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매매춘의 발생과 지속 및 확산의 원인-역사적관점

 

한국 매매춘의 발생과 지속 및 확산의 원인


2.1 역사적 관점




우리나라의 매매춘 조직과 규모는 서구사회나 아시아의 다른 여러 나라와 비교가 안될 정도로 거대하다. 외국인들 사이에서 한국이 여자를 가장 손쉽게 구할 수 있는 나라로 꼽히기까지 한다. 우리사회에서 이렇게까지 매매춘이 고착되고 확산될 수 있었던 원인을 우리사회의 가부장적 전통에서 찾을 수 있다. 이 가부장적 전통이 특정한 어느 한 계층을 지배하고 착취하게 되는 이데올로기로 정착되면서 한국의 가부장제는 더 이상 민족의 전통과 미덕이 되지 못하고 만다. 이데올로기화된 가부장제, 즉 가부장적 이데올로기는 남성에 의한 여성의 지배를 말하는 것으로서 여성과 남성이 구별된다는, 즉 여성에 비해 남성이 우월하다는 관념이다.1) 


한국에서는 전통적으로 남존여비사상으로 인한 남녀불평등 구조가 유지되어 옴으로써, 이 사회에서의 가부장적 전통은 性의 이중윤리와 이중규범, 그리고 여러가지 여성 비하의 관념이 특히 강하다. 이러한 가부장적 이데올로기는 남녀의 불평등한 사회구조의 성차별 이데올로기와 남녀불평등에 따른 性의 이중규범, 즉 성에 대한 이중적인 윤리를 가지게 된다.2) 성차별 이데올로기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남자와 여자사이에 적용되는 극단적인 이분법이다. 즉, 여성은 본성적으로 남성에 비해 성적욕망이 훨씬 뒤떨어지며, 남성의 성적욕망은 제어되기 힘든 것으로 보고, 여성은 당연히 정숙하고 순결하며 성적인 면에 대하여 무관심하여야 좋은 여자이고, 그렇지 않은 여자는 나쁜여자라는 왜곡된 이분법을 가진다.3) 반면 남성의 성에대한 관심과 욕망은 힘의 상징이나 남성다움으로 인식하게 조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같이 남성에게 적용되는 성 이데올로기와 여성에게 적용되는 성 이데올로기가 다른 성차별적 이데올로기로 여성은 부당하게 자신의 성적본능을 억압당하게 된다. 이러한 성차별 이데올로기를 정확히 찾아볼 수 있는 것은 가부장제 결혼과 가족제도, 그리고 여성의 순결논의에서이다. 먼저 가부장적 결혼에서 여성의 性은 오로지 남성의 재산상속과 가문의 혈통 계승의 목적을 위한 생식적 기능에서만 그 가치가 인정되며, 반면 남성에게는 혼외의 性의 자유와 함께 매춘이나 축첩을 통한 이중적인 성생활이 허용된다.4) 특히 혈통의 계승을 위하여 여성에게는 순결 또는 정절이 강요되는데 반해 남성은 이 의무에서 면제된다는 이중적인 성윤리가 생성된다. 그리고 이러한 가부장제 결혼으로 이루어지는 가족제도는 여자를 한 가정의 일원으로서가 아니라 남성의 소유물이라는 인식을 형성시킨다.5) 이와같이 성차별 이데올로기와 성에 대한 이중규범으로 대표되는 가부장적 이데올로기는 한국의 매매춘 현상의 유지와 확산에 결정적인 기여를 하게된다. 즉, 가부장적 이데올로기는 남녀 양성의 성적욕구에 대하여 차별화되고 왜곡된 관념을 고착시켜 남녀의 성윤리에 이중적인 모순구조를 가지게 하여, 가부장적 결혼제도에서 남성은 상속권과 혈통의 보존이라는 미명아래 자신의 부인에게는 정절과 현모양처의 상을 강요하는 반면, 남성인 자신은 자신의 성적욕구를 매춘이나 축첩 제도를 통해 분출하는 양면성을 지니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이중적인 성윤리의 영향으로 한편으로는 매춘 제도의 필요성을 인정하고, 또 다른 한편에서는 순결 이데올로기의 영향으로 매춘 여성들이 순결하지 못하고 정절을 지키지 않는다는 이유에서 그들의 부도덕성을 비난하는 이중성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어떻게 보면 매매춘 행위에 있어서 일방적인 비난을 받고 있는 여성들은 우리나라의 가부장적 이데올로기가 내세우는 결혼 제도와 그 안에서의 순결 개념, 그리고 이중적인 성규범에 의해서 여성의 性을 효과적으로 통제하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하고 있으며, 가부장적 이데올로기의 유지에 있어서 희생양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즉, 가부장적 이데올로기에 의한 이중적 성윤리가 존재하는 한, 남자의 혼외성생활을 충족시켜주는 여자들이 존재해야만 하며, 이 여자들은 결국 결혼 제도에서 소외되고 정절의 의무를 이탈한 존재일 수 밖에 없다.


