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의 단계

 

기도의 단계1)

 기도생활의 열정은 하느님께 대한 사랑의 열정과 비례합니다. 대데레사 성녀께서 가르치신 기도의 단계는 그리스도적 완덕을 향한 상승의 정도를 표현하는데 다음과 같습니다.

 ①구송기도    ②묵상   ③정감의 기도   ④단순함의 기도   ⑤주부적 관상

 ⑥정적의 기도   ⑦일치의 기도   ⑧순응일치의 기도   ⑨변형일치의 기도




①에서 ④까지는 주로 영성생활의 수덕단계에 속하고, ⑤에서 ⑨까지는 주입기도로서 신비적 단계에 속합니다. 기도는 수덕적인 것과 신비적인 것으로 크게 구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영성생활에서 초보단계에도 신비적 기도가 있을 수 있고 또 신비적 방법에 진보한 이에게도 수덕적 기도가 나타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신비적․수덕적이란 말마디는 양자 중 우세한 것이 어느 것이냐에 따라 구별하는 것일 뿐 한편이 다른 것을 배제하지는 않습니다.




1. 구송기도2)

 구송기도는 글이나 말이나 관계없이 말마디로 표현된 기도형식을 뜻합니다. 이런 유의 기도는 공적 기도나 전례기도에서 사용되는 형식이지만 개인적으로도 많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성 토마스는 구송기도가 어울리는 이유를 세 가지로 들었습니다.

① 내적인 신심을 불러일으킨다.

② 마음과 정신과 함께 몸으로 하느님께 존경을 드린다.

③ 영혼을 기도의 분위기도 몰아넣는(하느님을 만날 수 있도록 준비시키는) 영적 정감을 표현한다.




구송기도에서 요구되는 것은 주의(attention)와 신심(devotion)입니다. 주의라는 것은 깨어 있는 것입니다. 자신이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어떤 지향을 가지고 기도하고 있는지를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도하고 있는지, 분심 중에 있는 지를 깨닫는 것입니다. 운전을 할 때 네비게이션이나 이정표의 안내를 따라 목적지로 가는데 이정표를 보지 못하거나 네비게이션의 안내를 듣지 못하면 다른 곳으로 갈 수 있고, 더 나아가 가고자 하는 목적지를 잃어버리면 결국 다른 곳으로 빠져 버립니다.

 성녀 데레사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기도함에 있어서 누구에게 기도하는지, 무엇을 청하는지, 청하는 자가 누구며 누구에 대하여 청하는지를 유의하지 않는다면 아무리 입술을 놀려 댔자 그것은 기도라 할 수 없다.”

 어떤 이는 기도 중에 잠을 자는 것도 기도라고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주의가 빠져 버린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잠을 자는 것입니다. 인정할 것은 인정해야 합니다.




 둘째로 요구되는 것은 신심입니다. 이것은 주의를 보충하는 것으로 주의로써 기도실천에 지성을 사용하는 것이라면, 신심으로써 우리의 의지를 하느님께로 향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공동기도는 신자들의 신심을 불러일으켜 싫증을 느끼지 않도록 해야 오래 계속될 수 있습니다.

     7 너희는 기도할 때에 다른 민족 사람들처럼 빈말을 되풀이하지 마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해야 들어 주시는 줄로 생각한다. 8 그러니 그들을 닮지 마라.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신다.”(마태6,7-8)




2.묵상3)

 기도생활을 게을리 하면서 활동에만 전적으로 몰두함으로써 성덕을 열망하는 사람들은 그리스도교적 완덕에 관해 망각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기도생활을 대신 보충할 수 있는 것은 절대로 없다는 사실은 경험을 통해 증명됩니다. 기도생활을 하지 않으면서 매일 미사에 참례하여 성체를 모신다 할지라도 성체성사로 얻은 힘을 발휘할 수 없습니다. “매일미사에 참례하는 냉담자”4)가 얼마나 많이 있는지 알고 있다면 이 말은 깊이 이해가 될 것입니다. 묵상기도를 하지 않으면 성체를 모셔도 가슴 뜨거워지지 않고, 성체 앞에 더 가까이 나아가려는 열망도 없고, 봉사생활을 하고자 하는 열정도 없어집니다. 또 성당에서 다른 생각을 하게 되고, 다른 이들에게 분심까지 주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묵상기도의 부족에서 오는 것입니다. 기도서에 나와 있는 아침저녁기도를 다 외웠다고 “기도 다했다.”고 말하는 경우가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묵상기도를 전혀 하지 않거나, 하더라도 기계적으로 행하는 사람들은 완덕에 도달하기 어렵습니다.




