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에 관한 그리스도교적 이해-(다)

6. 토마스 아퀴나스의 하느님 이해
토마스 아퀴나스를 두고 교회의 학자, 천사적 박사라고 칭한다. 그만큼 교의신학에 영향을 준 학자도 없다. 제 2차 바티칸 공의회 사제 양성 교령 16항세서 “할 수 있는 대로 구원의 신비를 온전히 밝히기 위하여 학생들은 성 토마스를 스승으로 모시고 그의 사변 방법으로 보다 깊이 신비를 통찰하며, 신비들 사이의 연관성을 파악하는데에 익숙해져야 하겠다”고 밝히고 있다. 교황 바오로 6세가 신학생 양성에 관하여 사제들에게 보내는 교황서한(1963년 11월 4일)에서도 “사제의 주요한 정신적인 부는 하느님의 계시와 교회의 교도권과 일치되는 성 토마스의 교의와 원칙, 방법에 따라 철학과 신학적인 견고한 양성의 결과인 인간적이고 그리스도교적인 지혜로 이루어져야 합니다.”라고 말하고 있다. 실제로 그의 신론은 오늘날까지 가톨릭 교리체계의 기반을 이루고 있다. 프로테스탄트까지도 그의 신관에서 몇몇 본질적인 면모를 원용하고 있다.
그의 하느님 이해를 그의 주저인 신학대전에서 찿아 볼 수있다.

신학대전
1부, 문 1에서 문 13: 하느님의 존재와 본성
문 14에서 문 26: 하느님의 생명 또는 삶과 작용들
문 27에서 문 43: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에 대하여
문 44에서 문 49: 창조에 대하여
문 50에서 문 64: 천사들에 대해서

하느님에 관한 고찰은 세부분으로 구성된다. 우선 하느님의 본성에 관하여, 하느님의 위격의 구분에 관하여, 그리고 하느님으로부터 발원되는피조물들의 전개과정에 대하여 다루고 있다
우리가 보고자 하는 것은 문 1에서 문 13까지다.

부록: 문 1- 13의 요약
제 1 문, 계시된 거룩한 학문
1항. 계시진리가 인간에게는 필요하다. 인간은 그의 자연적 능력을 초월하는 신 직과에로 불리웠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한 신에 관한 것이 모든이에게, 즉시로 오류없이, 인식될 수 있기 위해서는, 그의 능력을 초월하지 않는 것들에 대해서도 계시가 필요하다.
2항. 이 계시진리 또는 신학은 학문이다. 확실한 원리로부터 유래하는 이론체계일 뿐만 아니라 하느님에 의해서 계시되었기 때문이며, 또한 분명한 학문인 기하학이 그러하듯이 확실한 원리로부터 출발하기 때문이다.
3항. 그리고 그것은 그 다수성 속에 하나의 통일성을 지닌다. 그것은 오직 계시된 것들로만 구성되기 때문이다.
4항. 신학은 인간활동들은 성찰함으로써 하느님에 관한 것들을 취급한다. 따라서 그것은 실천적이라기 보다는 사변적인 학문이다.
5항. 그 대상이 가장 고상하기에, 따라서 가장 고상한 학문이다.
6항. 신학은 단지 학문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지혜이다. 가장 고상한 것들에 대한 탐구야 말로 지혜이기 때문이다.
7항. 출발점이자 규범인 하느님은 신학의 주제이다.
8항. 신학은 계시의 증명을 논의 없이 받아들일 뿐 아니라, 서엇의 논술방식도 채택한다. 신학은 실상 어떤 것을 인정하는 자들과 더불어 그들이 인정하는 그것에 기초해서 토론하고, 아무것도 받아들이지 않는자들을 논박하면서 그들의 반론들를 해결한다.
9항. 인간은 감각적 사물들로부터 지성적 인식을 얻어내기 때문에, 게시를 담고 있는 성서도 ‘은유’를 사용한다.
10항. 성서의 저자는 하느님이다. 하느님의 지능은 무한하다. 따라서 성서의 귀절들은 여러 의미를 갖는다. 축자적의미 이외에도, 신앙을 위한 우의적 해석, 행위를 위한 도덕적 해석, 미래의 삶을 위한 초자연적, 상징적 해석이 있다.


제 2문, 하느님의 실존
1항. 하느님이 실존한다는 표현은 참되긴 하지만, 명증적인 것은 아니다. 예컨대 ‘전체는 그 한 부분보자 크다’는 진술은 참되고 명확하다. 이 진술에서 우리는 두가지 용어 ‘전체’와 ‘부부’의 의미와 가치를 잘 알고 있다. 그러나 ‘하느님이 실존한다’는 진술에 대해서는, ‘실존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있지만 ‘하느님’이 누구인지, 무엇인지 알 수 없다. 그러므로 그것에 대해서 ‘증명할 필요’가 있다.
2항. 이 증명은 하느님에 대해서 ‘우리에게 더 잘 알려진 것으로부터, 다시말해 원인을 알려줄 수 있는 ’결과들로부터‘ 출발할 수가 있다.
3항. 증명은 다섯가지 방식으로 할 수 있다. (1) 세상에 계속적인 변화가 있다는 것은 명확하다. 많은 것들이 운동상태에 있다. 그러나 그 어는 것도 움직여지지 않고서는 운동상태에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어떤 것도 스스로 가능상태에서 존재 현실로 건너갈 수가 없기 때문이다. 달구어질 수 있는 차가운 쇠덩이는 스스로 열을 내지 못한다. 누군가가 열을 가해야먄 달구어지게 된다. 그러므로 운동상태에 있는 모든 것은 움직여진 것이다. 그렇다고 무한히 원인을 소급해 올라갈 수 없다. 이것은 실제로 설명함 없이 자꾸만 설명을 미루는 것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제 1원동자‘(primum movens)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2) 우리는 일련의 능동인(causa efficiens)들의 끝에 있는 결과들을 본다. 그런데 그 어떤 것도 스스로 자기 자신의 원인일 수 없다. 만일 그렇다면 실존할 수 있기 위해서는 먼저 실존하지 않았어야 하고 실존을 주기 위해서는 실존하고 있어야 할 터인데, 이것은 명백히 모순이 된다. 2차적 원인들을 추적하며 무한히 소급해 올라가는 것은 제 1 원인을 부정하는 셈이다. 그 결과로 제 2 원인도 부정하는 셈이 된다. 왜냐하면 제 2원인들은 ’제 1원인‘없이는 있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3) 형성되고 해체되는 것은 하나의 ’우연유‘이다. 그것은 실존할 수도 있고 없어질 수도 있다. 그러므로 그것은 그 전에 실존하지 않았거나, 언젠가는 사라질 것이다. 우리가 보는 모든 존재(有)는 우연유다. 그러므로 언젠가는 아무것도 실존하지 안았었고, 지금이라도 만일 실존하지 않을 수 없는 ’필연유‘가 없었더라면 아무것도 실존하지 못할 것이다.
(4) 사물들 속에는 선이 있다. 그러나 선의 원천에 참여하는 정도에 따라 ’더‘와 ’덜‘이 있다. 그러므로 그 자체가 선인 자가, 선 자체가 있다.
(5) 이성이 없는 피조물들은 놀랄만큼 정밀한 규칙성을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그것들을 그렇게 형상화한 자가, 즉 ’최고 지성‘이 있다는 것이 틀림없다.

