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스 아퀴나스의 신존재 증명-(나)


“어느 두 사람의 탐험가가 원시림 속에 있는 빈터에 도착하였다. 거기에는 각양각색의 꽃이 만발해 있었고, 또 많은 식물들이 자라고 있었다. 그들 중 한사람이 말하기를, 어떤 정원사가 이 빈터를 돌보고 있음에 틀림없다. ” 다른 한 사람은 그것을 인정할 수가 없었다. “정원사라니 말도 안되는 소리다”. 그리하여 그들은 천막을 치고 망을 보았다. 그러나 정원사는 나타나지 않았다. “아마도 그 정원사는 보이지 않는지도 모른다”라고 첫번째 사람이 말했다. 이제 그들은 거기에 철망을 두루고 전류를 흐르게 한 후 사냥개를 앞세우고 순찰을 하였다. 그러나 아무런 비명소리도, 개짖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가시철망이 움직이는 흔적도 남기지 않았다. 그러자 첫번째 사람은,“그러나 정원사는 있다. 보여질 수도 없고, 느껴질수도 없으며, 또한 감전되지도 않는다. 그리고 냄새도 없고, 소리를 내지도 않으나 이 정원을 돌보기 위해서 남몰래 여기에 온다”고 주장했다. 그러자 두번째 사람이 외쳤다. “도대체 네가 주장하는 것 중에서 무엇이 남아 있는가? 네가 말하는 볼 수 없고, 느낄 수도 없으며 영구히 확인될 수 없는 그정원사와 아무도 없다는 것과 무슨 차이가 있는가?” 오늘의 사조를 적절하게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1.1.5 현대 무신론적 사고속에서 신의 문제에로의 접근
오늘을 살고 있는 인간은 어떤 양식으로든지 검증할 수 없고, 확증할 수 없는 그러한 일에는 자기자신을 개입시키려하지 않는다. 결국 무의미한 것으로 끝나버릴 그런 문제를 두고서 괜스레 시간과 노력을 소비한다는 것은 비경제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현대기술과 기계문명은 ‘어떻게 하면 인간이 보다 물질적으로 풍부하게 살 수있고 또 편리하게 살 수 있을까’하는 데 골몰한 나머지, 의미의 문제에 대해서는 의문을 제기할 여유를 갖지 못한다. 따라서 오늘날 기술과 기계문명이 발달한 나라일 수록 사람들은 다시 의미의 문제에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나는 왜? 그리고 무엇때문에 살아가는가? 내가 존재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를 지니는가? 만일 언젠가 영구히 무로 변해버린다면 결국, 진리와 거짓, 선과 악의 구별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불의를 거슬러 정의로운 투쟁이 무슨 의미를 지니는가?





우리는 이세상에서 체험하건대, 어떤 사람은 잘난 것없이 다섯 탈렌트를 받고 태어나고, 또 삶을 살아간다. 그런가 하면 어떤 사람은 못난 것도 없이 꼭 한탈렌트만을 받고 태어난다. 지지리 못사는 나라에, 별볼일 없는 집안에, 가진 재주도 없고, 그저 건강하나만을 재산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 어떤 사람은 잘한게 없는데 영웅대접을 받으며 삶을 마감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착하게만 살았고, 억울할 정도로 희생적으로 살았는데도 아무도 모르는 개죽음을 당한 사람도 있다. 하느님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죽음으로 모든게 끝장이라면, 도대체 우리들의 삶이 무슨 의미를 지니는가?
그러나 사실상 인간은 누구나 ’의미‘를 전재하고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이런 전제는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것이어서, 만일 이 전제가 사라져 버린다면 삶을 영위해 나갈 수 있는 가능성마저도 사라져 버리고 만다. 실제로 ‘의미’의 문제를 전제로하고 살아가기 때문에 삶을 지탱해 나갈 수 있고, 또 삶을 설계하고 보다 값진 삶을 위해서 전적으로 헌신할 수 있게 된다. “모든 것이 헛된 것으로 끝나버릴 수 없으며, 또한 헛된 것으로 끝나 버리지 말아야 한다”는 강력한 ‘의미요청’은 우리 인간을 지탱할 수 있는 마지막 토대가 된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한번 신이 문제를 접근할 수 있는 가능성을 발견하게 된다.