추리적 묵상은 초자연 진리가 지닌 의미를 꿰뚫어보고, 그것을 사랑하며 은총의 도움으로 그것을 실천하기 위해 그것에로 마음을 돌려 추리하는 것을 말합니다. 따라서 묵상기도의 특징은 추리적 형태의 묵상이고 따라서 주의 (attention)는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묵상이 아니라 공상이나 상상으로 떨어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추리하고 논리적으로 생각하는 활동이 그치면 묵상도 끝나게 됩니다. 추리작용이 없으면 묵상이 아닙니다.




① 묵상의 본질

묵상은 공부나 사색과는 다른 기도의 한 형식입니다. 묵상의 목적이나 결말이 공부나 사색의 목적과 다르기 때문입니다. 묵상은 이중적 목적을 지닙니다. 지적 목적성과 정감적 및 실천적 목적성입니다.

묵상은 초자연 진리에 관한 확고한 신념에 도달하는 것이므로, 묵상에서는 지성의 작용은 무척 중요합니다. 그러나 사색적 연구로도 확고한 신념을 얻을 수 있는 만큼 지적 목적성이 묵상의 중요한 목적이 될 수 없고, 지적 사색이 묵상을 참된 기도로 만들지도 못합니다. 묵상의 가장 중요한 요소는 지성이 제시하는 초자연 진리에 대한 사랑의 의지적 행위입니다. 아빌라의 데레사가 언급한 것처럼, 묵상은 많이 생각하는 데 있지 않고 많이 사랑하는데 있습니다. 추리작용은 단순히 사랑을 일으킬 준비에 불과합니다.




3. 정감의 기도

 정감의 기도란 의지작용이 지성의 추리작용보다 우세한 형태의 기도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정감의 기도란 사랑이 우세한 단순화된 묵상입니다. 어떤 이들은 본성적으로 감정적이고 감응되기 쉬워서 쉽게 지적 추리에서 의지의 활동으로 옮겨가게 됩니다. 그러나 또 어떤 이들은 본성이 냉랭하고 경직하여 그들의 기도는 거의 전적으로 추리적이기에 의지의 감정(정감)은 별로 표현되지 않습니다. 그런 이들이 정감적 기도를 하려면 많은 시간과 경험이 필요합니다. 그렇다면 언제 추리묵상에서 정감적 묵상으로 옮겨갈 수 있을까요? 매일 묵상을 하면 묵상의 어떤 점이 일으켜 주는 감정을 이따금씩 체험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될 때, 우리는 자신을 겸손히 사랑의 행위에 맡기고, 이런 활동이 점점 자주 일어나게 됨에 따라 추리적 묵상에서 정감적 기도로 이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3. 1. 정감적 기도의 실천

 추리적 묵상과 영적 독서는 정감의 기도 실천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여기서 의지의 행위를 자극하는 자료를 얻게 됩니다. 그러므로 정감(애정)이 유발되기 전에 추리적 묵상을 그치지 않도록 유의해야 합니다. 잘못하면 시간낭비와 망상의 근원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정감이 자발적으로 떠오르지 않을 때는 추리기도나 구송기도로 돌아가야 하고, 우리 자신의 노력으로 정감을 오래 지니려 하지 말아야 합니다. 정감기도의 실천은 묵상재료를 하나하나 고찰해 나가다가 의지의 정감이 유발되는 매 순간 추리묵상을 잠시 멈춤으로써 가장 잘 수행됩니다. 영적 독서를 할 때나, 기도서를 이용하여 기도할 때 이렇게 함은 좋은 방법입니다.




