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귀섭리연장시대에 있어서의 역사발전 1

   Ⅱ. 복귀섭리연장시대에 있어서의 역사발전




      1. 복귀섭리와 서양사


 기독교를 박해하던 <로마>제국은 4세기 말에 이르러 드디어 돌아가신 예수님 앞에 굴복하고, 기독교를 국교로 정하게 되었다. 그러나 당초에 <유대>민족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고 모시어 하나가 되었더면, <로마>제국을 중심하고 지중해를 기반으로 한 고대 통일세계는 응당 살아 계신 예수님에게 감화되어, 그를 왕으로 모시고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한 왕국을 이루었을 것이었다. 그러나 <유대>민족은 불신으로 돌아갔기 때문에 멸망하였고, <메시아>왕국을 위한 터전이 되었어야 했던 <로마>제국도 점차 쇠퇴하기 시작하여, 서기 476년에는 서<로마>가 <게르만>의 용병대장 <오도아케르>에 의하여 패망되고 말았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복귀섭리는 원한의 땅 <유대>에서 서<로마>의 판도였던 서구로 옮겨지게 되었다.


 따라서 예수님 이후에 있어서의 기독교에 의한 영적 복귀섭리는 서구를 발판으로하고 나왔기 때문에, 이 시대의 복귀섭리역사는 서구에서만 본보기노정을 따라서 발전하게 된 것이다. 유물사관에서 논하고 있는 역사발전과정도 서구의 역사에서만 적응되고 있는바, 그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되어 서구를 중심한 기독교사는 복귀섭리연장시대를 만든 중시적인 역사자료가 된 것이다.




       2. 종교사와 경제사와 정치사의 상호관계


  하나님이 인간으로 하여금 유형 무형의 두 세계를 주관하도록 하시기 위하여, 육신과 영인체의 두 부분으로써 인간을 창조하셨다 함은 이미 창조원리에서 논술되었다. 그러므로 인간이 타락되지 않았더면 그의 영인체와 육신이 함께 성장하여 완성됨으로써, 영 육 양면의 지성이 동시에 지상의 육신생활 가운데서 완전한 조화를 이루었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타락됨으로 인하여 영 육 양면의 무지에 빠지게 되었었다. 여기에서 인간의 영적인 무지는 종교에 의하여, 그 육적인 무지는 과학에 의하여 일깨워져 나왔던 것이니, 이에 관해서는 이미 전편 제3장 제5절 Ⅰ에서 논하였다.


 그런데 영적인 무지는, 종교로써 타락인간 가운데 잠재해 있는 그 본심을 불러 일으킴으로써, 그들이 보이지 않는 원인적인 세계를 찾아 나아감에 따라 점차 일깨워져 왔다. 그러나 종교는 누구나가 다 긴절한 필요성을 느끼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영적인 면의 깨우침은 어느 특수한 인간에 있어서는 비약적이기도 하지만, 일반적으로는 대단히 느린 것이다. 이것은 종교가 세계적으로 보편화되어 있는 오늘에 있어서도, 영적인 면에서는 고대인이나 큰 차이가 없는 인간들이 많이 있다는 사실로써 미루어 알 수 있다.


 그런데 이와는 반대로 육적인 무지는, 누구나 인식할 수 있는 결과의 세계 즉 자연계(육계)에 대한 대한 것을 과학적으로 탐구하는 것으로써 일깨워져 왔다. 그리고 과학은 현실을 타개하는 것이기 때문에 누구에게나 매우 필요하다. 그러므로 육적인 무지에 대한 계발은 급진적이면서도 보편적이다.


 이렇듯 찾아가는 대상이, 종교의 경우 그것은 보이지 않는 원인의 세계여서 초현실적인 것인데 반하여, 과학에서는 보이는 결과의 세계 즉 물지세계를 다루므로 현실적인 것이기 때문에, 지금까지 종교와 과학은 이론적으로 타협할 수 없는 것으로 상충되어 왔다. 그뿐 아니라 피조세계의 주권을 갖고 있는 사탄이 현실생활을 통하여 인간에게 침범하는 관계로, 지금까지 종교의 길은 현실을 버리지 않고는 갈 수 없는 것으로 생각되어 왔기 때문에, 현실을 추구하는 과학과 서로 조화될 수 없었던 것은 당연하다. 다음 장 제1절에서 상세히 논급하겠거니와, 하나님이 원래 인간의 외적인 육신을 먼저 창조하시고 다음으로 내적인 영인체를 창조하셨기 때문에(창세기 2장 7절), 재창조원칙에 의한 복귀섭리도 외적인 것에서 내적인 것으로 복귀해 가는 과정을 밟게 된다. 이러한 섭리적 원칙으로 보더라도 과학과 종교가 서로 조화될 수 없는 발전과정을 밟아 나온 것은 사실이다.


