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시간 강론(마르 14,32-42)자료, 사랑에 대해

 

성시간 강론(마르 14,32-42)




예수님께 가장 사랑을 받던 제자인 요한 사도는 하느님의 신비를 꿰뚫어 보시고 “하느님은 사랑이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하느님은 사랑 자체이십니다. 사랑이신 하느님은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고 계십니다.


하느님이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시는가하면, 마치 이 세상에 사람은 오직 나 혼자 뿐이것 처럼, 이전에도 사람이 없었고, 앞으로도 사람은 없을 것 같이 오직 나 혼자뿐인 것 처럼 우리 한사람 한사람을 그렇게 친밀하게 사랑하십니다.


이러한 하느님의 사랑은 변덕이 없으시고 언제나 한결 같으십니다. 시편은 이러한 한결같으신 하느님을 “큰바위”라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은 언제나 인간을 사랑하고 계시며, 그 사랑 때문에 당신의 아드님까지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하느님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언제나 한결 같은 사랑을 보여주십니다. 하느님은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이것이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하느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은 어떠합니까?


하느님께서 이렇게 친밀히 우리를 사랑하고 계시지만 우리는 그분의 사랑을 느끼지 못하고 살 때가 많습니다. 내 형제를 통해서 당신을 보여주시고, 성체 안에서 이렇게 가까이 계시지만 우리는 그분을 잘 알아보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또 하느님께서 이렇게 한결같이 우리를 사랑하고 계시지만 우리는 나약해서 하느님께 대한 감사도 잊어먹고, 그분께 대한 사랑도 자주 변합니다. 겟세마니의 제자들도 단 한시간만이라도 깨어 나와 함께 기도 하자는 예수님의 간청도 불구하고 깊은 잠에 빠져버렸습니다.


하느님은 늘 우리와 함께 계시고, 변함없이 우리를 사랑하고 계시지만 우리는 늘 변덕스럽고, 그분을 잘 알아 뵙지 못합니다. 이것이 하느님께 대한 우리의 사랑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일상에서 주님을 잘 느끼지 못하고, 알아보지 못하는 것은 우리 마음이 순수함을 잃어가고, 때가 묻어가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어제 축일을 지낸 성 아우구스티노는 회개한 다음에야 비로소 이렇게 고백합니다. “이렇듯 오랜, 이렇듯 새로운 아름다움이여, 늦게야 님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내안에 님이 계시거늘 나는 밖에서 님을 찾아 헤메었습니다. 님은 나와 같이 계시건만 나는 님과 같이 아니 있었나이다.” 주님은 늘 함께 계셨지만 회개한 다음에야 비로소 눈이 밝아져 그분을 뵙게 되었습니다.


하느님은 깨끗한 마음을 가지고 있을 때 뵐 수 있습니다. 예수님도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하느님을 뵈올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학년이 올라가면서, 시간이 흐르면서 입학 때의 그 순수했던 마음, 수단을 처음 입었을 때의 그 깨끗했던 마음, 부제품 받을 때 그 뜨거웠던 마음을 잊어 먹곤 합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의 이러한 나약한 마음을 아시기에 이 시간 나와 함께 깨어 있어달라고 청하십니다. 그분은 지금까지 우리의 무관심으로 너무나 고독하셨습니다. 이 시간 다시한번 우리 마음을 깨끗이 가다듬고, 우리와 함께 계시는 예수님을 바라보고 느낍시다. 그리고 이 한시간 진정으로 주님 안에 머물며, 우리 주님을 위로해 드립시다.




“지금 내 마음이 괴로와 죽을 지경이니 너희는 여기 남아서 나와 같이 깨어있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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