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아우구스띠노 주교의 목자들에 대한 강론의 시작(하)

 

  주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허약한 것을 잘 먹여 힘을 돋구어 주지 않고 아픈 것을 고쳐 주지 않았다.” 주께서는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익이 아닌 제 이익만 찾고, 또 젖과 양털을 마음껏 즐기지만 양들을 결코 돌보지 않거나 병든 양을 고쳐 주지 않는 악하고 거짓된 목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내 생각으론, (우리가 어떤 때 병자를 허약자라 하지만) 허약자와 병자를 잘 구별할 수 있다고 봅니다. 허약자는 튼튼하지 않는 사람이고 병자는 어떤 질병에 걸린 사람입니다.


   더욱 큰 주의를 기울인다면 내가 여기서 구별하고자 하는 것들 간의 차이점을 좀더 잘 이끌어 낼 수 있고, 또 나보다 더 박식하고 열심한 다른 사람이 물론 더 잘할 수도 있지만, 나는 여러분이 허전한 감을 갖지 않도록 이 성서 말씀을 내가 생각하는 대로 말해 보겠습니다. 허약자는 유혹이 밀어닥치면 넘어질 우려가 있는 사람이고, 병자는 하느님의 길로 발걸음을 내닫지 못하게 할 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멍에에서 멀어지게 하는 나쁜 욕망으로 앓고 있는 사람입니다.


   착한 생활을 하기 원하고 또 이미 그렇게 마음먹은 사람들을 한번 봅시다. 그들은 어떤 때 착한 생활을 하려는 준비가 되어 있지만 그만큼 어려움을 겪을 마음은 없습니다. 그렇지만 진정코 견고한 그리스도인은 착한 일을 행하는 것만이 아니라 힘든 일이나 역겨운 일을 참아 내는 것도 알아야 합니다. 착한 일을 하는 데 열심한 것으로 보이지만 다가오는 어려움이나 고통을 참아 내고 싶어하지 않거나 또는 참아 내지 못하는 이들은 허약자입니다. 그리고 어떤 나쁜 욕망에 사로잡혀 세상을 사랑하고 선행에서 물러서는 이들은 병들어 앓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들은 병 때문에 힘이 다 빠져 선행을 할 능력이 없습니다.


   주님께 가까이 데려갈 수가 없어서 그를 들고 왔던 사람들이 지붕을 벗기고 그곳으로 주님께 내려진 그 중풍 병자가 이런 상태에 있던 영혼이었습니다. 이 사실은, 지체를 통제할 수 없게 되고 선행을 조금도 하지 못하며 죄에 짓눌려 나쁜 욕망이라는 병에 걸린 여러분의 마비된 영혼을 위해 기꺼이 지붕을 벗겨 주님께 내려보내야 한다는 것을 암시해 줍니다. 여러분의 지체가 모두 말을 듣지 않는 상태이고 여러분의 내부에 마비증이 있다면, 의사께 도달하기 위해선(그분이 숨어 계신지, 집안에 들어가 계신지, 확실한 의미를 성서는 말하지 않습니다.) 지붕을 벗겨 중풍 병자를 내려보냄으로써 감추인 것을 노출시켜야 합니다.


   해야 할 것을 하지 않거나 게을리하는 자들은 앞에서 언급한 말씀을 듣습니다. “너희는 아픈 것을 고쳐 주지 않고 상처 입은 것을 싸매 주지 않았다.” 이 점에 대해 이미 말씀 드렸습니다. 그들은 유혹의 두려움으로 인해 상처를 입었습니다. 상처 입은 이들을 싸매 주어야 할 위로의 붕대는 바로 성서의 다음 말씀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신의가 있는 분이시므로 여러분에게 힘에 겨운 시련을 겪게 하지는 않으십니다. 시련을 주시더라도 그것을 극복하고 벗어날 수 있는 길을 마련해 주실 것입니다.”(연약한 그리스도인들)




   “너희는 길 잃고 헤매는 것을 찾아 데려오지 않았도다.” 이제 우리는 강도의 손아귀와 잔악한 늑대의 이빨에 사로잡힌 사람처럼 되었습니다. 여러분이 이런 위험들 앞에서 기도해주기를 청합니다. 뿐만 아니라 앙들마저 뻣뻣한 상태입니다. 그들이 방황하고 길을 잃어버려 우리가 찾으러 나가면 자기들은 오류와 파국 상태에 빠져 우리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고들 말합니다. “왜 나에게 신경을 쓰는 거요? 왜 나를 찾아 다니오?” 우리가 그들에게 신경을 쓰고 그들을 찾는 이유가 흡사 자기네들이 방황하고 길을 잃어버려서가 아닌 것처럼 대꾸하는 것입니다. “내가 오류에 빠져 죽을 위험에 처해 있는 자라면 왜 나에게 신경을 쓰며 찾아 다니는  거요?” 바로 당신이 오류에 빠져 있기 때문에 당신을 돌이키고자 하는 것이고 또한 당신이 길을 잃었기 때문에 찾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렇게 반응합니다. “나는 방황하고 싶고 파국 상태로 있고 싶소.”


   그렇게도 방황하고 싶어하고 파국 상태에 있고 싶어합니까? 나는 그보다 훨씬 더 당신이 그런 상태에 있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솔직히 말합니다. 나는 고집 불통입니다. “기회가 좋든지 나쁘든지 꾸준히 말씀을 전하고 훈계하십시오.”라는 사도의 말씀이 내 귀에 메아리치고 있습니다. 누구에게 기회가 좋고 또 누구에게 기회가 나쁘겠습니까? 원하는 이에게는 기회가 좋고 원치 않는 이에게는 기회가 좋지 않습니다. 나로 말한다면 고집 불통이므로 이렇게 까지 말합니다. “당신은 방황하고 싶어하고 파국 상태에 있고 싶어하지만 나는 그것을 원치 않습니다.” 그리고 내가 두려워 하는 그분이 그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내가 만일 그것을 원한다면, 그분은 내게 이렇게 말씀하시며 꾸짖으실 것입니다. “너희는 길 잃고 헤매는 것을 찾아 데려오지 않았다.” 내가 그분보다 당신을 더 두려워해야 한단 말입니까?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나는 헤매는 것을 돌이키고 파국에 처해 있는 것을 찾을 것입니다. 당신이 원하든 말든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것을 찾다가 숲 속의 가시 덩굴에 찔린다 해도, 가장 좁은 산길까지 헤치고 들어가, 내가 두려워하는 주님께서 나에게 힘을 주시는 데까지 온 천지를 두루 돌아다닐 것입니다. 나는 헤매는 것을 되돌아오게 하고 파멸 지경에 처해 있는 것을 찾아내겠습니다. 내가 이렇게 귀찮게 구는 것을 견딜 마음이 없다면 헤매지 말고 파멸의 지경에 빠지지 말도록 하십시오. 이것은 당신이 헤매고 파멸에 빠져 드는 것을 볼 때 내가 마음 괴로워하는 것과 비교한다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내가 당신을 소홀히 한다면 그로 인해 튼튼한 양까지도 파멸하지 않을까 염려됩니다. 예언자는 이어서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는 살진 놈을 잡아먹었도다.” 내가 헤매고 파멸 지경에 처해 있는 것을 소홀히 한다면, 튼튼한 양까지도 헤매고 파멸에 빠져 들지 누가 알겠습니까?(기회가 좋든지 나쁘든지 꾸준히 훈계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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