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에 물든 인간과 십자가, 그리스도의 제자와 십자가

3. 罪에 물든 인간과 十字架

그리스도교 인간관의 독특한 특징은 인간을 죄인으로 규정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결코 인간을 천시하거나 경멸하려는데 그 본 뜻이 있지 않다. 다만 인간 현실을 그대로 지적하려는 것 뿐이다. 인간을 죄인으로 규정하고 그 의미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굳이 그리스도교라는 종교에만 기댈 필요는 없다. 죄라는 개념을 밝히는 일이라면, 법이나 윤리의 차원에서도 얼마든지 가능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인간을 죄인으로 선언하거나, 또한 죄의 개념을 밝히는 것이 능사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그 죄로부터 벗어날 수 있느냐에 있다. 죄로부터의 자유와 해방, 여기에 죄를 묻는 근본적인 목적과 의의가 있다. 한마디로 인간을 救援시키려는 데 있다. 송기득, 앞의 책, 108면 참조.
본 단락에서는 ‘죄인으로서의 인간이 十字架를 어떻게 바라보아야되는가?’ 하는 물음에 답해볼 것이다.
성서는 무엇보다도 罪와 관련하여 十字架를 기술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복음서의 저자들은 예수의 체포, 구금, 재판, 구형 및 집행을 기술하면서 은밀히 인간의 죄악들을 폭로한다. 이같은 폭로는 그들이 복음서를 기술한 목적들 중의 하나이다. J. STOTT, 앞의 책, 61면.
十字架는 인간의 惡을 폭로하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의 惡이 저지른 결과이다(사도 2,23; 4,28). 인간 죄악의 시각으로 예수의 十字架를 본다면 다음에 연유한다. 유다의 탐욕의 죄와 사제들의 시기심의 죄와 빌라도의 비겁함의 죄로 예수에게 十字架상의 죽음이 야기되었다.
다른한편, 이처럼 성서가 罪와 관련하여 十字架를 기술하는 것은 十字架가 罪를 치유하기 때문이다. 사실 罪는 항상 있으며 의인들의 삶 안에도 상존하고 있다. “우리가 罪없다고 말한다면 우리 자신을 속이는 것이며 우리 안에는 진리가 없습니다”(1요한 1,8).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우리 罪를 용서해 주십시오”(마태 6,12)하고 매일 간청해야 한다. 그럼 罪와 苦痛의 문제와 罪人들의 태도를 十字架와 연결시켜 보겠다.

1) 罪惡과 苦痛

인간의 피조성과 하느님의 벗으로 불리움받은 소명에 비추어 볼 때에 세상의 모든 苦痛이 罪에서 기인되는 것은 아니다. J. STOTT, 앞의 책, 421-423면 참조 : 스토트는 고난이 생기는 요인들을 네가지로 설명한다. 첫째, 고난은 하느님의 선한 세계와 조화를 이루지 않는 무엇에서 기인한다. 둘째, 고난은 흔히 죄에서 기인한다. 셋째, 고난은 우리 인간이 고통에 민감하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넷째, 고난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정해주신 환경에 기인한다.
罪가 세상 안에 있는 온갖 苦痛의 원인은 아니지만 罪는 苦痛을 가중시킨다. 인간이 罪를 짖게 되면 자기 본연의 존재로부터 멀어져서 무의미한 공허 속에서 생활하게 되고 이 때에 그는 苦痛을 맛본다. 苦痛이 罪에서 생겨날 수 있는 것은 다만 罪의 결과로서 또는 회개를 위해 전적으로 필요하게 된 조건으로서 저질러진 惡에 내적으로 결부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선과 정의가 마치 결부된 惡에 외부로부터 첨부되는 것인 양 다른 惡이 罪人에게 가해지도록 요구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분명 완악한 罪人이 당하는 苦痛이 그 자체로 하느님을 기쁘게 하는 것은 아니며, 하느님께서 이 苦痛 그 자체를 우주의 도덕 질서를 회복하기 위한 방편으로 원하시는 것도 아니다. 최영철, “十字架와 인간”, 83면.