이러한 의미에서 볼 때 매매춘 여성들을 단순히 성규범의 일탈자이거나 쾌락과 안락을 탐닉하는 이들로 치부할 수 없으며, 오히려 우리 사회의 가부장적 이데올로기가 가지는 이중적 성윤리의 모순의 대가를 대신 치르는 이들이라고 말할 수 있다.6) 따라서 유교의 원리를 통하여 성차별적이고 여성 비하적인 성문화와 남성의 이중적 성생활의 관습을 정착시켜온 가부장제는 매매춘 제도와 서로의 존립을 같이한다고 볼 수 있을 만큼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으며, 매매춘 제도가 가부장적 이데올로기의 구조적 산물로서 유지되어 왔다고 볼 수 있다.


이 땅에서의 매매춘 현상은 인간의 본능적 욕망에 그 근거를 모두 돌리기는 어렵다. 매매춘 행위를 인간의 성적 욕망으로만 설명한다는 것은 인간사회에서 발생하는 제반 문제가 복합적 요인에 의하여 발생되고 심화된다는 점을 망각한 것일 뿐만 아니라 가부장적 이데올로기와 남성우월주의, 그리고 성에 대한 불평등한 생각을 가진 이들의 궁색한 변명이며 자기 은폐일 뿐이다. 따라서 매매춘 현상의 발생과 지속 및 심화의 원인 중 관습으로 이어져 내려오는 가부장적 이데올로기외에 특별한 몇가지의 사건을 경험한 우리 민족의 근대사를 더듬어 봄으로써 세계 어느 곳에나 있다고 하는 매매춘 현상이 우리 나라에서는 어떤 영향에 의하여 “한국의 매매춘”이라고 부를만한 특수성을 가지는지를 살펴보겠다. 우리 나라는 역사적으로 오늘날까지 사회 구석구석에서 그 영향을 찾아 볼 수 있을 만큼 막대한 상처를 남긴 두 가지의 사건을 겪었다. 바로 일본 제국주의에 의한 국토 침탈과 식민 지배, 그리고 한국전쟁으로 인한 미군정의 한반도 주둔이라는 사건이었다. 그리고 한국전쟁 이후 경제 개발과 근대화의 과정에서 발생한 부작용도 우리 나라의 특수한 경험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한국 매매춘 현상에 있어서의 특수성을 세 부분으로 나누어 살펴보기로 하겠다. 즉,“ 제1기 일본 제국주의와 매춘 문화의 유입”7), 제2기 미군 주둔과 한국 매매춘의 기형적 형성, “제3기 산업화. 도시화. 농민 분해로 인한 매춘 자원의 지속적 동원과 사회적 순환이다”8). 먼저 제1기 일본 제국주의와 매춘 문화의 유입이다. 이는 한국매매춘의 역사적 뿌리와 대중화의 기초가 일본 제국주의에 의한 한반도 식민통치에 있다는 것이다.