3. 2. 정감기도의 위험

① 우선 억지로 애정과 의지작용을 불러일으키려 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느님께 대한 열렬한 사랑의 행위를 불러일으키기 위해 애를 쓰는 것은 허사입니다. 사랑의 행위는 자발적으로 일어나야 하고, 또 만사에 있어서 오직 또 단순히(순수한 사랑에서) 하느님께 영광을 돌리려고 애쓰고, 또 자신의 동기를 초자연화 함으로써 사랑의 정감이 가장 잘 일어나게 됩니다.

② 또 다른 위험은 기도가 감각적 위로를 준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쉽게 정감에 사로잡히는 이들은, 자신들이 실제보다 완덕이 더욱 진보한 것으로 오판할 수 있는데, 그들은 이따금 자신들이 탈혼상태에 들어가고 있음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불행하게도 이런 이들 중 상당수가 일상생활에서 언제나 결점과 소죄에 떨어진다는 사실을 알고도 변화되지 못합니다. 영성생활의 참된 진보는 그리스도교적 덕행을 나날이 더욱 완전히 실천함에 있는 것이지, 기도 중에 체험하는 감미로움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더욱이 감각적 위로를 중요하게 여기는 이들은 우선 즐거움을 얻기 위해 기도할 위험이 있습니다. 이것은 영적 탐욕으로서 성 십자가의 요한은 신랄하게 비판한 바 있습니다.(어두운 밤, 제 1편 제 6장).

③ 정감기도에서 감미로움과 위로를 맛본 이들은 나태에 빠질 위험이 있습니다. 즉 감미와 위로를 맛본 나머지, 그들이 이전에 실천했던 추리묵상에 되돌아가지 않으려고 합니다. 습관적 정감기도에 익숙하고, 그것을 즐기는 이가 이제 묵상은 더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함은 큰 잘못입니다. 신비적 관상을 체험한 연후라도 아래 단계의 기도에 되돌아가는 것은 때때로 필요하다고 대 데레사 성녀는 가르치고 있습니다(영혼의 서, 제 7궁방, 제 4장).




3. 3. 정감기도의 열매

 어떤 기도든 그 가치를 평가하는 법칙은 바로 기도의 열매를 살피는 것입니다. 정감기도의 가치는 체험되는 감각적 위로의 강도나 빈도로 측정되어야 합니다. 정감기도의 열매는 덕행을 더욱 열성적으로 실천함, 지향이 점점 순수하게 됨, 극기 및 초탈의 영(정신), 애덕이 증대됨 및 자신의 의무를 충실히 하고 정확히 수행함 등입니다. 정감기도는 그것으로 얻는 위로에도 불구하고, 결코 기도생활의 목표나 종점은 아닙니다. 그것은 신비적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완전한 기도를 향한 한 단계에 불과합니다.




4. 단순성의 기도

 “작크 보수에”5) 는 단순함의 기도를 하느님과 관계된 대상6)을 단순히 사랑하는 마음으로 응시함이라고 정의했습니다. 이것은 극히 단순화된 수덕적 기도의 한 형태입니다. 먼저 묵상에서 사용된 추리는 이제 단순한 지적 응시로 바뀌고, 정감기도에서 체험한 감정들은 하느님께 대한 단순한 애정 어린 관심과 합일됩니다.

이렇게 단순성의 기도는 수덕적 기도와 신비적 기도 간의 다리 노릇을 합니다. 이것은 바로 성령의 은사를 통해 영혼 안에 작용하기 전의 최종적 단계입니다.