성서는 惡의 문제에 관해- 그것이 자연적 惡이든 도덕적 惡이든, 곧 고난의 형태로 오는 惡이든 罪의 형태로 오는 惡이든-완전한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지 않다. 성서의 목적은 사변적, 철학적이 아니라 실제적, 실천적이기 때문이다. 성서는 여러 곳에서 무수히 罪와 苦痛에 대해 언급하고 있지만, 그 관심사는 그 연유나 기원을 설명하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그것을 극복하도록 돕는 것이다. 하지만 惡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리해보는 것도 의미는 있을 것이다. 참조. 송기득, 앞의 책, 358-373면은 인간학적 관점에서 ‘악이란 무엇인가’ 라는 물음에 대답하고 있다.
惡이란 그 자체로써 어떠한 적극적인 존재 이유를 갖지 못하며, 그것은 원래 무엇인가 가지고 있었던 것, 또는 정당하게 가지고 있어야 하는 선의 상실, 왜곡, 결여, 不在이다. 김승철, “기독교 사상사를 통해본 악의 문제”, 「목회와 신학」 (1992년 6월), 61면 참조 : 악의 분류에는 본래적 악과 도구적 악의 구분도 있다. 어떤 악이 다른 선한 목적에 직․간접으로 공헌한다면 도구적 악이라 하고, 다른 선한 목적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을 본래적 악이라 한다. 특별히 신정론에서 도구적 악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다른 표현으로는 “있어서는 안될 것” 또는 “그래서는 안될 것”이다. 정달용, “악의 문제”, 「신학전망」 34호(1976년 겨울), 광주가톨릭대학교 전망편집부, 54면.
완전성의 결여이다. 프랑소와 쁘디, 「악이란 무엇인가」, 강성위 역, 이문출판사, 1984, 91-97면 참조.
흔히 惡은 苦痛과 서로 교차될 수 있는 개념으로 사용한다. 예컨대 惡을 가장 폭넓게 적용할 때, 惡은 재해, 수해, 질병 등을 포함하여 인간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덮쳐오는 자연惡과 도덕적 책임을 귀속시킬 수 있는 행위자의 행위에서 비롯되는 도덕적 惡까지도 포함한다. 여기서 苦痛은 도덕적 惡과 자연적 惡에 의하여 야기되는 주관적 체험을 일컫는다. 정해창, 「악이란 무엇인가?」, 도서출판, 1992, 9면에서 다음과 같이 전한다. 주관적 체험인 이유는 각자의 반응에 따라서 강도가 다르기 때문이다. 한 어떤 이에게는 심한 고통이 다른 이에게는 고통이 아닐 수 있다 : 사실 고통이 직․간접적으로 악의 형태와 연계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고통은 그 자체로 악이 아니며 악의 전체성도 아니다. 또한 고통은 악 현존의 상징으로 우리에게 보여진다. 악이 존재한다는 것은 고통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런나 고통 자체는 주관적 체험 자체이다. 단순히 수동적으로 불행이나 악을 수용한다는 의미만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어떤 감정을 느끼면서 당한다는 의미도 포함된다. 고통의 심리학적 형태를 이루고 있는 내용의 한 복판에 으례 “악의 체험”이 있기 마련이고, 이것이 각 개인에게 고통의 원인이 된다. 말하자면 인간은 자기가 참여하지 못하고 있는, 어떤 의미에서 자기로부터 단절되어 있는, 또는 자기가 박탈당하게 된, 그런 ‘선 때문에’ 고통을 받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특히 사물의 정상적인 질서에 있어서는 그러한 선에 ‘마땅이’ 참여해야 하는데도 그렇게 하지 못할 때에 인간은 고통을 겪는다. 결국 그리스도교적으로 보면 고통이라는 현실은 악을 통해서 설명되며, 악은 언제나 어떤 모양으로든 하나의 선을 시사하고 있다. 참조.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서한, 「구원에 이르는 고통」, 정한교 역,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1989, 7항.
물론 도덕적 惡과 자연적 惡은 공해에 의한 苦痛에서 보듯이 긴밀히 연결되기도 한다.
惡은 세상의 역동적 존재의 조건이지만 우주의 질서 정연한 진화를 저해하고, 역사적 발전을 방해하며, 인간의 초자연적 존재의 발전에 장애가 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므로 인간 존재는 惡에 대한 인내와 아울러 투쟁을 시사한다. 惡의 부정적 역할은 그 긍정적 역할로부터 명확히 구분될 수 없다. 아주 빈번하게 惡은 투쟁을 자극하는 것으로써 인격의 성숙을 촉진 시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총체적 발전을 저해하는 罪에 결탁된 惡들이 있다. 개인에 있어서 긍정적 역할이 부정적 역할에 대해 우세하느냐 않느냐는 그의 역량에 달려 있다. 하지만 개인의 역량 역시 자연적 및 초자연적 상황들의 정도에 따라 결정됨을 부인할 수 없다. 인격체는 惡을 참고 견딤으로써 또는 그것을 거슬러 대항함으로써 반응한다. 인내과 대항은 惡에 대한 인격체의 두 가지 태도이다. 惡의 긍․부정적 두 가지 기능과 마찬가지로 인내와 대항의 두 가지 태도도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대범한 인내는 자기 자신에 대한 투쟁을 요구하고, 또 투쟁은 참아 견디는 노고를 부과한다. 최영철, “十字架와 인간”, 88면 ; 참조. J. STOTT, 앞의 책, 423-455면에 의하면 그리스도의 十字架는 고통 중에 있는 신앙인에게 다음과 같은 의미를 준다고 말한다. ㉠참을성 있게 인내하도록 격려해 준다. ㉡완덕에로 향하는 길을 제시한다. ㉢고난 가운데서 봉사를 상징해준다. ㉣궁극적 영광을 희망하게 해준다. ㉤참 신앙의 뿌리를 알려준다. ㉥하느님과 결속된 사랑임을 입증해준다.

