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 신앙과 고통의 극복

Ⅳ. 十字架 信仰과 苦痛의 克服

처음에 말했듯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교리적인 의미에서의 信仰지식은 그 信仰實存을 위기에까지 빠뜨리지는 못한다. 그러나 苦痛과 불의, 증오와 허무의 체험은 하느님에 대한 信仰을 회의케 하며 信仰人을 참으로 흔들리게 하는 인간의 체험임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너나 할 것 없이 가난, 질병, 억압, 수탈, 유린, 멸시, 배신, 패배 따위로하여 너무나 지독한 아픔을 겪어 왔다. 우리는 苦痛을 떠난 삶을 생각할 수조차 없다. 사실 이 글의 시작부터 苦痛이란 단어를 쉴새없이 난발해왔다. 苦痛에 대해 괄목할만한 신학적 분석과 이해를 했다 하더라도 정말 苦痛이 없어지는 것도 아니다. 이러한 난제 앞에서 하느님을 믿는 信仰人들은 다시한번 苦痛에 대해 진지하게 묻고, ‘苦痛과 하느님’의 관계에 대한 信仰的 반성을 통해 ‘苦痛이 무엇이냐’가 아니라 ‘어떻게 苦痛의 克服이 가능한가’를 찿아야 할 것이다. 이제 우리는 苦痛의 극복이라는 이 사실을 머리에 두고 우리의 문제에 접근해 보기로 한다. 우선 ‘믿는다는 것’은 ‘인식의 능력’이 아니라 ‘사랑의 능력’임을 근거로하여, 그리스도교 信仰 안에서 苦痛의 克服은 ‘사랑의 十字架를 감수할 때’ 가능함을 말하겠다. 본 단원은 삶 속에서 부딪치는 고난과 고통에 대한 문제를 묻고 그 신앙적 의미를 추구하는 G. GRESHAKE의 저서, Der Preis der Liebe (Freiburg 1978)을 중심으로 역어진 황철수, “그리스도 신앙과 세상의 고통”, 「신학전망」 94호(1991년 가을), 광주가톨릭대학교 전망편집부, 21-35면에 실린 ‘十字架와 세상의 고통 극복’이란 주제를 다루겠다.
말미에서는 苦痛이라는 十字架에 대한 현 교도권의 견해를 정리할 것이다.

1. 믿는다는 것

‘믿는다는 것’을 우리는 자주 과학적 검증을 거친 확실성에 부여하는 태도로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태도는 모든 존재와 사물을 측량할 수 있고 실험할 수 있는 관점에서만 생각하여 그 보이는 면만을 중시하게 되어 오히려 사물의 본질을 올바로 이해할 수 없게 되는 처지에 이르게 한다. 어떤 사물의 본질을 참으로 인식하기 위해서는 실험과 관찰을 넘어서는 또 다른 태도가 필요하다. 또 다른 태도란 믿음을 들 수 있다 : J. HESSEN, 「인식론」, 이강조 역, 서광사, 1986, 39면에서 저자는 인간 이성이 진리를 알아들을 수 있다는 확신의 가장 깊은 토대는 종교적 신앙에 두고 있다고 한다. 이 종교적 신앙은 철학적으로 보면 의미에 대한 믿음으로 나타난다고 한다. 그것은 무엇에 의해서도 동요될 수 없는 세계와 삶의 의미에 대한 믿음이다. 삶은 인간의 인식의 인식 기능이 오류와 착각이 아니라 진리의 인식을 목표로 할 때만 의미를 지닌다. 그리하여 우리 정신의 가장 중요한 장치, 따라서 이성이 진리 능력에 대한 믿음은 일반적으로 의미에 대한 믿음 속에 놓여 있다는 주장이다. 그의 주장에 따른다면 믿음이야말로 가장 확실한 인식의 능력이다. 그러나 이 논문에서 본인이 말하고 싶은 바는 “믿는다는 것”을 인식의 능력이 아니라 “사랑의 능력”이라고 하는 것은, 그리스도교에 있어서 참된 믿음이란 “인식한다”는 차원에 머물지 않고 “(능동적으로)사랑한다”는 의미에서 바라볼 때 가장 그리스도인의 신앙을 잘 표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생떽쥐베리는 그의 책 “어린 왕자”에서 이점을 잘 부각시키고 있다. 다음은 어린 왕자와 그의 친구가 된 여우와의 대화 중 일부이다.

