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사회·경제적 상황
조선말 사회구조 상의 현저한 특징의 하나는 양반 계급의 증대였다. 조선 사회에서는 과거제도 외에 신분 상승의 길은 극히 드물었고, 이런 신분 상승에도 한계가 있었다. 그런데 조선 말기에 공명첩이나, 납속책, 호적 위조, 족보 매매 및 위조, 홍패 위조로 양인이나 노비가 양반의 신분으로 신분 상승을 했다. 이로 인해 과거 제도의 문란이 일어났으며, 일반 민중에게 과중한 과세를 부담하여 소작농으로 전락하게 되었다.
경제적 악화의 요인중 하나는 토지 소유 관계와 삼정문란에 따른 것이 많았다.
본래 20년마다 규칙적으로 실시되던 양전은 양란 이후 제대로 실시되지 못해, 토지 경계가 불분명해 졌고, 진전과 기전이 혼동되어 총 전결수는 증가하였는데도 오히려 실결수는 감소하는 기현상이 일어났다. 그리고 궁방전과 둔전의 증가로 민전이 감소되었다. 그나마도 거의 부농층이 소유하고 있었기에 일반 농민은 영세농으로 전락하게 되었다.
군포의 경우, 마을 단위로 총액제가 시행되고 양인만이 부담하기 때문에 양인 비율이 감소하는 시대 상황에서 1인당 부담해야 할양이 늘어났다.
환곡은 삼정 중에서 폐해가 가장 켰다. 환곡은 빈민을 구제한다는 본래의 목적과는 다르게 국가 재정의 고갈을 핑계로 영리를 목적으로 한 고리대로 운영됨으로써 빈민의 부담을 가중케 할뿐이었다.
어려운 경제적 상황 속에 고질적인 것은 지방 행정의 말단 관리자들인 아전 및 이서(吏胥)의 지방민에 대한 수탈이다. 이들은 지방 토착민으로 지방 행정을 장악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급료가 없었기 때문에 부정 부패가 더 심해 질 수밖에 없었다.1)
3. 사상적 상황
이 시대에 재래 종교인 유교·불교·도교는 사회적 혼란을 극복할 수 있는 정신적인 지주가 되지 못했다.
조선왕조 후기에 들면서 지금까지의 유학은 한편으로 사장(詞章)위주로 발전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성리학과 주자학 일변도의 경향을 때어서 그 원래의 經世의 學으로서 실효를 거두기에 어렵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반상차별의 계급사상으로 변질되어 민중과는 거리감을 갖고 있었다.
불교는 조선왕조의 숭유억불 정책 때문에 그 명맥만을 유지할 뿐 유학의 공백을 대신할 수 있는 사상은 되지 못했다. 도교는 노장사상의 한국적 재현으로 은둔사상과 연결, 높은 선비들의 피난처와 담소처로 이용될 뿐, 사상적 부재 현상을 해결해 주지 못했다. 단지 풍수도식화(風水圖識化)하여 민간에 유행하는 토속 신앙으로 변질되고 말았다.
서학(天主敎)은 지배층까지 전파되어 있었다. 이것은 위기 의식 조장에 큰 원인이 되었다. 이것은 서양의 물리적 도전뿐만 아니라 사상적인 위기도 시사하고 있다. 온 민중은 다방면의 위기 속에서 전전긍긍했다.
이렇게 정치·경제·사회·사상적 상황이 어수선하고, 궁핍한 생활을 하고 있는 일반 백성들에게 그들이 살아갈 수 있는 방향이 필요했으나 충분히 제공 해주는 것이 없었다. 이러한 시기에 최제우는 후천개벽(後天開闢)과 인내천(人乃天)을 주장하며 東學을 창도했다. 이것은 일반 백성의 요구에 부합되었다.

2. 사회·경제적 상황
조선말 사회구조 상의 현저한 특징의 하나는 양반 계급의 증대였다. 조선 사회에서는 과거제도 외에 신분 상승의 길은 극히 드물었고, 이런 신분 상승에도 한계가 있었다. 그런데 조선 말기에 공명첩이나, 납속책, 호적 위조, 족보 매매 및 위조, 홍패 위조로 양인이나 노비가 양반의 신분으로 신분 상승을 했다. 이로 인해 과거 제도의 문란이 일어났으며, 일반 민중에게 과중한 과세를 부담하여 소작농으로 전락하게 되었다.
경제적 악화의 요인중 하나는 토지 소유 관계와 삼정문란에 따른 것이 많았다.
본래 20년마다 규칙적으로 실시되던 양전은 양란 이후 제대로 실시되지 못해, 토지 경계가 불분명해 졌고, 진전과 기전이 혼동되어 총 전결수는 증가하였는데도 오히려 실결수는 감소하는 기현상이 일어났다. 그리고 궁방전과 둔전의 증가로 민전이 감소되었다. 그나마도 거의 부농층이 소유하고 있었기에 일반 농민은 영세농으로 전락하게 되었다.
군포의 경우, 마을 단위로 총액제가 시행되고 양인만이 부담하기 때문에 양인 비율이 감소하는 시대 상황에서 1인당 부담해야 할양이 늘어났다.
환곡은 삼정 중에서 폐해가 가장 켰다. 환곡은 빈민을 구제한다는 본래의 목적과는 다르게 국가 재정의 고갈을 핑계로 영리를 목적으로 한 고리대로 운영됨으로써 빈민의 부담을 가중케 할뿐이었다.
어려운 경제적 상황 속에 고질적인 것은 지방 행정의 말단 관리자들인 아전 및 이서(吏胥)의 지방민에 대한 수탈이다. 이들은 지방 토착민으로 지방 행정을 장악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급료가 없었기 때문에 부정 부패가 더 심해 질 수밖에 없었다.1)
3. 사상적 상황
이 시대에 재래 종교인 유교·불교·도교는 사회적 혼란을 극복할 수 있는 정신적인 지주가 되지 못했다.
조선왕조 후기에 들면서 지금까지의 유학은 한편으로 사장(詞章)위주로 발전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성리학과 주자학 일변도의 경향을 때어서 그 원래의 經世의 學으로서 실효를 거두기에 어렵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반상차별의 계급사상으로 변질되어 민중과는 거리감을 갖고 있었다.
불교는 조선왕조의 숭유억불 정책 때문에 그 명맥만을 유지할 뿐 유학의 공백을 대신할 수 있는 사상은 되지 못했다. 도교는 노장사상의 한국적 재현으로 은둔사상과 연결, 높은 선비들의 피난처와 담소처로 이용될 뿐, 사상적 부재 현상을 해결해 주지 못했다. 단지 풍수도식화(風水圖識化)하여 민간에 유행하는 토속 신앙으로 변질되고 말았다.
서학(天主敎)은 지배층까지 전파되어 있었다. 이것은 위기 의식 조장에 큰 원인이 되었다. 이것은 서양의 물리적 도전뿐만 아니라 사상적인 위기도 시사하고 있다. 온 민중은 다방면의 위기 속에서 전전긍긍했다.
이렇게 정치·경제·사회·사상적 상황이 어수선하고, 궁핍한 생활을 하고 있는 일반 백성들에게 그들이 살아갈 수 있는 방향이 필요했으나 충분히 제공 해주는 것이 없었다. 이러한 시기에 최제우는 후천개벽(後天開闢)과 인내천(人乃天)을 주장하며 東學을 창도했다. 이것은 일반 백성의 요구에 부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