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이들의 해방자 예수(2)

(3) 굶주림과 목마름에서의 해방
구약에서 하느님께서는 굶주린 이스라엘 백성을 만나와 메추라기로 배불리 먹여주시면서(출애 16,7.10-12)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신 것처럼 예수는 자기를 따르는 사람들의 배고픔을 채워주신다(마르 8,1-3). 예수께서도 굶주린 군중 수천 명을 배불리 먹이신 기적을 일으켰다. 군중들은 그 기적을 메시아가 베푸는 것으로 알아들었고, 예수를 왕으로 받들어 모시고자하여 그분을 찾았다.
진실히 여러분에게 이릅니다. 여러분이 나를 찾는 것은 표징들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먹고 배가 불렀기 때문입니다.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시오, 그것을 인자가 여러분에게 줄 것입니다(요한 6,26-27).
그러한 양식을 요청하는 이들에게 예수께서는 하느님의 말씀, 예수 자신인 참된 빵에 대한 갈망과 예수의 영인 생수(7,37-39)에 대한 욕망을 일깨워주신다. 그는 이러한 갈증을 사마리아 여인의 마음안에 일으킨다(요한 4,1-14).
나는 생명의 빵입니다. 여러분의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고도 죽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빵이니 이것을 먹는 이는 죽지 않을 것입니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입니다. 이 빵을 먹는 이는 영원히 살 것입니다.(요한 6,48-51)
예수의 이 말씀을 들은 많은 사람들이 결국 떠나갔다(요한 6,66). 떠난 이들은 영원한 생명을 주는-일시적 굶주림의 해방이 아닌 죽음에서의 해방을 주는- 예수님 자신에게는 전혀 관심이 없었고 빵과 배부름만을 찾고 있었던 것이다. 육체의 허기를 채운 것은 일시의 해방에 불과하다. 이것으로는 조상들이 광야에서 만나를 먹고도 죽었듯이 죽을 수밖에 없다. 죽음은 죄를 통하여 왔다(로마 5,12.17; 1고린 15,12). 그 이후 모든 인간은 “아담 안에 죽게”(1고린 15,22) 되었고 따라서 죽음이 세상을 지배하게 되었다(로마 5,14). X. 레옹-뒤푸르, “죽음”항, 앞의 책, 552-553면.
“하늘에서내려 온” 참된 빵은 먹고도 죽음을 멀리 할 수 없는 그런 만나가 아니라, 예수의 말씀과 죽게 될 그분의 몸을 동시에 상징하는 것으로서 성서신학사건, “빵”, 244면.
신앙으로 모셔야 할 예수님 자신이시다. 위의 책, “만나”항 143면.
이분이야말로 우리를 해방시켜주실 구세주이시다.
(4) 억압하는 율법에서 해방하는 율법으로
율법의 정신은 원래 가난한 자들의 권리와 존엄성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다. 억압받고 소외된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의 해방을 통하여 하느님이 가난하고 억눌린 히브리인의 하느님이며 자신들은 한 형제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형제 중에 그 누구도 소외되거나 억압받는 일들이 있어서는 안된다는 것이 그들의 근본적인 법정신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법률이 가난한 자들을 보호하기는커녕 도리어 그들을 억누르고 굴레가 되고 말았다. 가난한 이들은 복잡한 구약의 율법은 613개조가 있다.
안식일 법이나 까다로운 정결법을 도저히 지킬 수 없었다. 따라서 가난한 이들은 거의 모두 죄인 취급을 받았다. 율법을 지키느냐, 그렇지 않느냐가 의인과 죄인을 결정하는 율법주의가 되어버렸다. 유대교에 이어서 율법의 개념은 결정적이다. 의식 및 도덕 율법은 물론 사법적인 율법은 전체가 모두 하느님의 뜻을 나타낸다. 따라서 모든 위반은 다 죄다. 사소한 잘못도 죄가 되기 때문에 기준을 낮추었다 : 깃텔, 앞의 책, 54면 참조.
이러한 사실을 예수께서는 용납할 수 없었다. 그래서 예수는 본래의 정신을 잊어버린 율법의 의미를 바로잡고자 하였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다(마르 2,27)
그리고 정결법의 규정에 있어서도 사람을 더럽히는 것은 마음에서 나오는 살인, 간음, 음란, 도둑질, 거짓증언, 모독과 같은 악한 생각들이지, 사람이 손을 씻지 않고 먹는다고하여 사람을 더럽히는 것은 아니다(마태 15,18-20)라고 이야기함으로써 가난한 이들을 억압하는 정결법으로부터 해방시키신다. 예수는 인간을 억누르고 짓밟고 소외시키는 율법을 거부하고 모든 이들이 평등하게 살아가는 형제 공동체를 형성하는 데 필요한 율법의 본래 정신을 찾고자 했던 것이다. 조재진, ꡔ민중과 하느님ꡕ, 광주가톨릭대학 대학원, 1993, 57-59면 참조.

