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지순례 예절
(장소:김대건 신부님 동상 앞)
1. 취지의 말씀
우리는 오늘 신앙의 선조들 걸어가신 길을 새겨보려고 이자리에 와 있습니다. 믿음을 지니고 살아간다는 것은 십자가를 사랑하며 희망을 잃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나약한 신앙의 상태가 종종 우리의 십자가를 포기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성인들의 신앙을 돌아봄으로써 큰 힘과 용기를 얻게되며 그들의 삶을 배우고 표양을 따라 살아갈 때 좀더 하느님께로 가까이 나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성인들이 걸으신 길을 돌아보면서 우리의 신앙을 다지기 위하여 모두 마음을 모아야겠습니다. 다같이 가톨릭 성가 287장 “성 안드레아 김 대건 신부 노래” 1-2절 을 노래하시겠습니다.
2. 시작성가: 가톨릭 성가 287장 “성 안드레아 김 대건 신부 노래” 1-2절
3. 행 적 가 ◎ 우리 벗아, 생각할지어다.* 가련한 세상에 한번 나서 우리 내신
임자 알지 못하면, 우리 난 보람 없도다.
○ 여사울골 이존창님 세례받고 권고받아 내포사도 되었도다.
● 루수존창 솔뫼사는 대건조부 택현에게 천주도리 가르쳤네.
○ 택현아우 한현이도 형을따라 입교하고 천주공경 앞장섰네.
● 성김대건 증조부님 김진후도 택현한현 아들따라 입교했네.
○ 진산살던 윤지충이 제사거부 화근되어 신해박해 일어났네.
● 증조부님 김진후가 잡히어서 관직잃고 고통형벌 받았도다.
○ 김제준이 태어나니 우술라와 더불어서 김대건의 부모로다.
● 신해박해 일어나니 증조부가 잡히었다 헛말하고 풀렸다네.
○ 회개눈물 흘리면서 자청하여 큰칼쓰고 긴옥살이 시작했네.
● 감옥살이 십년만에 허기병고 참고참다 해미옥서 순교했네.
○ 신사년의 염천팔월 스무하루 솔뫼에서 성김대건 탄생했네.
● 칠세되어 정해박해 일어나고 조부친부 따라나서 피난갔네.
○ 이리저리 살곳찾다 용인땅의 골배마실 깊은산중 은거했네.
● 열다섯에 세례받고 신학생에 뽑히어서 입학준비 하였다네.
○ 동지섣달 김대건과 양업토마 최방제는 눈보라속 걸었다네.
● 만주벌을 걷고걸어 손과발이 얼고터저 마카오에 당도했네.
○ 물이설고 산이설은 마카오서 난리만나 마닐라로 피신했네.
● 친구방제 병고허기 인내지심 주의고난 뒤따르다 선종했네.
○ 마카오서 다섯해를 공부하다 여러차례 입국시도 하였다네.
● 스물셋에 팔가자서 부제서품 받으시고 압록강을 건넜다네.
○ 고국산천 변양변모 없었지만 순교하신 아버지만 간데없네.
● 문전걸식 연명하는 어머니의 소식듣고 성모님께 위탁했네.
○ 보고파도 볼수없는 모친아모 뒤로하고 바다건너 떠나갔네.
● 성모님께 의탁하고 황해노도 뚫고넘어 상해땅에 이르셨네.
○ 스물네살 염복팔월 열이렛날 김가함서 사제서품 받으셨네.
● 이레지나 첫미사를 봉헌하니 수선탁덕 성체성혈 이루셨네.
○ 주교님을 모시고서 황해바다 배를띄워 귀국길에 올랐다네.
● 거친풍랑 시달리다 길을잃고 떠밀리다 탐라제주 표착했네.
○ 뱃머리를 다시돌려 북상타가 황산포라 나바위에 도착했네.
● 바삐걸어 상경타가 수리치골 교우촌서 미사성제 봉헌했네.
○ 두손모아 성모님께 조선교회 위탁하고 특별보호 청했도다.
● 기해박해 피를흘린 신자들게 고해성체 베푸시어 위로했네.
○ 십년만에 어머니를 상봉하고 순교하신 아버지께 기도했네.
● 주교님께 순명하여 위험고난 무릎쓰고 백령도로 나가셨네.
○ 순위도서 순라군에 적발되어 해주감영 문초심문 당하셨네.
● 서울포청 압송되어 석달열흘 취조고문 옥살이를 하셨다네.
○ 병오년에 구월보름 권돈인이 신부님을 역적으로 몰아댔네.
● 취객들이 동조하니 헌종왕이 부화뇌동 군문효수 언도했네.
○ 날이밝자 형리들이 신부님을 결박지어 새남터로 끌고갔네.
● 이골저골 구경꾼이 도배치니 북을울려 사형집행 알렸도다.