제 3문 하느님의 단순성
1항. 하느님은 물체가 아니다. 왜냐하면 첫째로 물체는 움직여져야만 움직이게 되는데, 하느님은 ’부동의 원동자‘(primum movens immobile)이기 때문이다. 둘째로, 물체는 변화에 매여있는데, 하느님은 불변이기 때문이다. 셋째로, 물체는 영적존재보다 덜 고상한 것이 사실이라면, 하느님은 가장 고귀하므로 더더욱 물체일 수 없기 때문이다.
2항. 질료 (materia)로 사물들이 구성된다. 형상은 각 사물에 그 고유한 존재를 규정해 준다. 그런데 하느님은 질료와 형상으로 복합되어있지 않다. 그 이유는 첫째로, 물체가 아니므로 질료를 지니지 않기때문이다. 둘째로, 형상도 지니지 않는다. 왜냐하면 형상으로부터 그 존재를 가지게 되는 것은 형상때문에 어떤 선이지만, 하느님은 선자체이시기 때문이다. 또 만일 어떤 것이 그 존재를 형상으로부터 받게되면 운동을 지니게 된다. 즉 형상때문에 움직인다. 그런데 하느님은 운동의 원리다. 따라서 형상을 가진다기 보다 형상 자체이다.
3항.질료와 형상으로 구성된 인간은 인간성(humanitas)를 지닌다. 그러나 인간은 인간성인 것이 아니다. 말하자면 다른데서 인간성을 받은 것이다. 그런데 질료와 형상의 구성체가 아닌 하느님은 ’신성‘(divinitas)이다. 따라서 하느님은 자기 자신의 본질 또는 본성이다.
4항. 하느님에게는 본질과 존재가 동일시된다. 인간의 경우처럼 존재와 본질이 구별되는 경우엔 늘 어떤 원인을 지니는 법이다. 왜냐하면 그 어떤 것도 자기자신을 산출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느님에게는 다른 무엇으로부터 원인을 받지 않는다. 그리고 또 존재가 본질을 구분하는 경우 이것은 모든 물질적 피조물의 구성조건인바. 본래 가능태의 본질은, 준재로부터 분리되게 되면 현실적으로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미 말한 바와 같이, 하느님은 본질상 유이다.
5항. 하느님은 어떤 류(genus)에도 속하지 않는다. 류란 그 안에 포함되는 것들보다 먼저 개념하게 되는데, 하느님은 지성에 있어서도 모든 것에 앞서 있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또한 어떤 종(species)에도 속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종이란 류와 종차(differentia specialis), 마치 현실태와 가능태처럼, 하느님에게는 이런 것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6항. 하느님에게는 우유(accidens)들이 없다. 우유들이란 주체를 보충하는 것인데, 하느님은 순수 현실(actus purus)이기때문에 조금도 더 완전해 질 수 없기 때문이다.
7. 하느님은 가장 단순하다. 첫째로 이미 말한 것처럼 물질적 부분들로 구성되어 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질료- 형상으로도, 본질- 존재로도, 류-종으로도, 주체- 우유로도 구성되어있지 않기 때문이다. 둘째로 더더욱 복합될 수 없는 이유는, 만일 그렇게 복합된다면 그 구성요소들 보다 후속적이고, 의존적이라는 말이된다. 그런데 하느님은 제일 유(Ens primum)이다. 또 그렇게 복합된다면 하느님에게도 구성요소를 결합시키는 어떤 원인이 있어야 할텐데, 하느님은 제일 원인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구성체에 있어서 부분들은 전체에 비해 가능태에 있고, 전체는 부분보다 큰 법인데, 하느님에게는 모든 것이 다 신적이기 때문이다.
8항. 그 어떤 것도, 마치 하느님이 ’세상의 영혼‘(anima mundi)이거나 또는 사물의 형상 또는 질료이기라도 하듯, 그렇게 하느님으로 구성될 수 없다. 왜냐하면 세상과 한 단일체로 구성된다면, 그때 이미 제일유(第一有)임을 포기하는 것일 것이고, 가치가 전락되고, 가변적이 되어 구성체보다도 오히려 하위의 것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제 4문, 하느님은 가장 완전하다.
1항. 하느님은 가장 완전하다. 물질이 아니며 조금도 가능태를 가지지 않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제일 활동원리이며, 모든 완전성의 원리이고 원천이다.
2항. 사물들은 존재를 소유하는 그만큼 선이다. 그리고 그들의 존재를 완전히 소유하면 완전하다. 그런데 그들은 이 완전성을 존재자체인 하느님으로부터 받는다. 그러므로 하느님은 완전자체이며, 사물의 완전성들은 하느님에게서 가장 본래적인 형태로 내속되어 있다.
3항. 사물들은 하느님과 같은 류, 같은 종일 수 없고, 오직 유비적으로 하느님과 유사하다.

제 5문, 선이란 무엇인가
1항. 사물들은 존재를 소유하는 그만큼 선을 소유한다. 그런데 이성은 선을 존재로부터 구별한다. 존재와 더불어 ‘원욕될만함’(appetibilitas)을 소유한 것을 선이라고 부른다.
2항. 이성을 통해서 먼저 존재성이 오고, 그 다음에 원욕성이 온다.
3항. 존재성은 현실태요, 완전성이므로, 모든 유는 그 사실 자체로 선이다. 다만 지성의 산물인 수학적인 유는 여기서 제외된다.
4항. 선은 모든 것이 추구하는 그것이므로, 목적인(causa finalis)이 된다. 미(pulchrum)에겐 찬탄을 자아내는 형상이 중요하다. 즉 지성과 관련되고 있다. 선에겐 잡아 끄는 형상이 중요하다.
5항. 어떤 형상의 구성은 다음 경우에 일어난다. 첫째로 함께 비교해서 선행하는 질료적 또는 작용적 원리들이 실현될 때, 둘째로, 종을 구성하는 구성원리들이 한 숫자로 결합될 때, 셋째로 귀결되는 고유활동으로 기우는 경향과 함께. 그래서 성서는 말한다. 하느님은 모든 것을 비례와 수와 무게에 따라 펼치셨다.
6항. 선을 끌어당기는 한 유쾌한 것이고, 수단으로 활용되는 한 유익하다. 또 목적적인 선인 한에 있어서 합당하다고 불리운다.

