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강림 이후의 교회 형성과 발전을 통해서 성령이 어떻게 예수의 삶과 운명을 넘어서 독자적인 방식으로 역사 안에서 작용하시는지를 살펴볼 수 있다.
1) 다양성 안에서의 일치: 신약성서는 성령이 일치를 이룬다고 강조하는데, 여기서 일치는 단조로움이나 획일성을 뜻하지 않는다. 성령강림 때 모든 사람이 사도들의 말을 자기들의 말로 이해하도록 성령께서 작용하셨다. 구약성서의 바벨탑 이야기(창세 11,1-9)는 언어가 여러 가지라는 것을 부정적으로 평가하고 하느님의 벌로 해석하였다. 그러나 성령강림 기사는 여러 언어를 긍정적으로 평가함으로써 가치 체계의 전환이 이루어진다. 여기서 플라톤 철학과의 차이도 드러난다. 즉 플라톤 철학에 따르면 일치는 긍정적이고 좋은 것인 반면에 다양성은 하등의 것이고 악한 것이다.
더 나아가서 바오로는 한분이 영이 여러 가지 은총의 선물을 선사한다(1고린 12,4-11. 28-31)고 강조한다. 그는 자신의 생각을 인간의 몸에 비유해서 설명한다. 모든 신앙인은 영을 통해서 한 몸을 이루지만, 이 몸은 각기 고유한 사명을 지닌 여러 지체로 이루어져 있다(1 고린 12,12-27; 로마 12,4-8).
인간 자신의 힘만으로는 (무정부 상태에까지 이르는) 분산이나 (전체주의로까지 이르는) 획일성으로 흐르기 십상이다. 이와 대조적로 다양성 안의 일치가 형성되는 곳에서는 하느님 영의 작용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러므로 하느님 영이 현존한다는 가시적인 표지는 – 예언, 이상한 언어, 치유 등의 다른 특별한 표지를 넘어서- 신자들이 사랑 안에서 생생한 일치를 이루는 것이다(참조: 요한 17; 사도 2,46; 1고린 13; 14,24-25; 갈라 5,13-26).
2) 진리와 자유: 예수는 생전에 자신의 제자들을 파견하였고 부활 이후에도 재차 분명히 그들을 세상에 파견하였지만, 제자들은 파견 행동을 비로소 성령강림과 함께 시작한다. 영은 제자들에게 한 편으로는 예수와 그의 사신에 충실히 머무는 능력을, 다른 한 편으로는 노예처럼 묶임없이 자유 안에서 새로운 길을 갈 수 있는 능력을 주었던 것이다.
요한복음은 성령이 본질적으로 전혀 다른 새로운 것을 전해준다기 보다는 그리스도의 진리를 더욱 깊이 깨닫도록 이끈다는 것을 특별히 분명하게 강조한다. “협조자,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 주실 성령께서 모든 것을 여러분에게 가르쳐 주실 것이고 내가 여러분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해 주실 것입니다”(요한 14,26). 이렇게 그리스도의 진리에로 이끄는 협조자는 진리의 영이다(16,13). 진리의 영은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히고 부활하신 분(1고린 12,3)으로, 사람이 되신 하느님의 아들(1요한 4,2; 5,6)로 고백하는 곳, 바로 거기에서 활동하신다.
그리스도께 충실함의 영은 동시에 자유의 영이다. 바오로는 이 자유에 대해서 강조하여 말하면서 이를 한 편으로는 율법에서의 자유(로마 7,1-6; 갈라 4,25-31)로 다른 한 편으로는 죄와 죽음의 세력으로부터의 자유(로마 6,7. 15-23; 8,2; 갈라 4,13-14)라고 표현한다.
자유 안에서 그리스도에 대한 충실이 전형적으로 명시된 사건은 이방인 선교에로의 전환이다. 사도행전은 베드로가 이방인에게 성령이 내리는 것을 보고서 자신의 마음을 돌려서 그들에게 세례를 준 것을 보도하고 있다(사도 10,1-48). 이런 조처는 예수의 사신에 대한 충실에서 유래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유대인으로 구성된 원시교회 측에서는 이방인도 그리스도 안에서 불림을 받은 사람으로 인정하는 결단, 용기와 자유가 요구되는 새로운 결단이었다.
3) 담대함: 성령의 은혜는 인간 내면에만 머무르지 않고 밖으로 표출된다. 다시 말하면 성령은 세상과 인간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고 공개적으로 신앙을 고백하도록 인도한다. 요한복음에 의하면 많은 유다인들은 마음으로는 예수를 믿었지만 공개적으로 그의 편에 서기를 꺼려하였는데, 왜냐하면 그들은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영광보다는 사람들로부터 오는 영광을 더 사랑했던 때문이다(요한 12,37-43). 사람에 대한 두려움에서 베드로는 스승을 배반하였고(마르 14,66-72 병행; 요한 18,17.25-27), 같은 이유에서 다른 제자들도 수난의 시간에 예수를 버리고 도망갔다(마르 14,50 병행; 요한 16,32). 더구나 부활 이후에도 제자들은 유다인들에 대한 두려움에서 문을 잠근채 함께 모였다(요한 20,19). 그러므로 사람은 사람들로부터의 명예를 잃지 않으려는 원의와 사람에 대한 두려움에서 공개적으로는 속마음과는 아주 달리 행동하게 된다. 신약성서의 증언에 의하면 사람에 대한 두려움에서 기인한 표리부동은 오직 성령을 통해서 극복될 수 있다. 그러므로 공개적으로 신앙을 고백하는 담대함은 성령의 특별한 은혜이다(사도 2,29; 4,8.13.29.31; 28,31; 3,6.12; 에페 6,19; 필리 1,20).