○ 옷벗기고 두귀뚫고 화살꿰어 얼굴에다 물뿌리고 회칠했네.
● 겨드랑에 장목끼워 어깨메고 사람무리 휙휙돌며 망신주네.
○ 무릎꿇겨 상투머리 옭아매고 밧줄계삭 장대높이 당기었네.
● 열두명의 망나니들 미친듯이 춤을추며 신부님의 목을쳤네.
○ 한칼에는 목을썰고 두칼에는 뼈를썰고 세칼에는 피줄끊네.
● 이리하여 반복하길 여덟번째 망나니의 칼날아래 참수됐네.
○ 참수성시 사십주야 파수병의 감시받다 백사장에 묻히셨네.
● 용감하던 이민식이 시신지고 백오십리 미리내에 안장했네.
○ 신부님의 깊고높은 신앙으로 조국산천 주님말씀 전해지네.
● 수선탁덕 성인품에 오르시니 천상성인 환호하며 기뻐하네.
○ 우리모두 굳은믿음 다지어서 머지않은 천국에서 상봉하세.
● 성인따라 높은성덕 갈고닦아 주님영광 우리구원 이루세나.
◎ 우리 벗아, 생각할지어다.* 가련한 세상에 한번 나서 우리 내신
임자 알지 못하면 우리 난 보람 없도다.
4.성인 독서(김대건 신부님의 옥중서간 중에서)
교우들 보아라. 우리 벗아 생각하고 생각할지어다. 천주 무시지시로부터 천지 만물을 배설(配設)하시고,그중에 우리 사람을 당신 모상과 같이 내어 세상에 두신 위자(慰藉)와 그 뜻을 생각할지어다. 온갖 세상 일을 가만히 생각하면 가련하고 슬픈 일이 많다. 이 같은 험하고 가련한 세상에 한번 나서 우리를 내신 임자를 알지 못하면 난 보람이 없고, 있어 쓸데없고, 비록 주은(主恩)으로 세상에 나고 주은으로 영세 입교하여 주의 제자 되니,이름이 또한 귀하거니와 실이 없으면 이름이 무엇에 쓰며, 세상에 나 입교한 효험이 없을 뿐 아니라, 도리어 배주 배은하니, 주의 은혜만 입고 주께 득죄하면 아니남만 어찌 같으리요.
5.성지안내
소나무 숲이 청청하다고 붙여진 솔뫼는 한국 최초의 사제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의 탄생지이며 박해를 피해 할아버지 김택현을 따라 용인 땅 골배마실로 이사갈 때인 일곱 살까지 사셨던 곳입니다.
솔뫼가 위치한 내포지방(아산,예산, 면천, 당진, 해미,서산, 덕산,태안)은 한국 천주교회의 태동지인 천진암에서 권철신, 권일신으로부터 교리를 배워 이곳에 전교한 이존창 루도비꼬에 의해 천주교 사상의 수용이 어느 지역보다 빨랐던 곳입니다. 김대건 신부님은 1821년 8월 21일 김제준 이냐시오와 고 울술라 사이에서 둘째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김 신부님의 집안이 처음 천주교와 관계를 맺게 된 것은 1788년 김 신부님 할머니의 삼촌되는 이존창에 의해서이며 이때 이존창의 활동으로 내포지방에 그리스도의 신앙이 뿌려지고 가꾸어져 많은 교인이 생겨났습니다. 솔뫼의 훌륭한 양반집에서 태어나서 이 지방에서 벼슬을 지내던 신부님의 증조부께서 복음을 전해 받고는 곧 벼슬을 버리고 신덕을 쌓는데 전념했습니다. 김진후는 1791년 전라도에서 제사 문제로 벌어진 박해인 신해년 진산 사건으로 인해 천주교의 대한 탄압이 충청도에 미치자 붙잡혀 홍주(지금의 홍성), 전주, 공주 등지의 옥문을 드나들었다. 신유박해(1801년)때는 귀양을 가고 죽음만은 면하는 것 같았으나 귀양에서 풀린지 얼마 안되어(11805년) 다시 해미 감옥에 갇히게 되어 1814년 10월에 76세의 나이로 옥사하셨습니다.
증조부의 순교가 있은 2년 뒤 종조부 김한현 안드레아는 안동 땅으로 박해를 피해 가서 신앙생활을 하시다가 1815년 을해박해 때 대구에서 참수형을 받아 순교하셨고 김대건 신부님의 부친 김제준 이냐시오는 1939년 기해박해 때 국법을 어기고 그의 아들을 해외로 내 보낸 사학도로 몰려 서소문 밖에서 44세의 나이로 참수되어 순교하셨습니다. 이 박해 때 김대건 신부님의 왕고모인 김 데레사(김한현의 딸)도 순교하셨으며 이처럼 김대건 신부님의 가문은 증조부와 종조부, 부친 김제준 김대건 신부님이 순교함으로써 4대가 순교하는 비극과 영광의 가문이 되었습니다.