2) 苦痛에 대한 罪人들의 태도

인간의 罪는 타인들보다는 오히려 자기 자신에게 해를 더 끼친다. 세상을 살면서 피할 수 없는 惡은 그 의미가 발견될 때 견딜만한 것이 된다. 그런데 罪는 자기의 고유하고 세속적이며 순간적인 이득으로 말미암아 모든 의미를 부정한다. 그러므로 罪人에게는 항상 포기와 결부되어 있는 ‘선의 추구’와 ‘고난의 감수’가 근본적으로 어렵게 되어 있다. 이런 점에서 우리가 알고 있는 죽음, 우리가 겪는 수고와 소외가 罪의 결과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惡이 세상의 역동적 존재, 즉 진화하는 체제에서 요구되는 것이라하더라도, 우주의 방향 설정된 진화를 방해하고 역사적 발전을 저해하고 초자연적 존재 발전에 해를 끼치는 惡이 많다는 -것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사실 惡의 부정적 역할이 그 긍정적 역할과 뚜렷하게 구별될 수는 없다. 아주 드물게 惡은 투쟁을 자극함으로써 인격 형성을 촉진한다. 이런 측면에서 우리는 苦痛에 대한 罪人들의 태도를 언급할 수 있다. 최영철, 위의 글, 89면.

