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시 간
복 음 : 마르 14, 32~42
오늘 우리는 이 작은 방에 모여 ‘성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최후의 만찬 때 당신의 몸을 온전히 내어 주시기로 하신 분이 얼마 지나지 않아 제자들과 따로 떨어져서는 “무서워, 떨며, 번민하시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이미 결단은 났습니다. 당신은 최후의 만찬 때 자신의 살과 피를 빵과 포도주로 우리들에게 모두 내어주셨습니다. 하지만 뒤돌아 서서는 그 잔을 거두어 주시기를 성부께 기도하십니다. 이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하느님의 모습과 나약한 의지를 지닌 인간의 모습이 상반되면서도 잘 드러나는 부분입니다.
이제 온전한 하느님이시며 동시에 온전한 인간이신 그분께서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 홀로 남아 외롭고도 처절한 자신과의 싸움을 하십니다.
우리는 어디에 있습니까?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이 머물러 있는 곳, 우리도 그곳에 머물면서 홀로 기도하고 계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바라봅니다.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돌을 던지면 닿을 만한 거리”(루가 22,41) 정도라고 합니다. 하지만 그 사이에는 존재의 차원을 달리하는 깊은 심연이 있습니다. 야곱이 꿈에서 본 천국을 오가는 사다리는 아직 놓여지지 않았고 지성소를 구분 짓는 성전의 휘장도 아직 찢어지지 않았습니다. 인간이 자신의 존재로서 하느님과 만날 수 있고 그분의 생명에 온전히 참여할 수 있는 길은 아직 열리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으로부터 조금 떨어져서 그저 바라만 볼 따름입니다. 예수님만이 하느님과 인간 사이를 다니시며 세상의 구원을 위한 외로운 싸움을 계속하십니다. 그분의 성심은 극심한 고통에 쌓여 있습니다. ‘성시간’은 이러한 예수님의 고통받는 성심을 위로해 드리는 시간입니다.
여기서, 그분의 성심을 위로해 드린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요? 따뜻한 위로의 말 한마디를 건네는 것일까요? 아니면 우두커니 앉아서 감상적인 눈물만 흘리는 것일까요?
그건 아니겠지요? 분명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신 것이 있습니다.
“당신들은! 여기! 머물러서! 깨어 있으시오!”
예수님께선 세 번이나 제자들에게로 오셔서 당부하십니다. 당신과 함께 여기 머물러서 같이 깨어 있자고 하십니다. 이 깨어 있음은 멀찍이 떨어져서 팔짱끼고 구경이나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예루살렘 부인들처럼 자신들의 처지는 생각지 않고 동정의 눈물을 흘리기를 원하신 것도 아닙니다. 당신을 체포할 무리가 오는지 망을 보라고 깨어 있으라고 하신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깨어 있다는 건 육체적으로 눈만 뜨고 깨어 있는 상태가 아니라 매일, 매순간 깨어 있는 내적인 경각상태를 말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의 삶 안에서 깨어 있는 자세는 어떤 것일까요? 늘 되풀이되는 일상의 삶 속에서 깨어 산다는 건 어떻게 사는 것일까요?
불가의 선승들의 삶을 흔히 “운수행각(雲水行脚)”이라고 표현합니다. 바람 부는 대로 떠가는 구름이나 낮은 대로 흐르는 물처럼 한 곳에 머무르지 않고 이곳저곳 계속 떠돌며 도를 닦는다는 뜻입니다. 위대한 선승들은 깨달음을 얻을 때까지 결코 한 사찰에 오래 머무르지 않았습니다. 추위를 피한 ‘동안거(冬安居)’와 더위를 피한 ‘하안거(夏安居)’ 외에는 그 선방에 익숙해지고 편안함을 느끼기 전에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깁니다. 한 곳에 안주함으로써 오는 나태함과 게으름을 몰아내고 칼날 같은 정신으로 정진하는 자세입니다.
‘연어’라는 물고기가 있습니다. 산란기에 접어든 연어가 바다를 떠나 태생지인 하천의 상류로 돌아가 알을 낳는다는 것은 잘 알려진 내용입니다. 그러나 수천, 수만 킬로미터를 거슬러 올라가는 회귀본능이 놀라운 연어가 귀향하는 데는 숱한 어려움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연어가 처음 맞는 어려움은 바닷물과 강물의 성분이 다른 데서 생기는 신체의 적응문제입니다. 민물고기와 바다 물고기는 사는 물의 성분이 달라 혈액 농도의 차이가 납니다. 그래서 민물고기는 바다에서 살 수 없고 바다 물고기는 강에서 살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연적인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연어는 많은 노력을 합니다. 바닷물이 입을 통해 들어오면 있는 힘을 다해 염분을 버리고 물을 저장하려고 합니다. 반대로 민물이 들어오면 힘껏 물을 버리기 위해 신장이 작동하여 조절합니다. 이는 숨을 쉬는 매순간 끊임없이 되풀이해야하는 작업입니다. 잠시라도 멈추어서는 안되는 작업입니다. 이러한 어려움이 모두가 아닙니다. 또 다른 어려움이 찾아옵니다. 하천의 발원지, 즉 강의 최 상류 부근이 연어가 알을 낳는 장소이므로 이곳까지 물을 거슬러 올라가려면 쉬지 않고 헤엄을 쳐야 합니다. 잠시라도 멈추거나 머뭇거리게 되면 물살에 쓸려 하류로 떠내려갑니다. 목적지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더 큰 노력이 요구됩니다. 그리고 곳곳에서 작은 폭포 같은 것을 만나게 되는데, 3m 정도의 작은 폭포는 근육의 타력을 이용해 지느러미로 물을 때려 뛰쳐 올라갑니다. 목적지에 도착할 무렵이면 거의 모든 힘을 써 버리게 됩니다. 산란 장소에 도착하게 되면 마지막 힘을 모아 암컷은 5천개 정도 되는 알을 하나하나 따로 분리해서 강바닥에 낳고 수컷들은 그 주변에 모여들어 수정란을 만듦으로써 자신들의 임무를 끝냅니다. 여기서 연어들은 기운이 다 떨어져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이 시간, 우리 각자의 삶에서 깨어 사는 자세란 어떤 것인지 살펴보도록 합시다. 여기는 예수님과 나 외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나는 지금 예수님과 “돌을 던지면 닿을 만한 거리”에 앉아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당신과 “함께” 깨어 있자고 나를 부르십니다. 머리로만 깨어 있는 것이 아닌, 가슴으로, 두 손으로, 온 몸으로 깨어 있어야 할 것입니다.
2천여년 전의 게세마니 동산으로 들어가 봅시다. 아니, 2천여년 전 게세마니 동산에서 벌어졌던 그 사건을 지금, 이곳에 있는 나에게 일어나는 사건으로 볼 눈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