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예수와 바리사이파
바리사이파라는 용어는 신약성서에서 95번 사용되었다. 마태 27번,마르 12번,루가 27번,요한 19번,사도 9번, 필립 1번.
그런데 대부분의 복음서 자료들은 예수와 바리사이파들이 서로 격렬하게 대적하고 있음을 보여 주고 있다 마태 12, 14. 23 ; 마르 3, 6 ;12, 13 ; 요한 11, 46-52. 57 ; 19, 39.
. 예를 들어 바리사이파는 예수의 말을 책잡으려고 하였으며 마태 22, 15 ;22, 35 ;마르 12, 13 ; 요한 8, 13.
. 그의 권위를 의심하여 끈질기게 표징을 요구하였다(마태 12, 38 ; 16, 1 ; 마르 8, 11). 또 예수를 고발할 증거를 찾았으며(루가 6, 7 ; 요한 11, 46). 그를 죽이려고 의논하였고 마태 12, 14 ; 마르 3, 6 ; 요한 11, 47.
, 체포하려 하였다(마태 21, 46 ; 요한 7, 32). 예수의 가르침을 비난하였고(루가 5, 21. 30), 그가 행한 기적은 귀신 두목에게서 힘을 얻었기 때문이라고 하였을(마태 9, 34 ; 12, 24)뿐만 아니라, 예수를 거짓말쟁이로 매도하였고(마태 27, 63), 예수의 제자들을 저주받은 자들로 단정하였다(요한 7, 49).
한편 예수로부터 바리사이파들은 독사의 자식들(마태 3, 7 ; 23, 33), 뱀 같은 자들(마태 23, 33), 위선자들이며 마태 15, 7 ; 23, 13. 15. 23. 25. 27. 29.
, 소경 같고(마태 15, 14 ; 23, 26 ; 요한 9, 40-41). 회칠한 묘소이며(마태 23, 27), 예언자를 죽인 사람들의 후손(마태 23, 31)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또한 그들은 성서에 대해 무지하며(요한 4, 22 ; 7, 28 ; 8, 19등), 하느님을 믿지 않고(요한 8, 45 ; 10. 26. 38 ;12, 37등). 스스로 하느님의 뜻을 저버렸다(루가 7, 30)고 예수는 비판하였다. 그리고 탐욕적이며(마태 23, 25), 돈을 좋아하고(루가 16, 14 ; 마태 23, 25 이하) . 거드름 피우며 대접받기를 좋아한다(마태 23, 6-7 ; 루가 11, 43)고 하였다. 바리사이파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한 까닭도 예수에게서 바로 이와같은 비난을 받았기 때문이다(요한 8, 37. 40. 59 ; 10, 31이하) 한국가톨릭대사전 편찬위원회, 앞의 책, p. 3050-3051참조.
이와 같이 바리사이파들에 대한 예수의 통렬한 질책, 그리고 그들이 매우 빈번하게 예수님의 적대자로 등장한다는 사실은 예수과 그들 사이에 존재하는 많은 일치점을 흐리게 만든다. 예수님은 충성스러운 유대인으로서 사셨으며 토라의 권위를 인정하셨다. 비교. 마르 6:56; 1:40-45: 14:12; 12:36. 에버렛 퍼거슨 P. 498.
예수님은 어떤 바리사이파들과는 우호적으로 접촉을 하셨다 루가 7:36ff ; 11:37 ; 13:31-33 ; 14:1 ; 마르 12:28-34 : 마태 23:1-2.
특히 루가 복음서에서 바리사이파에 대한 자료는 복합적이지만, 다른 복음서처럼 예수에게 적대적인 바리사이파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루가 복음에서 예수는 바리사이파의 가정에 식사 초대를 받기도 하며(7, 36-50 ; 11, 37-54). 안식일에 바리사이파 지도자의 집에 들어가 식사를 함께 나누기도 한다(14, 1-24). 더욱이 헤로데가 예수를 죽일 계획을 세웠을 때 예수에게 피하도록 도움을 준 사람이 바리사이파였다(13, 31). 사도행전에 기록에 의하면,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에는 바리사이파 출신의 사람들도 있었다(15, 5). 바리사이파에 대한 루가 자료의 이러한 변화에 대하여 일부 학자들은 루가 자료의 역사성을 의심하기도 하고, 또 다른 학자들은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에 대한 바리사이파의 공헌을 지적하기도 한다. 또한 예수가 선포한 하늘나라의 개념을 분명하게 하기 위하여 루가 복음서의 저자가 편집 의도상 바리사이파들을 등장시켰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위에 열거한 모든 자료들은 일차적으로 초기 예수 공동체와 바리사이파들 사이에 있었던 논쟁이었다는 것을 인정해야한다. 즉 예수 공동체와 바리사이파는 하느님(마태 22, 41-46), 조상들의 전통이나 율법(마태 12, 1-8 ; 15, 6 ;23, 23 등), 일상적 삶(마태 9, 11 ; 마르 2, 16 ; 루가 5, 30)에 대한 이해와 해석에 있어서 서로 견해차이를 보였던 것이다.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과 바리사이파 사이의 논쟁은 주로 조상들의 전통 가운데서 정결 예식(마태 15,1이하 ; 마르 7,1-5)과 단식(마태 9,14 ; 마르 2,18 ; 루가 5,33), 안식일(마태 12, 2 ;마르 2, 24 ; 루가 6, 2 ; 14, 3 ; 요한 9, 16). 이혼(마태 19,3 ; 마르 10, 2)등에 관한 것이다. 한국 가톨릭 대사전편찬위원회, 앞의 책, P. 3051 참조.