제 6문, 하느님은 선이다.
1항. 하느님은 선이다. 모든 이로부터 원욕될 만하기 때문이다. 또한 결과들은 원인에 유사해 지는 경향이 있는데, 하느님이야말로 만물의 원인이기 때문이다.
2항. 하느님은 최고선이다. 왜냐하면 제일원인이고 모든 특수한 선들의 원천인 까닭이다. 그리고 그 어떤 것도 하느님과 같은 류일 수 없으므로 사물의 완전성들은 하느님에게서는 가장 완전한 형태로 발견된다.
3항. 하느님은 본질상 선이다. 왜냐하면 첫째로, 본성상 존재를 가지기에 존재의 충만을 지니기 때문이고, 둘째로 불변적이므로 더 개선할 수 있는 석은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며, 셋째로 최후목적이므로 하느님이 어떤 수단으로 이용될 수 있을 어떤 더 큰 선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4항. 각 사물은 하느님의 선성때문에 선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존재하는 한’ 선이고, 또 그러한 것으로서 그것은 하느님을 자기의 모범적, 작용적, 목적적 원리로 지닌다. 그렇긴 하지만 모든 것은 하느님의 선성과는 다른 자기 나름대로의 형상적 선을 지닌다. 왜냐하면 그 어떤 것도 신적 존재를 자기 안에 지니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제 7문, 하느님은 무한하다.
1항. 하느님은, 형상에 결합되기 때문에 형상으로부터 규정되는 질료가 아니다. 또한 규정되는 질료와 결합됨으로써 반대로 질료로부터 규정되는 형상도 아니다. 하느님은 ‘자립하는 존재 자체’(Ipsum Esse subsistens)로서 무한하다.
2항. 질료와 형상으로 결합된 다른 존재자들은 유한하다. 오직 형상일 뿐이고 질료가 아닌 천사들도 유한하다. 왜냐하면 천사들은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존재의 부분들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3항.모든 물체는 유한하다. 첫째로 본질상 유한하다. 왜냐하면 형상은 그것을 종으로 규정짓고, 질료는 그것을 개체로 규정짓기 때문이다. 둘째로, 규모상 유한하다. 왜냐하면 모든 물체는 표면을 가지는 데, 그 것은 그의 한계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자연적 물체들에 대해 말해져야 한다. 왜냐하면 수학적 물체는 그것을 생각하는 정신 속에서가 아니라면 실존하지 않기 때문이다.
4항. 실제적 숫자는, 단일성에 비교된 다수성이기에, 무한하지 못하다. 그러나 수학적 숫자는 무한할 수 있다.

제 8문, 하느님은 모든 것 속에 있다
1항. 작용이 있으면 거기에 존재가 있다. 그런데 하느님은 모든 것들 속에 작용한다. 그러므로 하느님은 모든 것 속에 있다. 공기가 태양이 있을 때 빛나게되고, 태양이 비치는 한 빛나는 채로 남아 있듯이, 피조물 모두, 본질적으로 존재인 자의 영향력이 그 속에 존속하는 한에 있어서 존재를 지니고 유지된다.
2항.하느님은 모든 장소에거 발견된다. 왜냐하면 그것들을 자신의 존재로써 지탱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물들의 경우에는, 한 사물을 다른 것의 현존을 저지한다. 그러나 하느님으로서는, 그의 현존이 다른 것들을 현존케한다.
3항. 하느님은 만물의 창조주이므로 ‘본질상 모든 것 속에 있다. 하느님은 모든 것을 질서 지우므로, 능력상 모든 것 속에 있디 하느님은 모든 것을 인식하므로 현존상 모든 것 안에 있다.
4항. 하느님은 모든 것 안에 있고, 따라서 어디에나 다 계시다. 그리고 하느님은 물체가 아니고 부분들을 지니지 않기에 온전히 어디에나 계시다. 그리고 오직 하느님만이 그러실 수 있다.

제 9문, 하느님은 불변하다.
1항 하느님은 제일 존재이며 따라서 실재이고 현실태이다. 현실태에 후발적인 가능태는 제일 존재에게 끼어들 여지가 없다. 하느님은 그러므로 오직 현실이며, 순수 현실이다.(3,4참조) 하느님에게 가능태가 없다면, 따라서 하느님은 하느님이 아닌 다른 무엇으로 될 수 없고 변화될 수 없다. 그러므로 불변적이다. 또 변화에 있어서는 일부는 남고 일부는 사라지거나 없던 어떤 것이 덧붙여지는 것인데, 하느님에게는 부분도 없고, 어느때 없었던 적도 있을 수 없기 때문에, 하느님은 불변적이다.
2항. 그 밖의 다른 모든 것들은 가변적이다. 왜냐하면 가멸적이기 때문이다. 영들도 가변적이다. 창조주가 원하기만 한다면 그들은 실존을 그칠수 도 있기 때문이다.

제 10문, 하느님의 영원성
1항. 영원성이란 동시적이고 완전하며 시작도 마침도 없는 생명의 소유를 지칭한다. 시간이라 ’먼저‘와 ’나중‘에 따른 운동의 척도이다.
2항. 불변하고 항상적인 하느님에게는 변화가 있을 수 없고, 따라서 ’먼저‘와 ’나중‘으로 구별될 구별점을 그의 존재 속에 설정할 수 없다. 따라서 하느님에게 시간이 없고 영원하다.
3항. 그리고 이 영원성은 하느님의 존재 자체에 속하는 것이므로 하느님의 고유한 본질이다. 다른 모든 존재자들은 고유한 권리로서가 아니라 오직 하느님의 영원성에 참여할 수 있을 뿐이다.
4항. 영원은 시간과 다르다. 왜냐하면 영원성은 모든 것이 동시에 함께 있음인데, 이것은 시간에 있어서 불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5항. 시간은 먼저와 나중을 함축한다. aevum(시대)는 시작은 지니나 끝이 없다. aevum도 먼저와 나중을 지니긴 하지만, 새로와짐도 낡아짐도 지니지 않는다. 영원은 어떤 ’먼저‘와 ’나중‘도 지니지 않으며, 결코 어떤 모양으로도 그것들과 무관하다.

제 11문, 하느님은 오직 한분이시다.
1항. 단일성은 구분에 반대된다. 부분이 없는 단순 존재는 언제나 하나다. 부분을 지니고 있는 존재자는 부분으로 구분되지 않는 동안까지만 하나다.
2항. 단일성은 다수성과도 반대된다. 단일성은 다수성의 원리이지 척도이기 때문이다.
3항. 만일 소크라테스가 한사람이 아니라 인간 그 차제’즉 유일인간‘이라면, 세상엔 오직 소크라테스 한명만 있게 될 것이다. 이 사실은 소크라테스의 경우가 아니라, 바로 하느님의 경우다. 하느님은 바로 신적 본성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느님은 오직 한분이시다. 게다가 하느님은 모든 완전성을 소유한다. 만일 여러 신들이 있었더라면, 그들 간에 하나에겐 있고, 다른 것에겐 없는 어떤 완전성이나 특전에 차이가 있을 것이고, 따라서 그 어느 신도 완전 무결하지 못할 것이다. 그때 그 어느 것도 신이 아닐 것이다. 그러므로 하느님은 하나일 수 밖에 없디. 또한 세상은 그 질서에 있어 단일성을 특성으로 지닌다. 그러므로 세상은 오직 하나의 하느님을 창조주요 지탱자로 지닌다.
4항. 단일성은 불가분의 존재자에게 어울린다. 하느님은 가장 완전한 존재자이다. 왜냐하면 존재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가장 완전히 불가분적이다. 왜냐하면 가장 단순해서 부분을 갖지 않으며, 또 가질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단일성은 가장 완전하게 하느님에게 어울린다.