담대한 신앙고백은 알려지지 않는 이름 없는 신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명확한 대상을 갖는다. 사도들은 유다인과 이방인들이 박해한 분을 담대하게 증언하고 이 때문에 그들도 박해를 당한다(사도 4,1-31; 5,17-42). 특히 스테파노는 유다인들이 완고하게 언제나 성령을 거역하고 있다고 책망한다. 이미 그들의 조상도 예언자들과 의인들을 박해하였고 그들 자신은 참된 의인의 살해자가 되었다는 것이다(사도 7,51-52). 이런 담대한 말 때문에 스테파노는 죽임을 당한다(사도 7,54-60). 그러나 담대함의 은혜를 주는 성령은 담대함 때문에 박해받는 이들의 협조자이기도 하다. 요한복음에 의하면 성령은 제자들이 진리를 깨닫도록 돕는 협조자이며(요한 14,26; 16,13), 신앙 때문에 박해받는 이들 편에 서서(요한 15,18-27) 박해자들의 정체를 드러내는(요한 16,7-10) 위로자이다. 또한 성령은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으로 인해서 박해받는 이들에게 박해받는 때에 해야 할 말을 일러주는 분이시다(마르 13,11; 루가 12,11-12).
4) 평화: 성령의 여러 가지 작용들은 오직 하나의 목표는 평화이다. 즉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평화와 인간과 인간 사이의 평화를 복구하는 것이다. 그래서 신약성서의 거의 모든 편지들은 하느님 아버지의 은총과 평화가 함께 하기를 바란다는 것으로 시작된다. 요한복음에 의하면 이미 예수는 자신의 제자들에게 최후만찬 석상에서 협조자로서 오실 성령을 약속하면서 평화를 남겨둔다고 말한다(요한 14,25-27; 참조. 20,21-22). 바오로는 성령이 힘쓰는 바는 생명과 평화라고 서술한다(로마 8,6; 참조: 14,19; 갈라 5,22). 하느님은 평화의 하느님으로서(로마 15,33; 16,20; 1고린 14,33; 2고린 13,11; 필립 4,9; 1테살 5,23; 2테살 3,16; 히브 13,20) 당신 사랑과 평화를 성령을 통해서 인간의 가슴 속에 쏟아주신다(로마 5,1-5; 15,13; 필립 4,7; 골로 3,15).
5) 미래의 영광에 대한 보증: 마지막에는 생명이 결국 죽음을 이길 것인데, 이를 마련해 주신 분이 하느님이고 그 보증으로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주셨다(2 고린 5,5; 참조: 에페 1,14).
성령의 여러 가지 작용이 보여주는 바는 성령을 통해서 새로운 삶이 가능하게 된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성령은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룩하신 구원이 열매를 지속시키는 작용한다. 구원의 열매로 나타나는 바는:
― 죄와 죽음의 세력에서의 해방(로마 6,7-23; 8,2; 갈라 3,13-14)
― 새로운 하느님 백성의 건설(신앙, 사랑, 자유, 일치, 담대함, 평화)
― 미래의 영광에 대한 보증(2고린 1,22; 5,5; 에페 1,14)
2.2.6. 신약성서에 나타난 삼위일체의 계시
구약성서 창세기에는 하느님이 자신을 ‘우리’라는 복수로 지칭한 대목(창세 1,26; 3,22; 11,7)이 나타난다. “여기서 ‘우리’는 시편 8장 5절에서처럼 하느님이 천상조정의 관리들인 천사들과 상의하는 것을 뜻할 수도 있고, 하느님의 이름을 가나안의 신 ‘엘’을 복수로 만들어 엘로힘이라고 부르는 경우처럼 하느님의 위엄과 충만성을 드러내기 위한 표현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두 해석 모두 경신례 안에서 하느님의 천상적 위험을 최대한 드높이려 했던 사제들의 경건한 태도와 연결된다”. 정태현, 『하느님과 함께 걸으며』, 생활성서사, 1990, 20.
그러나 교회는 전통적으로 하느님의 복수성을 신약에 와서 뚜렷하게 부각될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삼위일체 관계를 미리 암시하는 것으로 이해해 왔다. 특히 마므레 참나무 근처에서 나타난 세 명의 길순은 하느님의 천사로 여겨지는데(창세 18장), 그리스도교의 오랜 전통은 이를 삼위일체 교리의 분명한 성서적 표상으로 해석하였다. 그러나 오늘날의 역사 비판적 방법에 근거를 둔 성서학은 이런 해석에 대체로 회의적이다.