4. 1. 단순기도의 실천

 이 기도는 그것이 지닌 단순성 때문에 기도하는 특수한 방법이 따로 없습니다. 있다면 그냥 응시하고 사랑하는 것 뿐 입니다. 이 단순기도에 들어가기 전에, 이런 유의 기도에 너무 갑작스레 들어가려 하지 말아야 합니다. 묵상과 정감기도를 할 수 있는 동안은 그냥 그것을 계속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와 정반대되는 경향은 피해야 합니다. 즉 어떤 특수 추리작용이나 정감의 활동을 하지 않고도 깨닫게 되면 묵상기도나 정감기도까지도 계속하지 말아야 합니다.7) 기도자는 묵상할 때 행한 것처럼 어떤 자료를 이용하여 이 기도에 임하는 것이 좋지만, 은총의 이끄심이 있다면 즉시 그런 자료를 버려야 합니다. 단순기도에서 요구되는 것은 사랑의 응시 안에서 친밀히 결부되어 하나를 이루고, 이때 관심의 대상은 단순하고 통일된 것이어야 합니다, 단순기도를 하는 동안 기도자는 하느님께 고정된 사랑스런 관심을 유지하도록 애써야하되, 억지로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기도자는 분심과 나태를 피해야 하나 너무 애를 쓰면 기도의 단순함은 손상됩니다. 심리학적으로도 오랫동안 유념(정신차림)하기란 어려운 일이므로 특히 기도 시작부터 계속하여 단순기도를 오랫동안 행할 수 있기를 바라지 말아야 합니다. ‘사랑의 유념’이 흔들리기 시작하면 즉시 정감의 기도나 단순묵상을 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단순함의 기도 안에서는 조용하고 순조롭게, 단순기도가 언제나 감미롭게 위로를 주는 것은 아니기에 무미건조기가 생겨도 당황하지 말아야 합니다.




4. 2. 단순기도의 열매

 은총은 인간행위가 사랑 안에서 통일되기까지 그것을 줄곧 단순화하려는 경향이 있으므로, 다양성을 피함으로써 행위의 단순화 경향을 길러 나가야 합니다. 단순기도에 들어간 이의 특징은 바로 생활의 단순화입니다. 이 특징은 특별히 하느님께 대한 깊고도 지속적인 잠심에서 타나나기 마련입니다. 기도자는 일상생활안에서 바쁜 때에도 내적으로는 하느님을 응시하고 사랑합니다. 또 전례기도나 염경기도를 바치는 동안에도 하느님의 현존을 특별히 느낍니다. 수덕기도와 신비기도가 기도자 안에서 완전히 따로 분리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수덕적 단계에 있는 사람은 성령의 은사의 작용을 통해 어떤 신비적 영향을 받을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비가들도 은사가 실제로 작용하지 않을 때는 순수한 수덕 양식으로 행동했습니다. 확실한 것은 수덕적 상태에서는 수덕행위가 우세하게 되고, 신비적 상태에서는 성령의 은사의 작용이 우세하게 된다는 점입니다. 결국 기도자가 수덕기도의 최고단계인 단순기도를 하는 동안에도 때로는 성령의 은사가 작용하기 시작함은 놀랄 일이 아닙니다.




5. 관상기도

 관상이란 말은 하느님에 대한 초자연적 지식을 말한다. 관상은 인식능력의 작용인만큼 자연 질서 안에도 순수한 자연적8)․ 습득적 관상과 같은 것이 있습니다. 그러나 관상은 특수한 지식의 형태입니다. 관상이 개인의 정감능력을 움직여 준다는 뜻으로 보면, 그것은 어떤 경험적 지식입니다. 그러므로 관상은 기도자가 큰 즐거움을 얻는 행위에서 인식능력 및 정감능력의 혼합을 체험하게 되는 작용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지식은 추리적인 것이 아니라 직관적인 것입니다. 사랑의 활동은 사랑받고 있는 대상의 소유를 지향하지 않고, 사랑 받는 대상에게 자신을 내어주는 활동입니다.




5. 1. 초자연적 관상(주부적 관상)

 초자연적 또는 주부적 관상의 본질적인 특징은 그것이 하느님께 대한 체험적 지식이란 점입니다. 즉 애덕이 주입한 신앙을 전제로 하는 지혜와 이해의 은사를 입고 그 작용을 통해 체험되는 하느님에 관한 복된 지식을 의미합니다. 성녀 데레사는 이런 기도를 주부적 잠심이라 불렀습니다.