일본은 조선의 개항 이후 일본의 공창제도를 조선 내의 일본인 거주지에 우선 도입하고, 을사조약 체결로 조선의 봉건주의를 강제로 해체함과 더불어 한일 양국간의 합방이 이루어지면서 조선인 매음부에 대한 성병 검사와 기생. 창기 단속령을 발포, 조선에서의 공창화 정책을 실시해 나갔다. 이어서 1904년 10월 10일, 일본 공사관 산하 ‘경성영사관령’ 제3호에서 전문 직업인으로서 매춘녀인 창기. 창녀가 사회적으로 공식화되어 조선의 매매음 형태와는 다른 공창제도라는 형태의 매춘 문화가 일본식 자본주의와 더불어 이 땅에 유입되게 되었고 제도적으로 공식화되어 버렸다. 그러나 일본식 공창제도의 도입이 한국 매매춘 문화의 발아와 존속 기반이 되었다는 사실 이외에 일본 제국주의에 의한 공창제도 실시는 한편으로 당시 조선사회에 매매춘 현상을 더욱 만연시키는 계기가 된다. 즉, 일본인들의 공창제도가 일본인들의 거주지에서는 유곽이라는 일정지역에 한정해서 실시되었던 반면 조선인 창기의 영업지는 유곽이외의 지역에서도 허용되는 이중적인 형태로 운영되었다는 점이다.9) 조선의 공창제도는 일본국내 또는 거류지에서 풍기단속을 위해 유곽을 설치한 것과는 달리 시내에 산재되어 있는 상태에서 매춘업을 공허하면서 매춘부의 성병 검사를 중심으로 하는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이는 조선사회 전반에 매매춘을 스며들게 하는 역할을 하게 된다. 따라서 사창제도가 불법화 되어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공창제도 실시의 양면성으로 말미암아 기형적인 성문화가 자리잡게 된다. 이러한 기형적인 성문화가 표면화된 것은 1920년대 전반기를 지나면서이다. 1920년대를 지나면서 이 땅에서는 매매춘이 일반화되기 시작하였으며, 특히 사창이 급격히 늘어나고 공창이 상대적으로 쇠퇴하게 된다. 이에 대한 원인은, 첫째, 일제에 의한 토지조사 사업과 토지겸병정책, 그리고 제1차 세계대전 이후의 만성적 불경기가 겹쳐 생활고가 극에 달하자 죽음보다 매춘을 택하는 여성이 많아졌다는 것이다. 둘째, 1920년부터 시작된 이른바 일제의 문화정치에 의하여 일본적 생활양식이 도입되어 매춘은 절대로 용서할 수 없다는 사고방식이 무너지기 시작하였다. 셋째, 많은 매춘 여성들이 공창이 지닌 제도적 굴레를 기피하였다. 넷째, 창기. 기생들 모두가 세금을 내고 있었는데 반해 매춘은 표면상 비밀 행위 즉 밀매음의 형태이었기 때문에 탈세가 가능하여 이를 택하는 일이 많았다.10) 이와 같이 당시 매춘부들은 식민지 통치하에서의 열악한 생활 환경이 매춘의 길을 택하게 하는 결정적 요인으로 작용하였음과 이러한 여성들에 대한 착취를 공창제도라는 것이 제도적으로 인정하였으며 이 공창제도의 실시로 인하여 이미 형성되어있지 않았다고 볼 수 있는 한국의 성문화가 기형적으로 형성 및 정착되어 나가게 된다. 한편 일제가 패망한 이후 해방이라는 역사적 공간에서 한국의 매춘 문화는 미국군대라는 존재에 의하여 일본식 매춘 문화를 일소하기는 커녕 그 잔재를 더욱 왜곡시키고 심화시키게 된다. 즉, 미국군대는 이 땅의 매춘 문화를 더욱 심화시키는 촉매제의 역할을 하게 된다. 그러면 두번째로 제2기 미군 주둔과 한국매춘의 기형적 형성에 대하여 알아보겠다.