오늘날은 이런 해석보다는, 구약에서 철저히 유일신론을 고수하면서도 동시에 하느님이 인간과 관련을 맺고자하는 분으로 파악한 점에 주목한다. 하느님은 당신 백성 한가운데에 현존하시고 역사하시기 위해서 다양한 중개형식을 통해서 자신의 뜻을 알리고 인간과 통교한다. 하느님은 말씀, 지혜, 영 등을 중개 수단으로 삼아서 인간 역사 안에서 작용하신다: 말씀은 야훼로부터 파견되고(이사 9,7; 시편 107,29; 147,18), 야훼로부터 나와서 그의 뜻을 성취하고 그에게로 돌아가며(이사 55,10-11), 병을 고쳐주고(지혜 16,12), 전사처럼 멸망한 땅 한가운데로 뛰어 든다(지혜 18,15). 지혜는 하느님의 첫 번째 창조물로서 인간들 사이에 거주하고 구원에 이르는 확실한 길을 가르치고(잠언 8,22-31), 인격적 존재처럼 행동한다(잠언 1,20-33; 8; 9,1-6;집회 24; 지혜 6,12-25; 7,22-8,1). 하느님의 영은 예언자들과 하느님께 선택된 사람(이사 61,1), 기름부음 받은자에게 내리고 마지막 날에는 모든 이에게 내린다(요에 3,1-5). 이렇게 구약에 나타나는 말씀, 지혜, 영등은 하느님의 역사적 작용을 의미하지만, 마치 독자성을 지닌 인격체처럼 묘사된다. 이런 점에서 구약에서 삼위일체 신비에 대한 직접적인 계시를 찾지는 못하더라도 삼위일체 신비를 지향하고 있는 경향은 발견할 수 있다고 하겠다.
2.2.6.1. 바오로의 증언: 아버지, 영 그리고 아들의 구분과 활동상의 일치
바오로는 주님이며 그리스도이신 나자렛 예수가 “죽은 자들의 부활에 의거하여 권능을 지닌 하느님의 아들로 책봉”되셨다(로마 1,4)고 고백하면서, 이 책봉은 성령의 힘에 의한 것, 더 나아가서 예수를 죽음에서 부활시킨 분이 바로 성령이다(로마 8,11)고 주장한다. 바오로는 현양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현존을 영적인 실재로 해석하는 데 이는 바로 교회 공동체의 체험을 서술한 것이다. 성령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믿은 이들을 장악해서 그들이 당신 몸의 지체가 되도록 하고(1 고린 6.15-20; 12,13), 미래의 영광에 대한 보증을 간직하도록 하였다(2 고린 1,22). 이런 의미에서 성령은 현양된 예수와 일종의 “기능적 일치”(Funktionseinheit)를 이루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2 고린 3,17). 그리고 여기서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바오로는 영이 아버지와도 “기능적 일치” 속에서 활동하신다고 보는데 왜냐하면 아버지는 예수를 “영을 통하여” 죽음에서 부활시켰기 때문이다(로마 8,11).
하느님의 영은 신앙인들 안에 머물고 그의 능력에 의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앞서 그러했듯이- 신앙인들을 부활하게 될 것이다. 이런 하느님의 영은 동시에 그리스도의 영으로서 그리스도를 우리 안에 있도록 하고, 우리를 그리스도와 같게 하여서 하느님의 아들, 딸로 만든다(로마 8,9-11; 14,17). 이런 “기능적 일치”는 신앙인들이 하느님께 세 단계로 속해있다는 것과도 상응하는데, 이는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인들의 신앙체험의 약식 형태라고 하겠고 세례 신학의 맥락에서 그대로 표현된다: 신앙인들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느님의 아들들”로서, 세례 때에 그리스도를 새 옷으로 “입었다”(갈라 3,26-27). 하느님은 그들에게 “당신 아들의 영을 그들 마음 안에 보내시어” 그들을 아들로 만드시고 이 세상 권세의 지배에서 해방시키셨다.(갈라 4,4-7). 아들의 영 안에서 아들의 하느님 아들의 구원 업적이 현존하는데, 아들은 자신의 삶과 죽음으로써 “자유로운 아들이 되는 자격”과 함께 신앙인들을 자기 것으로 얻었던 것이다(4,5) 하느님의 영은 신앙인들을 – 아들 예수 그리스도처럼- 죽음에서 부활시키실 것이다(로마 8,11). 이렇게 갈라디아서가 광범위하게 해석한 아버지, 아들, 영의 관계는 고린도 후서의 마지막 축복에서 전례적 형태로 공동체를 이룩하는 성령을 능력을 강조하면서 요약되어 표현된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하느님의 사랑과 성령의 친교가 여러분 모두와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13,13). 고린도 전서에서 영과 “주님” 그리고 하느님(아버지)가 연관된 대목이 여러 가지 성령의 은사에 대한 맥락에서 나온다: 은사는 다양하지만 거기서 작용하시는 분은 한 분인데, 왜냐하면 다양한 은사는 아버지와 아들 그리고 영의 “활동의 일치”(Wirkeinheit)에서 기인하기 때문이다. “은사는 물론 (여러 가지로) 나뉘어 베풀어지지만 영은 같은 영이십니다. 