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인명 – 최형 베드로(崔炯 Peter)
축일 – 9월 20일
성인구분 – 성인
신분 – 회장, 순교자
활동지역 – 한국(Korea)
활동연도 – 1814-1866년
같은이름 – 베드루스, 최 베드로, 최베드로, 페드로, 페트로, 페트루스, 피터
성 최형 베드로(Petrus)는 일명 최치창으로도 불렸다. 충청도 홍주에서 태어난 그는 부모와 함께 수원으로 이사했다가 1863년에 또다시 서울 석정동으로 이사하였다. 20세 때 영세 입교한 그의 부친은 슬하에 세 아들을 두었는데, 최 베드로의 동생 최방제(崔方濟) 프란치스코는 최초의 유학길에 오른 3명의 신학생중 한 명이었고, 그의 형인 최수 요한은 순교자이다. 어려서부터 한문을 잘 배워 익힌 최 베드로는 집이 넉넉지 못해 집안일을 도와 농사일이나 수공업 등의 손일을 통하여 가계를 도왔다.
1836년 모방(Manbant, 羅) 신부가 입국한 이래 베드로는 모방 신부의 복사로 일하였는데, 그의 재주와 신심이 크게 돋보였기 때문에 모방 신부는 자신이 순교한 1839년까지 그를 자기 옆에 있게 하였다. 1845년 유학길을 떠난 김대건 신학생이 부제가 되어 돌아오자 김 부제를 도와 조선 입국을 기다리던 페레올(Ferreol, 高) 주교와 다블뤼(Daveluy, 安敦伊) 신부를 모셔 들이는데 많은 힘을 썼다. 그는 사공 하나 없는 배를 타고 상해로 건너가 김대건 안드레아(Andreas) 부제의 서품식에도 참석하였다.
그 후 36세쯤에 결혼하여 서울 남쪽 교외로 내려가서 틈틈이 종교서적을 번역하고 묵주도 만들어 팔아가며 생활하였다. 1856년 베르뇌(Berneux, 張敬一) 주교가 입국하자 모든 교회 서적의 정리를 단행했는데, 이 일의 책임자로 최 베드로가 임명되자 그는 기꺼이 이 일을 맡아 여러 가지 어려움과 장애를 이겨 나가며 4년 동안 교회 서적을 많이 출간하였다.
1826년 2월 23일 베르뇌 주교가 체포되자 사태가 위태롭게 전개됨을 알고 피신하였으나, 이선이라는 밀고자가 그의 집을 알려주었다. 포졸들이 그의 집에 들이닥쳤으나 그가 피신하고 없었으므로 그의 아내가 문초를 받아 피와 살이 범벅이 되고 말았지만 끝까지 남편의 거처를 말하지 않았다. 그런데 최 베드로의 집에 사는 14세 된 하녀가 밤중에 몰래 집을 빠져 나가는 것을 보고 포졸들이 붙잡아 곤장을 쳐서 베드로가 숨어 있는 곳을 알아내었다.
포졸들은 3월 1일 최 베드로를 체포하여 온 몸에 석회를 뿌리고 주먹으로 마구 친 다음 포청으로 데려갔다. 그는 천주교를 신봉했다는 죄와 사악한 책을 출판했다는 죄 그리고 다른 신자들을 선동했다는 죄 등으로 사형선고를 받았다. 사형 선고문에는 “혹심한 곤장에도 굴하지 않고 쇠나 돌같이 고집이 세어 사교를 단념하지 않을 것을 맹세하였다. 또 진리를 고백하면서 사형 선고문에 직접 서명까지 하였으니 이에 국법을 따라 마땅히 사형에 처하노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하여 최 베드로는 그의 성실한 벗 전장운 요한과 함께 서소문 밖 네거리에서 참수형을 받아 순교하였다. 이때가 1866년 3월 9일이며, 그의 나이는 53세였다. 그는 1968년 10월 6일 교황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