이미 증조부와 작은 할아버지께서 순교한 천주학 집안이어서 가세는 기울대로 기울었고 또 어느 때 새로운 박해가 닥칠지 몰라 조부인 김택현은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위해 솔뫼에서 가솔들을 데리고 골배마실(용인군 내사면 남곡리)로 피신 하셨는데 이때 김대건 신부님의 나이는 일곱 살이었습니다. 어려서부터 뛰어난 신앙심과 총명함으로 주목을 받았던 김대건 신부님은 선교사로 오신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모방 신부님으로부터 영세를 받고 신학생으로 선발되어 충남 청양 다락골 출신 최양업 토마(성 최경환 프란치스꼬의 아들)와 충남 홍성 출신 최방제 방지거(최한지의 아들)와 함께 신학공부를 위해 1836년 12월 마카오로 떠났습니다. 1837년 6월부터 1842년 3월까지 유학 6년만에 신학공부를 마치신 김대건 신부님은 서품 받기 전 잠시 귀국의 길에 오릅니다. 수학 도중 함께 했던 최 방지거는 병사하고 김대건 신부님은 부제서품을 받고 조선 입국을 시도 경비가 삼엄한 국경선을 넘느라 온갖 위험을 극복하고 고국을 떠난지 8년만인 1845년 1월 15일 서울에 도착 교인들의 환영을 받았습니다.
이미 아버지 김제준(이냐시오)은 1839년 기해박해 때 순교하셨고 어머니는 일구월심으로 아들이 돌아오기를 고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김대건 신부님은 본인이 조선에 들어왔다는 소식을 어머니에게 알리지 말라고 부탁하셨습니다. 일시 귀국이라 할 일이 너무 많고 어머니를 만나면 마음이 약해질까 봐 그러했습니다
귀국 후 3개월 동안 선교사를 모셔 오기 위해 순교자에 대한 자료를 수집하고 조선 지도를 작성하며 치밀한 준비를 하였습니다. 1845년 4월 30일 만주에서 입국의 손길을 기다리는 조선 교구 제3대 교구장인 페레올 주교님과 다블뤼 신부님을 모셔 오기 위해 1백 50냥의 돈으로 한 척의 배를 사가지고 현석문 등 11명의 신자와 함께 그 배를 타고 한 개의 작은 나침반이 가리키는 대로 중국 상해를 향하여 떠났습니다. 11명의 신자 중에는 1명의 목수와 4명의 어부와 배를 타 보지도 못한 6명의 농부가 있었으니 이들은 김대건 신부님을 익숙한 뱃사람으로 믿고 있었습니다. 배를 띄운 첫째 날에는 순풍에 돛을 달고 잔잔한 파도 위를 달렸으나 다음날부터는 폭풍우를 만나 3일 동안을 밤낮 할 것 없이 시달리게 되었습니다. 배가 뒤집힐 듯 몹시 흔들렸으므로 할 수 없이 김대건 신부님은 끌고 가던 뗏목을 끊어 버렸습니다. 그 다음은 두개의 돛대를 베어 버리고 무거운 짐들도 물에 던져 버리게 하였습니다. 뱃사공들은 배멀미에 시달려 넓고 젋은 바다 위에서 방향조차 잡을 수 없었으므로 모두 죽을 것만 같았습니다. 김대건 신부님도 배멀미에 몹시 시달렸으나 힘써 아무렇지 않은 듯이 보이고 성모 마리아의 성화를 내보이면서 “겁내지 마시오. 성모 마리아께서 도와주실 것입니다”라고 하며 모든 사람을 격려하여 주었습니다. 배는 여전히 사나운 파도 때문에 이리 저리 들까불리다 가장 중요한 키조차 부러지고 말았습니다. 할 수 없이 돛을 둘둘 말아서 바다에 던져 키 대신으로 쓰게 하였으나 이것조차 얼마 안가서 끊어졌습니다. 이에 다시 멍석 을 나무토막에 싸매어 키로 써 보았으나 이것마저 파도가 삼켜 버렸습니다.
모두들 기진맥진하여 모든 것을 하느님과 성모님께 맡길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며 열심히 하느님의 도움을 빌면서 잠이 들었습니다. 다음날 아침에는 다행히 바람이 자고 비도 멈추어서 모두 이제는 살아났다고 하며 나무 조각을 주워 모아 급한 대로 키와 돛대로 쓰게 하고 바람을 거슬러 항해를 계속하였습니다. 이리하여 자비로우신 하느님의 도우심과 성모님의 보호 아래 김대건 신부님의 대담함과 침착함으로써 상해에 도착하였습니다.