결국 인간은 어떤 형태로든 절대자를 앞세워 살고있다. 어떤 사람은 학문을, 어떤 사람은 기업을, 정치이념을, 운동을 자신의 생활의 절대자로 삼고 있다. 사람에게 있어서 행가과 행동으로 집약되는 삶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절대자가 필요한 것만은 사실이다. 그런데 이 절대자가 기한부라는데 문제가 된다. 정치가가 죽는 순간까지 정치인일 수 없고, 축구선수가 죽는 순간까지 축구선수일 수 없다. 여기서 실망에 부딪치게된다. 따라서 무신론자들 역시 절대자가 없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전통적으로 종교인들이 믿어 온 신이 절대자가 아니고, 그 대신 유물론적 사회주의는 인민의 물질생활을 최고의 목표로 삼고, 실증론적 사회주의는 인류자체를, 국수주의자들은 국가나 민족자체를, 황금만능주의자들은 돈을, 쾌락주의자들은 쾌락을 하느님의 대치물로 삼고 있는 셈이다. 이런점에서 유
신론과 무신론이 서로 다른 입장이면서도 인류의 진정한 행복과 정의 구현을 주장하는 태도가 선의적이고 진실이라면 어떤 대화의 실마리를 찿을 수도 있다.
또 현대세계가 보이고 있는 세가지 입장:
유일신론, 다신론, 무신론안에 신문제의 접근 가능성이 보이고 있다.
무신론은 겉으로만 신이라는 주제를 끝장낸 것처럼 보인다. 실상은 인간이 신에 대한 물음에 임하는 한가지 형태에 불과하다. 오히려 적극적이고 정열적인 표현일 수 있다. 무신론의 가장 효능적인 형태인 막스주의는 모든 존재를 물질로 선언함으로써 현존재 안에서의 존재의 단일성을 매우 엄격한 형식으로 주장하고 있다. 여기서 존재 자체인 하나로서의 종래의 신개념과 하나로서의 물질은 차이가 있지만 동시에 절대성을 분명케하는 속성을 갗주어 다시금 신관념을 연상케한다. 다신론은 특히 신화에서부터 시작해서 전개되는 신의 문제에 대해 임하는 표현인데, 궁극적으로는 하나의 유일신으로 접근한다. 가령 그리이스 제신들은 인간이 현상적으로 체험한 신적 표현의 다양성이었으며 결국 제우쓰 신을 정점으로 수렴하고 있음을 본다. 숭배와 희망의 대상이 되고 있는 여러 신들은 결코 절대자 그 자신은 아니었다. 여기서 이런 뭇 권세들의 이면에 마침내는 어디엔가 하나인 존재가 있다는 것이, 즉 존재라는 것은 하나이거나 아니면 어쨌든 하나의 역원리의 그지없는 대립이라는 것이 분명하다. 유일신론이건, 다신론이건, 무신론이건 모두 궁극적으로는 절대자의 단일성과 유일성을 확신하고 있는 것이다. 이 세가지 이론은 인류가 체험한 두가지 거점이 있다.
첫째는 자신을 끊임없이 초월하여 자신과는 전혀 다른 존재를 어렴풋이나마 가리키고 있는 자신의 실존에 대한 체험이다. 그리고 이러한 종교적체험은 인간실존과 마찬가지로 여러층에서 다양하게 일어나는 현상이다. 그리고 실제로 인간의 힘에 한계에 응급수단으로 두었다가 우리 자신이 한계에 다다르면 불러대는 구멍메꾸기의 하느님은 치워버려야 할 것이다. 이 이야기는 하느님을 우리 실존의 곤궁과 실패 안에서 찿을 것이 아니라 지상현실과 삶의 현실의 충만 가운데서 찿아야 한다는 말이다. 신을 는 인간적 노력의 역사가 둘다 정당한 것으로 보인다. 인간 실존의 궁핍도 그렇지만 인간 실존의 충만도 신을 지시한다는 점이다.
우리의 모든 갈구를 채워주지 못한다는 체험만이 신의 체험에로 이끌어 주는 것이 아니라, 아름다움과 충만함에 있어서도, 기쁨에서도 마찬가지로 신 체험을 가능케한다는 점이다. 결국 인간은 인간의 삶 속에서 얼마든지 신체험의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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