깊이와 심연을 그 속에 내포하고 있으며, 따라서 역사의 역사라고 이해될 수 있다”(J. MOLTMANN, 앞의 책, 259면). 결과적으로 죄와 죽음의 성격을 지니는 인간의 모든 역사가 이 하느님의 역사인 삼위일체 안에 통합되어 있다는 통찰이 따른다. 그래서 하느님의 역사 속에서 하느님의 고통이 아닌 고통이 없고, 역사를 통하여 하느님의 영원한 삶과 기쁨에로 통합되지 않는 삶이나 기쁨도 없다는 것이다. 몰트만은 이처럼 역사를 하느님 안에서 생각함으로써 인간 존재에 대한 이해 또한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에 참여하는 데에서 출발하고 모든 인간 존재를 그의 모든 소외된 상황과 함께 파악하고 있는 것이다.
임을 본 후, ‘자신의 본질 속에서 결코 변하지 않는 하느님이 어떻게 苦痛을 겪을 수 있는가’ 에 대해 언급을 하겠다. 마지막으로 十字架의 苦痛 속에서 聖父와 聖子가 어떠한 역할을 맡고 있는지 살피겠다.

1. 十字架는 三位一體의 啓示

예수는 무엇보다도 하느님 아버지와의 관계 안에서 죽음을 겪었다. 하느님과 친밀한 일치 관계 속에서 살았던(요한 8, 31; 10, 31 참조) 그가 하느님으로부터 버림받은 자로서 죽음을 겪었다. 복음서는 후대에 갈수록 예수의 죽음을 미화하고 승화하려는 노력의 흔적을 드러내고 있다. 가장 먼저 기록된 것으로 알려진 마르코 복음사가는 시편 22, 2을 빌어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마르 15, 34)라고 전하고 있다. 이후 루가 사가는 이 절규 대신 시편 31, 6을 빌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아버지, 제 영혼을 당신 손에 맡기옵니다” (루가 23, 46). 요한 사가의 표현은 더욱 승화됨을 볼 수 있다. “다 이루었다”(요한 19, 30)라고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전승 역사의 이같은 진전을 볼 때, 각 복음 사가는 자신의 신학적 관점에 따라 기록하였다 하더라도 마르코의 보도가 현실에 가장 근접함을 알 수 있다. 실제로 예수는 하느님에게서 버림받은 자로 죽음을 겪었다; 최영철, 앞의 글, 77면 참조.

聖父와의 일치 속에 살았던 예수 안에서 “苦痛이 지배하는 시간”에 무엇이 발생하였는가? 유다스(마르 14, 12; 루가 22, 48 참조)에게 그리고 산헤드린과 빌라도(마르 15, 1 참조)에게, 로마 병사들과 十字架(마르 15, 15 참조)에 차례로 “넘겨지신” 예수는 마침내 聖父께 “맡긴다”(루가 23, 46 참조). 사람의 아들인 예수가 자기 아버지에게 자신을 넘기신다. 사람들로부터 버림받아 그들에게 넘겨지신 분은 실제로 자기를 포기하는, 넘겨주는 분이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것은 … 나를 위해서 당신 자신을 바치신(넘겨주신) 하느님 아드님께 대한 信仰으로 사는 것입니다”(갈라 2, 20; 참조, 에페 5, 2; 1 디모 2, 6). 수난의 역사는 예수가 우리를 위한 사랑 때문에 아버지에게 자신을 바치신 봉헌의 완성으로 나타난다. 아들의 자기 봉헌은 聖靈의 “넘겨짐”으로 이루어 졌다: “예수께서는 식초를 받으신 다음 ‘다 이루어졌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시고 영을 넘겨 주셨다”(요한 19, 30). 十字架는 아들의 역사다. 죽음의 최종적 포기 안에서 아들은 靈 안에서 아버지께 자신을 봉헌하신다. 최영철, 앞의 글, 78면.