제 12문: 우리는 어떻게 하느님을 인식할 수 있는가
1항. 모든 존재자가 자기 원리에 접근하면 할수록 더욱 완전한 것이라면, 이성적 피조물에게 있어서도 그 존재의 완전성은 그 존재 원리인 하느님 안에서가 아니라면 발견될 수 없다. 그런제 본성상 인간은 뚜렷한 지성을 갖추고 있고 하느님은 단순한 유이기 때문에 가지적(intelligibile)이므로, (아니 최고 존재이고 최대로 단순하므로 최고로 가지적이다.) 인간은 그 지성을 신에 고정시킬 때 완전해 질 수 있을 것이다. 성인들의 경우처럼 이에 완전한 이들은 분명히 하느님을 본다. 그러나 어떻게 보는가?
2항 인식이 가능하려면 주체에게 인식 기능이 있어야 하고 그 대상은 그 상을 통해 주체에 결합될 필요가 있다. 이제 우리의 하느님의 경우, 지성 기능의 원리이자 지성적 ‘봄’(視)의 대상이긴 하지만, 그의 무한 존재성 때문에 어떤 상으로 환원될 수 없다. 그러므로 인간지성이 하느님을 포착하기 위해서는 하느님에 ‘유사해질’ 필요가있다. 즉, 영광의 빛이 필요하다.
3항. 눈이나 환상을 가지고 하느님의 인식에 도달할 수 없다. 눈과 환상은 물직적이고, 하느님은 영적이기 때문이다.
4항. 자연적인식에 있어서 사물들은 인식주체의 본성에 유사하게 인식된다. 즉 인간은 물질 속에 개별화되어 있는 본성들을 인식한다. 추상기능을 통해 그것들을 ‘보편적’으로 인식하는 것이다. 천사들은 비물질적 본성들을 지각한다. 그러나 하느님의 본성은 ‘자립 유’이기 때문에 천사들의 포착능력도 벗어난다. 따라서 오직 하느님 자신만이 자연적 인식으로써 하느님 본성을 인식할 수 있다.
5항. 피조된 지성이 하느님 본성을 인식하려면 인식능력이 증가되지 않으면 안된다. ‘영광의 빛’은 우리를 하느님과 유사하게 만들어 준다.
6항. 하느님은 이 ‘영광의 빛’을 각 사람의 사랑에 비례하는 보상으로서 준다. 따라서 어떤 사람은 남보다 이 빛을 더 가질 수 있다.
7항. 하느님은 완전하게 인식될 때 비로소 이해될 수 있다. 그런데 무한자이신 하느님은 무한히 인식될 수 있다. 그러나 영광의 빛을 받아야 하는 피조된 지성은 유한하다. 따라서 하느님은 이해 될수 없는 채로 남는다.
8항. 따라서 피안의 세계에서는 비록 사물들이 하느님 안에서 보이긴 하겠지만, 피조된 지성으로서는 하느님 안세서 모든 것을 즉, 하느님이 행하고 있고, 행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인식할 수 는 없다.
9항. 신적본질 속에서 보이게 되는 사물들은 그 본성 속에서 보이는 것이지 그 상들을 통해서 보이는 것이 아니다.
10항. 그리고 모두 한꺼번에 동시에 한 눈길 속에 제시되어 보이게 된다. (영광의 빛과 비례해서 그 범위에는 차이가 있다).
11항. 차안의 세계에서 우리는 물질적 육체속에 영적인 존재를 지니고 있으므로, 그리고 또 우리의 인식도 이것에 알맞게 되어있기 때문에, 우리는 감각적 피조물을 통해서 인식한다. 그러나 피조물들을 통해서 하느님을 인식한다는 것은 결코 하느님 본직을 직관하는 것이 결토 아니다. 그러므로 ‘이승에서는 아무도 하느님을 볼 수 없다’.
12항. 그러나 우리느 물질 사물들을 통해서 이 사물들은 하느님이 그 원인인 결과들이고 거기에는 원인으로서 하느님이 있다는 것 또 거기에 여러 관계들이 나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3항. 우리의 인식에 있어서 정신력과 사물의 비물질적 유사상들이 함께 작용한다. 하느님은 예언자들의 경우에 일어나듯이 어는 한가지를 더 강화하고 또 다른 것들을 주입해 줄 수 있다. 이렇게해서 은총을 통해서 신적인 일들에 대한 아주 높은 경지의 인식을 지닐 수 있다.

제 13문: 하느님의 이름들
1항. 말(vox)은 관념들의 기호들이고, 관념들은 사물의 유사상(similitudo)이다. 피조물을 통해서 알게 되는 하느님에게 우리 피조물로부터 추출된 이름들을 붙인다. 그러나 이 이름들은 하느님의 본질 그 자체를 결코 설명해 내지 못한다.
2항. 하느님의 상대적인 이름들 (예컨대 ‘창조주’)와 부정적인 이름들(예컨대 ‘무한자’)은 하느님에 대해 어떤 관계나 결함의 제거를 지시하지 못하며. 그 실체를 지시하지 못한다. 그러나 적극적인 이름들 (예컨대 ‘선한자’)은 불완전하게나마 우리가 사물들 속에서 선이라고 칭하는 것이 하느님에게 선재한다는 식으로 그 실체를 지시한다.
3항. 따라서 적극적인 이름들은 엄밀한 의미에서 하느님에게 해당된다. – 피조물 고유의 존재방식들의 내용만 뺀다면 말이다.
4항. 하느님의 여러 이름들은 결코 동의어가 아니다. 왜냐하면 그 이름들이 비록 하나의 단순실재를 지시함에도 불구하고, 이 실재는 피보물들의 다양한 완전성들과 우리 정신의 여러 개념들에 두루 일치하기 때문이다.
5항. 하느님은 무한하고 완전한 존재 이기 때문에 이이름들은 인간에게서와 하느님에게서 다른 의미를 지닌다. 그렇다. 하느님을 표상한다. 그러나 어느 정도까지만 표상할 수 있다. 따라서 일의적도 다의적도 아니고, 오직 유비적이다.
6항. 하느님은 피조된 질서 위에 군림한다. 피조물이 하느님에게로 질서 지워져 있지, 하느님이 피조물에 질서 지워져 있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하느님과 피조물의 관계는 역전될 수 없다. 또 이런 의미에서 ‘창조주’와 같은 상대적 이름들은 피조물로부터 영원한 신에게로 적용시킬 수 있다.
7항 ‘하느님’이라는 이름으로써 사람들은 ‘우주의 주재자’로 알아듣는다. 따라서 ‘하느님’이란 이름은 그 자체로 ‘하느님의 작품’을 표상한다. 그렇긴 하지만 동시에 하느님의 본성을 지칭하는 데에로 방향지워져 있다.
8항. 그리고 하느님의 본성은 피보물에게 알려질 수 없기 때문에 엄밀한 의미에서 ‘하느님’이란 이름도 알려질 수 없다. 더더욱 하느님의 참 이름은 알려질 수 없다.
9항. 하느님의 고유한 참 이름은 ‘야훼’이다. 왜냐하면 첫째로, 그 이름은 하느님에 대해 그 존재(esse)를 지시하며 그래서 그 존재가 그 본질을 형성하기 때문이다. 둘째로, 그 이름은 하느님에 대해 가장 가능한 것 즉 무한인 존재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셋째로 이 존재(esse)라는 동사와 더불어 과거와 미래가 배제되고 하느님의 고유 특성인 「현재의」 영원성을 밝혀 주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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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에 관한 그리스도교적 이해-(다)에 1개의 응답

  1. guest 님의 말:

