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에우세비오(Eusebius)


 

성인명 – 에우세비오(Eusebius)

축일 – 8월 2일

성인구분 – 성인

신분 – 주교, 순교자

활동지역 – 베르첼리(Vercelli)

활동연도 – +371년

같은이름 – 에우세비오스, 에우세비우스




 성 에우세비우스(또는 에우세비오)는 이탈리아 사르데냐(Sardegna) 섬 태생으로 어느 순교자의 후손으로 어렵게 자랐다. 그의 어머니가 그를 데리고 이사하였기 때문에 성 에우세비우스는 로마에서 성장하고 공부하여 사제로 서품되었다. 그 후 그는 베르첼리의 초대주교로 선출되어 그곳에 착좌하였다. 그는 교구내의 성직자 개혁운동을 전개했고, 성직생활과 수도생활의 일치를 시도했던 서방 교회의 첫 번째 주교로 손꼽힌다. 그는 일단의 성직자들과 더불어 공동체를 이루어 살았다.

 


 그는 정통 교회를 고수하는 강력한 주교였다. 아리우스파(Arianism)에 대한 그의 강력한 반대 입장 때문에 그는 많은 곤욕을 치렀는데, 355년 밀라노(Milano) 회의에서 성 아타나시우스(Athanasius, 5월 2일)를 단죄하는 결의를 반대한 결과로 인하여 황제 콘스탄티우스로부터 추방당하였다. 그래서 그는 6년 동안 팔레스티나(Palestina)의 스키토폴리스(Scythopolis)에서 유배생활을 하였다. 너무나 심한 모욕과 고통을 당하였기에 그는 이에 항의하는 뜻으로 4일 동안 단식투쟁을 벌이기도 하였다. 그 다음에는 카파도키아(Cappadocia)로 또 그 다음에는 이집트의 테베(Thebae, 나일 강 중류에 위치한 고대 이집트 신왕국시대의 수도로 오늘날의 룩소르 Luxor)로 유배를 갔다.

 


 361년에 콘스탄티우스 황제가 죽고 배교자 율리아누스가 황제가 된 후에 유배된 주교는 각자의 교구로 돌아가도 좋다는 허락에 따라 귀향하였고, 362년에 열린 알렉산드리아 교회 회의에 참석할 수 있었다. 그는 이 회의에서 안티오키아(Antiochia)로 파견되는 사절로 뽑혔는데, 그의 임무는 331년에 아리우스파에 의하여 안티오키아의 주교로 선출된 멜레티우스(Meletius) 추종자들 사이의 불화를 조정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아무 일도 하지 못하고 세월만 허송하였다. 그 후 그는 일리리쿰(Illiricum) 지방을 다니며 정통 교회를 옹호하고 아리우스파를 배격하는 운동을 꾸준히 전개하였고, 363년에 베르첼리로 돌아왔다. 그는 여생을 성 힐라리우스(Hilarius, 1월 13일)와 함께 아리우스파와 싸우는데 보냈다.

 


 베르첼리에는 라틴어로 된 복음서 사본이 보물로 간주되고 있는데, 이 사본은 성 히에로니무스(Hieronymus, 9월 30일)의 불가타 사본보다 시기적으로 더 앞선 것이라 한다. 학자들은 성 에우세비우스의 손에 의하여 기록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이 사본을 “베르첼리의 사본”(Codex Vercellensis)라고 한다. 그는 “아타나시우스 신경”(Symbolum Athanasianum)의 저자 중의 한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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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에우세비오(Eusebius)에 1개의 응답

  1. guest 님의 말:

     

    성인명 – 에우세비오(Eusebius)

    축일 – 8월 2일

    성인구분 – 성인

    신분 – 주교, 순교자

    활동지역 – 베르첼리(Vercelli)

    활동연도 – +371년

    같은이름 – 에우세비오스, 에우세비우스

     성 에우세비우스(또는 에우세비오)는 이탈리아 사르데냐(Sardegna) 섬 태생으로 어느 순교자의 후손으로 어렵게 자랐다. 그의 어머니가 그를 데리고 이사하였기 때문에 성 에우세비우스는 로마에서 성장하고 공부하여 사제로 서품되었다. 그 후 그는 베르첼리의 초대주교로 선출되어 그곳에 착좌하였다. 그는 교구내의 성직자 개혁운동을 전개했고, 성직생활과 수도생활의 일치를 시도했던 서방 교회의 첫 번째 주교로 손꼽힌다. 그는 일단의 성직자들과 더불어 공동체를 이루어 살았다.

     

     그는 정통 교회를 고수하는 강력한 주교였다. 아리우스파(Arianism)에 대한 그의 강력한 반대 입장 때문에 그는 많은 곤욕을 치렀는데, 355년 밀라노(Milano) 회의에서 성 아타나시우스(Athanasius, 5월 2일)를 단죄하는 결의를 반대한 결과로 인하여 황제 콘스탄티우스로부터 추방당하였다. 그래서 그는 6년 동안 팔레스티나(Palestina)의 스키토폴리스(Scythopolis)에서 유배생활을 하였다. 너무나 심한 모욕과 고통을 당하였기에 그는 이에 항의하는 뜻으로 4일 동안 단식투쟁을 벌이기도 하였다. 그 다음에는 카파도키아(Cappadocia)로 또 그 다음에는 이집트의 테베(Thebae, 나일 강 중류에 위치한 고대 이집트 신왕국시대의 수도로 오늘날의 룩소르 Luxor)로 유배를 갔다.

     

     361년에 콘스탄티우스 황제가 죽고 배교자 율리아누스가 황제가 된 후에 유배된 주교는 각자의 교구로 돌아가도 좋다는 허락에 따라 귀향하였고, 362년에 열린 알렉산드리아 교회 회의에 참석할 수 있었다. 그는 이 회의에서 안티오키아(Antiochia)로 파견되는 사절로 뽑혔는데, 그의 임무는 331년에 아리우스파에 의하여 안티오키아의 주교로 선출된 멜레티우스(Meletius) 추종자들 사이의 불화를 조정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아무 일도 하지 못하고 세월만 허송하였다. 그 후 그는 일리리쿰(Illiricum) 지방을 다니며 정통 교회를 옹호하고 아리우스파를 배격하는 운동을 꾸준히 전개하였고, 363년에 베르첼리로 돌아왔다. 그는 여생을 성 힐라리우스(Hilarius, 1월 13일)와 함께 아리우스파와 싸우는데 보냈다.

     

     베르첼리에는 라틴어로 된 복음서 사본이 보물로 간주되고 있는데, 이 사본은 성 히에로니무스(Hieronymus, 9월 30일)의 불가타 사본보다 시기적으로 더 앞선 것이라 한다. 학자들은 성 에우세비우스의 손에 의하여 기록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이 사본을 “베르첼리의 사본”(Codex Vercellensis)라고 한다. 그는 “아타나시우스 신경”(Symbolum Athanasianum)의 저자 중의 한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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