한국 현대사의 전개 과정에서 미국이라는 나라는 일본을 한반도에서 축출한 장본인으로서 구세주와 같은 존재로 대두되어 한국은 해방자로서의 미국에 대하여 어떤 식으로든 그 대가를 지불해야 할 입장에 처하게 된다. 그러나 미국은 해방 이후 지금까지 한반도에 자국의 군대를 주둔시킴으로써 해방자로서의 역할을 넘어서서 제1의 점령군이라고 할 수 있는 일본과 다를 바 없는 제2의 점령군으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해 내고 있다. 특히 한국의 매매춘 문제에 있어서 점령군의 위치인 그들은 매매춘행위의 억제와 올바른 성문화의 형성을 주도해 나가기는 커녕 매매춘 문화의 발전과 심화에 주체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즉, 그들은 일본 제국주의가 반강제적으로 이 땅에 이식시킨 매매춘 문화의 잔재를 청산하지 못하고 해방과 한국전쟁 전후를 거쳐 더욱더 심화시키고 왜곡시키는데 일익을 담당하게 된 것이다. 특히 미국이 한국 사회의 매매춘 문화에 있어서 결정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이유는 일본 제국이 남기고 간 공창제도라는 매춘 문화를 종식시키는 동시에 새로운 매매춘 문화를 형성시킨 장본인이라는 점이다.11) 즉 한반도에 진주한 미군정은 자신들이 축출시킨 일본이 형성시켜 놓은 매매춘 문화인 공창제도를 그대로 유지시킬 수 없는 입장에 있었기에 1946년 5월 17일 법령 제70호 ‘부녀자의 매매 또는 그 매매 계약의 금지’를 발포한다. 그러나 이 법은 부녀자들의 인신매매만을 금지하고 공창지역 내에서의 매매춘 행위는 금지하지 않았다는 결점이 발견되어 1947년 11월 14일, 입법 의원이 제정하고 군정 장관이 인준한 형식을 취하여 남조선 과도정부 법률 제7호로서 ‘공창제도등 폐지령’이 공포된다.12) 아마도 미군정은 이 공창제도 폐지령으로 일본의 잔재를 청산하고 동시에 매매춘행위의 근절이 이루어 질 것으로 기대한 것 같지만 공창의 폐지로 말미암아 대부분의 매춘 여성들이 사창으로 이동하게 되어 제도적으로 공창이라는 형태의 매춘 문화는 사라지고 본격적인 사창의 시대가 열리게 된다. 따라서 공창의 전격적인 폐지라는 조치 이전에 과도기적인 행정 조치와 더불어 의식의 전환을 위한 공백이 절대 필요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승전국의 자존심이라는 명분 때문에 취해진 법적 조치가 사태를 호전시키기는 커녕 전혀 다른 모습으로 전환시키고 악화시킨 셈이 되어버렸다. 이미 형성되어 있던 매매춘 조직은 전업의 기회와 배려가 전혀 없었던 덕분에 다시 매춘을 할 수 밖에 없었으며 공창과는 달리 제도적 통제가 어려운 사창은 법이라는 제도의 헛점을 비웃듯이 날로 번창해 가게 된다. 한편 미군정에 의한 매춘 문화의 공창에서 사창에로의 전환과 더불어 이 땅에서는 미군의 주둔지를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매춘 문화가 탄생하게된다. 즉, 미군정은 혈기왕성한 젊은 미군들의 성욕처리공간을 필요로 하였으며, 한국매춘조직은 일제시대부터 공창이라는 매매춘의 형태를 이미 경험해 보았고, 매춘여성들은 대부분 다른 길을 찾지 못한 채 새로운 수요자의 등장을 기다리고 있었으며, 정부는 한반도에서 일본을 몰아내고 해방시킨 미국에 대하여 어떤 식으로든 보상을 해 주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이러한 세 가지의 상황이 맞물리면서 미군의 주둔지 주변을 중심으로 소위 “기지촌”이라는 것이 형성된다. 이 기지촌의 음성화된 주요역할은 매춘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 나라의 매춘 문화는 사창의 형태를 띠지만 정부의 묵인을 받는 ‘기지촌 매춘’이라는 새로운 형태를 가지게 되며, 주한 미군에 의해 이 기지촌 매춘 문화가 한반도에 지배적인 매춘 문화로서 자리잡게 되고 지금까지 그 명맥이 뚜렷이 이어지고 있다.이러한 이중적인 매매춘 정책과 왜곡된 성문화의 형성에 일익을 담당한 정부에 일침을 가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즉, 1992년 10월 28일, 동두천 미군 클럽 접대부 ‘윤금이’씨가 주한 미군 케네스 마클 에게 처참히 살해된 사건이다.13) 이 사건에 대하여 정부는 ‘한미행정협정’14)의 미국군대의 관할권상의 치외법권 조항으로 법적 대응이 어려워졌지만 소위 기지촌이라는 매춘문화공간 형성을 주도하였고,지금까지 자발적으로 한미행정협정의 불평등성에 대하여 일언반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은 정부는 국가윤리적인 차원에서의 대응을 할 명분조차 상실할 수 밖에 없게 되었다. 이와같이 우리 나라는 점령군 내지 침략군에 의한 영향으로 특수한 역사적 경험을 하게 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매매춘 문화는 자생적이 아니라 외부의 주도와 압력, 그리고 필요에 의해서 기형적으로 형성되고 발전하게 된다. 한편 1960년대에 들어서면서 경제발전을 통한 근대화라는 이데올로기가 정권에 의해 강요되고, 매춘부들도 이러한 조국 근대화에 일익을 담당해야 한다는 논리가 대두되면서 한국의 매춘 문화는 또다시 변화를 거듭하게 된다. 그러면 세번째로 1960년대에서부터 1970년대 후반을 중심으로 하는 제3기 농민 분해, 도시화, 산업화로 인한 매춘 자원의 지속적 동원과 사회적 순환에 대하여 알아보겠다.