    6. 토마스 아퀴나스의 하느님 이해
    토마스 아퀴나스를 두고 교회의 학자, 천사적 박사라고 칭한다. 그만큼 교의신학에 영향을 준 학자도 없다. 제 2차 바티칸 공의회 사제 양성 교령 16항세서 “할 수 있는 대로 구원의 신비를 온전히 밝히기 위하여 학생들은 성 토마스를 스승으로 모시고 그의 사변 방법으로 보다 깊이 신비를 통찰하며, 신비들 사이의 연관성을 파악하는데에 익숙해져야 하겠다”고 밝히고 있다. 교황 바오로 6세가 신학생 양성에 관하여 사제들에게 보내는 교황서한(1963년 11월 4일)에서도 “사제의 주요한 정신적인 부는 하느님의 계시와 교회의 교도권과 일치되는 성 토마스의 교의와 원칙, 방법에 따라 철학과 신학적인 견고한 양성의 결과인 인간적이고 그리스도교적인 지혜로 이루어져야 합니다.”라고 말하고 있다. 실제로 그의 신론은 오늘날까지 가톨릭 교리체계의 기반을 이루고 있다. 프로테스탄트까지도 그의 신관에서 몇몇 본질적인 면모를 원용하고 있다.
    그의 하느님 이해를 그의 주저인 신학대전에서 찿아 볼 수있다.

    신학대전
    1부, 문 1에서 문 13: 하느님의 존재와 본성
    문 14에서 문 26: 하느님의 생명 또는 삶과 작용들
    문 27에서 문 43: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에 대하여
    문 44에서 문 49: 창조에 대하여
    문 50에서 문 64: 천사들에 대해서

    하느님에 관한 고찰은 세부분으로 구성된다. 우선 하느님의 본성에 관하여, 하느님의 위격의 구분에 관하여, 그리고 하느님으로부터 발원되는피조물들의 전개과정에 대하여 다루고 있다
    우리가 보고자 하는 것은 문 1에서 문 13까지다.

    부록: 문 1- 13의 요약
    제 1 문, 계시된 거룩한 학문
    1항. 계시진리가 인간에게는 필요하다. 인간은 그의 자연적 능력을 초월하는 신 직과에로 불리웠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한 신에 관한 것이 모든이에게, 즉시로 오류없이, 인식될 수 있기 위해서는, 그의 능력을 초월하지 않는 것들에 대해서도 계시가 필요하다.
    2항. 이 계시진리 또는 신학은 학문이다. 확실한 원리로부터 유래하는 이론체계일 뿐만 아니라 하느님에 의해서 계시되었기 때문이며, 또한 분명한 학문인 기하학이 그러하듯이 확실한 원리로부터 출발하기 때문이다.
    3항. 그리고 그것은 그 다수성 속에 하나의 통일성을 지닌다. 그것은 오직 계시된 것들로만 구성되기 때문이다.
    4항. 신학은 인간활동들은 성찰함으로써 하느님에 관한 것들을 취급한다. 따라서 그것은 실천적이라기 보다는 사변적인 학문이다.
    5항. 그 대상이 가장 고상하기에, 따라서 가장 고상한 학문이다.
    6항. 신학은 단지 학문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지혜이다. 가장 고상한 것들에 대한 탐구야 말로 지혜이기 때문이다.
    7항. 출발점이자 규범인 하느님은 신학의 주제이다.
    8항. 신학은 계시의 증명을 논의 없이 받아들일 뿐 아니라, 서엇의 논술방식도 채택한다. 신학은 실상 어떤 것을 인정하는 자들과 더불어 그들이 인정하는 그것에 기초해서 토론하고, 아무것도 받아들이지 않는자들을 논박하면서 그들의 반론들를 해결한다.
    9항. 인간은 감각적 사물들로부터 지성적 인식을 얻어내기 때문에, 게시를 담고 있는 성서도 ‘은유’를 사용한다.
    10항. 성서의 저자는 하느님이다. 하느님의 지능은 무한하다. 따라서 성서의 귀절들은 여러 의미를 갖는다. 축자적의미 이외에도, 신앙을 위한 우의적 해석, 행위를 위한 도덕적 해석, 미래의 삶을 위한 초자연적, 상징적 해석이 있다.

    제 2문, 하느님의 실존
    1항. 하느님이 실존한다는 표현은 참되긴 하지만, 명증적인 것은 아니다. 예컨대 ‘전체는 그 한 부분보자 크다’는 진술은 참되고 명확하다. 이 진술에서 우리는 두가지 용어 ‘전체’와 ‘부부’의 의미와 가치를 잘 알고 있다. 그러나 ‘하느님이 실존한다’는 진술에 대해서는, ‘실존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있지만 ‘하느님’이 누구인지, 무엇인지 알 수 없다. 그러므로 그것에 대해서 ‘증명할 필요’가 있다.
    2항. 이 증명은 하느님에 대해서 ‘우리에게 더 잘 알려진 것으로부터, 다시말해 원인을 알려줄 수 있는 ’결과들로부터‘ 출발할 수가 있다.
    3항. 증명은 다섯가지 방식으로 할 수 있다. (1) 세상에 계속적인 변화가 있다는 것은 명확하다. 많은 것들이 운동상태에 있다. 그러나 그 어는 것도 움직여지지 않고서는 운동상태에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어떤 것도 스스로 가능상태에서 존재 현실로 건너갈 수가 없기 때문이다. 달구어질 수 있는 차가운 쇠덩이는 스스로 열을 내지 못한다. 누군가가 열을 가해야먄 달구어지게 된다. 그러므로 운동상태에 있는 모든 것은 움직여진 것이다. 그렇다고 무한히 원인을 소급해 올라갈 수 없다. 이것은 실제로 설명함 없이 자꾸만 설명을 미루는 것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제 1원동자‘(primum movens)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2) 우리는 일련의 능동인(causa efficiens)들의 끝에 있는 결과들을 본다. 그런데 그 어떤 것도 스스로 자기 자신의 원인일 수 없다. 만일 그렇다면 실존할 수 있기 위해서는 먼저 실존하지 않았어야 하고 실존을 주기 위해서는 실존하고 있어야 할 터인데, 이것은 명백히 모순이 된다. 2차적 원인들을 추적하며 무한히 소급해 올라가는 것은 제 1 원인을 부정하는 셈이다. 그 결과로 제 2 원인도 부정하는 셈이 된다. 왜냐하면 제 2원인들은 ’제 1원인‘없이는 있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3) 형성되고 해체되는 것은 하나의 ’우연유‘이다. 그것은 실존할 수도 있고 없어질 수도 있다. 그러므로 그것은 그 전에 실존하지 않았거나, 언젠가는 사라질 것이다. 우리가 보는 모든 존재(有)는 우연유다. 그러므로 언젠가는 아무것도 실존하지 안았었고, 지금이라도 만일 실존하지 않을 수 없는 ’필연유‘가 없었더라면 아무것도 실존하지 못할 것이다.
    (4) 사물들 속에는 선이 있다. 그러나 선의 원천에 참여하는 정도에 따라 ’더‘와 ’덜‘이 있다. 그러므로 그 자체가 선인 자가, 선 자체가 있다.
    (5) 이성이 없는 피조물들은 놀랄만큼 정밀한 규칙성을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그것들을 그렇게 형상화한 자가, 즉 ’최고 지성‘이 있다는 것이 틀림없다.