또 봉사(의 직책)도 (여러 가지로) 나뉘어 베풀어지지만 주님은 같은 주님이십니다. 그리고 일도 (여러 가지로) 나뉘어 베풀어지지만 모든 이 안에서 모든 일을 하시는 하느님은 같은 하느님이십니다”(12,4-6). 에페소서의 첫머리에 전례적인 색채를 띤 찬가(1,3-14)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를 아들로 받아들이어 당신의 상속자로 삼으신 하느님을 찬미한다. 그리고 성령 안에서 우리가 신앙에 이르게 되었고, 성령은 우리가 구원의 완성과 함께 이르게 될 상속의 보증이라는 것이다. 에페소서 1장에서 눈에 띠는 것은 -로마 8장처럼- 아버지, 아들 그리고 영이 서로 병존하면서 서로 관련되어 있다는 점인데, 즉 (세례 안에서 이루어지는) 회심하는 이의 받아들임은 아버지를 통해서 성령 안에서 아들에게로 이루어진다고 말한다(참조: 에페 4,4). 이렇게 세례와 연관해서 삼위일체에 대한 숙고가 이루어지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세례 안에서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를 닮게 되고, 이렇게 “아들이 됨” – 유일한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에의 참여(로마 8,29과 6,8)는 – 신자들이 아들됨을 세상 권세에로부터의 해방으로 체험하도록 하는 – 성령 안에서 이루어진다. 이런 관점에서 신약성서에 나타난 유일한 삼위일체 정식(마태 28,19)이 부활하신 주님의 세례명령과 관계되어서 전승된다는 점을 이해할 수 있다.
2.2.6.2. 요한계 문헌의 증언: 아버지와 아들을 결합하는 사랑 그리고 진리의 성령
요한계 전승은 아버지와 아들의 일치를 거듭해서 근본주제로 삼는다: 아들은 아버지를 아는데, 왜냐하면 그는 아버지로부터 왔기 때문이다(요한 7,29); 아들은 아버지를 알고 그분의 말씀을 지키고 있다(8,55); 아들은 아버지의 말씀을 선포하여서 인간이 아버지와 아버지께서 보내신 이들 알도록 하였는데, 이렇게 아버지와 아들을 아는 것이 바로 영원한 생명이다(17,3). 아들을 통해서 아버지를 알 수 있는데, 왜냐하면 아들을 아는 사람(그와 함께 공동체를 이루는 사람)은 아버지가 아들 안에 있고 아들이 아버지 안에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10,38). 이것은 진리 자체로서 이 진리를 앎으로써 신앙인은 생명을 간직한다.
요한복음은 이렇게 아버지와 아들이 일치에 대해서 얘기하면서 아버지와 아들 외에 협조자라는 고유한 특성을 지닌 성령에 대해서 언급한다(14,15). 그러나 이 협조자는 예수의 이름으로 아버지로부터 파견되어서(14,16), 다른 것이 아니라 예수가 이미 말한 것을 기억하도록 한다(14,26). 또한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의 일치 그리고 아들과 신앙인과의 일치를 깨닫도록 인도한다. 즉 성령께서 오시면 제자들은 예수가 그의 아버지 안에 있고 제자들이 예수 안에 있으며 예수도 그들 안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요한 14,20; 참조: 14,16-17).
2.2.7. 요약
구약성서의 하느님 이해의 골격과 기본적인 내용은 신약성서 어디에서도 침해되지 않았다. 즉 야훼 유일신 신앙은 예수와 그의 제자들에게서 그대로 유지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구약과 마찬가지로 신약에서도 몇몇 구절들 주로 이방인들을 대상으로 한 복음 선포에서 그리스 철학의 신개념의 자취를 찾아 볼 수 있다. 그리스도교에서 선포하는 하느님은 “보이지 않고”(로마 1,20), “썩어 없어질 수 없으며”(로마 1,23), “무엇인가를 아쉬워하지 않으시고”(사도 17,25) “불변하신”(야고 1,17) 분이다.
을 제외하고는 이론적으로 하느님 자체의 ‘본질’과 특성에 대해서 논하는 것은 거의 발견되지 않고 항상 하느님과 인간과의 관계에 비추어서 하느님이 이해되었다: 하느님은 세상을 초월하신 분으로서 인간이 좌지우지할 수 있는 분은 아니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당신이 창조한 인간과 세상에 대해서 크나큰 관심을 가진 분이고 그래서 인간과 세상에 다가 오셔서 자신과 자신의 뜻을 드러내시는 분이다. 하느님은 인간에게 사랑과 충실을 보이시면서 인간과의 공동체를 원하신다. 즉 그분은 당신의 백성과 계약을 맺으심으로써 그들에게 보호를 약속하시고 (그들이 하느님의 뜻에 맞는 공동체를 이루기 위해서) 지켜야할 계명을 주신다. 그러나 인간은 거듭해서 계명을 어김으로써 하느님의 뜻에 저항하고 하느님을 배반한다. 그래서 하느님의 분노와 심판이 언급되지만, 하느님은 결국 분노보다는 자비가 더 크신 분으로 체험된다. 이렇게 하느님은 이해할 수 없이 큰 자비와 사랑을 지닌다는 점에서 그분이 궁극적으로 파악불가능한 분, 초월적인 분으로 머무르신다.