아버지가 十字架의 순간에 무관심한 채로 있을 수 없다. 근원적 행위자는 하느님 아버지이시다. 죽어가는 예수가 버림받았음을 절규하는 외침은 최종적인 동시에 궁극적인 ‘포기’를 드러내는 것이다. 聖子의 ‘넘겨짐’은 “당신의 친아드님마저 아끼지 않으시고 오히려 우리 모두를 위해 그분을 넘겨주신”(로마 8, 32) 아버지의 ‘넘겨짐’이다.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을 이토록 사랑하시어 외아들을 주시기까지 하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이마다 모두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요한 3, 16). 아버지가 아들을 사람들에게 넘겨 주셨으므로 아들은 사람들에게 넘겨지셨다: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지고 사람들은 그를 죽일 것이다(마르 9, 31과 병행구). 아버지가 아들을 사람들에게 넘겨주시고 그 결과 아들이 버림받으셨다면 아들의 가장 심오한 苦痛은 ‘하느님의 포기’를 체험하는 데 있다. 김균진, 「기독교 조직신학 Ⅱ」, 연세대학교출판부, 1987, 108면에서 판넨베르그는 “하느님과의 일치에 대한 확실한 의식 속에서 그분으로부터 배척되었다는 것이 예수에게는 지옥의 고통이었다”라고 말한다
아들이 지상생활동안 아버지와 함께 누리셨던 완전한 일치(요한 8,31; 10, 30 참조)가 十字架상에서 끝장난 것처럼 보인다: 죽어가는 아들앞에서 말문을 열지 아니하시는 하느님의 沈黙은 十字架 상에서의 ‘하느님의 죽음’ 또는 무엇보다도 十字架를 ‘하느님 안에서의 죽음’으로서 啓示하는 것이다. 아들은 아버지로부터 격리되어 가장 깊은 곳에서 고난 당하며 죽으시고, 아버지는 苦痛 중에 당신 아들을 넘겨주므로 ‘죽으시고, 이는 성부 수난설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성부, 성령과 일치를 이루신 아들 하느님이 十字架의 죽음을 당한다. 아버지 하느님은 성령을 통하여 十字架의 죽음을 겪는 그리스도 안에 계시고 그 죽음의 고통을 함께 겪으신다는 의미다.
靈은 아들의 十字架상 죽음의 순간에 아들로부터 아버지에게 넘겨지는 분으로 沈黙 중에 現存하신다. 十字架는 아들과 아버지와 聖靈의 역사이다. 하느님의 三位一體적 역사이다. B. FORTE, Gesu di Nazaret, Storia di Dio della Storia, Roma, 1981, 271-281면.(최영철, 앞의 글, 79면에서 재인용).
十字架는 하느님 자신의 사건이 역사 안에서 발생한 것이다. 그것은 하느님 자신의 존재 안에서 일어난 사건이다. 그 사건은 단순히 외부를 향한 하느님의 사건이 아니라 하느님의 내적 존재 자체의 사건이다. 그래서 十字架는 하느님의 내면적 생명의 결정적 啓示이다. 최영철, 위의 글, 79면.

聖父의 버리심 그리고 이 버리시는 행위의 결과로 연유된 聖子의 극심한 苦痛은 우선 두분을 결합시키는 완전한 일치를 “상반 속에서” 啓示하는 것이다. 즉 예수는 사랑 안에서 참으로 일치를 이루는 그분으로부터의 격리를 체험하므로 반복될 수 없는 유일회적 방식으로 고난을 당한다. 十字架는 “상반 속에서 감추어 계시는 하느님의 은폐” B. FORTE, 앞의 책, 272면에서 인용된 루터의 표현이다(최영철, 위의 글, 79면에서 재인용).
이다. 聖父와 聖子는 서로 격리되어 있는 데서 발생된 혹독한 苦痛 속에서 그들의 신적 일치를 세상에 啓示하신다. 十字架는 하느님의 三位一體적 존재를 “상반 속에서” 啓示하는 것이다. 이는 “자신 안에 계시는 하느님과 ‘十字架의 수치와 비하’ 속에서 나타나시는 하느님 사이에, 초월적 三位一體와 수난의 역사 안에 내재하시는 하느님 사이의 모순 안에서 동일성의 관계 즉 빠스카로써 충만히 밝혀지게 될 관계가 있다.” 최영철, 위의 글, 80면.
十字架는 하느님의 존재 안에서 순환하는 무한한 생명의 사건을 상반의 표지 안에서 유한한 방식으로 표현한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하느님의 내면적 존재를 사람들에게 열어내 보인 사건이다. 위의 글.

十字架에서 聖父는 聖子를 聖靈 안에서 버리셨고, 聖子는 聖靈 안에서 聖父로부터 버림받으셨다. 이 버림받음은 은폐된 방식으로 발생한 신적 사건의 표지이다. 버림받음의 표지 하에서 실제로 일어난 것은 聖父에 의한 聖子의 “넘겨줌”이다. 聖子는 聖父의 뜻에 따라 聖靈 안에서 자신을 사람들에게 넘겨주셨다. 또한 聖父는 聖子의 자발적 포기를 통해서 聖靈 안에서 자신을 내어 놓으셨다. 이와같이 十字架의 죽음은 三位一體 하느님 사이에서 발생하였다. 결국 그리스도의 자발적 포기는 聖靈 한 가운데서 聖父와 聖子사이에 발생한 하느님의 자기 양도이다. 위의 글.