① ~주부적 관상은 카리스마나 비상한 은혜9)가아니고 성화은총을 지닌 모든 이에게 주어지는 바 성령의 작용으로 이루어지는 기도의 한 단계이다.

② 주부적 관상은 반드시 성화은총을 요구한다. 주부적 관상은 성령의 은사의 작용 없이는 결코 주어지지 않는다. 또 성령의 은사들은 은총과 불가분적이다. 더욱이 관상은 성화은총과 애덕을 전제하는 하느님께 대한 열렬한 사랑에서 나오는 결과들 중 하나이다.

③ 관상은 조력은총의 충동을 요구한다. 왜냐하면 관상은 초자연 행위이고 그러므로 초자연 능력의 가능성을 현실성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먼저 조력은총의 작용이 요구된다.

④ 애덕은 영혼을 하느님과 결합시키고 의지 안에 관상의 즐거움을 불러일으킴으로써 관상행위에 직접적 영향을 미친다.

⑤ 관상을 직접 이끌어내는 원리들은 애덕으로 충동받는 신앙행위를 완성하는 지혜 및 이해의 은사들이다. 이해의 은사는 대상이 알려진 그 무엇으로 현존하게 함으로써 형상적인 신비적 지식을 제공한다. 지혜의 은사는 하느님에 관한 추리적이 아닌 직관적인 지식을 제공함으로써 신덕을 완성한다.




5. 2. 주부적 관상의 특징

① 하느님 현존의 체험

 많은 신비학자들은 ‘하느님 현존의 체험’을 주부적 관상의 기본적 특징으로 생각하여 그것을 몹시 강조합니다. 하느님께서는 관상가에게 당신 현존에 관한 체험적이고 지적인 지식을 제공합니다. 그러나 이 특징은 신비적 관상의 본질적 요소이나 일반적으로 신비체험의 본질적 요소는 아닙니다. 왜냐하면 관상가가 영혼의 수동적 정화를 겪을 때 “하느님 현존 체험”이 “결여”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② 관상가의 영혼에 초자연적인 것이 엄습함.

 이것은 성령의 은사가 작용하는 어떤 결과로서 영혼이 초자연 생명으로 충만케 됨을 말합니다.




③ 본성노력으로는 신비체험을 할 수 없다.

 은사는 성령의 통제 아래 있고, 성령께서 원하실 때 원하시는 만큼 작용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뜻대로 활동하십니다. 신비체험이 나타났다가 별안간 사라지는 경우도 있습니다.10)




④ 관상에서 관상자는 능동적 이기보다 훨씬 수동적이다.

 영혼은 은사의 작용 아래 중요한 방법으로 반응하고 하느님의 활동에 저절로 협력하나 그것은 수동적 활동일 뿐입니다. 성 토마스는 “인간은 성령의 은사의 작용에서 작용자로서 행동하지 않고 피동자로서 행동한다.”고 언급했습니다.




⑤ 관상 중에 누리는 하느님께 관한 체험적 지식은 명확하거나 뚜렷하지 못하고 모호하고 혼란스러운 것이다.

 신앙은 볼 수 없는 것에 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직 영광의 광채만이 하느님과 그분의 신비에 관한 것을 분명하고 뚜렷하게 관상할 수 있게 해 주고, 이것은 지복직관에서만 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지상에서 신앙으로 사는 동안은, 관상으로 얻는 지식은 모호하고 혼잡스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⑥ 주부적 관상은 관상가가 하느님의 활동 아래 있다는 안정감과 확신을 준다.

 신비가의 증언에 따르면, 관상활동이 계속되는 한, 하느님께서 그이 안에 활동하신다는 것을 그는 추호도 의심하지 않습니다. 일단 기도가 끝나면 그는 체험을 의심할 수 가 있습니다. 그러나 신비기도 중에는 결코 어떤 의심도 할 수가 없습니다. 이런 확신에 정도의 차이가 있음은 마치 신비적 기도에 여러 단계가 있음과도 같습니다.




⑦ 주부적 관상은 관상자가 은총상태에 있다는 윤리적 확신을 준다.




⑧ 신비체험은 서술 불가능하다.