그리고 율법의 문자에 의해서 인간을 해방․축복하는 방식으로 직접 하느님 앞에 세우는 것에 대하여 예수께서는 사람의 하느님과의 관계는 사람이 하느님 앞에 자기를 내세울 수 있는 그런 법전화한 권리․의무 관계가 아니며, 사람이 복종해야 할 것은 단순히 율법이 아니라 하느님 자신이며 하느님이 바로 인간 각자에게 원하시는 그런 하느님의 뜻임을 말씀하셨다. Hans Küng, 앞의 책, 160면 참조.

(5) 부자들의 해방
루가는 행복 선언에 이어서 네 가지 불행 선언을 전한다. 네 가지 불행들은 본질적으로 하느님의 나라와 부를 섬기는 일이 양립될 수 없다는 사실에 대한 단순한 진술인 것이다. 이 말씀들은 예수께서 부자들을 회개시키고 해방하시기 위한 간절한 열망에서 그들에게 제기하시는 일종의 경고요 심각한 회의처럼 들린다. S. Galilea, 앞의 책, 35-37 참조.

부자가 하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려운 이유는 무엇일까? 부요한 자들은 스스로가 폐쇄되는 성향이 있다. 주변의 가난한 이들을 잊어버린다. ‘다른 사람을 해치지 않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불의와 착취를 의식적으로 자행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부족하다. 우리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나눔의 삶, 자비의 삶을 살아야 한다. 바로 이것이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의 가르침이다. 이것은 또한 최후의 심판의 비유에 나오는 가르침이기도 하다. 최후의 심판의 비유는 곤궁한 이들과의 결속이 하느님 나라에 이르는 길임을 제시하고 있다. 위의 책, 38면 참조.