    제 3문 하느님의 단순성
    1항. 하느님은 물체가 아니다. 왜냐하면 첫째로 물체는 움직여져야만 움직이게 되는데, 하느님은 ’부동의 원동자‘(primum movens immobile)이기 때문이다. 둘째로, 물체는 변화에 매여있는데, 하느님은 불변이기 때문이다. 셋째로, 물체는 영적존재보다 덜 고상한 것이 사실이라면, 하느님은 가장 고귀하므로 더더욱 물체일 수 없기 때문이다.
    2항. 질료 (materia)로 사물들이 구성된다. 형상은 각 사물에 그 고유한 존재를 규정해 준다. 그런데 하느님은 질료와 형상으로 복합되어있지 않다. 그 이유는 첫째로, 물체가 아니므로 질료를 지니지 않기때문이다. 둘째로, 형상도 지니지 않는다. 왜냐하면 형상으로부터 그 존재를 가지게 되는 것은 형상때문에 어떤 선이지만, 하느님은 선자체이시기 때문이다. 또 만일 어떤 것이 그 존재를 형상으로부터 받게되면 운동을 지니게 된다. 즉 형상때문에 움직인다. 그런데 하느님은 운동의 원리다. 따라서 형상을 가진다기 보다 형상 자체이다.
    3항.질료와 형상으로 구성된 인간은 인간성(humanitas)를 지닌다. 그러나 인간은 인간성인 것이 아니다. 말하자면 다른데서 인간성을 받은 것이다. 그런데 질료와 형상의 구성체가 아닌 하느님은 ’신성‘(divinitas)이다. 따라서 하느님은 자기 자신의 본질 또는 본성이다.
    4항. 하느님에게는 본질과 존재가 동일시된다. 인간의 경우처럼 존재와 본질이 구별되는 경우엔 늘 어떤 원인을 지니는 법이다. 왜냐하면 그 어떤 것도 자기자신을 산출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느님에게는 다른 무엇으로부터 원인을 받지 않는다. 그리고 또 존재가 본질을 구분하는 경우 이것은 모든 물질적 피조물의 구성조건인바. 본래 가능태의 본질은, 준재로부터 분리되게 되면 현실적으로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미 말한 바와 같이, 하느님은 본질상 유이다.
    5항. 하느님은 어떤 류(genus)에도 속하지 않는다. 류란 그 안에 포함되는 것들보다 먼저 개념하게 되는데, 하느님은 지성에 있어서도 모든 것에 앞서 있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또한 어떤 종(species)에도 속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종이란 류와 종차(differentia specialis), 마치 현실태와 가능태처럼, 하느님에게는 이런 것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6항. 하느님에게는 우유(accidens)들이 없다. 우유들이란 주체를 보충하는 것인데, 하느님은 순수 현실(actus purus)이기때문에 조금도 더 완전해 질 수 없기 때문이다.
    7. 하느님은 가장 단순하다. 첫째로 이미 말한 것처럼 물질적 부분들로 구성되어 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질료- 형상으로도, 본질- 존재로도, 류-종으로도, 주체- 우유로도 구성되어있지 않기 때문이다. 둘째로 더더욱 복합될 수 없는 이유는, 만일 그렇게 복합된다면 그 구성요소들 보다 후속적이고, 의존적이라는 말이된다. 그런데 하느님은 제일 유(Ens primum)이다. 또 그렇게 복합된다면 하느님에게도 구성요소를 결합시키는 어떤 원인이 있어야 할텐데, 하느님은 제일 원인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구성체에 있어서 부분들은 전체에 비해 가능태에 있고, 전체는 부분보다 큰 법인데, 하느님에게는 모든 것이 다 신적이기 때문이다.
    8항. 그 어떤 것도, 마치 하느님이 ’세상의 영혼‘(anima mundi)이거나 또는 사물의 형상 또는 질료이기라도 하듯, 그렇게 하느님으로 구성될 수 없다. 왜냐하면 세상과 한 단일체로 구성된다면, 그때 이미 제일유(第一有)임을 포기하는 것일 것이고, 가치가 전락되고, 가변적이 되어 구성체보다도 오히려 하위의 것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제 4문, 하느님은 가장 완전하다.
    1항. 하느님은 가장 완전하다. 물질이 아니며 조금도 가능태를 가지지 않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제일 활동원리이며, 모든 완전성의 원리이고 원천이다.
    2항. 사물들은 존재를 소유하는 그만큼 선이다. 그리고 그들의 존재를 완전히 소유하면 완전하다. 그런데 그들은 이 완전성을 존재자체인 하느님으로부터 받는다. 그러므로 하느님은 완전자체이며, 사물의 완전성들은 하느님에게서 가장 본래적인 형태로 내속되어 있다.
    3항. 사물들은 하느님과 같은 류, 같은 종일 수 없고, 오직 유비적으로 하느님과 유사하다.

    제 5문, 선이란 무엇인가
    1항. 사물들은 존재를 소유하는 그만큼 선을 소유한다. 그런데 이성은 선을 존재로부터 구별한다. 존재와 더불어 ‘원욕될만함’(appetibilitas)을 소유한 것을 선이라고 부른다.
    2항. 이성을 통해서 먼저 존재성이 오고, 그 다음에 원욕성이 온다.
    3항. 존재성은 현실태요, 완전성이므로, 모든 유는 그 사실 자체로 선이다. 다만 지성의 산물인 수학적인 유는 여기서 제외된다.
    4항. 선은 모든 것이 추구하는 그것이므로, 목적인(causa finalis)이 된다. 미(pulchrum)에겐 찬탄을 자아내는 형상이 중요하다. 즉 지성과 관련되고 있다. 선에겐 잡아 끄는 형상이 중요하다.
    5항. 어떤 형상의 구성은 다음 경우에 일어난다. 첫째로 함께 비교해서 선행하는 질료적 또는 작용적 원리들이 실현될 때, 둘째로, 종을 구성하는 구성원리들이 한 숫자로 결합될 때, 셋째로 귀결되는 고유활동으로 기우는 경향과 함께. 그래서 성서는 말한다. 하느님은 모든 것을 비례와 수와 무게에 따라 펼치셨다.
    6항. 선을 끌어당기는 한 유쾌한 것이고, 수단으로 활용되는 한 유익하다. 또 목적적인 선인 한에 있어서 합당하다고 불리운다.

