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림절

 

대림절




Epiphania와 마찬가지로 대림(待臨: Adventus=παρουσια)도 이교 세계에 기원을 둔 용어이다. 이는 신이 자기 신도들을 만나러 자기 신전에 연중 한번 찾아오는 것을 뜻한다. 그러므로 대림·성탄·공현은 근본적으로 동일한 것으로 표현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대림·성탄·공현으로 번역되는 “Adventus”는 오늘날에는 대림만을 일컫는 말이 되었다.




가) 기원


갈리아와 스페인에서는 4세기말과 5세기에 걸쳐 고행하는 가운데 성탄-공현 축제를 준비할 필요성을 자각하였다. 이는 아마 공현 때 베푸는 세례 준비와 관련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시기의 특징은 고행, 기도, 자주 모임 같은 것들이다. 이렇게 다른 모든 곳에서는 대림절이 고행적 성격을 가지고 있었던 반면에, 6세기 후반에 이를 받아들인 로마에서는 처음부터 전례로 세워졌다.


이런 특성으로 인해 대림절은 전례 주년의 첫 부분에 자리하고 있지만,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전례 헌장」은 약간의 다른 의미를 설명해준다. “일년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모든 신비, 즉 강생과 성탄에서부터 승천, 성령강림, 그리고 복된 희망과 주의 재림(대림)의 기대까지를 전개한다”라고 공의회는 밝히고 있는 바, 대림절은 전례 주년의 첫부분에 자리하고 있지만, 사실은 전례 주년의 처음과 마지막을 동시에 장식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로써 대림시기는 끊임없이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교회와 백성들의 희망을 드러낸다.


대림절은 성탄 축일을 기쁨 중에 기다리면서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세상 끝날에 주님이 영광 중에 돌아오시기를 기다리게 한다. 이로써 이교도의 옛 단어인 adventus가 성서적·종말론적 의미의 “재림”이 된 것이다.


그러나 특이하게도 동방 전례들 중에서는 로마의 대림절에 비견될만한 축제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나) 전례


4주간의 대림절은 두 단계로 이루어져 있다. 12월 16일까지와 17일부터 24일까지의 시기인데, 두 번째 시기는 더욱 직접적으로 성탄 축일을 향하고 있다.


대림시기의 제1독서는 메시아에 대한 주요 예언들에 관한 것이다. 이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제4주의 예언들이다. 여기에서는 한 여인이 다윗의 후손을 낳을 것이며, 그는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 임마누엘이심을 예고한다(이사야, 미가, 나단). 복음은 매년 같은 주제를 상기시키는데, 제1주일은 오시는 주님을 기다리는 것에 관한 것이고, 제2·3주일은 세례자 요한에 관한 것이다. 제4주일은 요셉에게 한 예고(가해), 마리아에게 한 예고(나해), 마리아의 엘리사벳 방문(다해)에 관한 복음이다. 서간은 예언들이 예수 안에서 어떻게 완성되는지를 보여준다.


이 시기의 기도문들은 주님의 육화와 영광 중의 재림에 관한 두 가지 주제가 교차하고 있다. 즉 주님의 첫 번째 오심과 두 번째 오심이 교차되고 있다.




다) 주님에 대한 예고


주님에 대한 예고는 대림절과 3월 25일 두 날 모두의 주제이다.


대림절 동안 주님을 예고하는 것은 그 기원과 의미를 생각해 볼 때 당연한 일이다.


한편 3월 25일에 지내는 주의 탄생 예고 대축일은 7세기 후반 로마 교회에 “Annunciatio Domini”라는 이름으로 나타났다. 후에 이 축일의 이름이 “Annuntiatio beatae Mariae Virginis”(성모 영보)로 바뀌었지만, 1969년의 새 전례력은 다시 초기 이름으로 복구하였다. 이 축일은 비잔틴 전통이 사순절 동안에는 토요일 이외의 날에는 축일을 허용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692년 Trullo 공의회는 이 축일을 예외로 하였고, 심지어 빠스카 성삼일 동안에 이 축일이 오더라도 경축할 수 있도록 했다는 데서 그 중요성을 짐작할 수 있다.




결론




그리스도교가 이제 막 기지개를 펴려 하려는 시점에서 교회가 이교도의 가장 큰 축제를 받아들인 것은 충격이 아닐 수 없다. 아직 그리스도교가 확고한 자리를 차지하지 못한 상황에서 -물론 콘스탄티누스에 의해 자유를 찾고, 로마제국의 종교로 선포되기는 하였지만- 더욱이 아직 이교도의 풍습을 따르는 사람들이 지배적이었던 상황에서 그들의 “무적의 신(태양신) 탄생일”을 그리스도의 성탄으로 대체한 것은 분명 큰 모험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런 점이 바로 그리스도교의 가장 큰 강점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즉 교회는 퇴폐적인 이교도의 예배를 그리스도교화 함으로써, 여러 부작용을 예방하면서도 효과적으로 이교도들을 그리스도교화 하였다. 이러한 교회의 모습은 오늘날 토착화의 문제로 고민을 안고 있는 한국 교회에 많은 교훈을 주고 있다.


나아가 교회는 성탄에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육화의 신비를 경축함으로써, 빠스카의 의미를 더욱 풍부하게 만들었다. 더욱이 이 육화는 “사람이 하느님이 되도록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신” 놀라운 사건이다. 이로써 처음의 의도와는 달리(?) 초세기 이단들에 대항하여 육화의 신비를 잘 드러내는 축일이 된 성탄은 과연 빠스카 다음으로 성대한 축제가 되었다.


그러나 오늘날 교회 혹은 그리스도교인들은 성탄의 의미를 얼마나 잘 이해하고 있는가? 하느님의 영광되이 오심을 더욱 성대하게 맞이한다는 명목으로 베들레헴의 흙으로 된 구유를 은으로 대치한 그런 잘못을 오늘날에도 여전히 반복하고 있지는 않은가?


성탄이 우리에게 주는 진정한 의미는, 십자가와 마찬가지로 가장 고귀하신 분께서 가능한 한 가장 비천한 모습을 취하신 데 있지 않나 생각해본다. 더불어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죄인들의 세계에 직접 파고 들어오신 데 있지 않나 생각해본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자신 안에 계신 그리스도를 닮고, 그분의 순결과 가난 그리고 겸손과 순명을 본받으며, 과거의 합당치 못한 자신의 행동으로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졌던 관계를 회복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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