이렇게 해서 어린 왕자는 여우를 길들였다. 그리고 떠날 시간이 가까워오자 여우가 말했다. “…잘가라. 내 비밀을 알려줄게. 아주 간단한 거야. 잘 보려면 마음으로 보아야 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 A. SAINT-EXUPÉRY, 「어린왕자」, 안응렬 역, 인문출판사, 1973, 92-94면.

‘눈에 보이지 않는 현실’ 그것은 상상의 세계가 아니라 인간 삶의 또다른 현실이다. ‘믿는다는 것’ 은 세계와 사물을 보는 또다른 시각을 가지는 것이다. 그것은 이것 또는 저것에 대한 확인을 뜻하지 않고 존재와 소유와 현실전체를 떠받들고 있는 또다른 현실에 대한 긍정이다. J. RATZINGER, 「그리스도 신앙 어제와 오늘」, 장익 역, 분도출판사, 1974, 26-29면 참조.
그 현실은 보고 만지는 보고 만지는 세계로만 기우는 사람에게는 아득히 먼 거리에 있는 현실이나, 신적 의미와 사랑의 차원에 눈을 뜬 사람에게는 현실 중의 현실이다. 결국 믿는다는 것은 인식의 차원을 넘어서 사랑의 현실로 넘어감을 의미한다. 생산과 이윤, 그를 통한 자기충족의 현실에 머무는 사람은 자기버림과 비움을 통한 최고의 존재 현실이 비현실처럼 보일 것이다. 그러나 인간 존재의 실현은 역설적으로 자기를 버리는 사랑에 있다는 사실이다. 바울로 사도의 말씀대로 사랑은 모든 것을 완성한다. 우리는 모든 존재의 근거이고 의미인 하느님을 보지 못했지만 하느님은 사랑이시기에 사랑하는 사람은 곧 하느님을 알고 있음을 요한 1서는 자신있게 진술한다(1요한 4, 7-8 참조).
그리스도교에서 ‘믿는다는 것’은 보이는 현실에 대한 지식과 인식의 확인이 아니라 보이는 현실에 의미를 주고 그것을 궁극적으로 완성시키는 사랑에의 결단이고 선택인 것이다. 바로 여기서 우리는 참된 信仰의 능력은 ‘인식의 능력’이 아니라 ‘사랑의 능력’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황철수, 앞의 글, 30-31면 참조.

2. 十字架 信仰과 苦痛의 克服

인간의 모든 아픔과 苦痛을 어떤 초월적인 신의 능력에 의해서 기적적으로 치유받는 것을 信仰의 확실한 근거로 삼으려고 하는 사람은 그리스도교 信仰을 아직 이해하지 못한 사람이다. 앞에서 말한대로 믿는다는 것은 사랑에 대한 이해이고 선택이기에, 그리스도교 信仰은 단순한 마술적 기적에 근거를 두는 것이 아니라 사랑에 근거를 두는 것이다. 그 사랑은 예수의 十字架에서 가장 훌륭하게 드러난다. 예수의 十字架, 그것은 苦痛을 음미하고 즐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로 苦痛과 싸움으로 인해 생겨나게 된 또다른 苦痛으로서 사랑의 표시이다. 이때의 사랑 때문에 당하는 苦痛은 오히려 세상을 변화시키느 힘으로 작용한다는 사실이다. 그리스도교 信仰人의 實存은 바로 이러한 苦痛과의 싸움에서 오히려 苦痛당하는 모습으로 드러난다. “그리스도교의 영웅들은 놀라운 업적을 남긴 특출한 인물들이 결코 아니고 모험가와 정복자가 결코 아니며 무슨 굉장한 능력을 타고난 인물들이 아니다. 그리스도교의 영웅들은 참피온처럼 혜성같은 존재가 아니다. 그리스도교의 영웅들은 날마다 천대와 박해를 대항하며 투쟁해 가는 가난한 사람들이고 공포감과 수치심을 극복하고 信仰의 위력을 가지고 인내롭게 나아가는 가난한 사람들이다.” J. COMBLIN, 「그리스도교 인간학」, 김수복 역, 분도출판사, 1988, 324면.

