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現世的 性格
증산교의 구원관에서 나타나는 현세중심적인 성격을 논하기 이전에 먼저 한국인의 종교심성에 대해 언급할 필요가 있다. 증산교는 민족의 공통적 종교심성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에, 이에 대한 언급없이는 증산교의 구원관을 올바로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한국인의 전통적 종교적 심성은 “개똥 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라는 속담에서 드러나듯이 현세중심적이다. 이 현세중심적인 성격은 전통적인 신관과 저승관에 기인한다.
민간신앙에서의 여러 신들은 나름대로 각각의 영역안에서만 활동하며 인간을 도울 수는 있지만, 인간을 구원에로 이끄는 모습을 보이지는 않는다. 죽음을 넘어서는 영원한 구원자로서의 모습은 거의 찾아볼 수가 없다. 따라서 그 관심은 현세의 삶에로 집중될 수밖에 없다. 민담(民譚)에 나타나는 바와 같이 저승은 죽으면 누구든지 가야만 하는 막연한 곳으로서, 이승과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 없다. 저승의 모습은 이승의 모습이 그대로 전이(轉移)된 것에 불과할 뿐이다. ‘새 하늘 새 땅’이라고 하는 성격을 전혀 가지지 않고 있다.
그 대신 이 세상 속에, 적어도 이 세상 저쪽 어딘가에는 부(富)나 영원한 생명 등에 대한 꿈이 실현되는 별천지가 존재한다고 믿었다. 이 세상과 별개(別個)의, 다른 차원의 저승에서가 아니라 현세의 연장선상(延長線上)에서 모든 꿈이 이루어져 영원히 살기를 소망했던 것이다.
결국 재생설화나 변신설화를 통해서 볼 수 있듯이 한국인은 현세의 삶에 집착하였고, 더 나아가 인간 삶을 절대시하였다. 따라서 현세의 삶으로 오래도록 사는 것이 최고의 복이라고 보았고, 그것은 대표적으로 현세의 삶을 영원히 연장시키는 것으로서의 신선이 되기를 희망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현실 초월’과 ‘영원’에의 희망이 ‘현세 안에서’로 제한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것은 자연히 인간중심 사상과 현실적인 가치만을 절대시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 인간은 신이나 다른 동물들마저 인간을 부러워하는 가장 귀한 존재라는 생각을 가지게 된 것이다. 신은 인간을 도와주는 존재를 넘어 인간에게 봉사하는 존재라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더 나아가 인간이 신을 부릴 수 있다고 하는 차원에로까지 이르게 되었다. 여기서 ‘신이 인간을 돕거나 인간이 신을 부린다’고 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현세적인 복의 추구에로 집중되어 있다.
실제로 巫俗은 인간의 현실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편이며, 궁극적으로 재앙(災殃)을 피하고 복을 받음으로써 인간의 욕구를 채우려는 시도이다. 욕구중에서도 물질생활의 생계유지나 병의 완치, 풍부한 재산을 가지려고 하는 것과 관계가 깊다. 재수굿이나 우환굿, 사령굿 등 모두가 현세의 삶을 충만히 살고자 하는 원의(願意)에서 행하여지는 것들이다. 특히 원한을 가진 사령(死靈)이 저승으로 잘 가기를 기원하는 ‘씻김굿’에서 그 궁극적인 목적은 어디까지나 원혼(寃魂)이 살아있는 사람들에게 재앙을 그만 끼치고 조상신이 되어 후손들을 도와 주는 신이 되기를 바라는 데에 있다. 죽은 자에 대한 관심보다는 산 사람이 잘 살기를 바라는 마음이 더 컸던 것이다.