    제 6문, 하느님은 선이다.
    1항. 하느님은 선이다. 모든 이로부터 원욕될 만하기 때문이다. 또한 결과들은 원인에 유사해 지는 경향이 있는데, 하느님이야말로 만물의 원인이기 때문이다.
    2항. 하느님은 최고선이다. 왜냐하면 제일원인이고 모든 특수한 선들의 원천인 까닭이다. 그리고 그 어떤 것도 하느님과 같은 류일 수 없으므로 사물의 완전성들은 하느님에게서는 가장 완전한 형태로 발견된다.
    3항. 하느님은 본질상 선이다. 왜냐하면 첫째로, 본성상 존재를 가지기에 존재의 충만을 지니기 때문이고, 둘째로 불변적이므로 더 개선할 수 있는 석은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며, 셋째로 최후목적이므로 하느님이 어떤 수단으로 이용될 수 있을 어떤 더 큰 선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4항. 각 사물은 하느님의 선성때문에 선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존재하는 한’ 선이고, 또 그러한 것으로서 그것은 하느님을 자기의 모범적, 작용적, 목적적 원리로 지닌다. 그렇긴 하지만 모든 것은 하느님의 선성과는 다른 자기 나름대로의 형상적 선을 지닌다. 왜냐하면 그 어떤 것도 신적 존재를 자기 안에 지니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제 7문, 하느님은 무한하다.
    1항. 하느님은, 형상에 결합되기 때문에 형상으로부터 규정되는 질료가 아니다. 또한 규정되는 질료와 결합됨으로써 반대로 질료로부터 규정되는 형상도 아니다. 하느님은 ‘자립하는 존재 자체’(Ipsum Esse subsistens)로서 무한하다.
    2항. 질료와 형상으로 결합된 다른 존재자들은 유한하다. 오직 형상일 뿐이고 질료가 아닌 천사들도 유한하다. 왜냐하면 천사들은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존재의 부분들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3항.모든 물체는 유한하다. 첫째로 본질상 유한하다. 왜냐하면 형상은 그것을 종으로 규정짓고, 질료는 그것을 개체로 규정짓기 때문이다. 둘째로, 규모상 유한하다. 왜냐하면 모든 물체는 표면을 가지는 데, 그 것은 그의 한계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자연적 물체들에 대해 말해져야 한다. 왜냐하면 수학적 물체는 그것을 생각하는 정신 속에서가 아니라면 실존하지 않기 때문이다.
    4항. 실제적 숫자는, 단일성에 비교된 다수성이기에, 무한하지 못하다. 그러나 수학적 숫자는 무한할 수 있다.

    제 8문, 하느님은 모든 것 속에 있다
    1항. 작용이 있으면 거기에 존재가 있다. 그런데 하느님은 모든 것들 속에 작용한다. 그러므로 하느님은 모든 것 속에 있다. 공기가 태양이 있을 때 빛나게되고, 태양이 비치는 한 빛나는 채로 남아 있듯이, 피조물 모두, 본질적으로 존재인 자의 영향력이 그 속에 존속하는 한에 있어서 존재를 지니고 유지된다.
    2항.하느님은 모든 장소에거 발견된다. 왜냐하면 그것들을 자신의 존재로써 지탱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물들의 경우에는, 한 사물을 다른 것의 현존을 저지한다. 그러나 하느님으로서는, 그의 현존이 다른 것들을 현존케한다.
    3항. 하느님은 만물의 창조주이므로 ‘본질상 모든 것 속에 있다. 하느님은 모든 것을 질서 지우므로, 능력상 모든 것 속에 있디 하느님은 모든 것을 인식하므로 현존상 모든 것 안에 있다.
    4항. 하느님은 모든 것 안에 있고, 따라서 어디에나 다 계시다. 그리고 하느님은 물체가 아니고 부분들을 지니지 않기에 온전히 어디에나 계시다. 그리고 오직 하느님만이 그러실 수 있다.

    제 9문, 하느님은 불변하다.
    1항 하느님은 제일 존재이며 따라서 실재이고 현실태이다. 현실태에 후발적인 가능태는 제일 존재에게 끼어들 여지가 없다. 하느님은 그러므로 오직 현실이며, 순수 현실이다.(3,4참조) 하느님에게 가능태가 없다면, 따라서 하느님은 하느님이 아닌 다른 무엇으로 될 수 없고 변화될 수 없다. 그러므로 불변적이다. 또 변화에 있어서는 일부는 남고 일부는 사라지거나 없던 어떤 것이 덧붙여지는 것인데, 하느님에게는 부분도 없고, 어느때 없었던 적도 있을 수 없기 때문에, 하느님은 불변적이다.
    2항. 그 밖의 다른 모든 것들은 가변적이다. 왜냐하면 가멸적이기 때문이다. 영들도 가변적이다. 창조주가 원하기만 한다면 그들은 실존을 그칠수 도 있기 때문이다.

    제 10문, 하느님의 영원성
    1항. 영원성이란 동시적이고 완전하며 시작도 마침도 없는 생명의 소유를 지칭한다. 시간이라 ’먼저‘와 ’나중‘에 따른 운동의 척도이다.
    2항. 불변하고 항상적인 하느님에게는 변화가 있을 수 없고, 따라서 ’먼저‘와 ’나중‘으로 구별될 구별점을 그의 존재 속에 설정할 수 없다. 따라서 하느님에게 시간이 없고 영원하다.
    3항. 그리고 이 영원성은 하느님의 존재 자체에 속하는 것이므로 하느님의 고유한 본질이다. 다른 모든 존재자들은 고유한 권리로서가 아니라 오직 하느님의 영원성에 참여할 수 있을 뿐이다.
    4항. 영원은 시간과 다르다. 왜냐하면 영원성은 모든 것이 동시에 함께 있음인데, 이것은 시간에 있어서 불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5항. 시간은 먼저와 나중을 함축한다. aevum(시대)는 시작은 지니나 끝이 없다. aevum도 먼저와 나중을 지니긴 하지만, 새로와짐도 낡아짐도 지니지 않는다. 영원은 어떤 ’먼저‘와 ’나중‘도 지니지 않으며, 결코 어떤 모양으로도 그것들과 무관하다.

    제 11문, 하느님은 오직 한분이시다.
    1항. 단일성은 구분에 반대된다. 부분이 없는 단순 존재는 언제나 하나다. 부분을 지니고 있는 존재자는 부분으로 구분되지 않는 동안까지만 하나다.
    2항. 단일성은 다수성과도 반대된다. 단일성은 다수성의 원리이지 척도이기 때문이다.
    3항. 만일 소크라테스가 한사람이 아니라 인간 그 차제’즉 유일인간‘이라면, 세상엔 오직 소크라테스 한명만 있게 될 것이다. 이 사실은 소크라테스의 경우가 아니라, 바로 하느님의 경우다. 하느님은 바로 신적 본성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느님은 오직 한분이시다. 게다가 하느님은 모든 완전성을 소유한다. 만일 여러 신들이 있었더라면, 그들 간에 하나에겐 있고, 다른 것에겐 없는 어떤 완전성이나 특전에 차이가 있을 것이고, 따라서 그 어느 신도 완전 무결하지 못할 것이다. 그때 그 어느 것도 신이 아닐 것이다. 그러므로 하느님은 하나일 수 밖에 없디. 또한 세상은 그 질서에 있어 단일성을 특성으로 지닌다. 그러므로 세상은 오직 하나의 하느님을 창조주요 지탱자로 지닌다.
    4항. 단일성은 불가분의 존재자에게 어울린다. 하느님은 가장 완전한 존재자이다. 왜냐하면 존재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가장 완전히 불가분적이다. 왜냐하면 가장 단순해서 부분을 갖지 않으며, 또 가질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단일성은 가장 완전하게 하느님에게 어울린다.