신약성서의 주제 역시 하느님의 인간에 대한 사랑이다. 그런데 그 사랑이 구약에 비해서 새로운 방식으로, 더할 나위 없이 드러났다고 증언한다. 즉 하느님은 당신의 ‘말씀’(Logos), 아들이 사람이 되도록 하셨다. 하느님은 당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약에서 특히 예언자들을 통해서 이미 선포된 것, 하느님을 알고 하느님께 가까이 간다는 것은 바로 인간을 사랑하는 것임을 드러내셨다. 그런데 예수를 통해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은 원수와 죄인까지도 포함하는 사랑으로서, 보통의 인간 사회에서는 버림을 받는 사람들까지도 제외하지 않는 종말의 하느님 백성(=‘對照社會’)을 이루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러나 예수의 사명은 반대에 부딪쳐서 십자가 죽음으로 끝맺는다. 하지만 하느님은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을 통하여 성령을 보내시어 인간의 마음 속에 성령의 은혜를 부으심으로써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지속적이고 깊은 일치, 인간들 사이의 일치가 가능하도록 하셨다. 이렇게 성자를 통해서 당신을 드러내신 성부는 성자와 함께 성령 안에서 인간에게 지속적으로 현존하신다. 이런 의미에서 성부, 성자, 성령은 인간의 구원을 목표로 “활동의 일치”를 드러낸다고 하겠다.
3. 신론과 삼위일체론의 역사적 고찰
3.1. 그리스 철학과의 만남: 하느님의 본질과 고유성에 관한 가르침의 형성
그리스도교는 왕성하게 선교를 하면서 주변의 세계와 적극적으로 논쟁과 대화를 펼쳐나갔다. “護敎論者”라고 일컫는 2세기와 3세기에 활동하던 그리스도교의 신학자들은 그리스도교의 메시지를 주위의 세계에 이해시키기 위해서 그들 시대의 개념과 언어를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무엇보다도 그 당시에는 그리스 철학이 지성인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었기에 그리스 철학의 개념과 언어를 사용해야만 했다.
그리스도교에 대한 부당한 공격에 대처한다는 좁은 의미의 ‘호교론’(apologia)은 2세기와 3세기 초의 그리스도교 저술가들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그들의 주요 논점은 그 당시의 철학적 가르침의 모순점을 지적하는 데에 있었다. 그러나 3세기 중반 (신) 플라톤 사상이 거의 보편적인 철학의 위치를 차지하자 대화의 형태도 변화되었다. 즉 지배적인 사상인 플라톤 철학에서 그리스도교와의 연결점을 찾고자 노력을 기울였다. 초기교회의 호교론자 그룹에 속하는 이들로서는 유스티노(Justinus+ 165년경), 안티오키아의 테오필로(Theophilus, +186), 사르데스의 멜리톤(Meliton, +180년경),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Clemens, +215년 이전), 리용의 이레네오(Irenaeus, +202), 오리게네스(Origenes, +254년경), 안티오키아 학파의 창시자 루치아노(Lucianus, + 312) 등이 있다.
그리스도교 호교론자들은 유다-그리스도교 전통이 전하는 야훼 하느님은 모든 이를 위한 하느님으로서 그리스 철학이 탐구하면서 찾던 바로 그 하느님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데에 총력을 기울였다. 그들이 출발점으로 삼은 것은 야훼 유일 신앙이었다. 즉 모든 시대, 모든 곳, 모든 민족에게 오직 한분의 참된 신만이 존재한다는 확신이었다. 호교론자들이 그리스 철학과의 대화에서 연결점으로 삼은 것은 과연 무엇이 참으로 신적인 것이냐는 물음이었다. 그런데 이 물음은 그리스 철학에서는 실상 이미 오래전에 제기되었던 물음이었다. 즉 이 물음은 그리스 철학이 평범한 日常事에서 여러 신들이 활동하고 있다고 보았던 대중신앙과 겨루던 가운데 생긴 물음이었다. 사람들은 여러 신들의 공통성을 찾기 시작하였다: 여러 신들은 “신적인 것”을 지니고 있을터인데, 그러면 이 신적인 것의 기본구조 혹은 본질은 무엇인가?