 이러한 부조화는 종교와 경제의 관계에 있어서도 또한 마찬가지이다. 그것은 경제도 역시 과학과 같이 현실세계에 속하는 것으로서, 더우기 과학의 발달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발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계로 인하여 하나님의 내적인 섭리에 의한 종교사와 그 외적인 섭리에 의한 경제사는, 그 발전에 있어서 서로 방향과 진도를 달리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와 같이 하나님의 복귀섭리의 본보기노정을 밟아온 서구에 있어서의 역사발전을 섭리적인 면에서 이해하기 이하여는, 기독교사와 경제사를 따로 갈라지고 고찰해 보지 않으면 아니 된다.


 그런데 종교와 과학이 그러하듯이, 종교와 타락인간의 내 외 양면의 생활을 각각 분담하여 복귀해야 될 사명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것들이 전혀 관계없이 발전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종교와 과학, 따라서 종교와 경제는, 그 발전과정에 잇어서 서로 상충적인 면을 지니면서도, 우리의 사회생활과 결부되어 각각 기독교사와 경제사를 이루어 온 것이다.


 그러면 그것들은 우리의 사회생활과 어떻게 결부될 수 있었던가 ? 그것은 바로 정치에 의해서였다. 기독교화했던 서구에서였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서구에 있어서의 정치는 급진적인 과학의 발달에 따르는 경제발전과, 복귀섭리의 뚜렷한 방향을 잡지 못하고 헤맸던 기독교의 움직임을 사회생활 가운데서 조화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에, 그의 정치사는 종교와 경제를 조화시키려는 또 하나의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복귀섭리를 위한 역사의 발전을 정확하게 파악하기 위하여는, 정치사도 역시 별도로 살펴보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에 대한 실례로서, 17세기 말엽에 있어서의 서구의 역사를 놓고 그 발전과정을 살펴보자.


 먼저 종교사의 면에서 살펴보면, 이 시대에는 이미 기독교민주주의사회가 이룩되어 있었다. 즉 1517년의 종교개혁으로 인하여 교황이 독재하던 영적인 왕국이 무너짐으로써, 중세인들은 교황에 의해 지배받던 신앙생활에 해방되어, 누구나 성서를 중심하고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었다. 그러나 정치사의 면에서 보면 이 시대에는 전제군주사회가 나타나 있었고, 경제사의 면에서는 아직도 장원제도에 의한 봉건사회가 그대로 존재하고 있었다. 이와 같이 같은 시대의 같은 사회가 종교면에서는 민주주의사회가 되고, 정치면에서는 군주주의사회가되며, 경제면에서는 봉건주의사회가 되기 때문에, 복귀섭리의 입장에서 이 시대의 성격을 파악하기 위하여는, 그 발전과정을 각각 별도로 살펴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면 복귀섭리시대(구약시대)에 있어서의 역사발전은 어찌하여 그러한 과정을 밟아 나오지 않았는가 하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할 것이다. 고대사횡 있어서는 과학의 발달이 거의 정돈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경제발전도 역시 그러하였다. 아직도 생활양식이 분화되기 전인 구약시대의 이스라엘민족은 지도자들의 명령에 의하여 엄격한 율법에 따르는 주종관계의 사회제도 아래서 단순한 생활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종교생활은 곧 그들의 사회생활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종교와 정치와 경제가 분립된 발전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3. 씨족사회


 그러면 우리는 여기에서 복귀섭리연장시대(신약시대)에 있어서의 종교와 정치와 경제 등의 각 부면으로 본 역사발전은 어떻게 되었는가 하는 것을 알아보기로 하자.


 사탄을 중심한 원시공동사회는 하나님의 복귀섭리에 호응하는 인간의 본심의 작용에 의하여 분열되어, 그 중에서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인간이 분립됨으로써, 하늘편 씨족사회가 이룩되었다 함은 이미 위에서 밝힌 바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예수님을 죽인 유대민족은, 이미 사탄편 계역로 전락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 사회를 그대로 두시고는 복귀섭리를 할 수 없으셨던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은 이 사회를 분열시켜 그 가운데서 독실한 기독교 신도들을 부르시어, 그들을 중심하고 기독교씨족사회를 세우셨던 것이다.


