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Ignatius de Loyola의 시대적 배경 및 생애
1. 시대적 배경
聖 Ignatius가 활동했던 시기의 유럽은 그야말로 ‘격동과 흥분의 시기’라고 말할 수 있다.1) 정치적으로는 군주국가들이 등장하면서 그리스도교 제국의 보편정신이 점차로 지역국가의 자국 일변도 주의로 전환하였으며, 경제적으로는 11세기 이후 도시의 성장으로 인한 상업의 발달과 화폐경제의 발전으로 자본주의 정신이 등장하였던 시기였다. 또한 문화적으로는 14세기 이탈리아에서 일어난 르네쌍스 인문주의로 인해 인간의 가치와 존엄성이 고양되었으며, 이는 교회 안에도 수용되어 성사적 교회를 통한 구원보다는 인간 개인과 신의 만남을 통한 구원을 강조하게 되었다. 한편 이러한 정치, 경제, 사회의 변화 속에서 교회는 일련의 불행한 사건으로 사회에 대한 영향력을 상실하였고, 교황권의 약화를 가져오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교회의 세속화와 성직자들의 비도덕적 생활로 종교개혁의 전조가 보이기 시작한 시기였다.2)
이러한 주변 세계의 변화 속에 聖 Ignatius 역시 무감각할 수 없었을 것이며, 그 시대적 영향을 받지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같은 역사적, 시대적인 요인들이 聖 Ignatius 성인의 생애와 사명 그리고 영성에 광범위하게 작용했으리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2. 聖 Ignatius의 생애
聖 Ignatius는 1491년 가스띨랴 왕국의 기뿌즈코아 지방에 있는 바스코 귀족 가문에서 열세 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왕실에 대한 충성을 자랑삼는 독실한 가톨릭 가문에서 태어난 聖 Ignatius는 무엇보다도 먼저 교회 성직의 길로 나가야 할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는 ‘세속생활’에 더 마음이 끌렸던 것 같다.3) 聖 Ignatius는 1507년부터 1517년까지 스페인의 왕실 재무상 후안 벨라스께르 데껠랴르의 시중을 들면서 그의 신분에 상응하는 교육을 받았으며, 우아하고 기품있는 기사로 성장하였다. 1517년에 벨라스께르가 죽자 聖 Ignatius는 당시 나바르라 태수이며 그 지역수비를 맡은 나헤라 공작의 군대에 입대하였다. 1521년에는 나바라의 수도 팜플로나가 에스파로스의 군주인 아드레 드 푸아가 지휘하는 군대의 공격을 받자 수비군의 선봉에 서서 완강히 저항하였다. 그러나 聖 Ignatius는 이 싸움에서 불란서군의 포격으로 심한 부상을 당하였다. 전투가 끝난 뒤 불란서군은 聖 Ignatius를 로욜라에 있는 가족에게 후송했으며, 그곳에서 聖 Ignatius는 고통스럽고도 힘든 회복기를 보내야 했다.
그러나 로욜라에서의 회복기간은 聖 Ignatius에게 인생의 여정을 바꾸어 성공의 화관을 쓰게 하는 동기가 되었다. 聖 Ignatius는 병상에 누워있는 동안 지루한 시간을 메우려고 그 당시 유행하던 흥미진진한 기사소설을 찾았지만 로욜라 성 안에는 그런 책이 없었다. 대신에 聖 Ignatius는 종교서적 몇 권을 얻을 수 있었다. 聖 Ignatius는 이렇게 병상에 누워서 「그리스도의 생애」와 「성인열전」을 읽으면서 중대한 발견을 했다. 즉 聖 Ignatius는 궁인으로서의 자신의 과거와 미래를 생각할 때마다 유쾌함을 느끼지만 일단 그런 생각들이 끝나고 나면 불만과 침울한 기분에 사로잡히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책으로 읽은 성인들의 생애를 생각해 보고 그들의 삶을 모방하는 상상을 할 때면 그렇게 즐거워질 수가 없는 것이었다. 따라서 聖 Ignatius는 하느님 사랑을 위해 성인들이 이루었던 위대한 행업을 자신도 이루기 위하여 속세의 욕망과 야심을 버리기로 결심하였다. 이렇게 책을 읽고 명상하는 가운데 시작된 聖 Ignatius의 회심은 자신의 삶의 의미를 바꾸어 놓았다.
聖 Ignatius는 자신의 과거의 삶을 속죄하기 위해 가능한 한 빨리 예루살렘에 가기로 작정하였다. 聖 Ignatius는 1522년 초에 로욜라를 떠나 까따로나에 있는 몽세르라트 성모 성지로 갔고 그곳 가까이에 있는 만레사에서 수개월을 보내면서 자기 생애에 가장 중대한 체험을 하게 된다.4) 1523년 聖 Ignatius는 로마와 베니스를 거쳐 예루살렘 여행길에 오르지만 이듬해에 스페인으로 귀국한다. 마침내 聖 Ignatius는 영혼들을 도울 수 있기 위해서 정규교육을 받기로 작정한다. 그리하여 1524년 바르셀로나에서 라틴어 공부를 시작하면서부터 1534년 빠리에서 문학석사 학위를 얻기까지의 장기간의 면학생활이 시작된다.
1526년 聖 Ignatius는 바르셀로나에서 알칼라 대학으로 옮겨갔고, 이듬해에는 스페인 지성의 최대의 요람인 살라망까대학으로 갔다. 그런데 이 두곳에서 다 종교재판에 결려 심각한 고통을 받았으며, 투옥당하기도 하였다.5) 聖 Ignatius는 스페인에서 종교재판에 더 시달리지 않기 위해 1528년 빠리로 건너갔다. 1538년까지 빠리에 있으면서 쌩 바르브에서 인문과정을 마쳤고 그후 쌩 쟈크 도미니꼬회 학원에서 1년간 신학을 연구했다. 聖 Ignatius의 빠리 시절은 매우 의미있는 시기였다. 후에 새 수도회를 발족시킬 동지들을 모은 것도 빠리에서 했으며, 특히 1534년 8월 15일 몽마르뜨르 소성당에서 발한 서원 등은 예수회의 전주였으며, 그 창립의 길을 닦았다. 면학이 끝나갈 무렵, 聖 Ignatius와 그 동지들은 예루살렘을 순례하고 터키인들의 개종을 위해 일하기로 작정하지만, 그 일이 성사되지 않아 1538년 로마로 가서 그 이듬해에 하느님의 보다 큰 영광과 영혼들의 봉사에 도움이 될 수 있도록 교황에게 전적으로 자신들의 소임을 맡긴다. 그러므로 1540년에 聖 Ignatius의 전반기 생애와 활동의 절정이자 결실이라 할 수 있는 예수회가 탄생한다. 聖 Ignatius는 1541년 4월 예수회의 총장으로 선출되었고, 1556년 7월 31일 서거하기까지 그 직책을 맡았다.
이렇게 聖 Ignatius는 자신의 회심을 통해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하였고,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무엇인가 행동하고 싶어했다. 하느님께 대한 그러한 갈망은 기나긴 순례의 여정을 걷는 사이 더욱 단련되었고 확고해졌다. 聖 Ignatius는 언제나 하느님이 자신을 비추시고 인도하고 계심을 목격했다. 즉 하느님이 그의 영혼에 신비로이 개입하신 것이다. 따라서 聖 Ignatius는 신적인 사물을 지각하고 통찰하여 그것에 완전히 압도된 인간이며, 신비가인 것이다.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