조국 동포들이 참석한 가운데 페레올 주교님의 집전하에 서품식을 받은 날이 1845년 8월 17일, 서품을 받고 페레올 주교님과 다블뤼 신부님을 모시고 다시 뱃길로 귀국하게 되는데 이때도 폭풍을 만나 제주도 가까이까지 표류하였다가 마침내 강경 나바위에 상륙하여 무사히 서울로 잠입하였습니다. (1845.10.12) 김대건 신부님은 페레올 주교님이나 다를뷔 신부님보다 월등한 위치에서 전교 활동을 펼 수 있었는데 언어나 활동의 제약이 덜했기에 교인들을 찾아다니며 사목활동을 하셨습니다.
세 분의 성직자가 활동하고 계셨지만 만주에서 기다리고 있는 메스트르 신부와 동료인 최양업 토마의 입국을 위해서 주교님의 편지와 연락문, 해로로 입국할 때 사용할 지도를 가지고 백령도 해역 순위도에 고기잡이 나온 중국 어선에게 전달하고 오시다가 체포되었습니다. 김대건 신부님께선 체포되어 해주 감옥을 거쳐 서울로 압송되었습니다.
엄중한 문초와 혹독한 고문을 가하는 취조 과정에서 일찍이 천주 성교를 위하여 해외 유학으로 6년간의 마카오 유학 생활, 4년의 중국 만주 대륙에서의 활동을 통해 얻어진 학식과 견문은 조정의 박해자들에게 놀라움을 안겨 주었습니다. 김대건 신부님께선 사학죄인이란 죄목으로 군문효수형의 선고를 받고도 담담하셨고 태도가 의연하였으며, 옥중에서 당신을 교육하고 꾸준히 돌보아 준 마카오 장상 신부님들에게 조선교회의 장래를 부탁하는 서한을 남겼고, 페레올 교구장님에게 조선교회의 모든 일을 당부 드렸으며, 어둡고 더러운 옥중에서 형벌로 상처난 아픔을 참아 가며 그가 돌보던 조선 교우들에게 이별을 고하는 회유문을 남기셨습니다. 1846년 9월 16일 새남터에서 26세의 젊은 사제로 군문효수형에 처하여 순교하셨습니다. 비록 짧은 기간이기는 하였으나 김대건 신부님은 당시 목자의 보살핌에 굶주린 교우들에게 모국인 사제에게서 성사를 받을 수 있는 기회가 되었고 그들의 영성지도자로서 자리 매김이 되었습니다.
김대건 신부님께서 골배마실에서 전교활동을 할 때 사제직을 꿈꾸던 이민식(원선시오)은 김대건 신부님의 치명 소식을 듣고 시신을 거두기로 마음먹고 새남터로 달려갔으나 14일간이나 모래밭에 가매장된 시신은 국사범인 관계로 군졸들의 감시를 받고 있었습니다. 기회를 엿보던 이민식은 감시가 소홀해진 틈을 타 시신을 옮기게 됐습니다. 수의에 곱게 싼 머리는 가슴에 안고 동체는 걸방하여 짊어지고 사람들의 눈을 피해 끊임없이 묵주신공을 바치며 밤을 틈타 시신을 옮기던 이민식은 용인 땅에 들어서서야 한숨을 돌렸다합니다. 은이마을(골배마실)에서 미리내까지는 신덕, 망덕, 애덕이라 불리우는 험한 고개 셋이 있는데 마지막 애덕고개에서 날이새는 바람에 시신을 콩밭에 숨겨놓고 밤이 되기를 기다리기로 하였습니다. 해가 중천에 뜨자 농부들이 가을걷이를 하느라 콩밭으로 오는게 보였고 순간 가슴이 덜컥 내려앉은 그는 마음 졸이며 천주님과 성모님께 제발 무사하길 빌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맑았던 하늘이 어두워지면서 비가 쏟아지기 시작하여 농부들이 돌아가 시신을 무사히 보호할 수 있었으며 10월 26일에 김대건 신부님의 시신을 미리내에 있는 그의 선산에 모실 수가 있었습니다.
부모 슬하에서 15년, 해외생활 10년 ,사제생활 1년 1개월(옥중생활 4개월 포함)만에 영광의 순교를 하신 신부님께선 1925년 7월 5일 비오 11세 교황에 의하여 시복되시고, 1984년 5월 6일 교황 요한바오로2세에 의하여 성인품에 오르셨습니다
6.묵상(1-2분)
7.주의기도
+ 하늘에 계신
◎ 우리 아버지….아멘.
+ 김대건 안드레아와 정하상 바오로와 모든 한국 순교 성인 성녀들이여,
◎ 우리를 위하여 빌으소서.
8.마침성가: 가톨릭 성가 287장 “성 안드레아 김 대건 신부 노래” 3-4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