하느님은 예수를 죽음에 버리신 분, 세상에 내어주신 분(聖父)일 뿐 아니라 버림을 당한 분, 내어줌을 당한 분(聖子)이기도 하다. 그런데 聖父와 聖子의 내어줌과 내어짐은 聖靈 안에서 발생하므로 聖靈은 내어주고 내어지는 사건 자체이다. 위의 글 : 성서에서는 하느님의 활력, 생명력 그리고 나아가 하느님의 생명 및 사랑 자체이신 성령이 바람, 숨, 호흡으로 묘사되어 있고 또 十字架의 예수는 자기 영을 아버지 손에 내맡기면서 숨을 거두셨다(루가 23, 46 참조). 그리고 復活하신 예수는 자기 숨을 불어넣으면서 성령을 사도들에게 선사하셨다(요한 20, 23 참조). 죽음은 예수에 의한 영의 되돌려 줌이고 復活은 예수가 하느님으로부터 영을 되돌려 받음이다.
내어줌, 내어짐, 내어주고 내어지는 사건 자체로서의 하느님은 곧 그분 자신의 내적 존재 자체 안에서 사랑이시다(1 요한 4, 16). 이리하여 聖父가 聖子를 내어주신 의도가 밝혀진다 : 三位一體 하느님이 서로 나누는 완전한 사랑을 역사 한 가운데에서 구현하려는 것이었다(로마 8, 32 참조). 우리를 위한 聖子의 苦痛스런 “넘겨줌”은 三位一體적 사랑 때문이다. 가치들의 추상적 질서들을 회복하기 위해서도 아니고 어떤 필연성과 관련 때문도 아니라 오로지 우리를 위한 사랑 때문에 당신 사랑을 무상으로 우리에게 보여주고 또 그 사랑 안에 무상으로 우리를 이끌어 들이기 위하여 三位一體 하느님은 十字架 위에서 죽으신다. 버림받음의 순간에-聖靈이 넘겨지시는 순간(루가 23, 46과 요한 19, 30)에 ― 聖父와 聖子가 겪는 苦痛이 그분들이 서로 나누는 사랑의 깊이를 啓示한다면 그것은 또한 우리를 위한 그같은 사랑의 “어리석음”까지 드러낸다 : “누가 자기 친구들을 위해서 목숨을 내놓는 것, 그보다 더 큰 사랑은 아무도 지니지 못합니다”(요한 15, 13). 세상이 보기에 “어리석음이요 걸림돌”인 바는 사랑을 믿는 사람이 보기에는 “하느님의 능력이며 하느님의 지혜”이다(1고린 1, 23-24). 苦痛스런 “넘겨짐”은 인간에게로 향한 聖三位의 지고한 자기 비하이다. 그것은 우리들을 위한 그분들의 사랑이 “무한히” 자신을 포기하는 양도의 “유한한” 표지이다. 하느님은 당신 자신을 선사하기 위하여 죽으신다. 十字架의 苦痛은 하느님의 三位一體적 사랑의 케노시스(자기 비움, 자기 비하)이다. P. SCHOONENBERG, “그는 당신 자신을 비우셨다”, 「신학전망」 27호(1974년 겨울), 112-131면에서 슈넨베르그는 ‘케노시스’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신학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케노시스의 주체를 사람이 되신 聖子로, 케노시스의 대상을 ‘聖子로서의 생활’로 보았고 성자인 그리스도는 十字架의 죽음을 택하였다고 설명한다.
인간을 향하여 자신을 제한하고 소외시키며 자신 밖으로 이탈하여 자신을 증여하는데서 겪게 되는 苦痛이다. 이리하여 十字架는 하느님이 三位一體이심을, 당신의 내적 존재 안에서 순수한 사랑이심을 啓示한다. 최영철, 앞의 글, 80-81면 참조.

2. 十字架와 하느님의 苦痛

十字架는 하느님이 침묵 중에 말씀하시는 장소이다. 十字架에서 하느님은 침묵 중에 말씀하시고, 不在 중에 現存하신다. 十字架의 암흑 속에 감추어진 신비는 하느님의 苦痛과 사랑의 신비이다. 위의 글, 81면.
하느님의 苦痛 J. STOTT, 앞의 책, 443-455면에서 하느님의 고통을 다음과 같이 본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고난을 받으셨을 뿐만 아니라, 하느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백성들과 함께 여전히 고난받으신다.
은 그분의 내적 존재를 드러내 보이는 표지, 하느님의 三位一體的 존재를 상반 속에서 드러내는 표지이다. 三位一體 하느님이 만일 하느님으로서 十字架를 감당하시지 않았다면, 그것은 三位一體적인 사랑, 聖父를 聖靈 안에서 聖子에게 결합시키는 아주 심오한 일치를 드러내는 사건이 아닐 것이다. 하느님의 苦痛은 하느님 자신을 위하여 상반 속에서 실현된 三位一體의 啓示라는 가치를 지닌다. 이와 같이 하느님이 실제로 苦痛을 겪으셨다면, 이 苦痛은 전통 신학에서 주장되는 하느님의 不變性에 배치되는 것은 아닌가? 또한 하느님의 苦痛이 어떻게 인간 贖良의 가치를 지니는가? 본단락에서는 이같은 문제를 다루겠다. 최영철, 앞의 글, 82면 참조.