대중신앙은 신들이 일상사의 근원이라고, 즉 신적인 것은 바로 근원일 수밖에 없다고 받아들였다. 이는 “逆推論”(Umkehrschluß)적 사고와 유사하다: 일상사에서, “평범한” 체험에서 시작하여 신의 본질에 관하여 거슬러 올라가며 묻고 결론을 내리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런 생각은 이미 소트라테스 이전에(기원전 7세기부터) 등장하였다: 우리가 경험하는 세계(cosmos)에는 의미가 있는 질서가 존재하는데, 이를 통해서 세상의 근원에는 계획을 세우는 영이 자리하고 있음에 틀림없다(아폴로니아의 디오게네스, 나중에 소크라테스와 플라톤도 이와 유사하게 주장하였다). 이런 역추론은 근본적으로 모든 것의 근원 자체를 탐구하는 질문을 가능케하면서, 참으로 신적인 것은 모든 실재의 필연적인 근원이라고 인식되었다.
초기 그리스도교가 상당히 많은 영향을 받은 그리스철학은 이른바 (기원전 79년에서 기원후 40년 사이에 형성된) 중기 플라톤 철학이었다. 이 철학에서 근원(arche)에 대한 물음은 계속될 뿐만 아니라 더욱 강하게 숙고되었다. 근원이 여러 개라는 생각은 배제되었는데, 왜냐하면 다수의 근원은 차이를 내도록 하는 근원 혹은 기원이 있을 것이라고 전제되기 때문이다. 마지막 근원에 대한 물음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도 이 근원이 기존의 다양성을 근거지우는 것으로서 그 뒤에는 다른 근원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마지막 근원은 무제한적이며 불변적인데, 왜냐하면 제한이 있다거나 변한다는 것은 다시금 그 “뒤에” 있는 최종적인 근원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초기 그리스도교 당시의 그리스철학은 그리스 대중종교의 다신적 신앙에 강력히 반대하는 경향을 보였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리스철학이 명확하게 성서적 유일신 신앙과 동일하다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이렇게 경험세계로부터 추론을 통해서 찾은 “신적인 것”은 성서적 의미의 인격적 신은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역추론적 사고를 통해서 이르게 된 최종적 근원에는 여러 가지 고유한 특성을 부여된다. 최종 근원은 숫적으로 하나, 혹은 하나 그 자체, 一者(to hen)일 수밖에 없는데, 이미 플라톤은 이를 존재 혹은 선 자체와 동일시 하였다. 즉 최종 근원은 변화하는 우리의 체험세계의 변화하는 다수와는 반대되는 것이다. 오직 하나인 최종적 근원은 우리의 경험세계의 다양성과는 사뭇 다르게 생각될 수밖에 없기에 결국은 항상 파악불가능한 것으로 머무른다. 즉 사고를 통해서 그것을 정의하며 파악하거나 규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리스적 사고에 의하면 체험세계는 가시적인 사물, 즉 물질적인 것들이 합하여진 것이다. 가시적이고 물질적인 것들은 움직임에 종속되어 있고 그렇기 때문에 변할 수밖에 없다. 바로 여기에 그것들의 한계성이 있는 것이다. 한계가 없는 최종 근원은 이와는 아주 다른 것으로서 움직임이 없고, 비물질적이며 불변한다. 달리 말하면, 그것은 영적이다. 플라톤적 사고에서는 우리의 인식능력은 감각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영적인 최종 기원은 개념적으로 단지 희미하게 파악할 수 있을뿐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있었다. 사고를 통해서 신적인 것을 인간적인 것과 비교하고 본질적인 차이가 무엇인지를 알아내는 접근방식으로 세상을 질서지우는 이성의 윤곽이 드러나게 된다. 바로 이 이성이 신이라는 것이다.
우리의 체험세계가 변하는 이유를 찾는다면 우리가 체험하고 관찰하는 사물들이 합성되어 있는 것이기 때문에 변화한다. 합성된 사물들은 다시금 해체될 수 있다. 이 물체들의 뒤에는 무엇인가 있을 수밖에 없는데, 그것이 사물이 합성되도록하는 원인이다. 그러므로 모든 합성체의 최종 근원은 순수해야 한다. 우리가 사물을 인식할 수 있는 것은 그 사물들이 여러 부분으로 합성되어 있기에 그 부분들을 비교하고 규정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주 순수한 것에서는 이것이 가능하지가 않다. 신적인 것은 극도로 순수한 특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궁극적으로 파악될 수 없고, 기껏해야 어렴풋하게 짐작될 수 있을 뿐이다.
이런 사고 과정을 거쳐서 얻어낸 신의 특성은 자유로운 성질의 것이 아니라 필연적 성질의 것이다. 즉 신이라면 이러 이러한 구조와 고유성을 지녀야한다는 식이다. 다시 말하면 이런 고유성들은 신이라면 필연적으로 갖출 수밖에 없는 본질적 고유성(Wesenseigenschaften)인 것이다.
(후기의) 구약성서나 신약성서에는 추론적 과정이 야훼 신앙인들에게도 알려져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몇몇 구절(지혜 13장; 로마 1,18-20)들이 나타난다. 즉 체험할 수 있는 창조계에서 볼 수 없는 하느님의 본질이 추론할 수 있다는 것이다. 초기 그리스도교의 신학자(호교론자)들은 여러 측면에서 중기 플라톤 사상과 연관을 맺는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 사상을 체계를 통채로 그리스도교 신학에 수용한 것은 아니었다.