 신비가들은 신비적 활동에서 체험한 바를 분명히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은사의 작용이 인간 이성의 추리능력을 초월하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인간의 언어로 완전히 표현될 수 없는 것입니다.




⑨ 신비적 일치의 변화의 동요를 가져온다.

 성녀 데레사는 신비적 일치가 오랫동안 계속될 수도 있고 때로는 짧게 계속될 수도 있는데, 이것은 이런 체험을 하게 하는 하느님의 뜻에 달린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⑩ 신비체험은 흔히 신체에 반응을 일으킨다.

 관상가가 체험한 강한 영적 기쁨은 때때로 감각기능에 놀랄만한 현상을 불러일으킵니다. 그러나 성 십자가의 요한은 이런 현상이 신비생활의 초보자에게만 일어나는 만큼 이런 반응을 무시하고 계속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관상이 매우 강렬할 때 신체기관은 눈으로 볼 수 있을 정도로 변화될 수가 있습니다. 눈은 흐릿하고 활기가 없으며, 호흡은 약하고 때때로 끊기어 필요한 양의 공기를 마시려는 듯 깊은 숨을 들이쉬기도 합니다. 또 사지가 부분적으로 마비됩니다. 특히 극단에 빠진 경우에는 체온이 떨어집니다. 인간의 신체기관은 오직 일정한 방법으로 반응하고, 또 정신이 강한 활동 속으로 끌려들어갈 때 육체는 필연적으로 영향을 받기 때문입니다. 그런가하면 인간이 완전히 육체의 일에 몰두할 때 영혼의 기능은 영적 사물에는 약해입니다. 왜냐하면 육적인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영적인 삶을 이해할 수 없고, 영적인 것을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⑪ 신비적 기도는 흔히 기능정지나 결박을 가져온다.

 신비적 관상이 강렬하여 탈혼에 빠지는 수도 있습니다. 이런 일이 생길 때 감각기능의 정지는 불가피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비행위 중에 따라야 할 실천적 권고는 영혼 안에서 행하시는 하느님의 활동에 그저 순종하라는 것과 자신을 오로지 하느님의 충동에 내맡기는 것입니다. 오직 기도하는 경우나 또는 의무적으로 이행해야 할 외적 일에 임할 때 우리의 직분을 완수하도록 갖은 노력을 다해야 한다.




⑫ 주부적 관상은 덕행실천에 큰 충동을 준다.

 이것은 참된 관상의 가장 확실한 증거 중의 하나입니다. 확고한 덕행을 실천하려는 열정이 없는 이는 참된 관상기도를 해 보지 않았음이 확실합니다. 신비체험의 놀라운 사실들 중 하나가 관상가가 전에는 노력해도 오랫동안 얻을 수 없었던 덕행을 순식간에 거의 완벽하게 지님을 때때로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관상기도의 초기 단계에서는 변형이 그리 깊지 못하기 때문에 영혼은 자신의 결점에서 벗어나지 못 합니다. 그 때문에 영적지도자들이 신비적 관상을 체험한 이들이 아직도 어떤 결점을 지니고 있는 것을 보게 되면 잘못 판단하여 지도하는 잘못을 저지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결점들은 고의적인 의지에서 생기기보다 오히려 약함에서 생기는 경우가 많습니다. 신비적 관상이 영혼의 성화에 큰 도움이 되긴 하나 그렇다고 그것이 즉시 또는 반드시 성인을 만들지는 않습니다.




5. 3. 실천적 지도원리

 관상기도의 첫 빛을 받기 시작하는 이들을 영성지도자들은 매우 조심스레 지도해야 합니다. 우선 그들은 기도의 진보에 장애거리가 되는 것을 놓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다음 사항은 관상기도의 단계에 들어선 이들에게 줄 중요한 권고사항입니다.