예수를 만난 자캐오는 그가 전에 부당하게 취한 것들에 대해 배상하려 한다. 그리고 자신의 부를 곤궁한 이들과 함께 나누기로 한다. 이것은 그가 회심하는 데 필요한 구체적인 길이 된다. 예수께서는 이러한 자캐오를 보시며 말씀하셨다. “오늘 이 집은 구원을 얻었다…사람의 아들은 잃은 사람들을 구원하러 온 것이다.”(루가 19,10).
부자가 하늘 나라에 들어가기 어려운 두 번째 이유로는 그들이 물질주의에 빠지기가 쉽기 때문이다. 부와 거기에 함께하는 것들 모두는 인정을 메마르게 만들고 그것 자체를 우상화시키도록 유도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예수께서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는 없다”(루가 16,13), “해어지지 않는 돈지갑을 만들고 축나지 않는 재물 창고를 하늘에 마련하여라…너희의 재물이 있는 곳에 너희의 마음도 있다.”(루가 12,33-34; 마태 6,20-21 참조)고 말씀하신 것이다.
자기를 따르는 누구에게나 재산 포기를 요구하지도 않는다. 부자 청년에게 추종의 전제로 요구한 것을 어떤 상황의 누구에게나 일반적으로 엄명하지는 않으셨다. 가난한 사람들이 행복하다고 하는 이유는 가난한 상황 그 자체를 두고 하신 말씀은 아니다. 따라서 부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재물을 우상화 하는 것에서 벗어나 욕심없이 만족하고 걱정없이 신뢰하는 근본 자세로서의 청빈-곧 재물로부터의 내적 자유 Walter Kasper는 자유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자유란 해방된 자유요 놓여나온 자유이다. 인간의 자유는 조건지어진 자유이다. 한걸음 더나아가, 이 자유는 무엇인가 크게 잘못된 자유요 실패한 자유이다. 인간이 아무리 고상하다고는 하지만 역시 유한한 가치들이나 재물의 조건을 받거나 아니면 심지어 거기에 지배를 받는 동안에는, 그는 정말로 자유롭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 Walter Kasper, 앞의 책, 382면.
-이다. 이때에 아무리 자기에게 재산이 많이 있다하더라도 자신의 재산을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도록하는 요구 때문에 풀이 죽어 떠나가지 않고(마태 16,22), “나를 따라 오너라”(21) 하신 예수의 부르심을 기꺼이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사람은 다만 재화의 청지기로서, 모든 힘과 권위가 하느님의 이름으로 사용되듯이, 하느님의 이름으로 그것을 관리할 따름이다. S. Galilea, 앞의 책, 42면.
재물 때문에 주변과 담을 쌓고 재물을 우상화하는 것에서 해방하여 억눌린 형제자매들과 화해를 하고 예수께서 그 부에 대해서 세우신 계획에 그들의 부를 부함시키는 것이 부자들의 해방을 의미한다. 위의 책, 43면 참고.

(6) 전인적·보편적 해방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예수를 통해 주어지는 해방은 모든 계층에게 열려있음을 알 수 있다. 예수께서는 보편적이고 전인적(全人的)인 해방을 선포하셨다. 경제적으로 가난하고 사회적으로 억압받는 사람들 뿐만 아니라 지배하고 소유하는 사람들도 사회 경제적인 측면을 넘어 전인적인 구원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공평하신 분이시며 자유로운 분이시다. 예수께서는 가난한 자와 부자 모두를 당신 아버지의 나라, 즉 하느님의 사랑과 하느님의 부성(父性)과 모든 인간들의 형제애가 다스리는 상태인 하느님 나라로 초대하고자 하셨다. 예수의 이 초대에는 어느 누구도 제외되지 않는다. 가난한 사람들-개념, 28면 참조.
그래서 예수께서는 스스로 가난한 이가 되시어 가난한 이들과 함께 하시고 이들에게 희망을 주었으며 부자와 권력자들에게는 강력한 어조로 회개를 요구하였다. 예수의 이러한 활동들은 부자와 권력자들에게 근본적인 도전이 되었다. 이들은 예수가 부르짖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 이웃과 하느님과의 벽을 허물고 자신들의 부와 권력으로 향유하는 생활을 청산하거나 자신들의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그 초대를 거부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결국 예수의 활동은 지배층의 반감으로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임을 당한다. 조재, 앞의 책, 61-62면 참조.

(7) 죽음에서의 해방
원래 죽음의 선고는 우리의 시조인 아담의 죄 이후, 비로소 인간에게 내려긴 것이다(창세 2,17; 3,19). 따라서 하느님께서는 죽음을 만드시지 않았으며(지혜1,13), 사람의 잘못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왔고, 죄를 통하여 죽음이 왔다(로마 5,12.17; 1고린 15,21). 그 이후에 모든 인간은 “아담 안에 죽게”(1고린 15,22) 되었고 따라서 죽음이 세상을 지배하게 되었다(로마 5,14). 또한 악마의 시기로 말미암아 죽음이 세상에 들어왔다(지혜 2,23-24). 따라서 우리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는 죽음의 권세는 이 세상에 죄가 실재하고 있음을 나타내 주는 표징이 된다. 죄는 우리의 본성과 하느님의 뜻에 반대되는 악일 뿐 아니라, 구체적으로는 우리에게 “죽음에 이르는 길”이 된다(잠언 11,19). 죄인은 바로 자기의 죄 때문에 죽어간다. 신약성서 어디서도 죽음(θαʹνατος)이 단수한 자연적 과정으로 가볍게 넘어가지 않는다. 죽음은 늘 죄와 연관되며, 하느님의 참 존재인 ζωηʹ와 정면으로 반대된다 : Kittel, 위의 책, 361면,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의 죽음을 달가와하지 않으신다. 오히려 죄인이 회개하여 살기를 바라신다(에제 18,33; 33,11). X. 레옹-뒤푸르, “죽음”항, 앞의 책, 550-555면참조.