호교론자들에게는 창조에 관해 숙고하는 데에 있어 그리스 철학이 최종 근원, 혹은 모든 사물의 근원은 오직 하나라고 강조하는 것을 매우 중요시하였다. 이런 생각은 그들의 유일신적 시각과 일치하는 것이었고, 또한 주변 세계에 적지 않았던 이원론적 사고를 물리치는 데에 도움이 되었다. 즉 당시에 창조계는 선의 원리와 악의 원리가 벌리는 거대한 싸움터라고 확신하는 이들이 적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유다의 성서적 유산에도 하느님과 물질을 이원론적으로 보는 생각이 그리 멀지는 않았다: 창세기를 글자 그대로 보면, 세상의 시작에 하느님과 창조되지 않고 꼴을 갖추지 않은 물질이 공존해있다는 것을 배제하지는 않는다. 이미 그리스적 유다교에서는 자칫하면 이런 시각으로 흐르는 것을 방지할 필요성을 느꼈고, 그래서 하느님은 무에서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말을 하였던 것이다(2마카 7,28 참조). 그리스인들을 통해서 이런 확신은 더욱 명확하게 되었다: 하느님은 유일하고 다른 모든 사물들의 최종 근원이라는 것은 신개념에 속한다.
초기 그리스도교 신학자들은 중기 플라톤 사상이 신을 영적이며 파악불가능한 존재로 생각한 것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였다. 그들은 이와 관련해서 무엇보다도 신에 대한 이런 저런 명칭은 단지 ‘비교적 방식으로’ 적합할 뿐 신은 ‘본래적으로는’ 표현하기 어렵다는 견해를 수용하였다. 적합한 명칭은 항상 비교에서 나오는 것인데, 신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존재이다. (자식을 낳은 부모가 자식에게 그러하듯이) 이름을 부여한다는 것은 항상 그 대상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전제한다. 그러나 누구도 신보다 우위에 있을 수 없고 그래서 신에게 마땅한 이름을 부여할 수는 없다. 이런 생각을 바탕으로 초기의 그리스도교 신학자들은 그 당시의 플라톤 사상에 동의하였다: 하느님은 표현하기 어렵고 이름이 없다.
그리스도교와 플라톤 철학 사이에 커다란 일치점은 신의 불변성(不變性, incommutabilitas)에 대한 고찰에서도 드러난다. 불변성은 근원이 지니는 속성으로 생각되었다. 즉 변하는 것은 항상 무엇에로부터 유래하는 것이고 그러기에 끝이 있다. 모든 것의 근원은 시작과 끝이 없어야 하고 그러므로 – 합성된 것이 아니기에- 변함이 없다. 여기에서부터 신은 고통을 당할 수 없다는 견해가 도출되었다. 고통이란 외부로부터 영향을 받는 것을 뜻하며 상태가 변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하느님이 외부로부터 오는 영향을 받아 변화될 수 없기에 -그렇지 않다면 이미 신이 아니다- 고통을 당할 수도 없다. 초대교회 신학은 이런 無感動性(απαθεια)이 아주 중요한 신적인 속성이라고 간주하였는데, 이는 인간의 윤리적 행동의 분야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즉 완전에 이르고자 하는 신앙인의 길이 하느님을 닮는 길이라면, 이 길의 목표는 항상 고통에 둔감하고, 냉정하고, 침착하고 무감각하게 되는 데에 있다.
그리스 철학과 대화하면서 신이 어디에 존재하느냐는 문제도 논의하게 되었다. 사람들은 근본적으로 신은 결코 무엇에 포괄(包括)될 수 없는 존재라고 보았다. 왜냐하면 포괄되는 존재는 포괄하는 것보다 열등하고 그렇기에 신이라고 할 수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은 포괄되지 않고 모든 것을 포괄한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신은 어느 한 장소에 국한하여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곳에 현존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모든 것이 신에 의해 포괄되고, 그래서 신이 알지 못하고 일어나는 일은 아무 것도 없다. 이런 신의 앎이란 바로 신의 뜻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에 의해서 포괄된 것 안에서는 신의 뜻없이 발생하는 일은 아무 것도 없다. 우리가 모든 것을 다 통찰할 수는 없는데, 왜냐하면 하느님의 뜻을 알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든 것은 신의 先-見(Vor-sehung) 의해 지탱되고 긍정된다. 초기 그리스도교 신학자들은 이런 사변적인 길을 통해서 이미 스토아 철학이 주제로 삼았던 변신론(辯神論. theodicy)의 문제에 이르게 된다. 고대교회의 저술가 락탄씨우스(Lactantius)는 에피쿠루스(Epicurus)에 의거해서 고통과 악의 문제에 관련한 신 문제를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 “하느님은 악을 제거하기를 원하지만 그것을 할 수 없다. 혹은 그것을 할 수는 있지만 하기를 원치 않는다. 혹은 그것을 원하지도 않고 할 수도 없다”(De ira dei 13: PL 7,121).