    제 12문: 우리는 어떻게 하느님을 인식할 수 있는가
    1항. 모든 존재자가 자기 원리에 접근하면 할수록 더욱 완전한 것이라면, 이성적 피조물에게 있어서도 그 존재의 완전성은 그 존재 원리인 하느님 안에서가 아니라면 발견될 수 없다. 그런제 본성상 인간은 뚜렷한 지성을 갖추고 있고 하느님은 단순한 유이기 때문에 가지적(intelligibile)이므로, (아니 최고 존재이고 최대로 단순하므로 최고로 가지적이다.) 인간은 그 지성을 신에 고정시킬 때 완전해 질 수 있을 것이다. 성인들의 경우처럼 이에 완전한 이들은 분명히 하느님을 본다. 그러나 어떻게 보는가?
    2항 인식이 가능하려면 주체에게 인식 기능이 있어야 하고 그 대상은 그 상을 통해 주체에 결합될 필요가 있다. 이제 우리의 하느님의 경우, 지성 기능의 원리이자 지성적 ‘봄’(視)의 대상이긴 하지만, 그의 무한 존재성 때문에 어떤 상으로 환원될 수 없다. 그러므로 인간지성이 하느님을 포착하기 위해서는 하느님에 ‘유사해질’ 필요가있다. 즉, 영광의 빛이 필요하다.
    3항. 눈이나 환상을 가지고 하느님의 인식에 도달할 수 없다. 눈과 환상은 물직적이고, 하느님은 영적이기 때문이다.
    4항. 자연적인식에 있어서 사물들은 인식주체의 본성에 유사하게 인식된다. 즉 인간은 물질 속에 개별화되어 있는 본성들을 인식한다. 추상기능을 통해 그것들을 ‘보편적’으로 인식하는 것이다. 천사들은 비물질적 본성들을 지각한다. 그러나 하느님의 본성은 ‘자립 유’이기 때문에 천사들의 포착능력도 벗어난다. 따라서 오직 하느님 자신만이 자연적 인식으로써 하느님 본성을 인식할 수 있다.
    5항. 피조된 지성이 하느님 본성을 인식하려면 인식능력이 증가되지 않으면 안된다. ‘영광의 빛’은 우리를 하느님과 유사하게 만들어 준다.
    6항. 하느님은 이 ‘영광의 빛’을 각 사람의 사랑에 비례하는 보상으로서 준다. 따라서 어떤 사람은 남보다 이 빛을 더 가질 수 있다.
    7항. 하느님은 완전하게 인식될 때 비로소 이해될 수 있다. 그런데 무한자이신 하느님은 무한히 인식될 수 있다. 그러나 영광의 빛을 받아야 하는 피조된 지성은 유한하다. 따라서 하느님은 이해 될수 없는 채로 남는다.
    8항. 따라서 피안의 세계에서는 비록 사물들이 하느님 안에서 보이긴 하겠지만, 피조된 지성으로서는 하느님 안세서 모든 것을 즉, 하느님이 행하고 있고, 행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인식할 수 는 없다.
    9항. 신적본질 속에서 보이게 되는 사물들은 그 본성 속에서 보이는 것이지 그 상들을 통해서 보이는 것이 아니다.
    10항. 그리고 모두 한꺼번에 동시에 한 눈길 속에 제시되어 보이게 된다. (영광의 빛과 비례해서 그 범위에는 차이가 있다).
    11항. 차안의 세계에서 우리는 물질적 육체속에 영적인 존재를 지니고 있으므로, 그리고 또 우리의 인식도 이것에 알맞게 되어있기 때문에, 우리는 감각적 피조물을 통해서 인식한다. 그러나 피조물들을 통해서 하느님을 인식한다는 것은 결코 하느님 본직을 직관하는 것이 결토 아니다. 그러므로 ‘이승에서는 아무도 하느님을 볼 수 없다’.
    12항. 그러나 우리느 물질 사물들을 통해서 이 사물들은 하느님이 그 원인인 결과들이고 거기에는 원인으로서 하느님이 있다는 것 또 거기에 여러 관계들이 나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3항. 우리의 인식에 있어서 정신력과 사물의 비물질적 유사상들이 함께 작용한다. 하느님은 예언자들의 경우에 일어나듯이 어는 한가지를 더 강화하고 또 다른 것들을 주입해 줄 수 있다. 이렇게해서 은총을 통해서 신적인 일들에 대한 아주 높은 경지의 인식을 지닐 수 있다.

    제 13문: 하느님의 이름들
    1항. 말(vox)은 관념들의 기호들이고, 관념들은 사물의 유사상(similitudo)이다. 피조물을 통해서 알게 되는 하느님에게 우리 피조물로부터 추출된 이름들을 붙인다. 그러나 이 이름들은 하느님의 본질 그 자체를 결코 설명해 내지 못한다.
    2항. 하느님의 상대적인 이름들 (예컨대 ‘창조주’)와 부정적인 이름들(예컨대 ‘무한자’)은 하느님에 대해 어떤 관계나 결함의 제거를 지시하지 못하며. 그 실체를 지시하지 못한다. 그러나 적극적인 이름들 (예컨대 ‘선한자’)은 불완전하게나마 우리가 사물들 속에서 선이라고 칭하는 것이 하느님에게 선재한다는 식으로 그 실체를 지시한다.
    3항. 따라서 적극적인 이름들은 엄밀한 의미에서 하느님에게 해당된다. – 피조물 고유의 존재방식들의 내용만 뺀다면 말이다.
    4항. 하느님의 여러 이름들은 결코 동의어가 아니다. 왜냐하면 그 이름들이 비록 하나의 단순실재를 지시함에도 불구하고, 이 실재는 피보물들의 다양한 완전성들과 우리 정신의 여러 개념들에 두루 일치하기 때문이다.
    5항. 하느님은 무한하고 완전한 존재 이기 때문에 이이름들은 인간에게서와 하느님에게서 다른 의미를 지닌다. 그렇다. 하느님을 표상한다. 그러나 어느 정도까지만 표상할 수 있다. 따라서 일의적도 다의적도 아니고, 오직 유비적이다.
    6항. 하느님은 피조된 질서 위에 군림한다. 피조물이 하느님에게로 질서 지워져 있지, 하느님이 피조물에 질서 지워져 있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하느님과 피조물의 관계는 역전될 수 없다. 또 이런 의미에서 ‘창조주’와 같은 상대적 이름들은 피조물로부터 영원한 신에게로 적용시킬 수 있다.
    7항 ‘하느님’이라는 이름으로써 사람들은 ‘우주의 주재자’로 알아듣는다. 따라서 ‘하느님’이란 이름은 그 자체로 ‘하느님의 작품’을 표상한다. 그렇긴 하지만 동시에 하느님의 본성을 지칭하는 데에로 방향지워져 있다.
    8항. 그리고 하느님의 본성은 피보물에게 알려질 수 없기 때문에 엄밀한 의미에서 ‘하느님’이란 이름도 알려질 수 없다. 더더욱 하느님의 참 이름은 알려질 수 없다.
    9항. 하느님의 고유한 참 이름은 ‘야훼’이다. 왜냐하면 첫째로, 그 이름은 하느님에 대해 그 존재(esse)를 지시하며 그래서 그 존재가 그 본질을 형성하기 때문이다. 둘째로, 그 이름은 하느님에 대해 가장 가능한 것 즉 무한인 존재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셋째로 이 존재(esse)라는 동사와 더불어 과거와 미래가 배제되고 하느님의 고유 특성인 「현재의」 영원성을 밝혀 주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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