이러한 갈등을 네 가지로 나누어 이야기 해보면 아래와 같다.
(1) 예수가 죄인들과 교제하신 것은 세상으로부터의 분리(마르 2:15-17 ; 마태 9:9- 13; 루가 5:27-32)의 다른 개념을 보여준다. 바리사이파인들의 태도는 정의되어 있었다. 경건한 자는 특히 식사에 관한 것, 제례상의 정결과 십일조를 내는 등의 율법을 지키는 데 태만한 자들과 분리되어야 한다. 에세네파는 한 단계 더 나아가 세상으로부터 도덕적 분리뿐만 아니라 공간적인 분리까지도 실행했다. 바리사이파들은 에세네파와 같이 공간적인 분리까지 시도하지는 않았으나 세상에 사는 동안 동일한 생각에서 육체적인 분리를 성취하려 했다. 그와는 대조적으로, 예수는 종종 “세리들과 죄인들”의 집에서 함께 식사하셨다. 그러므로 예수는 전체적으로 사람들에게 제사장적 규제들을 확산하려는 행위을 거부한 것이다. 예수는 자신의 사명(마르 2:17; 비교. 루가 19:10)에 대한 관점에서 자신의 행동을 변호했다. 예수는 종교생활에 대한 다른 모델을 제시했는데, 즉 죄인들의 죄에는 동조하지 않으면서 그들과는 어울리는 것이었다.
(2) 의식에 정결함은 전통에 대한 권위에 대한 차이점들을 묘사한다(마르 7:1-23; 마태 15:1-20). 바리사이파들이 죄인들로부터 분리되려는 이유 배경에는 의식에 있어서의 정결함에 대한 염려가 있었다. 그들의 해석의 바탕이 되는 것은 구전율법(장로들의 유전)이었다. 반면에 예수는 의식의 정결을 강조하는 것을 거부했을 뿐만 아니라(더럽히는 것이 아니고 속에 있는 것이라고 했다). 바리사이파들이 두는 권위의 기반도 부인하셨다. 그리고 구전 율법은 실제로 많은 경우에 있어서 기록된 율법과 일치하지 않았다.
(3) 안식일에 관한 논쟁은 일련의 다른 우선 순위들을 보여준다(마르 2:23-3:6; 마태 12:1-13; 루가 6:1-11). 서기관들의 해석은 안식일에 행해야 하는 일은 무엇인가하는 질문이었다. 안식일에 예수의 제자들이 밀을 까먹는 것과 예수께서 병든 자를 치료하신 행동들은 구약 성서의 어떠한 구체적인 구절과도 모순되지 않지만 그 당시 바리사이파들의 해석에는 어긋나는 것이다. 마르코 복음은 세가지 점을 들어 제자들을 변호한다:
첫째, 구약에서 절실한 경우는 예외를 허락했다. 둘째, 인간의 가치는 의식상의 요구들보다 우선시된다. 셋째, 메시아의 권위가 율법을 결정한다는 것이었다. 인간에게 필요한 일에 우위에 둔 것은 안식일에 병자를 치료하신 일에 대한 예수의 변론의 또 한 부분이다.
(4) 이혼에 대한 해석은 원칙에 의하건, 교훈에 의하건 간에(마태 19:3-12; 마르10:2-9) 차이를 보인다. 여기에 관계되는 것은 율법을 해석하는 방법이었다. 바리사이파들은 자기들끼리도 차이를 보이는 신명기 24:1(“부적합한 것”, “점잖지 않음”, 또는 “불결함”)의 해석에 관해 예수에게 질문을 했다. “샴마이는 성적으로 부도덕한 경우에만 이혼을 허락한 반면에 힐렐은 어떤 이유에서건 이혼을 허락했다. 예수님은 원칙상으로는 샴마이와 일치했지만 그의 대답은 결혼에 대한 하느님의 의도를 밝히시는 데까지 가셨다. 그렇게 함으로써 예수님은 모세의 율법의 궁극적 권위를 부인하시고, 창조의 원리에 따라 표현된 하느님의 목적을 호소한 것이다. 근본적인 원리들에 관한 이러한 율법의 해석은 그 당시 유대교 내의 대립하는 그룹들로부터 예수를 분리시킨다. 예수에 의할 것 같으면, 사두가이파들이 성서 해석에 있어서는 옳았다― 바리사이파들이 원하는 대로 성서의 뜻이 고정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성서를 현재와 더욱 더 적용시키지 않으므로 고대 유물같은 위치로 전락시킨 점에 있어서는 사두가이파들은 그릇되었던 것이다.
바리사이파들이 성서를 적용하려는 지속적인 노력은 분명 올바른 것이었다. 하지만 유전을 기록된 말씀과 동등하게, 아니면 오히려 더 우월하게 비중을 둔 그들의 방법에서 틀렸던 것이다. 예수는 그런 양쪽의 치우친 관점들을 바로 잡으셨다. 기록된 말씀은 권위가 있지만, 그 안에 내재하는 근본적인 원리들이 우선이 되고, 그것에 의해 해석되고 적용이어야 하는 기준이 제시된다는 사실이다. 에버렛 퍼거슨, 앞의 책, P. 499-500 참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