성서의 인간은 자신을 억누르는 惡을 자기 불충실의 합당한 결과로 시인한다. “주님, 우리는 지금 이처럼 얼굴을 들 수 없게 되었습니다마는 주님께서는 잘못이 없습니다”(다니 9,7). 이스라엘은 환난 중에 하느님 대전에 자신을 낯추었고 그분의 자비에 호소하였다. 성서의 이같은 태도와 결부시켜 敎會는 우리가 罪에 대한 벌을 자발적으로 보상할 수 있다고 가르친다. 성사의 집행에서 부과되는 보속을 실천하고 하느님이 우리에게 보내시는 苦痛을 인내로이 받아들임으로써 贖罪하게 된다 : 罪人은 참회하는 마음으로 자기 罪를 보속하고,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사랑의 위대한 요약인 인내로써 贖罪해야 한다(DS 1693). 한 인간이 유혹받는 상황에 빠지도록 하느님이 허용하실 때, 그 목적은 그가 자신의 선택을 통하여 하느님 자신의 영광, 즉 자기 증여에 참여할 수 있게 하시려는 것이다. 그가 유혹에 굴복 당하게 되면 이 목적에 어긋나게 된다. 그러나 다음 순간에 그 자신이 이기심을 포기하고 하느님을 위하여 결단하는 기회를 갖는다면 이러한 극복은 보상이나 충족의 의미를 지니게 될 것이다. 인간이 스스로 자기에게 부과하거나 떠맡아 인내로이 참고 견디게 되는 惡은 일정한 선에 필수적인 조건이 되는 것이므로 罪를 보속하는 것이다. 그러한 상황에서 인간은 하느님의 뜻을 다시 수락함으로써 그분의 三位一體적 생명 안에 동참하게 된다. 위의 글, 89-90면.

苦痛을 참고 견디는 것 이외에도 罪人 보속할 수 있는 것은 苦痛을 거슬러 투쟁하는 것이다. 이웃을 짓누르는 惡의 온갓 형태를 거슬러 대항하는 것은 창조주와 최초로 맺은 계약의 한 요구 사항이다. 이는 惡이 창조 세계의 발전이나 완성을 제한, 저해하는 것이 때문이다. 罪 역시 마찬가지다. 구약 성서는 罪로부터 해방되는 한 방도로써 “억눌린 자를 풀어주고, 고아의 인권을 찿아주며, 과부를 두둔해 주는 것”(이사 1,16-20)을 말하고 있다: “자선은 사람을 죽음에서 건져내고, 모든 罪를 깨끗이 없애 버립니다”(로마 12,9): “무엇보다도 먼저 서로 진정으로 사랑하시오. 사랑은 허다한 罪를 덮기 때문입니다”( 1베드 4,8). 罪人의 苦痛이 十字架가 되는 것은 인내하고 대결하면서 十字架를 받아들이는 태도와 하느님에 대한 흠숭의 자세를 견지하며 뉘우치는 경우이다. 회개하기 위해서는 罪人이 다음 사실을 통찰해야 한다: 苦痛을 인내로이 수락하는 것이 하느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 있는 한 방도가 된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이 인식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그가 어떠한 대가를 치루더라도 하느님과의 友情을 회복할 수 있도록 자신을 변화시켜야 한다. 그래야만 예언자들이 예언한 새로운 계약이 하느님과 그 자신 사이에 회복될 수 있다: 이 계약은 걸어가야 할 길을 제시할 뿐 아니라 마음을 변화시키고 하느님의 뜻을 실행할 수 있게 해주는 자발성을 불러 일으킨다. 위의 글, 90면.

十字架는 惡 그 자체를 설명하지 않지만 그것의 의미를 밝히고 또 그리하여 그 무게를 경감시킨다. 실상 온갖 惡은 고난 당하는 인간이 객관적 苦痛의 결과인 긍정적 결실을 발견하고 옳게 이해할 때에 보다 견딜만한 것이 된다. 信仰人은 十字架에 대한 논의에 비추어, 그 자신을 위해 惡이 긍정적 기능을 가질 수 있음을 발견한다. 그는 피할수 있는 惡을 인내로이 견디어 냄으로써 그리스도와 동화되고 또 그리스도의 은총으로부터 영향을 받아 자기 자신과 다른 이들을 위해 긍정적 가치를 얻어 누릴 수 있다. 예를 들면 罪를 보속하고, 초월적 가치들을 증언하고, 초자연적 선물들을 획득할 수 있다. 바로 그런 까닭으로 인해 惡은 감소된다. 惡에 대한 투쟁과 惡을 견디어내는 인내는 적어도 양자택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惡에 대한 그리스도교적 자세의 두 가지 국면을 이룬다. 예를 들면 그리스도인은 질병을 퇴치하기 위하여 투쟁을 하면서 탐구하고, 환경을 생태학적으로 변화시키는 노고를 감수해야 하고, 또 타인들의 오해와 자신의 쓰라린 실패들을 참고 견디어야 한다. M.FILCK, Nuovo Dizionario di Teologia, a cura di G. Bargablio,Roma, 318-322면.(최영철, “위의 글”, 91면에서 재인용).