1960년대부터 한국은 ‘수출. 증진. 건설’을 표어로 도시 중심의 공업을 중점적으로 육성하기 시작하여 가히 기적적인 도약을 하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도시 중심의 공업 육성 정책으로 그 기반이 제대로 마련되지 않았던 농촌은 갈수록 피폐해져가고 농촌 인구의 다수가 돈을 벌 수 있다는 도시로 집중된다. 따라서 농촌 지역은 그 기초를 이루는 인력의 유실과 소위 근대화에 발을 맞추지 못한 형태로 남게 되면서 그 자체가 해체되어 버릴 상황에 이르게된다. 즉, 산업별 인구 구성비를 보면 전체 인구에서 농촌 인구가 1960년 72%에서 1990년 25.6%로 감소하였다는 사실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15) 그리고 한국의 도시화 정책으로 대량의 인구가 도시로 집중되면서 도시의 과잉밀집현상과 더불어 잉여 노동력이 대량으로 발생한다. 이 잉여 노동력의 주체들 중 농촌 여성들은 대부분 매매춘 조직에 끌려 매춘 여성으로서의 생활을 하게 된다. 농촌과 농민의 분해와 도시 중심의 개발에서 한국 매춘 조직의 공급 중 상당 부분을 분해된 농민들 중 도시에서의 잉여 노동력으로 남게 된 여성들이 차지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1970년대 후반, 즉 근대화의 초기 단계인 1960년대를 지나 후기 단계에 들어서서 한국의 매춘 현상은 지금까지의 전통적 형태, 즉 사창이나 기지촌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던 전통형 매춘이 쇠퇴하게 된다. 향락 산업의 번창과 접대 문화의 형성, 그리고 산업화 과정에서의 차별적 고용 정책으로 접객 서비스업에 여성 노동력의 공급이 증가되고, 상대적 빈곤감과 쉽게 벌어 호화롭게 살기 위하여 향락 업소를 매개로 호스티스, 콜걸, 요정 기생, 면도사, 안마사 등으로 위장하여 매춘을 하는 ‘산업형 매춘’이나 ‘겸업 매춘’현상이 나타나게 된다.16) 이 산업형 매춘이나 겸업 매춘은 공식적으로는 정부가 인정하는 사업장의 종업원으로 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매춘 여성과 다를바 없는 신종 직업이다.


따라서 한국의 매춘현상은 일제시대의 공창제도, 미군정과 미군 주둔지를 중심으로 하는 사창으로서의 기지촌 매춘이라는 전통적 매춘의 형태를 거쳐 1960년대 이래 추진되어온 경제 개발 일변도의 정책으로 말미암은 농촌의 분해와 도시화로 1970년대에 소위 산업형 매춘 또는 겸업 매춘 현상으로 특징지어 볼 수 있다. 이러한 그 시대의 지배적인 매매춘 형태로 자리잡았던 매춘 현상들을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특수한 역사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하는 것이었으며, 식민지 지배와 외국군의 주둔, 그리고 전쟁이라는 특수한 경험이 우리 나라의 매춘 문화를 기형적으로 형성시키고 심화시킨 장본인이라는 것은 확실하다. 그런데 한국의 매춘 문화 형성의 장본인들을 옆에서 거들고, 오히려 그들보다 한발 앞서 매춘 문화를 형성. 발전시킨 장본인을 한국정부라고 할 수 있다. 때로는 묵인으로, 때로는 은밀한 조작과 방관으로 한국 정부는 매매춘 현상의 확산에 일조를 하였다는 사실은 누구도 부인하기 어려울 것이다. 따라서 한국 정부가 어떠한 형태로 매춘 문화의 형성과 발전에 빠질 수 없는 역할을 담당했는지를 살펴보는 것은 한국의 매춘 현상을 역사적으로 더듬어 보는 것 못지않게 그 정체와 특수성을 알아내는데 중요한 의미를 가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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