1) 하느님의 不變性과 苦痛

十字架에 매달린 분은 유다인에게는 비위에 거슬리고 이방인들에게는 어리석음 자체였다(1고린 1, 23 참조). 유다인은 苦痛을 겪는 하느님을 결코 받아들일 수 없다. 유다인이나 이방인이 하느님의 처신을 옳게 이해하지 못하는 근본 동기는 그들이 하느님과 인간, 창조물과 피조물의 사이를 불변성-可變性의 이중 개념으로써 파악하기 때문이다. ‘神의 不變性’에 대한 유다인과 희랍인의 사고 방식은 다르다. 후자는 철학적 사변적 신관으로 ‘부동의 제 1 원인’으로 본다. 전자는 구약 성서에 근거한 神의 不變性을 주장하지만 그들의 메시아관이 그리스도인의 그것과 다르다. 그들은 메시아의 수난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원리에 의하면 하느님은 절대적으로 부동이시므로 전적으로 무감각적이시다. 최고의 본질은 어떤 방식으로도 변화를 겪지 않는다. 신적 존재는 완전하므로 욕구나 분노나 사랑을 느끼지 않으며 이러한 희생이나 봉사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다. 그러므로 神은 苦痛의 대상이 될 수 없다. 敎會도 몇 차례의 공의회를 통하여 하느님의 不變性을 교의로 확정 하였다. H. DENZINGER – A. SCHÖNMETZER, Enchiridion Symbolorum. Definitionum et Declarationum de rebus fidei et morum, Barcelona 1976. 이 책은 약칭은 DS로 표시함. DS800 : 참된 하느님은 하나이시며 영원하시고 무량하시며 불변하시다; DS3001 : 하느님은 단순하시며 불변하는 영적 실체이시다. 문헌에 대한 보다 자세한 언급은, 이병호, “하느님의 불변성과 그리스도론”, 「신학전망」 83호(1988년 겨울), 광주가톨릭대학교 전망편집부, 1-3면 참조할 것.
이미 신․구약에 걸쳐 성서도 하느님의 영원성, 초월성과 더불어 不變性을 하느님의 한 특성으로 명시하고 있다(이사 44, 6; 41, 4; 시편 90, 2; 요한 8, 58; 야고 1, 17). 최영철, 앞의 글, 82-83면 참조.

이에반해서 성서는 인간의 운명에 깊이 관여하여 인간과 사랑의 관계를 맺으심으로써 당신의 실존을 재구성하여 자신을 변화시키시는 하느님의 可變性을 전해준다. 하느님은 분노, 질투, 후회, 연민 따위 등 풍부한 감정을 지니신 분이시다. 그리스도의 降生과 十字架 受難은 하느님의 可變性, 감정성을 확증해 주고 웅변적으로 드러내 보이는 절정이다. 성서의 하느님은 희랍 철학적 不變性과는 무관한 분이시다. 요컨데 하느님 안에도 어떤 변화, 어떤 분출, 어떤 과정이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하느님은 자신을 변화시킬 수 있는 분이시기에 인간의 불쌍한 처지에 측은한 마음을 지니시고, 인간과의 깊은 연대 관계를 맺으러 사람이 되셨고 罪와 죽음에 예속된 인간과 하나되시기 위하여 고난을 겪고 죽으셨다. 최영철, 앞의 글, 83면.

