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리사이파와 예수의 신관 비교

바리사이파와 예수의 신관 비교

1. 바리사이파의 신관

바리사이파의 역사와 사상에서 살펴보았듯이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사회에서 격리되어 생활하는 꿈란 공동체에 대한 언급을 제외한다면 유대사회내에서 가장 열심히 하느님을 섬기는 자들이었다. 루가복음 18,12에 나와있듯이 그들은 정해진 규정들 이외에도 자신들 나름대로 규정들을 더 부과하여 지켰다. 예수도 바리사이파들이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려는 진심을 못 본것이 아니다. 예수는 그들의 즐겨 희사하는 태도, 그들의 금식, 그들이 감수하는 경제적인 희생을 보았다. 부자 청년이 모든 계명을 지켰다고 주장할 때 예수는 이를 반박하지 않고 긍정적인 태도를 보인다(마르 10,20). 오히려 예수의 눈에도 그들은 진정 하느님의 뜻을 행하려는 단정한 사람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는 바로 경건한 사람들이 특히 위험에 처해 있으며 하느님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다고 본다. 요아킴 예레미아스, 『예수의 선포』, 김경희(역), 왜관 : 분도출판사, 1999, P. 208 참조.
그리고 루가 18,9-14에 나타나 있듯이 그들의 기도하는 태도를 신랄하게 비판한다. 무엇이 잘못된 것인가? 앞서 이야기 하였듯이 바리사이파들의 율법 실천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문제는 그들의 기도내용이었다. 자신의 율법준수의 내용을 열거하고 세리와 비교한 것이 잘못된 것이다. 그렇다면 왜 바리사이파들은 그런 기도를 했을까? 그것은 바로 바리사이파의 신관 즉 하느님의 모습이 잘못되어 있기 때문이다. 루가는 15장에서도 예수는 바리사이파의 신관이 잘못되었음을 긴 비유를 통해 언급하고 있다. 바리사이파의 신관이 왜곡된데에는 다음 두가지 원인을 들 수 있다. 첫째, 바리사이파는 하느님의 한쪽 측면에 집착하고 있다. 즉 정의의 하느님만을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바리사이파에게 있어서 죄는 결코 저질러서는 안되는 것이며 저지른 자는 부정한 자이기에 가까이 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하물며 하느님이 죄인을 사랑한다는 것은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이것은 그들의 생각일 뿐이다. 유대인들에게 있어 하느님은 에집트에서 그들을 해방시키시고 예언자들을 통하여 끊임없이 당신에게로 이끄시는 사랑의 하느님이다. 예수도 안식일을 지키는 데 관한 논쟁에서도 나타나듯이 바리사이파들은 그들의 사상의 기둥인 토라를 자구적으로 이해한데 따른 결과이기도 하다.
둘째, 율법준수에 의한 구원이다. 이 문제는 초대교회 때에서도 다시 문제로 떠오른다. 사도 바오로는 유대교에서 개종한 유대인들이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에게 율법의 지켜야만 의화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에 바오로는 행업이 구원의 결정적 원인이 될 수 없으며 구원의 전적으로 하느님의 은총에 달려있음을 주장한다. 역사적으로보았을 때 바리사이파는 율법준수에 지나치리 만큼 집착하고 있다. 이러한 지나친 율법준수에 대한 집착은 바리사이파들로 하여금 결정적 실수를 하게 한다. 그것은 바로 하느님 중심이 아닌 바로 자기 중심으로 기도한 것이다. 즉 자신이 무엇을 하였기 때문에 하느님이 자신을 반드시 의인으로 인정해주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는 것이다. 구원은 하느님의 넘치는 자비에 의한 것이 아니라 바로 자신의 행업에 따른 것이다. 의도한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그들은 조작할 수 있는 하느님(Deus et Machina)으로 생각한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하느님을 완전히 배제한 결과을 가져온다. 이러한 상태에서 하느님을 올바로 인식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바리사이파가 생각한 하느님은 진정한 하느님의 모습이 아닌 바로 자기자신의 투사된 모습이었을 뿐이다.