4. 그리스도의 제자와 十字架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復活과 그가 보내신 聖靈의 체험을 통해서 예수가 선포하였던 하느님이 참 하느님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의 제자들은 예수가 인간을 위해 十字架상에서 자신의 생명마저 내어주었음을 알았다. 十字架가 저주할 참변이 아니라 救援을 위한 사건임을 알게 되었다. 드디어 예수의 제자들은 예수와 함께 자유와 사랑과 평화의 하느님 나라가 세상에 도래하였음을 인정하였다. 이때부터 제자들은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救援에 이르는 苦痛이 무엇인지 알았던 것이다. 復活을 위한 十字架의 삶을 시작했다. 그들은 죽음을 불사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선포하여 마침내 敎會라는 모임을 형성하였다.

1) 수난에의 동참

그리스도의 제자는 復活하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聖靈을 받은 자로서 그리스도의 메시지를 받아들이고 그분의 태도를 자기 삶의 규범으로 수락하며 삶과 죽음 안에서 자기 스승의 운명을 함께 나누기로 불리움받은 자이다. 그의 삶은 十字架에 현양된 예수 참조. W. KASPER, 앞의 책, 257-274면에서 저자는 十字架에 현양된 예수에 관한 내용을 상세히 소개하고 있다.
로 말미암아 이미 변하였다. 세례로써 주님의 죽음의 신비 안에로 들어간 그는 자신의 처신으로써 그 신비 안에 보다 깊이 동참하도록 초대받았다(로마 6,4). 그는 온 인류를 짓누르는 苦痛으로부터 결코 면제되어 있지 않다. 오히려 그는 그리스도를 따르기 때문에 특별한 苦痛을 받게 되어 있다. 그리스도가 체후의 만찬 설교 중에 그분 자신이 세상을 이겼으므로 환난 중에 체념하지 말라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요한 16,31). 이 말씀은 제자의 존재가 그를 이 세상의 惡으로부터 보호해 주시는 하느님의 기적적인 조처에 의해서가 아니라 환난을 대면하고 극복하는 내면적 태도에 의해 특징지어질 것임을 가르친다. 聖父께로 향한 제자들의 신뢰는 투쟁과 인내 안에서 드러나는 것으로 그리스도의 승리 위에 굳건한 바탕을 두고 있다: 十字架와 復活로 인하여 세상 위에 현양되신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을 자신에게로 이끈다(요한 12,32). 十字架의 승리와 체험은 제자들의 삶 안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한다. 아들로서 聖父와 맺어진 관계 속에 머물면서 죽기까지 자기 사명을 완수하는 능력을 가진 十字架상 그리스도의 체험 자체가 제자들의 삶 안에 깊이 새겨지고 그들이 겪게 되는 온갖 종류의 환난 안에서 그들을 지탱시켜 주는 활력이 된다. 최영철, “十字架와 인간”, 92면.

