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아우구스띠노 주교의 목자들에 대한 강론의 시작(상)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모든 희망은 그리스도께 달려 있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구원이시고  참된 영광이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이 진리를 지금에서야 비로소 듣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은 이스라엘을 인도하시고 기르시는 그분 양 떼의 한 부류입니다. 그러나 자기네들이 목자라고 불리우기를 간절히 원하지만 목자로서의 직분 수행을 거부하는 목자들이 있기 때문에, 예언자가 그들에게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들어 보기로 합시다. 여러분은 귀담아듣고 우리는 두려움과 떨림으로 들어야 하겠습니다.


   “주께서 나에게 말씀을 내리셨다. ‘사람의 아들아, 너는 이스랑엘 목자들에게 일러라. 목자들에게 그들을 쳐서 이르는 내 말을 전하여라.’” 방금 이 독서 봉독을 잘 들었습니다. 이제 여러분과 더불어 주석해 보고자 합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견해만을 고집하지 않는다면 주님 친히 우리가 진리를 전하도록 도와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것만을 말한다면 양 떼를 기르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만을 돌보는 목자들이 되겠지만, 하느님에게서 나오는 바를 말하다면 그분은 당신이 원하시는 아무를 통해서라도 여러분을 당신 친히 기르실 것입니다.


   “주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망하리라. 양을 돌보아야 할 몸으로 제 몸만 돌보는 이스라엘의 목자들아, 목자들이 양 떼를 길러야 하는 것이 아닌가?’” 말하자면 목자들은 자기 자신을 돌보는 것이 아니라 양 떼를 길러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런 목자들을 거슬러 내리시는 하느님의 첫번째 고발은 바로 이것입니다. 그들은 제 자신만을 돌보고 양 떼를 기르지 않습니다. 양 떼를 기르지 않고 제 자신만을 돌보는 사람이란 누구를 말합니까? 사도가 말하는 다음의 사람들입니다. “모두들 자기 이익만 찾고 그리스도의 일은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우리의 공로가 아닌 당신의 사랑으로 이 자리에 세워 주신 우리는 (이 직분에 대한 셈 바침은 정말로 두렵습니다.) 두 가지 점을 잘 구별해야 합니다. 한 가지는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는 점이고 또 한 가지는 지도자라는 점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은 우리 자신을 위한 것이고 지도자로 뽑히었다는 사실은 여러분을 위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면에서 볼 때에는 우리 자신의 선익을 보아야 하고, 지도자라는 면에서 볼 때에는 여러분의 선익만 생각해야 합니다.


   지도자가 아닌 하나의 그리스도인으로서, 혹시 더욱 쉬운 길로 여행할지 몰라도, 하느님께 도달하는 많은 이들이 있습니다. 그들의 짐이 가벼운 만큼 그만큼 더 홀가분하게 갈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선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우리 생활에 대해 하느님께 셈 바쳐야 하지만, 다음에 또한 지도자로서의 우리 직분 수행에 대해서도 셈 바쳐야 할 것입니다(우리는 그리스도인이고 또 지도자입니다).




   누구에게도 아첨하지 않는 하느님의 말씀이 양 떼를 돌보지 않고 자기 자신만을 돌보는 목자들에게 어떻게 말하고 있는지 보기로 합시다. “너희가 젖이나 짜 먹고 양털을 깎아 옷을 해 입으며 살진 놈을 잡아먹으면서 양을 돌볼 생각은 않는구나. 약한 것은 잘 먹여 힘을 돋구어 주어야 하고 아픈 것은 고쳐 주어야 하며 상처 입은 것은 싸매 주어야 하고 길잃고 헤매는 것은 찾아 데려와야 할 터인데, 그러지 아니하고 다만 못살게 굴었을 뿐이다. 양들은 목자가 없어서 뿔뿔이 흩어졌다.”


   이 말씀에서 양을 돌보지 않고 자기 자신만을 돌보는 목자들이 욕심내는 것이 무엇이고 또 소홀히 하는 것이 무엇인지 기술되어 있습니다. 그들이 욕심내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들은 “젖이나 짜 먹고 양털을 깎아 옷을 해 입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는 다음과 같이 질문합니다. “누가 포도밭을 만들어 놓고 그 포도밭에서 열매를 따먹지 않겠습니까? 또 도대체 누가 양을 친다면서 그 젖을 짜 먹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까 양의 젖이란 하느님의 백성이 자기 지도자들에게 생계를 위해 바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위에 언급한 말씀에서 사도가 이에 대해 말하는 것입니다.


   사실 사도는 자기 손으로 벌어 생계를 유지하는 길을 택하고 양을 젖을 짜 먹는 길을 찾지 않았지만, 그래도 주님은 “복음을 전파하는 사람이 그 일로 먹고 살 수 있도록” 제정해 주셨기 때문에 자기가 양의 젖을 짜 먹을 권리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사도는 자신의 동반자들인 다른 사도들이 수탈해 버린 권리가 아닌 이 정당한 자기 몫으로 받아야 할 것을 포기했을 뿐입니다. 그러나 자신이 받아야 할 것을 포기했다고 해서 다른 사도들이 받지 말 것을 요구했다는 말은 아닙니다. 바울로는 그 이상을 한 것뿐입니다. 바울로는 상처 입은 사람을 여관으로 데리고 간 그 사마리아인이 한 말을 반영해 주는지도 모릅니다. “비용이 더 들면 돌아오는 길에 갚아 드리겠습니다.”


   양들의 젖을 요구하지 않는 목자들에 대해 내가 더 이상 무엇을 말하겠습니까? 그들은 자비의 직분을 수행함에 있어서 더욱 더 너그럽고 관대합니다. 이들 목자들은 그렇게 할 수 있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들을 칭송합니다. 그렇다고 다른 목자들을 나무라는 것도 아닙니다. 다른 이들에게서 혜택을 구하지 않았던 사도 자신도 자기 양 떼 메마르고 결실을 맺지 못하는 양 떼가 되지 않고 열매를 맺는 양 떼가 되기를 원했습니다(자기 자신만을 돌보는 목자들).




   바울로 사도가 한 번은 진리의 증거 때문에 감옥에 갇혀 큰 어려움에 처해 있을 때 형제들로부터 그 궁핍을 해결할 생계 수단을 전해 받았습니다. 그때에 그들에게 가사하면서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여러분은 고맙게도 내 어려움을 함께 해주었습니다. 나는 어떤 처지에서도 자족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비천하게 살 줄도 알며 풍족하게 살 줄도 압니다. 나에게 능력을 주시는 분을 힘입어 나는 무슨 일이든지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고맙게도 여러분은 나와 고생을 같이 해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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