2. 예수의 신관

예수의 신관은 호칭에서부터 그 차이점을 보이고 있다. 유대인들은 감히 하느님의 이름을 직접 부르는 것은 불경스러운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야훼, 엘로힘, 아노나이 같은 비인격적인 호칭을 대신 사용하였다. 그러나 예수는 하느님을 과감하게 ‘아빠, 아버지(Abba ho patẽr)’라고 부른다. 여기서 아빠(Abba)는 아람어이고 아버지(Abba ho patẽr)는 우리말 번역이다. 초대교회는 하느님을 부를 때 예수께서 사용했던 아람어 칭호 ‘아빠’를 그대로 사용하면서, 그리스어로 번역된 말 ‘아버지’를 붙인 것이다(갈라 4,6 ; 로마 8,15). 송병모, 『대자대비하신 하느님』, 서울 : 바오로딸, 1999, P. 19.
이처럼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도 부르는 사람은 도저히 하느님을 진노하시는 하느님, 용서하시지 않는 하느님으로 생각할 수 없다. 하느님을 아빠라 부르셨던 예수는 하느님에 대한 올바른 상, 올바른 신관을 가졌던 분이라는 것을 단적으로 드러낸다. 이러한 사랑의 하느님 상을 가지고 있던 예수에게 있어서 하느님은 모든 죄를 조건없이 용서해주시는 분이다. 본문의 비유에서도 나타나 있듯이 세리의 기도에 하느님은 아무런 단서를 달지 않고 용서해주시고 더군다나 의로운 사람으로까지 인정한다. 예수의 사랑의 하느님 상은 하느님의 전능이나 정의와 결코 대치되지 않으며 객관적인 정의이 요구를 말살시키는 것도 아니다. 자비의 영역에는 반드시 정의의 기본구조가 들어 있기 때문이다. 자비는 정의에 새로운 내용을 부여하는 힘을 갖고 있는데 그 새로운 내용이 가장 단순하고 온전하게 드러나는 것이 용서이기 때문이다. 정의 또한 자비는 하느님을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바리사이파적인 실수도 범하지 않는다. 오히려 예수의 하느님 상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분에게로 더 다가가게 하고 있으며 그분의 절대적 주도권을 인식하게 한다. 즉 하느님이 중심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절대적 주도권에 대한 인식은 자연스럽게 겸손한 태도를 요구하게 된다. 즉 올바른 하느님 상을 가진 사람만이 하느님 앞에서 겸손한 태도를 취할 수 있는 것이다. 예수의 신관은 사랑의 하느님이며 그렇기 때문에 절대적 주도권을 가지신 분이다. 루가복음 18,9-14에 나오는 비유에서 세리는 바로 예수 자신의 신관을 드러내 보인 것이다.

3. 두 신관의 차이

예수와 바리사이파 모두가 다른 신을 섬기는 사람들이 아니었으며 같은 하느님을 섬기고 있었다. 루가복음 18,9-14에 나타나는 비유는 매우 대립된 위치에 있는 등장인물과 행동, 그리고 기도내용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이 비유만큼이나 예수와 바리사이파의 하느님에 대한 모습은 완전히 상이한 것이었다. 먼저 바리사이파의 하느님은 정의와 율법만의 하느님이다. 하느님은 율법에 대한 철저한 준수로만 다가갈 수 있는 하느님이며 경건하지 못한 자의 접근을 허락하지 않는다. 바리사이파의 신관은 하느님의 진정한 모습, 즉 인간을 사랑하시고 용서하시며 끊임없이 당신에게로 이끄시는 하느님의 모습을 간과하는 것이다. 이러한 신관은 하느님의 절대적 주도권을 무시하고 주도권을 자신의 행업에 유보시키는 잘못된 결과를 가져온다.
이에 비해 예수는 하느님을 ‘아빠(Abba)’라고 부르는 사랑의 하느님 상(象)을 가지고 있다. 루가복음 18,9-14의 비유에서 나타나는 예수의 신관은 루가복음 15장 “대자대비하신 하느님” 루가복음 15장의 비유의 제목은 『대자대비하신 하느님』에 나오는 것으로 송병모 신부의 의견을 따른 것이다.
의 비유에 나타나는 아버지의 모습과 동일하다. 이러한 사랑과 용서의 하느님 상은 인간에게 하느님의 절대적 주도권을 인정하게 하고 겸손한 태도를 가지게 한다.
바리사이파가 하느님의 절대적 주권을 무시하게 된 것은 바로 다름아닌 그들의 왜곡된 신관에서 비롯된 것이었고, 예수의 신관은 사랑의 하느님 모습에서 자연스럽게 하느님의 절대적 주권을 인정하고 겸손된 태도를 지니게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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