하느님의 苦痛에 관해서 분명히 밝혀야 할 사항이 있다. 즉 하느님 안에, 모욕 당함으로부터 연유하는 苦痛이 있다면 그것은 사랑의 苦痛일 뿐이다. 하느님의 苦痛은 오로지 순수한 사랑의 苦痛이다. J. GALOT, Il Mistero della Sofferenza di Dio, Citta della Editrice Assisi 1975, 139-140(최영철, 위의 글, 83면에서 재인용).
하느님의 苦痛 안에는 자애심과 질투의 요소가 전혀 배제되어 있다. 모욕은 하느님의 사랑에 타격만 줄 뿐이다. 그분은 사랑하는 사람이 그 자신에게서 격리되는 것을 체험하게 될 때에 苦痛을 겪으신다. 왜냐하면 그가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짐으로써 자기 자신을 손상 시키며 자기 존재의 가치들을 파괴시키는 것을 그분은 감수해야 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하느님은 罪人의 태도 때문에 자기 사랑 안에서 고난을 당하신다. 하느님의 苦痛은 罪人의 태도에 의해 타격받는 사랑의 苦痛이고 따라서 순수한 사랑에서 연유한 것으로서 罪人에 대한 ‘연민’의 苦痛이고 罪人을 위한 苦痛이다. 苦痛은 하느님의 완전성과 상반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인간은 자기 운명과 존재 발전의 회피할 수 없는 부분으로서 苦痛을 겪지만 하느님은 필연적으로 苦痛을 겪지 않는다. 苦痛이 그분에게는 어쩔 수 없이 겪어야만 하는 굴레가 아니다. 그분이 인간들의 罪로 말미암아 참으로 모욕을 당하였던 것은 그분 자신이 보다 완전한 사랑을 보여주기 위하여 스스로 결정함으로써 그 사건에 자신을 자발적으로 연루시켰기 때문이다. 성서는 그분이 계약으로써 상처 받을 수 있는 분으로 자신의 실존을 구성하였음을 보여준다. 그분 스스로 택한 백성과 친숙한 관계를 맺음으로써 그분은 백성의 수준에로 자신을 낮추셨고 또 그 결과로써 생겨날 수 있었던 모든 苦痛을 기꺼이 받아 들이셨다. 최영철, 위의 글, 84면.

그러나 하느님 안에서 苦痛은 어떠한 감소도 초래하지 않으며 신적 존재의 손해를 의미할 수 없다. 인간에게는 苦痛이 장애, 존재의 조화로운 발전 안에서 부딪히게 되는 저항으로서 체험되기 때문에 그것은 인간 능력의 제한을 의미한다. 이와반대로 하느님 안에는 어떠한 필요도 증가도 없다. 하느님이 자신의 행복이나 성장을 위하여 사람들을 사랑하고 그들로부터 사랑받을 필요도 없다. 그분이 사랑할 때 그분의 완전성이 증가되지 않으며, 그분이 사랑받지 않을 때 완전성이 감소 되지도 않는다. 하느님은 자기 완전성에 비추어 볼 때 모욕에 영향을 받지 않으며 자신의 초월성 안에 피해 입지 않은 채 머물러 계신다. 여기서 그의 不變性이 확인된다. 하느님의 不變性은 사랑의 항구성으로 이루어져 있는 도덕적 不變性에 국한될 수 없다. 먼저 存在論的 不變性이 확증되어야 한다. 위의 글, 84-85면.

하느님의 存在論的 不變性은 하느님의 苦痛을 이해하는데 관건이 된다. 이같은 苦痛의 신비로운 위대성은 그것이 하느님의 苦痛이라는 사실로부터 연유한다. 우리를 놀라게 하는 것은 救援 계획을 수립하시는 하느님이 불변하는 내적 왕국을 향유하시면서도 苦痛의 길에 자신을 투신하셨다는 사실이다. 사실 聖三位는 아무런 결핍이 없는, 어느 것에 의해서도 감소될 수 없는 지복을 누리신다. 실은 이같은 지복의 불변적 향유(享有) 때문에 성삼위는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고 十字架의 苦痛에 자신을 자유로이 내맡기실 수 있으셨다. 苦痛을 적극 수락하시는 하느님의 주도권은 인류를 위한 신적 사랑의 힘을 입증한다. 위의 글, 85면.

하느님의 存在論的 不變性을 확증하고 나서, 비로소 道德的 不變性 이제민, “현대신론의 문제점과 새 방향 모색(1)”, 「신학전망」 90호(1990년 9월), 광주가톨릭대학교 전망편집부, 30면 참조.
을 논의할 수 있다. 이것은 변함없는 사랑으로 구성되어 있는 不變性이다. 하느님은 자기 사랑 안에서 신실하시고 또 이 사랑이 사람들과 이루는 관계들 안에서 자신에 대하여 신실하기 위하여 이 사랑이 취할 수 있는 여러 가지 형식들 중에 苦痛받는 사랑의 형태를 취하실 수 있다. 그러므로 苦痛은 불변하는 사랑의 표현이다. 성서의 증언에 따르면 하느님의 不變性은 그분 자신의 모든 약속에 대한 절대적 신실이다. 출애굽의 하느님(출애 3, 15 참조)은 전능하고 신비의 영역 안에 계신 분으로서 자기 자신으로부터 이탈하여 자기의 고유한 존재(esse)를 {사이-존재}(inter-esse) 즉 ‘關係의 存在’로 변화시킴으로써 선택된 백성의 운명 안에로 자신을 투신하셨다. 즉 契約 체결을 통해 백성의 운명에 전력투구 동참하시며 그들을 위하여 슬픔을 겪고 또 그들을 위하여 그들과 함께 고난당함을 보여주신다. 契約을 통해 세상과 역사 안에 들어오심으로써 인간과 세계의 운명에 자기 존재를 투신하는 하느님은 세상과 인간의 고난과 무관한 분일 수 없고, 이 苦痛에 깊이 관련을 맺고 ‘苦痛당하는 분’으로 자신을 규정하신다. 十字架상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은 不動的 動者가 아니라 스스로 변화하는 분으로, 무감각의 소유자가 아니라 열정적으로 인간의 운명에 동참하여 苦痛당하는 분으로 啓示되셨다. 최영철, 앞의 글, 86면.

