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원본과 원형 개념의 차이점
원형은 만물의 근원을 신으로 보는 입장인데, 원본은 그러한 사고의 근원을 더 분석해 들어가는 견해이다. 즉 무엇이 신의 전능한 힘으로 나타나게 되는가를 찾아가는 사고다. 그래서 원본은 원형이전의 보다 선행되는 존재의 근원문제가 된다. 즉 원본의 본이란 일정한 규격을 갖춘 형상이전에 그 형상의 바탕이 되는 근원이란 의미로 생각된다.
예컨대 버선 뽄, 옷의 스타일, 타입이전의 옷의 패턴을 본이라 할 수 있다.
즉 원형에 선행되는 사고근원이 원본이다. 존재의 원본은 카오스의 미분성이라고 했다. 신(神)도 카오스의 미분성에 기반을 두고 있다.
지금까지 논의된 원본사고는 무속의 현장을 있는 그대로 현상학적 입장에서 볼 때 영원은 시간과 공간밖에 있는 카오스의 것이고 현실을 영원으로 바꾸어 순환지속시켜 나가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제부터는(앞으로) 무속현장의 구체적인 자료를 통해 인간존재와 원본의 문제를 검토해 보고자 한다. 덧붙혀 여기서 말하는 존재란 인간사고나 무속에서 인간의 눈앞에 형체를 나타내어 ‘있는 것’, 형체는 없지만 인간의 ‘관념’속에 있는 것, 이런 것들을 ‘존재’라는 말로 압축시켜 놓은 것이다. 그렇지만 무속의 존재문제를 관찰하는 데 있어서, 어떤 이론적 전제가 무속현실보다 선행하여 그 이론에다 무속현실을 갖다 맞출 수는 없다.
이렇게 지금까지 서로 다른 의미인 원형과 원본의 개념을 얘기해 온 것은 앞으로 원형이라는 용어를 잠정적으로 사용하더라도 그 의미는 원본의 의미로 사용되는 것임을 밝히기 위한 것이다.
<요약, 평가>
무엇이 무속현상으로 나타나게 되었는가, 무속의 궁극적인 의미를 찾는다는 거창한 시작과는 달리, 제1절은 허탈한 결론에 이른다. 제1절의 내용은 쉽게 말해 무속 행위의 근원적인 사고를 표현하는 말로 학계에서는 지금까지 ‘원형’이라는 개념을 써왔다, 그러나 이는 우리나라의 실정에는 맞지 않으니 ‘원본’이라는 개념을 (저자는) 쓰겠다는 것이다.
원본사고란 신과의 관계에서 무속의 형태(type)를 찾는 원형사고와는 달리, 영원한 존재근원인 카오스로부터 무속의 本(pattern)을 생각해 보는 것이다. 이렇게 神을 무속사고에서 배제하는 이유는, 신에 의한 원형사고는 이미 도그마화된 思考로서 일정한 규격이 없는 다양한 형태의 무속현장을 커버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또한 무속에서의 神은 영원존재이면서도 人體와 같은 形象으로 이해되기에 신을 배제한다. 즉 신에게로 되돌아간다는 사고를 무속에서는 도저히 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무속에서는 모든 존재가 영원한 존재근원인 카오스로부터 존재를 받고, 순환성을 통해 존재가 다시 카오스로 돌아감으로써 존재가 영원히 지속되어 간다고 믿는다. 그래서 무속의 祭儀 目的은 인간존재의 영구지속(永久持續), 즉 이생에 살때 편히 잘먹고 잘살고 죽어서도 영생하게 해달라는 인간의 소박한 원의라 할 수 있다.
플로티노스의 유출(流出)설, 신학에서의 여러 이론(Apocatastasis, Recapitulatio)들을 이미 알고 있는 이들에게 무속에서의 이러한 사고는 아주 단순한 걸음마식의 사고라 치부할 수 있다. 하지만 어떤 이론적 전제가 무속현실보다 선행하여 그 이론에다 무속현실을 갖다 맞출 수는 없다는 저자의 주장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즉 지극히 현세적이고 인간적인 원의(願意)의 실현, 현실화가 바로 무속의 여러 현상들이고, 이러한 현상들은 너무나 다양하기에 어떤 정형화된 틀에 끼워 맞춘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정형화된 도그마에 얽매여 ‘현실’과 ‘삶’에 유리된 이론(신학)들을 전개하는 것보다 무속의 사고는 얼마나 더 인간적인가! 그래서 많은 이땅의 그리스도인들이 부지불식(不知不識)중에 이러한 무속의 사고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 않은가? 이러한 무속의 사고를 어떻게 신앙적으로 이끌어 줄 것인가, 무속의 사고와 그리스도교 신앙의 접합점은 어디에서 찾고, 어느정도까지 연결할 수 있을 것인가 여전히 과제로 남는다 하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