우리를 죽음의 권세에서 구하고자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사멸의 조건을 자원으로 취하여 오셨다. 그분의 죽음은 불의에 당한 사고가 아니었다. 수난에 대한 예언들은 모두, 예수가 당신의 죽음을 미리 알고 있었다는 것을 표현하고 있으며 이로써 죽음의 운명을 감수하는 예수의 자발성을 강조하고 있다. Walter Kasper, 앞의 책, 210-215면 참조.
빌라도는 그분에게서 사형에 처할 만한 죄목을 발견하지 못하였으나(루가 23,15.22; 사도 3,13; 13,28), 그리스도께서는 율법에 의해 요청되는 형벌로 보이는 당신의 죽음을 받아들이셨다(마태 26,66; 마르 14,64). 율법의 지배하에 태어나시고 “죄많은 인간의 모습을 몸소 취하신”(로마 8,3) 그분은 당신의 백성과 온 인류와 유대를 같이 하셨다. 그리스도가 자원으로 우리와 굳은 인연을 맺고 연대책임을 진 것이다. 그분은 당신을 인간과 동일시하고 우리를 대신함으로써 상황을 뒤바꿨고 이렇게 해서 우리의 가난이 부유로 바뀌었다. 이러한 교환을 일러 바울로는 화해(καταλλαγή)라고 한다. 이 희랍어에는 άλλος (다른 또 하나의) 라는 형용사가 들어 있다. 결국 화해란 ‘달리 된다’는 뜻이다. 이런 의미에서 바울로는 2고린 5,18 이하에서 말하기를 하느님이 세상을 당신과 화해하게 했다고 한다 : 위의 책, 213면.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그리스도를 죄인으로 만드시고”(2고린 5,21; 참조 갈라 3,13), 인류의 죄가 받아야할 벌을 그리스도께 지게 하셨으며 죽으셨으며 죄인들처럼 명부(고성소)까지 내려가셨다. X. 레옹-뒤푸르, 앞의 책, “죽음”항.

인간들 사이의 평화와 화해는, 하느님 자신이 인간이 될 때, 그분이 다른 사람들을 위한 인간이 될 때에만, 그래서 그분이 새로운 연대성으로 맺어지는 어떤 새로운 인류를 위해 시작을 마련하실 때에만 가능하다. Walter Kasper, 앞의 책, 407면.

이 위타존재(爲他存在)야말로 그의 가장 심오한 본질을 이룬다. 그는 이 위타존재에서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의 인격적 화신이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다스림이 예수의 인격 및 활동 가운데서 발휘되기 시작했을 때의 그 무력(無力), 그 가난, 그리고 그 초라함이 여기 십자가에서는 그 극에 이르렀다. 위의 책, 210-215면 참조.