不變性은 하느님이 자신의 약속에 바위처럼 견고하고 신실하심을 의미한다. 하느님은 변덕을 부리지 않는 분이시고 외부의 어느 것에 의해서도 결코 영향을 받거나 침해받지 않으신다. 不變性은 흔들림 없는 하느님의 신실이다. 그것은 사랑의 不變性, 항구성이다. 인간이 아무리 罪를 범할지라도 그분은 변함없이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느님이다. 이 변함없는 사랑 때문에 ‘無罪한 苦痛’을 겪으신다. 심상태, 「속 그리스도와 구원」, 성바오로출판사, 1984, 72-73면에서 저자는 “사랑에는 오로지 고난만이 존재할 뿐이다. 사랑하는 사람은 상대방이 고통을 당할 때에 고통의 원인에 대해 해명하고 이를 합리화하거나 수수방관하기 보다는 고통을 극복하려고 할 것이다. 그래서 사랑하는 사람은 상대방의 고난에 자발적으로 동참하고 자신의 생명마저 기쁘게 희생한다. 무죄한 고난은 사랑의 고난이다.”
不變性은 하느님의 無罪한 苦痛, 숙명적으로 겪게 되는 苦痛이 아니라 완전한 자유 안에서 사랑 때문에 스스로 받아들이는 苦痛을 뜻한다. 하느님의 苦痛은 이기심의 요소가 전혀 배제된 사랑의 고난, 자유로운 선택으로 수락된 고난, 자기 존재의 제한에서 비롯된 고난이다. 존재의 결핍에서 생겨난 것이 아니라 흘러넘치는 사랑이 겪는 수난이다. 이 사랑의 고난은 자기 희생과 자기 헌신 속에서 완성된다. 이 사랑의 자기 희생이 하느님의 본질 자체이다. 하느님은 자기 희생을 통해서 자기의 본질에 모순되는 惡을 참아 견디고 극복한다. 최영철, 앞의 글, 86-87면.

2) 贖良과 苦痛

하느님의 존재 자체 안에 내포된 사랑은 苦痛을 알지 못한다. 聖靈의 일치 안에서 聖父와 聖子가 나누는 사랑은 조화와 지복일 뿐이다. 그러나 인간을 위한 하느님의 사랑은 고난과 위험을 감수한다. 인간의 자유를 존중하지 않고 또 罪로 말미암은 고난에 자신을 관련시키지 않는 하느님의 사랑은 전혀 이해될 수 없다. 오히려 하느님의 사랑은 명백히 罪와 관련하여 보다 깊은 고난의 길에 동참하기를 분명 원하셨다. 아버지가 아들을 주저하지 않고 죽음에 ‘넘겨주셨기’ 때문이다. 이 사랑은 최고의 정점에 이르기 위하여 十字架의 길을 선택하였다. 그러므로 苦痛이 하느님에 의해 사랑의 지고한 표현으로 선택되었다면, 그것은 도덕 질서 안에서의 불완전으로 이해될 수 없다. 苦痛은 적어도 도덕적 惡이 아니다. 진정한 의미의 惡은 도덕적 질서에 속한 것으로 罪가 그러한 惡이지만, 苦痛은 그러한 종류의 惡이 아니다. 그것은 罪도 아니고 罪의 표현도 아니다. 苦痛 그 자체는 사랑과 결코 모순되지 않는다. 苦痛은 도덕적 완전성을 감소시키지 않으며 또 이러한 관점에서 그것은 하느님의 절대적 완전성에 모순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이 보다 완전한 사랑의 방도로 선택되었다면, 그것은 사랑의 강도에 해를 끼치기는커녕 사랑을 증가 시키는 역할을 한다. 부정적인 것으로 보일지라도 긍정적 기능을 가진다. 사랑이 온전하게 성숙할 수 있도록 해주는 역할이다. 위의 글, 87-88면 참조.