여기서 박해를 받지 않으면 그리스도교의 영웅이 아니라는 말이 아니라, 세상의 苦痛에 정면으로 도전하여 苦痛을 극복하고 변화시키려는 사람이 받는 또다른 苦痛이 박해의 형태로 드러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것은 다른 말로 十字架이고 사랑의 苦痛이기도 한 것이다. 참으로 완성된 인간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자기의 인생과 생명을 타인을 위해 十字架에 못박음으로써 최고로 실현할 수 있다. 예수의 十字架는 ‘하느님의 사람됨’을 가장 훌륭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즉 ‘하느님의 부르심(信仰의 객관적 여건)’에 ‘인간의 응답(信仰의 주관적 요인)’을 가장 완전하게 보여준 것이다. 정하권, “가톨릭 신앙의 개념”, 「신학전망」 32호(1976년 봄), 광주가톨릭대학교 전망편집부, 18-27면 참조.
예수가 十字架에서 죽음을 당한 것은 그나마 인간을 불쌍히 여겨 苦痛을 한 번 참아준 연민과 동정의 단순한 행위로 해석할 수 없다.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특권으로 인간이 당하는 苦痛을 피해간다면 아무리 ‘내가 사람의 아들’이라고 말하더라도 그 하느님은 아직 완전한 사람에 이른 것은 아니다. 진정으로 인간과 일치된 하느님은 세상의 죄로 말미암은 苦痛의 신음을 함께 겪었을 뿐 아니라 그 苦痛을 극복하기 위해 투신하다 자기의 생명까지 빼앗기는 苦痛에 이를 때에 가능하다. 하느님의 위대하심은 苦痛당하는 거기에도 있다. 가장 비참한 인간의 苦痛에 동참하시는 하느님은 苦痛자체를 부각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죄로 점철된 세상에서의 苦痛에 대한 투쟁은 그 사랑으로 인해 또다른 苦痛으로 나아가게 됨을 보여 주시는 것이다. 이제 사랑의 苦痛을 당하는 거기에서 하느님은 우리 안에서 苦痛을 받으시고, 우리는 하느님의 고난과 그 기쁨에 참여한다. 이런 의미에서 하느님은 우리의 위대한 동반자이시며 이해하시는 고난의 친구이시다. J. MOLTMANN, 「十字架에 달리신 하느님」, 266-270면 참조.

우리는 세상의 苦痛에 직면하여 사람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름으로써 苦痛을 극복하도록 초대받고 있다. 그리스도의 十字架는 멸망과 苦痛과 죽음으로 이끄는 죄악의 길이 아니라, 救援과 生命으로 이끄는 사랑의 길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十字架가 말하는 것은 ‘苦痛의 인정’이 아니라 ‘苦痛에 대한 저항’이다. 따라서 그리스도교 信仰인들에게 있어서 十字架는 예수에 대한 단순한 애도의 표시가 아니라 苦痛에 대한 저항이며 죽음을 죽임으로써까지 생명을 사랑한 열정의 표지이다. 復活은 바로 이 사랑에 대한 하느님의 응답이고 苦痛의 없앰의 시작인 것이다. 황철수, 앞의 글, 33면.

이제 苦痛의 극복에 헌신하는 자는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일어난 것처럼 스스로 苦痛 속에 던져질 것이다. 그러나 이 苦痛은 意味를 가지고 있다. 참된 기쁨과 평온을 가능케하며 불행한 운명으로서가 아니라 보람된 인간됨의 실현 속에서 하느님의 현실을 만날 것이다. 이런 뜻에서 생떽쥐베리의 표현을 빌어 ‘가장 중요한 현실, 하느님의 현실은 눈에는 보이지 않으나 세상의 苦痛을 없애기 위해 투신하는 사랑 속에서 보이고 만나진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랑 때문에 苦痛을 당하고 그 苦痛으로써 세상의 苦痛을 변화시키는 것은 위대하고 용기있는 자유의 결실이며, 세상의 어떤 苦痛도 이 자유보다 힘있는 것은 아니다. 앞의 글.

그리스도교 信仰이 말하는 하느님은 마음에 드는 제물을 받고서야 분노를 푸시는 하느님이 아니라 함께 고난 당하시고 함께 죽으시는 사랑의 하느님이다. 설사 苦痛이 물리적으로 변하지 않고 계속될 지라도 우리는 이 하느님의 사랑이라는 지평 위에서 苦痛을 이해함으로써 변화된 은총의 세계를 살아갈 것이다. G. GRESHAKE, 앞의 책, 63-66면 참조(황철수, 앞의 글, 33면에서 재인용).