 구약시대에 있어서 야곱의 12자식을 중심한 70가족이 이스라엘씨족사회를 이룩하여 섭리노정을 출발했던 것과 같이, 신약시대에 있어서는 예수님을 중심한 12제자와 70문도가 기독교 씨족사회를 이룩하여 섭리노정을 출발했던 것이다. 기독교씨족사회는 원시기독교사회였기 때문에, 그때는 아직도 정치나 경제 에 있어서의 어떠한 제도가 필요하지 않았던 시대였다. 따라서 이 시대에는 종교와 정치와 경제가 분립된 발전을 할 수 없었다.


 기독교씨족 사회는 지중해를 기반으로 한 고대 통일세계 안에서 로마제국의 극심한 박해를 받아가면서 번성하여 기독교부족사회를 형성하는데 이르렀었다. 그리고 4세기 후반으로부터 시작외었던 민족들의 대이동에 의하여 서로마제국은 드디어 476년에 쇠망하였고, 그 판도 안으로 이동해 온 게르만민족에게 기독교가 침투됨으로써 그들을 중심하고 광범한 기독교사회가 이루어졌던 것이다.


         4. 봉건사회


 역사의 발전과정에 있어서 씨족사회 다음에 오는 것은 봉건사회인 것이다. 그리하여 서로마제국의 멸망을 전후하여 왕권이 약해지고 국가가 무질서한 상태에 빠졌을 때, 봉건사회는 이루어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 때부터 서구의 기독교사회는 종교와 정치와 경제가 분화되어, 각각 서로 다른 발전을 해 나아가게 되었다. 봉건사회는 대․중․소의 영주와 기사들 사이에, 복종과 봉사를 전제로 하고 맺어진 주종관계에 의한 정치제도와, 장원제도에 의한 봉쇄적인 자급자족의 경제제도로써 이루어졌었다. 국토는 많은 영주들에 의하여 분활되었고, 국왕은 사실상 영주 중의 하나였으므로 국왕의 권력도 지방분권적이었다. 영주들은 상부로부터 은대지로 토지를 분배받아 그들의 독립영지를 이루고 그 안에서 재판권까지 행사하였었다. 따라서 이 영지는 거의 국가 권력을 떠난 개인 영토나 다름없었다. 이렇게 되어진 개인의 영토를 장원이라 한다.


 자작농의 하인들이 주권자들의 보호를 받기 위하여, 자기의 소유지를 영주 또는 사원에 바치고, 그 토지를 다시 은대지로 대여받아서 된 장원도 있었다. 이와 같이 되어 장원은 전국에 퍼져 있었던 것이다. 최하급의 기사는 하나의 장원을 나누어 받아 영주에게 사병으로서 종사하였지만, 국왕이나 영주는 수백 수천의 장원을 소유했던 것이다.


 종교면에서도 그것은 기독교를 중심하고 위에서 말한 봉건사회와 똑같은 방향으로 발전하게 되었으니, 이것을 기독교봉건사회라고 한다. 즉 교구장, 대주교, 주교는 대․중․소의 영주에 해당되는 지위를 가지고 있었고, 국왕이 영주 중의 하나였던 것과 같이 교구장 중의 하나였다. 거기에도 절대적인 주종관계에 의한 종교적인 정치제도가 있었고, 주교들은 신자들로부터 바쳐진 봉토를 가지게 되어, 그들은 봉건적 계급층들 중에서 유력한 지위를 가지고 있던 영주들이기도 하였다.


 다음으로 경제면에서 이 시대를 살펴 본다면, 이 시대는 고대 노예제도에서 장원제도로 옮겨진 시대였다. 따라서 평민들이 이 때부터 토지를 가질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이 시대의 토지제도에 의한 신분은 대체로 지주, 자작농, 농노(반자유신분), 노예(부자유 신분) 등의 네 계급으로 갈라져 있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게르만민족을 새로운 선민으로 교화하여 봉건사회를 세움으로써, 쇠망한 서로마의 터전에다, 종교와 정치와 경제의 3면으로 소단위의 하늘편 판도들을 강화하여, 장차 하늘편 왕국을 건설하기 위한 터전을 마련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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