그렇다면 하느님의 내면적 실재 안에 사랑과 苦痛이 결부될 수 있는 근거가 있는가? 우선 속량행위에 앞서서, 三位一體 하느님의 신비 안에는 고난을 겪는 사랑의 첫째 가는 근원이 발견될 수 있는가? 위의 글, 88면.

하느님이 죄악으로 인하여 苦痛을 겪으신다면, 그것은 그분이 인간들을 罪에서 해방하기 위하여 그들과 함께 苦痛받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 그분은 救援의 완전한 계획 안에서 철저하게 인간들과 관계를 맺고자 원하셨으므로 罪에 의한 손상 즉 고난을 기꺼이 감수하신 것이다. 그분의 救援 계획 안에서 신적 사랑은 苦痛을 통하여 罪人인 인간이 고난 겪는 처지를 변화시키는 길을 택하였다. 이 고난은 속량행위 안에서 인간들을 罪로부터 해방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렇게 볼 때, 罪로 인하여 하느님이 인간에게 苦痛을 부여하였다기 보다는 오히려 苦痛의 첫째 가는 실재가 하느님 안에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분명한 것은 인간이 하느님의 능력에 비견되는 힘을 지니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그는 하느님에게 罪의 苦痛을 부과할 수 있는 주권의 힘을 갖고 있지 않다. 인간이 이 苦痛을 하느님에게 부과할 수 있는 것은 하느님의 절대적 사랑 덕분이다. 거룩한 사랑을 지니는 분, 곧 하느님이 苦痛에 내 맡겨지고 罪人의 해방을 위하여 그러한 苦痛을 수락하신다. 위의 글, 89-90면 참조.

3. 十字架상에서 聖父와 聖子의 역할

인간의 救援을 위한 啓示인 十字架 사건에서 하느님이 겪으신 苦痛은 聖父의 역할과 聖子의 역할이 어떻게 서로 다른가 하는 문제를 제기할 수 있다.
聖父가 희생에 있어서 주도권을 취하였고, 또 十字架상 聖子의 고난에 동참하셨다고 해서 이 사실이 聖父가 우리 救援을 위한 공로를 쌓았음을 뜻하지는 않는다. 이 공로는 聖子가 겪은 인간적 苦痛의 결실이다. 예수는 인간적 수난으로써 인류의 救援을 위한 공로를 쌓았다. 예수가 신적 위격으로써 겪은 인간적 苦痛이 공로를 쌓은 것이다. 위의 글, 90면.

聖父와의 관계에서 어떤 명분으로 예수가 우리 救援의 공로자인가? 聖父는 수난 중에 聖子에 의해 啓示되셨다. 十字架상 苦痛은 본질적 유사성으로 인하여 聖父의 비밀스런 苦痛을 우리에게 나타내 보인다. 十字架에 매달린 분은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볼 수 있는 모상이시다. 그것은 聖父가 인류에게 베푸신 사랑의 표현이다. 이 관점에서 十字架는 下降의 표현, 인류를 구하러 내려오는 하느님의 방향을 취한다. 聖父는 聖子를 희생으롤 봉헌하시는데, 이것이 결정적 행위이다. 속량 안에서 그리스도는 聖父의 놀라운 사랑을 나타내 보인다. 위의 글, 90-91면에 의하면, 성부의 이같은 행위를 묘사함에 있어서 바울로와 요한은 속죄 희생을 언급한다. 바울로에 의하면 하느님은 그리스도를 “속죄(제물)”(로마 3, 25 참조)로 예정하셨다. 요한에 따르면 성부는 “우리 죄 때문에 속죄의 제물”(1요한 4, 10)로 자기 외아들을 보내셨다. 예수는 속죄 희생이나 제물로서 성부를 대표하며 성부로부터 구원을 얻어내는 자의 입장에 서 있다. 그리고 성부는 구원을 무상으로 베푸는 분으로서가 아니라, 속죄 제물인 그리스도의 봉헌을 통하여 구원의 대가가 지불되도록 하는 분으로 나타난다.
贖罪의 희생이 없었다면 聖父는 지고한 사랑을 인류에게 증거할 기회를 못 가졌을 것이다. 이러한 희생의 요구는 그분의 계획 안에서 그분 자신이 그 희생의 부담을 진다는 것을 의미하였고 또 그분은 그 부담을 어느 누구보다도 먼저 떠맡기로 하신 것이다. 聖父는 罪의 苦痛스런 결과를 스스로 떠 맡기로 하셨다. 이렇게하여 聖父의 고난은 인간의 모든 苦痛, 그리스도와 모든 인간의 苦痛을 선행하는 것이었다. 인간은 자기의 苦痛 안에서 그 자신이 하느님의 희생제물이 되고 있다고 생각할 수 없다. 왜냐하면 하느님이 먼저 고난의 길을 걷기로 작정하셨기 때문이다. 위의 글, 91-92면 참조.