① 더 높은 단계의 기도에 이르는 것을 분명히 감지 할 때까지는 추리적 관상을 그치지 말아야 합니다. 일반적으로 영성생활에서는 언제나 은총의 도움으로 기도하려는 마음을 지녀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더 높은 단계의 기도로 아직 이끄시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기도자가 신비적 기도의 단계에 들어가려 한다면 무미건조만을 가져오고, 마음만 들뜨게 됩니다.11)




② 또한 기도자가 주부적 기도로 이끄는 은총의 충동을 느끼면 즉시 모든 추리적 기도를 중지해야 합니다. 만일 기도자가 은총을 받아 관상의 수동성을 체험할 때, 그들 자신의 인간적 노력으로 기도를 진전시키려 한다면 이것은 기도자 안에서 일어나는 하느님의 활동을 방해하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영적지도자는 기도자가 하느님의 활동하심을 깨닫는 즉시 자신을 그것에 내맡겨야 함을 기도자로 하여금 깨닫도록 지도해 주어야 합니다.




③ 기도자가 내적 생활에 자신을 온전히 바칠 것을 지도해야 합니다. 이들은 하느님을 거스르지 않는다면 완덕의 결정 도달할 수 있습니다. 이들은 은총과의 성실한 일치가 필요함을 충분히 확인한 후, 자신들을 완전히 또 전력을 다해 덕행실천에 매진해야 합니다. 영직지도자는 기도자에게, 특히 습관적 잠심의 실천, 내적․외적 침묵, 감각의 억제, 지상사물로부터의 완전한 초탈, 깊은 겸손 및 무엇보다 그들이 행하는 모든 일에 생기를 불어넣는 열렬한 하느님 사랑에 관해 강조해주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들은 기도에 온전히 매진해야 하고, 하느님의 음성에 마음을 쏟고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 음성이야말로 온전히 이들을 관상의 경지로 이끌어 갈 것입니다. 물론 하느님이 원하시는 시간에…,




6. 정적의 기도

 정적의 기도는 신비기도의 한 형태인데, 이 기도를 통해 의지는 하느님의 현존에 대한 친밀한 인식으로 사로잡히게 되고 영혼과 육신은 형언할 수 없는 감미와 기쁨으로 충만케 됩니다. 관상적 빛의 더 큰 강도와 더 큰 위로는 그만두고라도 정적 기도는 최고선의 실제적 소유와 즐거운 향유를 영혼에 베푸는 것입니다.




6. 1. 정적기도의 본질

 주부적 관상은 주로 지성에 영향을 미치고 이때 지성은 다른 기능으로부터 멀어지게 됩니다. 그러나 정적기도는 특별히 의지에 영향을 미칩니다. 지성과 기억은 이제 조용하나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능히 깨닫게 됩니다. 그 때문에 정적기도는 그 말마디가 가르치는 것처럼, 관상적 침묵과 휴식을 지향합니다. 그러나 다른 기능들은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는 만큼, 능동적 생활 활동에 종사할 수 있고, 또 열성적으로 그렇게 할 수가 있습니다. 이 잠심에서 때때로 행복이 넘치는 내적 고요와 평화가 나오고, 이리하여 영혼은 그 어떤 것도 부족함을 느끼지 않을 것 같은 상태에 있게 됩니다. 따라서 말하는 것까지도 영혼을 피로하게 하는 만큼, 사랑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이런 상태는 어느 기간 또는 상당기간 계속될 수 있습니다.




6. 2. 정적기도의 효과

 정적기도가 영혼 안에 만들어 내는 성화의 결과는 성녀 데레사의 <영혼의 성> 제4궁방에서 열거되고 있습니다. ① 영이 누리는 큰 자유, ② 하느님께 대한 자녀다운 경외심과 그분의 마음을 상해 드리지 않으려고 애씀, ③ 하느님께 대한 깊은 신뢰심, ④ 극기와 고난에 대한 사랑, ⑤ 깊은 겸손, ⑥ 현세 쾌락을 경멸함, ⑦ 모든 덕행에 성장함.