그분은 부유하셨는데 여러분을 위하여 가난하게 되셨습니다.(2고린 8,9)
그분은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시면서도…종의 모습을 취하셨습니다(필립 2,6)
“우리의 죄 때문에” 죽으신 그분은(1고린 15,3; 1베드 3,18) 당신 죽음으로 우리를 하느님과 화해시키시어(로마 5,10), 우리가 약속된 상속을 받게 하셨다(히브 9,15-16).
예수께서는 이것을 미래의 승리에 대한 표징으로 미리 보여주셨다. 야이로라는 회당장의 열두 살쯤 된 딸이 죽었을 때 예수께서는 “아이야, 일어나라!”고 하시면서 그 어린이를 다시 살리셨다(루가 8,40-56 참조). 나인이라는 동네에서 어떤 과부의 죽은 외아들을 보시고 측은 한 마음이 드시어 그 과부를 위로하시고 그의 아들을 살리시어 그 어머니에게 돌려주셨다(루가 7,11-17 참조). 이미 며칠이나 무덤에 묻혀 있었던 죽은 라자로를 살려주셨다.
성서가 예고한 죽은 자들의 부활은 그리스도에게서 실제로 이룩되었다(1고린 15,14).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제일 먼저 살아나신 분”(골로 1,18; 묵시 1,5)이 되셨다. 바로 그 순간부터 인간과 죽음의 관계는 전도되었다. 승리자이신 그리스도께서 “죽음의 그늘 밑에 앉아 있는 자들을 비추시기” 때문이다(루가 1,79).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이 그때까지 종으로 매여 있던 “죄와 죽음의 법”에서 그들을 해방하셨다(로마 8,2; 참조 히브 2,15).
그분으로 말미암아 하느님과 세상사이에 화해 바울로는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를 언급한는데 ‘καταλλαʹσσω’(화해시키다)를 사용한다(2고린 5,18-20 참조). 화해는 예수의 죽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다(로마 5,10). 그분 우리 대신 죄인이 되셨으며, 우리는 그 안에서 하느님의 의가 되었다(1고린 5,21). 히브리서 2,15에서 쓰인 ἀπαλλαʹσσω는 타동사 능동테로 “해방시키다”라는 의미로 나타난다 : Kittel, 위의 책, 44-45면 참조.
가 일어났고 올바른 관계가 형성되었다. 육화의 교리에 있어서도 요체가 되는 것은 바로 하느님과 세상 사이의 화해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의 화해는 하나의 해방으로서 현실화한 사건이요 동시에 그것은 화해로서의 해방이다. 해방적 화해는 일차적으로하의 은사이며 이차적 의미에서만 인간의 과제이다. Walter Kasper, 앞의 책, 16면.
이로써 예수의 가난과 죽음으로 인간의 마지막 원수인 죽음에서의 해방을 맞이하게 하였다. 이러한 것은 그분의 부활을 함으로써 증명하여주셨다. 죽음에서의 완전한 해방은 영광으로 부활하게 될 때에 완전히 이르어지고,(1고린 15,26.54-55), 우리는 아직도 “우리의 몸이 해방될 날을 고대하고 있다”(로마 8,23) 하느님께 나아가는데 유일한 길이시며 진리와 생명이신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는 그분의 부활에 참여할 수 없다. 그분의 가난의 삶을 따르고 그분의 죽음에 동참할 때에 부활한 이의 맏이이신(골로 1,12-) 그분을 따라 죽음에서 해방한 부활의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안에 있는 육체의 행실(로마 8,13), 곧 모든 세속적인 욕망들에 대해(골로 3,5) “죽음을 감행”해야 한다. 이것이 예수의 가난을 따르는 길이다. 바오로 사도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분은 모든 것의 시작이시며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아나신 최초의 분이시며 만물의 으뜸이 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 그리스도를 내세워 하늘과 땅의 만물을 당신과 화해시켜 주셨습니다. 곧 십자가에서 흘리신 예수의 피로써 평화를 이룩하셨습니다. ··· 이제는 하느님께서 당신 아들의 몸을 희생시키시어 여러분과 화해하시고 여러분을 거룩하고 흠없고 탓할 데 없는 사람으로서 당신 앞에 서게하여 주셨습니다. 물론 여러분은 튼튼한 믿음의 기초 위에 굳건히 서서 여러분이 이미 받아들인 복음의 희망을 저버리지 말고 신앙생활을 계속해야 합니다(골로 1,18-23).
예수는 그분의 가난으로 우리를 가난에서 해방시키셨고, 그분의 죽음으로 우리를 죽음에서 해방시키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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