사실 그리스도를 추종하는 것은 罪에 물들어 있는 인간의 자연적 실재를 十字架에 못박는 삶이다. 세상의 惡한 세력은 그리스도를 十字架에 처형하여 추방하였던 것과 마찬가지로 그의 성실한 제자들이 세상에 말과 행동과 생활로써 증거하지 못하도록 끝없이 방해한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苦痛을 면하기란 불가능하다. 그들은 苦痛과 관련하여 특유한 태도를 견지하도록 요청받으며 또 그런 처신을 취하는 데에 있어서 十字架의 도움을 받고 있다. 고난이 창조주의 창조 계획 수행에 방해되는 것으로 나타날 때, 그들은 그 고난에 대항하며 또한 각자의 고유한 소명에 보다 부응하는 苦痛을 생생한 信仰으로 받아들여 十字架로 변화시켜야 한다. 그리스도에게로 향한 부단하고 신실한 전향은 반드시 苦痛과 관련하여 특유한 태도를 견지해야함을 전제로 하므로 제자들의 삶은 苦痛에 깊이 연루되어 있다. “그리스도께서 모든이를 위해서 죽은 것은, 살아 있는 이들이 더는 자기 자신을 위해서 살지 않고 자기들을 위하여 죽었다가 일으켜지신 그분을 위하여 살게 하려는 것입니다”(2고린 5, 15). 그리스도를 위하여 영위하는 삶은 예수의 수난에 동참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체험되지 않는 고난은 苦痛이 아니며, 실제로 동참하려는 의지는 그리스도와 함께 겪기로 되어 있는 苦痛(참조: 로마 8, 17)을 체험해야만 실천적인 것이 된다. 수난하는 그리스도와 苦痛을 함께 나누는 태도는 罪와 가난의 처지에서 괴로워 하는 사람들을 사랑하고, 그들과 유대를 갖는 것으로 이어져야 한다. 惡을 조장하는 모든 것을 대항함으로써 유대관계가 드러난다. 이 연대성에의 참여는 惡으로부터 인간을 해방하는 그리스도의 十字架상 승리를 이 세상 안에서 드러내는 것이다. 위의 글, 93면.

그리스도는 자기의 사명이 苦痛스럽고 치욕적인 죽음 안에서 성취되기를 원하였다. 그를 추종하는 제자라면 자기의 소명으로부터 포기와 극기가 요청될 경우 그것을 수행해야 한다. 극기는 어떤 惡을 인내로이 감수 하는 방식으로 실천된다. 이러한 극기는 제자의 소명을 이루는 한 부분이다. 그가 十字架를 완전한 방식으로 받아들이려면 그 자신이 그것을 효과적으로 수락해야 할 뿐 아니라 信仰의 눈으로써 十字架의 苦痛을 통하여 이 苦痛이 지향하는 선, 곧 죽으시고 復活하신 그리스도와의 보다 친숙한 일치를 통찰할 줄 알아야 한다.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 때문에 十字架를 자발적으로 수락하는 것은 정서 생활에도 영향을 미치며 또한 어느 정도의 기간이 경과한 후에 十字架를 향한 기쁨, 信仰人의 ‘완전한 기쁨’에로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기뻐하십시오! 여러분이 지금 얼마 동안은 갖가지 시련을 겪으면서 슬퍼할 수밖에 없겠지만 그것은 여러분의 믿음을 순수하게 만들기 위한 것입니다. … 그러므로 황금보다 훨씬 더 귀한 여러분의 믿음은 많은 단련을 받아 순수한 것이 되어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시는 날에 칭찬과 영광과 영예를 차지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의 믿음이 결국 영혼을 救援하였기 때문입니다”(1베드 1, 6-9). : “나의 형제 여러분, 갖가지 시련을 당할 때 여러분은 그것을 다시없는 기쁨으로 여기십시오. 믿음의 시련을 받으면 인내력이 생긴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야고 1, 2-3). 위의 글, 94면.