6. 3. 동반현상

 보통 정적기도에 따라오는 동반현상은 관능12)의 휴지(休止) 상태와 사랑에 도취됨입니다. 성녀 데레사에 의하면 그것은 마치 영혼이 세속사에 대해서는 거의 완전히 죽었고, 오직 하느님만을 맛 들여 즐기려는 것 같고, 때때로 관능의 휴지에서 나오는 강한 즐거움이 일종의 신적 도취를 야기하고 그것은 겉으로 일종의 어리석은 사랑으로 나타납니다. 때로는 함성이나 기쁘게 날뜀이나 영적 찬가를 부르는 등의 신체적 운동까지 따르게 됩니다. 하느님께 대한 사랑은 매우 격렬하여 그것은 마음에 숨겨 둘 수 없고 바깥 행동으로 드러내어야 합니다.




6. 4. 행동 규범

 관상기도의 어느 단계에 들어선 이에게 요긴한 행동의 일반규범은 은총의 작용과 완전히 협력하고 참된 겸손을 닦는 일입니다.




① 이 단계의 기도 속으로 억지로 들어가려 하지 말 것. 신비적 기도는 인간의 본성노력으로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 그 노력은 무모하고 무익한 짓.

② 하느님의 활동을 체험하는 즉시 그것에 협력할 것.

③ 하급관능의 행위에 관여함으로써 의지의 정적을 산란케 하지 말 것. 기억과 상상은 아직도 자유롭게 작용할 수가 있으므로 정적기도에서 쉽게 분심이 일어날 수 있음.

④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어떤 기회라도 조심해 피할 것,

⑤ 어떤 두려움이나 방해가 있더라도 기도의 실천을 포기하지 말 것.




데레사 성녀께서는 “기도자는 관능의 휴지에 자신을 과도하게 내맡기지 말라”고 가르치십니다. 또, 어떤 이는 매우 약한 체질을 지녀, 그가 어떤 영적 위로를 받으면 곧 그것이 참된 영성적 휴지라고 잘못 생각하기에 이른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들 자신이 이론 경험을 맛보면 맛볼수록 육체적으로 더욱 나약해져서 그들은 황홀경에 있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실상 그들이 행하는 것은 모두 시간낭비요, 건강을 해칠 뿐입니다. 성녀 데레사가 분명히 언급하는 것은 참된 관능의 휴지가 있을 때에는 영혼의 나약함이나 권태가 없고, 오히려 영혼은 큰 기쁨으로 충만하다는 것입니다. 약한 체질을 가진 사람은 신비적 힘을 되찾을 때까지 잘 먹고 잘 자야하며, 그들의 체질이 약하게 되었을 때 이것이야말로 하느님께서 그를 신비기도의 단계로 부르지 않으시는 증거라고 생각할 수 있다고 성녀는 가르치십니다. 또한 사랑의 도취를 열광적이고 감수성이 강한 사람에게서 흔히 발견되는 자연적 감격 및 센티멘탈과 혼동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이 참된 신비현상이라 하더라도 기도자는 이런 체험에 끌려가도록 자신을 맡겨 두지 말고, 그것을 제어하고 조정하도록 힘써야 합니다. 영성지도자는 언제나 덕행실천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이러한 신비현상을 그리 중요시하지 말 것이며, 특히 기도자가 신비 현상에 크게 애착하거나 어떤 허영을 드러내기 시작한다는 것을 영적지도자가 알 때 신비현상을 대수롭지 않게 여겨야 합니다. 실상, 이런 현상이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경우, 기도자는 대개 참된 겸손을 지니게 됩니다. 이런 겸손은 참된 것을 거짓된 것13)과 구별하는 시금석이 됩니다.




 7. 일치의 기도

 일치의 기도는 신비적 기도의 한 단계로서 여기서는 모든 내적기능이 점차적으로 하느님께 사로잡히고 점유됩니다. 정적기도에서는 의지만이 사로잡히고, 기능의 휴지에서는 지성 역시 사로잡히게 됩니다.(기억과 상상은 자유롭지만). 그런데 일치의 기도에서는 기억, 상상을 포함한 모든 내적 기능이 사로잡힙니다. 오직 외적․신체적 감각만이 자유로우나 그들 역시 다음 단계의 기도에서는 사로잡히게 됩니다.




 7. 1. 일치기도의 성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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