즉 세상의 모든 것이 신의 뜻에 의해서 일어난다면 악 또한 하느님의 뜻에 포함되는가하는 물음이 제기되는데, 변신론은 세상의 죄나 악 또한 하느님의 뜻 안에 들어있으면서도 신의 속성(善, 全能, 正義)에 위배되지 않는다는 것을 이론적으로 설명하려는 노력이다.
그리스 철학과 초기 그리스도교 신학자들 간의 대화에 관해서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겠다: 초기 그리스도교 신학자들은 추상적인 신관념의 자료를 마련하였다. 이런 신관념에 따르면 신의 아주 순수한 본질은 모든 완전성의 총괄이라는 것이다. 본질상 순수한 존재인 신은 혼합되어 있지 않고, 불변하며, 감각적인 성질을 지니지 않는다. 그래서 일부에서는 이런 관점에서 신은 전혀 특성이 없고 형태도 없다고까지 주장하기도 하였다. 신의 이러한 순수한 본질을 근거로 두 가지 방향이 형성된다. 그 하나는 신은 인간이 체험하는 모든 것과는 아주 다르다는 견해이다. 그래서 신과 관련해서 인간 세계의 특징인 합성, 변화 혹은 시간을 의미할 수 있는 모든 것은 배제하게 되어서, 저명한 그리스 신학자들이 주장하였던 것처럼 신의 표현불가능성, 탐구불가능성, 無限性, 초월성을 강조하게 된다. 교부시대의 많은 신학자들은 성서에 나타난 하느님 행동에 관한 표현은 단지 상징에 불과하다고 주장하였다. 하느님의 본질은 긍정적 서술이나 부정적 서술로도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완전성의 생각에서 출발해서 우리가 잘 인식할 수 있는 모든 것을 가장 완전한 방식으로 신에게 부여한다. 이 경우에 신의 無限性이란 ― 예를 들어서 “카파도치아인들”이라고 명명된 그리스 신학자들의 주장처럼 ― 한계없는 충만이라는 의미로서 이해되었는데, 이런 충만에는 자신이 조금도 줄어들지 않으면서 자기 스스로를 전적으로 알릴 수 있는 특성이 포함된다고 보았다.
이렇게 고대교부들은 그 당시 주변의 중기 플라톤 사상의 초월적인 신 관념을 귀중한 요소로 받아들였다. 즉 플라톤 사상은 유일신 사상만이 아니라 성서가 증언하고 있는 하느님의 超세계성을 효과적으로 표현하는 데에 도움을 준다고 보았다. 이렇게 고대교부들은 그리스 철학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지만 개신교 신학자 하르낙(A.Harnack, 1851-1930)이 비판하듯이 “그리스화”(Hellenisierung)된 것 20세기 초반에 개신교 측에서는 그리스도 敎義史에 대한 저술이 활발하게 진행되었는데, 고대 그리스도교 호교론자들의 신학적 성과를 아주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경향이 만연하였다. 2세기호교적 신학자들은 철학적 관념과 개념을 그리스도교 신학, 특히 하느님의 본질과 특성에 관련해서에 수용하였는데, 하느낙은 이를 그리스도교의 “그리스화”(Hellenisierung)라고 표현하였다. 즉 하르낙은 호교론자들이 그리스 정신에 적응한 것은 박해를 받았던 당시 그리스도교의 곤란한 상황에서는 이해할 수 있지만, 그러나 이로 인해서 그리스도교의 본질이 변질되었다는 주장하였다. 그러나 역시 개신교 신학자인 판넨베르크는 이런 부정적인 시각에 비판적인 견해를 펼친다(참조: W.Pannenberg, “Die Aufnahme des philosophischen Gottesbegriffs als dogmatisches Problem der frühchristlichen Theologie”, in: ders., Grundfragen systematischen Theologie I, Göttingen 31979, 296-346).
은 아니다. 즉 그들은 성서에 나타난 하느님 이해를 견지하였다. 무엇보다도 하느님은 인간과 역사에 대해서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자유롭게 행동하신다는 측면에서는 그리스 철학과 아주 분명한 대조를 이루었다. 그리스 철학에서 신은 본질상 필연적으로 불변의 상태로 세상과 인간을 초월하는 존재이지만, 교부들은 하느님을 무한한 자유에서 창조적으로 행동하시는 분, 세상, 물질, 인간의 운명에 대해서 강한 관심을 지닌 분으로 이해하였다. 하느님의 이런 자유롭고 인격적인 행동은 인간을 神化시키기 위해서 하느님 스스로 인성을 취하신 하느님의 육화에서 정점에 이른다. 바로 이런 계시, 즉 하느님의 본질을 알려주는 교환의 사건에서 하느님의 참된 자기 계기가 이루어진다. 그러나 그리스 철학, 특히 영지주의적 사고에서는 이런 신을 도저히 상상할 수도 없었다. 이런 맥락에서 고대 그리스도교 신학은 성서에 근거한 그리스도교 신앙을 그리스 철학 체계보다는 근본적으로 우위에 두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