신비체의 지체들이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 때문에 수락하고 감수하는 고난은 그분의 몸을 위하여 그분의 수난을 보충하는 것이다(참조: 골로 1, 24). 이 보충은 十字架의 이득에 어떤 것을 첨가 하는 것이 아니라 고유한 환경 안에서 영향력을 미치는 그리스도의 작용을 현존시키는 것이다. 信仰으로 받아들여진 고난은 제자의 신실을 나타내 보일 뿐 아니라 은총의 현존과 그리스도 현존의 매혹적 가치를 드러내 보인다. 그리스도는 자기 모상과 현존을 통하여 신실하고 고난에 의하여 성별된 환경에 임하여 그 안에서 보다 효과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된다. 위의 글.

2) 十字架 밑에 있는 敎會

敎會는 十字架 안에서 태어났다: 하와가 잠든 아담의 옆구리에서 태어났듯이 새 하와인 敎會는 새 아담으로 十字架 위에서 ‘죽음의 잠’을 자고 있는 그리스도의 열려진 옆구리(요한 19, 34)에서 생겨났다. 참조; J. MOLTMANN, 「성령의 능력 안에 있는 교회」, 박봉랑 외역, 한국신학연구소, 1987, 100-113면.
그러므로 十字架는 敎會의 존재 방식이다. 敎會는 十字架에 못박히고 復活한 주님의 힘을 자신의 삶 안에 작용하게 함으로써 박해와 가난과 자신의 나약함 가운데에서도 十字架를 짊어진다. 이 땅 위의 敎會는 한 때 종말론적 단계에 이미 도달한 승리의 敎會와 구별되어 투쟁하는 敎會라 불리웠으나 오늘날에는 오히려 순례하는 敎會, 十字架에 못박힌 敎會라 불리우고 있다. 왜냐하면 敎會는 十字架를 통하여 자신을 발전시키기로 불리움받고 있기 때문이다. 敎會의 十字架는 박해 뿐 아니라 자신의 나약함이기도 하다. 敎會는 자기에게 맡겨진 사명의 수행에 필요한 인간적인 방편들을 충분히 소유하고 있지 못하다. 敎會의 나약함은 그 자신의 지체들 뿐 아니라 제도들에 의해서도 저질러지는 罪와도 깊이 관련되어 있다. 罪는 敎會 전체를 한정시키는 제약이다. 이 한계 때문에 敎會는 자신을 손상시키며 자기 설교와 증거의 효력을 감소 시키며 전례의 救援的 효과를 질식시킨다. 敎會의 내․외적 빈곤은 ‘十字架’라 불리울 수 있다. 왜냐하면 그 자신의 혼이신 聖靈을 슬프게 하는 것은 그 자신과 더욱 밀착되어 있는 지체들로 인해 저질러지는 과오이기 때문이다. 敎會의 결점 때문에 聖靈의 활동은 위축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敎會의 이러한 결점은 그리스도의 은총의 전능한 힘을 충만히 발휘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교회사를 볼 때, 믿겨지지 않을 정도로 심각한 어려움에 처해있었던 상황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교회가 면면히 이어온 것은 이를 여실히 증명하는 것이다.
: “너는 이미 내 은총을 충분히 받았다. 내 권능은 약한 자 안에서 완전히 드러난다”(2고린 12, 9). 그분의 은총은 敎會가 나약함에도 불구하고 罪 안에 잠겨들지 않도록 보호해 준다. 더군다나 은총의 영향력 덕분에 敎會의 자기 비움은 救援을 드러낼 뿐 아니라 증진시키기도 한다. 敎會의 나약함은 실제로 信仰을 자극하며, 각 개인들과 공동체로 하여금 자신들의 종교심을 마치 초자연적인 것인 양 착각하게 하는 인간적인 방편에 너무 의지하지 않도록 해주며, 자신의 절대화에 대한 유혹을 극복함으로써 오로지 하느님으로부터 나오는 救援만을 기다리도록 방향을 잡아준다: “나는 너의 환난과 궁핍을 알고 있다. 그러나 너는 부요하다. … 네가 장차 당할 苦痛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말라. … 너는 죽기까지 충실하여야 한다.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월계관을 네게 주겠다”(묵시 2,9-10: 참조. 2, 3-5, 19). 최영철, “十字架와 인간”, 9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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