속량의 행위에 있어서 聖父가 맡은 두가지 역할 사이에는 모순이 없다. 聖父는 아들을 희생으로 내어주며 또 아들로부터 속량 봉헌을 받아 들이신다. 첫째 역할은 가장 결정적인 것으로 그 안에 둘째 역할이 함축되어 있다. 聖父는 聖子를 희생하고 또 이 희생 안에서 聖子는 그분의 손에 자신을 내맡기신다. 둘째 역할은 罪가 만일 聖父에게 결정적으로 손상을 끼쳤다면, 마땅히 그분에게 보상이 주어져야 한다는 사실 위에 근거하고 있다. 聖父에게 끼쳐진 손상 안에는 하느님에게 가해진 손상 전부가 내포되어 있다. 罪人인 인간이 하느님에게 해드리는 보상 전반이 그 보상으로써 실현된다. 위의 글, 92면 참조.

聖子가 맡은 두 역할 사이에도 모순은 없다. 한 역할은 인류를 위한 聖父의 사랑을 啓示하고 증거하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인간의 보상을 聖父에게 드리는 역할이다. 聖子는 자신을 희생함으로써 하느님을 인간에게 啓示하고 또한 인간을 하느님에게 봉헌한다. 하느님이 인간에게로 내려오시는 하느님의 자기증여는, 인간이 하느님을 향해 上昇해 가는 인간의 선사를 통하여 성취된다. 이리하여 聖子는 자기 苦痛을 聖父에게 봉헌하는 행위 안에서 聖父 자신의 苦痛을 표현하고 啓示 한다. 聖子는 苦痛으로써 구속의 공로를 쌓으셨고, 聖父는 苦痛 중에 인간의 해방을 위한 지고한 사랑을 구현 하셨다. 위의 글.

그리스도의 上昇․下降 역할은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화해를 가져온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를 내세워 하늘과 땅의 만물을 당신과 화해시켜 주셨습니다. 곧 十字架에서 흘리신 예수의 피로써 평화를 이룩하셨습니다”(골로 1, 20). 下降의 역할은 화해의 주체이신 聖父를 부각시킨다. 聖父로부터 救援 사업은 下降의 방식으로 진행된다. 즉 그분은 세상 안에 들어오시고, 聖子를 세상에 보내시며, 十字架에 聖子를 넘겨주며, 聖子를 통하여 인간을 속박하였던 惡을 쳐부수시고, 인간을 해방하고 고양시키신다. 이 救援 사업의 결과로 인간은 변화되었다. 上昇의 주역은 罪人인 모든 사람과 결속된 그리스도의 인간성이다. 예수는 인간에게서부터 하느님에게로 上昇하는 방향으로 인간의 속량을 실현한다. 이 도식 안에 묘사된 화해 개념은 그리스도의 행위가 聖父 안에서 변화를 초래한 것으로 되어있다. 聖父는 十字架의 상황에서 야기된, 聖子의 자아 봉헌으로 이루어 지는 인간의 측량할 수 없는 성취에 비추어 만족감을 느낀다. 이같은 聖父의 만족은 당신이 사랑받을 필요가 있기 때문이 아니라 피조물인 인간이 자신의 충만함에 동참하게 되는 것을 기뻐하기 때문이다.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는 변화되는데, 하느님 안에서 변화가 생겨서가 아니라 하느님으로부터 자애로운 사랑을 받고있는 인류가 하느님의 만족의 대상이 됨으로써 關係의 변화가 초래되는 것이다. 이 關係로 인하여 인간은 罪의 상태에서 벗어나 하느님을 사랑함으로써 자신의 성취를 이루며 인간의 영원한 모상을 더욱 닮게 된다. 위의 글, 93면.

두가지 도식은 하느님이 罪人인 인간 안에서 모든 인간적 가치를 능가하는 애덕을 十字架의 호소를 통하여 불러일으킴으로써 인간을 救援하신다는 것을 훌륭히 단언한다. 이 애덕은 하느님에게 드린 선물처럼 보이지만, 실상 그분이 베푸신 선물이다. 그것은 인간을 희생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인간을 실현시키고 고양시키는 것이다. 베풀려는 하느님의 마음을 보상하고 (충족시키고) 또 받아야 할 인간의 요구에 호응함(충족함)으로써 그 애덕은 十字架에 못박힌 그리스도 안에서 화해를 실현한다. 이리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과 창조된 우주 사이의 下降 및 上昇의 중재가 하나로 묶이는 것이다. 위의 글, 9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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