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찡거의 삼위일체 요약-적극적 의미의 삼위일체론

 

4) 적극적 의미의 삼위일체론 : 부정신학이 범위만을 설정한다해서 삼위일체가 막연한 것일 뿐이라는 것은 아니다. 다음 세 명제는 삼위일체 그 자체에 관한 것이다. 첫째, 位는 셋이요 本體는 하나(una essentia tres personae)이다. 神은 그 자체에 있어 개별성과 공동성을 동시에 가진다. 神은 단수와 복수라는 한계를 뛰어넘어있고 그 둘을 포괄한다. 神의 단일성은 단지 더 이상 나눌 수 없는 Atom이 아니라 더욱 완전한 형태인 “사랑이 이루는 일치”이다. 둘째, 위격(Persona)이다. 神은 완전히 독립된, 아무것과도 관련이 없는 것이 아니다. ‘Persona’는 神의 내적인(내부의) ‘관계성(하나를 넘어섬)’을 나타내고, 또 인간의 인격(Persona)을 무한히 능가함을(사람 세 명이 모여도 삼위일체가 못된다.) 나타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Persona’는 그 표현에 있어 아직 미흡한 개념이다. 셋째, ‘位는 셋이요, 本體는 하나’라는 것은 상관관계 속에서 절대성을 지님을 말한다.


ⅰ) 여기 사용된 ‘位, 本體’라는 요소는 절대 이것만 사용해야하는 용어가 아니다. 다만 ‘하나’와 ‘셋’이라는 요소가 아주 완전히 동시적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하나’라는 요소에 더 강조점을 두면서 표현하기 위해 본체(실체substantia 혹은 본성essentia)와 위격(Persona)을 사용하게 된 것뿐이다.


ⅱ) 철학적 개념 : 이 교의는 원칙적으로 ① 神적 원리(근원)가 다수가 아닌 오직 하나임을, 또 ② 神적 단일성은 본체의 차원에 놓여있고, 셋이라는 요소는 관계의 차원, 즉 ‘상대적’ 현실에 놓여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성서에서도 神의 내면에서 이루어지는 대화들을 볼 수 있는데, 이런 상관(相關)과 구별과 상호응대(相互應對-서로 통교함)를 표현하는 것이 ‘위격’ 개념이다. “관계”는 아리스토텔레스의 10범주 속에서 우유성을 가질 뿐, 실체가 아니었다. 그러나 자신 안에서 대화(통교)를 나누는 神을 체험하게 된 이후, “관계”는 존재의 근원적 형태, 즉 본질이 된 것이다. 즉 “관계”는 神의 본질이며 또한 존재로서 실체를 이룬다. 결국 떼어 나눌 수 없는 하나의 실체뿐인 神은 자신 안에서 삼위의 “말씀과 사랑의 응대”라는 현실이 있음을 의미한다. 아들과 연관되지 않고 ‘아버지’를 말할 수 없듯이, Persona는 서로 연관되어있는 관계일 뿐, 실체에 덧붙여지는 우유가 아니다. 그러므로 ‘성부’라는 위격은 ‘아들을 낳는 자’가 아니라, ‘아들을 낳는 행위로서의 위격’, ‘흘러넘침’이며, 베푸는 행위 바로 그것이다.


ⅲ) 성서적 개념 : “아들은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고 그대로 할뿐이지, 무슨 일이나 마음대로 할 수는 없다.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아들도 할 따름이다(요한 5,19).” 예수의 말씀 속에서도 ‘아들’이라는 관계개념이 사용되고, 성부께 의존해야만 실행할 수 있음이 드러난다. 또, “아버지와 나는 하나이다(요한 10,30)”라는 말씀과 위의 말씀은 모순되는 듯 하지만, 사실 서로를 성립시키고 서로를 필요로 하는 말씀인 것이다. 요한은 神의 내재적 관계를 확장시켜 그리스도와 신자들과의 관계에까지 적용한다.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요한 15,5).” “아버지와 내가 하나인 것처럼 이 사람들도 하나가 되게 하여 주십시오(요한 17,11).” 다만 神의 내재적 관계는 하나임을 선포하고 있고, 신자들과의 일치는 요청하고 있다는 것이 다르다.


‘아들’이라는 말은 곧 ‘다른 이에 의한 존재’, 그리고 ‘다른 이들을 향한 존재’로서 활짝 열려있고, 자립과 자존을 주장하지 않음을 말하고, 동시에 “관계”이며 “일치”임을 나타낸다. 이것이 신자들의 ‘실존’으로서 제시되고 있는 것이다. 예수의 대사제적인 일치의 기도는 교회일치에 대해서도 원칙을 제시한다. ‘~로부터 비롯되고’, ‘~를 향한’ 조건없고 고집없는 자세를 요구하는 것이다. 개방성은 참된 일치를 위해 반드시 요구된다. 참된 일치란 숫자나 외적인 형태에서가 아닌, 정신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며, 사랑의 관계를 필요로 한다.


요한은 ‘아들’ 개념과 나란히 “파견”과 “말씀”을 사용한다. 예수는 자신을 파견한 이와 온전히 하나임으로 인해 또 개방된 존재임으로 인해 자신의 사명을 완수할 수 있었고, 이제 신자들에게도 개방되고, 일치된 존재로서의 파견을 명한다. “내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주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요한 20,21).” 요한은 희랍과 유대 사상에서 사용하던 Logos개념을 그리스도에게 적용시킨다. 그리스도는 말씀(Logos)이시다. “다른 이로부터 나와 다른 이를 향한” 개방적인 존재인 말씀인 것이다.


아우구스티노는 “Mea doctrina non est mea(요한 7,16)”의 주석에서 “예수의 가르침”을 말씀 즉, 예수 그 자신이라고 보고 이 구절을 다시 읽는다. “나는 나의 것이 아니라, 다른 분의 것이다.” “우리 자신”은 스스로에게서 나오지 않았고, 스스로를 위해 있지도 않다. 삼위일체는 우리 자신의 참이해를 “관계” 안에서 찾아볼 것을 말하고 있다. 이 신비에 대한 이성의 노력을 통해 우리는 현실과 인간과 神에 대해 새로운 이해를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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