결국 한국인의 전통적인 종교적 심성은 현세중심적, 나아가 현세집착적 성격을 띠고 있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장수하며 영원히 행복하게 살기를 바라는 것은 어느 민족에게나 동일할 것이나, 우리 민족은 이러한 모든 것이 바로 현세에서 이루어지기를 바랐다고 볼 수 있다. 내세(來世)에 대한 관념, 즉 저승이 있기는 하지만 저승에서의 삶이 그러한 염원을 해결하여 주는 새로운 세상이라고는 믿지 않았던 것이다. 그 이유는 ‘영원히 행복한 삶에로 이끄는 구원자로서의 절대신’의 개념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현세중심적인 성격은 신라시대에 풍미(風靡)했던 미륵신앙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신라시대의 미륵신앙은 원래의 불교사상과는 다른 한국적 불교사상으로 발전한 것으로 보인다. 미륵은 원래 죽은 혼령을 저승에서 좋은 곳으로 천도하는 역할을 하였는데, 신라의 불교는 미륵이 이 세상에 下降하여 현세의 인간을 구제하는 역할을 하도록 하였다. 미륵은 하잘것 없는 노인의 모습으로 나타나거나 거지의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미륵을 저 세상에 놓아두지 않고 이 세상으로 끌고 왔던 것이다.
증산은 이러한 민족 在來의 종교적 심성을 바탕으로 하여, 해원을 통한 천지공사의 결과로써 후천선경, 지상낙원이 이루어진다고 하였다. 후천세계의 낙원이 ‘이 세상’에서 이루어지는 것을 그리고 있다. 神明들에 관하여 수많은 언급을 하고 있지만 이 神明들은 여전히 현세와 밀접히 관련되어 있으며, 연극의 주역은 역시 이 세상에 있는 인간들이고 그 보조역을 하는 것이 신명들이라는 인상을 강하게 풍기고 있는 것이다.
증산의 지상낙원은 인존시대라고 표현한 바와 같이 인간중심적이다. 현세중심적이다. 현세에 사는 억압받는 민중을 구원하는 것이 전부이다. 신을 언급하지만 그것은 민중에게 다가가기 위한 방법의 하나이다. 따라서 천지공사라는 것은 증산 자신의 실조의식(失調意識)의 해결책이라고 할 수도 있는 것이다. 만약 그가 자신에게 당시의 혼란을 극복해낼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었더라면, 장길산의 미륵운동(彌勒運動)이나 東學과 같은 길을 걸었을 지도 모른다. 모순된 사회현실, 구조적 문제 등을 개혁할 만한 현실적인 힘이 없었기에 종교적인 방법으로의 전환으로 자신의 실조의식을 해결하려 한 것이라고도 볼 수 있는 것이다. 증산교의 구원은 현세에서 평등하고 억압이 없는 상태에서 인간답게 사는 것, 아무도 억울한 일을 당하고 않고 행복을 누리는 것일 뿐이다.
大巡典經 5:16에서는 후천개벽 이후 지상에 낙원이 도래(到來)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 때가 되면 지상에서 사는 인간이 不老․不死와 자유욕구대로 하여도 거리낌없이 자유로운 인간, 과거․현재․미래를 꿰뚫어 보는 知慧人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과연 육체를 가지고 있는 인간이 그렇게 될 수 있을지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인간은 육체를 가지고 있음으로써 동물성의 제한을 받고 있고, 의식과 무의식이 갈라져 있으며, 인간사회에 항상 그림자적인 측면을 지니고 있다. 후천세계에서 인간이 모두 육체를 벗어 던지고 천사(天使)처럼 탈바꿈을 하지 않은 한 그러한 일이 벌어질 수 없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또한 척(慼)짓지 않고 원한을 풀면서 살면 지상천국이 빨리 이루어진다고 했는데, 地上天國이 오기 전에 죽은 인간에 대한 문제도 의문점을 제공하고 있다. 죽어 신명이 되어 신명계에 올라가 인간과 관계를 맺고 있다가, 때로는 신안이 열린 인간에게 부림을 당하기도 하다가, 지상 선경이 이루어지면 그 땅에 사는 인간에게 기생(寄生)하여 살아간다는 것일 수도 있다. 神明과 人間이 同樂하는 것이 선경이라고 하고 있으나 아무래도 그 중심은 죽은 인간의 혼인 신명보다는 인간에게 있다. 후천은 인간이 하늘보다 땅보다 존엄한 시대이기 때문이다.
결국 증산이 이야기하는 인간 구원은 인간의 안정되고 완성된 구원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자신을 만드신 절대자와의 관계 안에서 영원히 그리고 안정되게 새로운 삶을 이어가는 구원이 아닌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