그리스도교 信仰은 죄악이나 苦痛과 같은 부정적 요소를 통해서가 아니라 삶의 긍정적 요소를 통해 새로운 희망의 원천을 발견케 해야 한다고도 한다. H. BOUILLARD, “인간경험과 기초신학”, 「신학전망」 19호(1972년 12월), 광주가톨릭대학교 전망편집부, 50-60면 참조.
그러나 여기서 다룬 苦痛의 문제는 부정적 요소를 부각시켜 인간의 한계성을 느끼도록 유도하여 신적 권능에 종속시키려고 하거나 苦痛을 운명으로 받아들여 체념케 하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리스도교 信仰은 실패와 좌절의 단순한 치료제나 苦痛위안의 임시변통제가 아니라, 삶의 현실인 苦痛을 정직하게 바라보고 이 모든 아픔과 불의, 부조리의 삶 안에서 참된 긍정 즉 희망을 발견케 하는 힘이라는 것이다. 삶의 기쁨 속에서 은총을 발견한다는 것은 쉽다. 그러나 삶의 苦痛과 슬픔 속에서도 은총을 느끼고 깨닫는다는 것은 쉽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苦痛 속에도 은총이 존재한다는 것은 자신만을 위해서 행복을 추구하지 않는 그런 사람들만이 올바로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참된 행복은 예수의 말대로, 옳은 일을 위해 苦痛을 당해본 사람, 남을 위한 사랑 때문에 슬픔에 빠져본 사람, 정당한 일을 추구하다 가난해진 사람만이 맛볼 수 있는 그런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의미에서 苦痛은 언급하지 말고 피해가야 할 단순한 부정적 요소가 아니라 긍정적인 삶을 위한 적극적인 말들이다. “그리스도교는 항상 苦痛과 사랑의 밀접한 관계를 강조해 왔다. 사랑이 苦痛과의 연관 속에서만 의미가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사랑이 苦痛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苦痛이 사랑에 진정한 근거를 두고 있다. 十字架의 공동체가 사랑의 공동체를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사랑의 공동체가 十字架의 공동체를 만들어 낸다. 만일 사랑이 우리에게 苦痛의 인내를 요구한다면 우리는 苦痛을 인내하는 방법을 알아야 한다. 苦痛을 인내하는 사랑은 우리에게 행복과 기쁨을 가져다 준다. 이것이 은총의 현존이다.” L. BOFF, 「해방하는 은총」, 김정수 역, 한국신학연구소, 1988, 157-158면.

인간에게 궁극적 救援의 은총인 예수 그리스도의 삶 안에서 이러한 것은 더욱 확실히 드러나고 있다. ‘갈대같은 인간’을 위해 하느님은 전 우주를 기획하고 그리고 기꺼이 그 우주를 소진시킬 뿐 아니라 당신 자신마저 사랑으로 인한 苦痛 속에 소진시키신다. 황철수, 앞의 글, 34면.

바울로 사도가 그리스도교적 信仰 實存 속에서 자기의 ‘고난의 삶’을 예수 그리스도의 十字架의 意味地平에서 바라보며 告白하는 바는 다음과 같다: 우리는 아무리 짓눌려도 찌부러지지 않고 절망 속에서도 실망하지 않으며 궁지에 몰려도 빠져 나갈 길이 있으며 맞아도 죽지 않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언제나 예수의 죽음을 몸으로 경험하고 있지만 결국 드러나는 것은 예수의 생명이 우리 몸안에 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2고린 4,8-10).
요컨대, 한마디로 그리스도교 信仰은 復活과 十字架에 대한 信仰이다. 지금까지도 그래왔지만, 앞으로도 그리스도 信仰人들의 과제는 이 復活과 十字架 信仰을 스스로 告白하는데 있다. 극도의 苦痛과 죽음의 순간에서도 이를 告白할 수 있어야 된다. 그리스도교를 實存하게 한 信仰은 바로 이것이었다.
3. 苦痛과 十字架에 대한 現 교도권의 이해

苦痛을 인간 救援의 길로 이해하는 敎會는 예수 그리스도의 十字架와 復活을 통하여 그 의미가 드러난 苦痛을 초자연적 의미와 인간적 의미로 구분하고 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서한, 「구원에 이르는 고통」, 31항 참조.
苦痛이 하느님의 신비에 뿌리박고 있으므로 초자연적이고, 그 안에서 인간이 자기 자신을, 자기 자신의 인간성을, 자기 자신의 존엄성을, 자기 자신의 사명을 발견하고 있으므로 인간적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이해의 토대는 그리스도가 당신의 苦痛을 수단으로하여 인간이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는 믿음에 있다.
인간의 苦痛은 인간 본성에 본질적으로 관련되어 있으며 苦痛은 인간이 어떤 의미에서 인간 자신을 넘어서서 나아가도록 운명지어져 있으며 신비로운 방식으로 이 초월성을 향하여 부름을 받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들 중의 하나로 본다. 특별히 인간은 자신의 삶이 苦痛에 처해 있을 때 敎會가 추구하는 길이되고 이 도상에서 인간을 만날려고 노력하는 태도가 敎會의 과제이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서한, 「구원에 이르는 고통」, 3항 참조.

敎會가 이해하는 苦痛의 근본적이며 결정적인 의미는 요한 복음 3장 16절에서 발견된다. “하느님은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해주셨다”. 그리스도가 苦痛을 수단으로하여 인간을 구원하셨다는 것이다. 홀로 하느님의 외아들이신 그 분만이 모든 죄의 “惡을 克服하는 아버지께 대한 사랑” 으로써 모든 죄를 짊머지시고 받아들일 수 있으며, 바로 그 때문에 그분의 苦痛에서 죄들이 불식되고 그분의 부활로 죽음을 정복하셨다는 것이다. 여기서 苦痛은 “救援의 차원”으로 전환된다. 그리스도의 救援사업의 결과로 현세적 苦痛이 완전히 제거된 것은 아니나 苦痛에 새로운 빛을 던져주고 있다. 이것이 복음이다. 그리스도는 복음과 자신의 苦痛에 의해서 苦痛에 대한 물음의 대답과 의미를 제시하고 있다. 위의 책, 14항 참조.

인간의 苦痛은 그리스도의 十字架위에서의 수난으로 그 절정에 이르렀으며 동시에 완전히 새로운 차원으로 들어갔다. 즉 苦痛을 수단으로하여 선을 이끌어 내는 “사랑”과 연결되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苦痛을 구속적 차원까지 들어 높이 셨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인간의 苦痛은 세상을 救援하는 힘이 될 수 있고 그리스도의 구속적 苦痛에 참여하는 것이다. 苦痛을 통하여 인간은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이 지닌 무한한 값을 다시 치르게 되는 것이다. 苦痛을 통하여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을 만큼 성숙하게 되는 것이다. 모든 인간 苦痛의 약점들이 그리스도의 十字架에서 드러난 바로 그 하느님의 권능과 융합될 수 있다. 약함을 통해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苦痛은 하느님의 영광의 초대이며 인간의 영적 성숙을 드러내라는 초대이다. 위의 책, 18항 참조.

결국 苦痛을 겪는다함은 그리스도안에서 인류에게 베풀어진 하느님의 救援 능력의 역사하심에 민감해진다는 것, 특별히 거기에 마음을 열어 놓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특별한 증거, 용기와 강직에의 특별한 부름이다. 苦痛속에 그리스도께 가까이 이끌어가는 특별한 힘과 은총이 감추어져 있다. 苦痛안에서 자기 온 삶과 소명의 새로운 차원을 발견하게 된다. 인간은 점차적으로 그리스도의 苦痛에 참여하는 사람이 되면서 그리스도의 救援적 대답을 듣게 된다. 그러므로 苦痛이야말로 세상의 救援을 위하여 필요 불가결한 좋은 이들의 대신할 수 없는 중개자요 조성자이며, 인간의 영혼을 변형시키는 은총을 위해 길을 닦아주고 인류의 역사안에 救援의 능력이 현존하게 하는 것 이다.
敎會는 세상의 苦痛받는 사람들에게 자신을 내어줌과 동시에 자신을 완전히 발견할 수 있음을 천명한다. 또 苦痛이 세상에 현존하는 이유는 사랑을 방출하기 위함이며, 이웃에 대한 사랑의 일들을 탄생시키기 위함이며, 인간의 문명 전체를 사랑의 문명으로 변형시키기 위함으로 본다.
인간의 신비에 속하는 苦痛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안에서” 그 해답을 얻을 수 있다. 세상의 구속이라는 신비는 놀랍게도 “苦痛에 뿌리박고” 있으며, 이 苦痛은 또한 救援의 신비속에서 가장 확실한 최고의 조회지점을 발견하고 있다. 참조. 제 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 “사목헌장” 22항 ;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서한, 「구원에 이르는 고통」 1-30항.

결국 苦痛의 문제는 苦痛속에 머무르고 있는 인간 모두가 苦痛을 단순히 감수하지 않고 이를 위해 함께 지고, 죽음보다 더 강한 사랑(선사된 하느님의 은총)으로서 새로운 삶을 탄생시킬 때 그 해결이 가능하다고 말한다. 심상태, “구원은총과 고통의 문제”, 「사목」 66호(1979년 11월),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87면.
敎會는 十字架 苦痛의 “현장에 계신” 그리고 “함께 아파하신” 마리아의 苦痛에 구속적 참여의 성격을 부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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