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의 하느님-구약 성서(야훼-야훼의 양면성 신비)

 

1.1.2.3. 야훼의 양면성(兩面性) 신비




성서는 야훼 하느님의 모습을 아주 모순되어 드러나는 양면성으로 표현하고 있다. 첫 번째 양면성에서, 야훼 하느님은 ‘거룩하신 하느님’(1사무 6,20)으로 표현되는 한편 당신 종들에게(신명 10,8 ; 18,7참조) ‘현존하시는 분’으로 표현된다. 하느님은 그분의 ‘거룩하신’(qadosh) 특성에 따라 세상과 분리되며 거기서 그분은 전혀 다른 분으로 제시된다. 창조주와 피조물이 대립되어 나타난다. 하느님이 나타나신 땅은 거룩하게 된다. 세속 가운데 나타나는 하느님의 현존은 자주 불의 상징으로 표현된다(출애 19,18 ; 24, 17 ; 민수 11,1이하 ; 신명 4,11-36 ; 시편 29,7). 이 불은 파괴자이기도 하고 정화자이기도 하다. ‘qadosh’(거룩함)의 이웃 개념은 ‘kabod’(영광)이다. 이 영광은 친교를 추구하며 드러나는 영광이다. 그러므로 이사야 예언서에 있어서 특별히 중요한 주제인 ‘이스라엘의 거룩함’(1,4 ;5,19.24 ;10,17.20 ;41,14.16.20)은 이스라엘 신앙인들의 삶을 거룩한 상태로 변화시키기 위하여 그 삶에 들어온다. 하느님은 그들이 세속과 분리되어서 혹은 죄에서 정화되어 혹은 그분 정의의 길을 걸으면서 스스로 성화되기를 촉구하신다. 윤리적인 삶이 거룩하신 분과 관계를 갖기 위한 논리적인 귀결로 천명된다. 야훼 하느님의 두려운 거룩함과 영광에 대조되는 국면이 하느님의 ‘얼굴’로 표현된다. 성서가 그분이 얼굴을 드러냈거나 빛을 비추었다고 말할 때(시편 4,7 ; 44,4 ; 89,16) 그것은 하느님의 호의로 이해된다. 왜냐하면 그것이 사랑의 증거이기 때문이다(시편 31,17). 하느님의 얼굴에 나타나는 고유한 빛은 영광의 광채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다. 하느님의 얼굴은 불변적이면서도 그 작용은 변화될 수 있다(출애 33,11-20참조).


두 번째 양면성에서, 야훼 하느님과의 만남은 모습이나 모상(imago)의 방법으로 이루어질 수 없다. 이 만남은 ‘말씀’과 함께 절정에 이른다. 십계명은 이스라엘에게 다른 신들에 대한 경배를 금지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너는 어떤 조각된 상도 만들지 말라’고 하며 ‘그 조각된 상이 나타내는 신 앞에 엎드려 절하지 말라’고 천명한다. 그리고 나아가 다음과 같이 부언한다 : “너의 하느님 야훼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말라.”(출애 20,7 ; 신명 5,11) 야훼 하느님은 ‘사람의 손으로 만든’(시편 115,4 ; 135,15) 조각품 안에 감금될 수 없다. 하느님은 믿는 자들의 필요에 따라 마음대로 조작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뜻은 야훼 하느님이 몸소 모든 것을 주관하시고 이끄신다는 뜻이다. E. Zenger는 ‘내 얼굴은 보지 못하겠지만 내 뒷모습만은 볼 수 있으리라’(출애 33,22)는 말씀을 ‘하느님이 몸소 길을 앞서 가시며 안내하신다’는 뜻으로 상징적으로 해석한다. 인간은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되었다(창세 1,26이하). 오직 이 모상만이 하느님으로부터 올 수 있다. 인간의 손으로 만든 모상을 원하지 않으신 하느님은 인간이 당신의 살아 있는 모상이 되기를 원하신다. 우상숭배 금지가 인간으로 하여금 초월적인 하느님을 접근할 수 없도록 한다면, 하느님의 ‘말씀’은 반대로 일상 생활 깊숙이 인간에게 접근한다. 십계명의 말씀들은 우선 야훼 하느님을 스스로 표현하면서 현실화하는 인간 인격의 유비적인 존재처럼 계시한다. 성서에 나타나는 하느님에 대한 ‘의인화’ 표현은 여기에서 근거한다고 볼 수 있다.


세 번째 양면성(모순)은 야훼 하느님의 ‘무소편재’와 ‘거주’사이에서 제기된다. “당신 생각을 벗어나 어디로 가리이까? 당신 앞을 떠나 어디로 도망치리이까? 하늘에 올라가도 거기에 계시고 지하에 가서 자리 깔고 누워도 거기에도 계시며 새벽의 날개 붙잡고 동녘에 가도, 바다 끝 서쪽으로 가서 자리를 잡아 보아도 거기에도 당신 손은 나를 인도하시고 그 오른 손이 나를 꼭 붙드십니다.”(시편 139,7-9) 시편 작가는 하느님의 ‘무소편재’를 시적으로 노래하고 있다. 다른 한편으로, 하느님은 특별한 방법으로 특별한 장소에 ‘거주’하시기도 하는 분으로 드러난다. 대표적으로 왕정시대의 예루살렘 거주를 들 수 있는데 그 곳을 ‘시온의 집’(시편 9,12 ; 74,2)이라 부르며 하느님이 거주하시는 집으로 생각했었다(예레 7,11이하 ; 미케 3,12). 이러한 하느님의 양면성 혹은 이중성은 그분 현존의 신비이며 그리스도의 성체적 현존을 통해 더욱 잘 드러난다. 야훼 하느님이 ‘영원자’라고 일컬어질 때 성서저자는 자주 그분에게 시간제한적인 행위들을 적용시키고 있다. 그분의 ‘영원’은 관계성을 가지며 역사와 유리되지 않고 오히려 역사를 짊어지고 역사 안으로 들어온다. 그래서 성서는 야훼 하느님을 ‘살아 계시는 영원자’(다니 12,7)로 부르거나 ‘세세 대대로 당신은 하느님’(시편 90,2)이라고 부른다.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하느님은 시간과 공간을 총괄하신다. 영원은 세상을 향해 열려 있으며, 역사가 첫 걸음을 내디뎠을 때 거기 있었고 이 세상이 끝날 때도 거기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야훼 하느님은 처음이시며 마침이시기 때문이다(이사 44,6 ; 48,12).


하느님에게 있어서 네 번째 양면성이 드러나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다. 한편으로는, 야훼 하느님은 당신의 신성으로 성적인 모든 차별을 초월하신다. 다른 한편으로는, 아버지에 비유되기도 하며(2사무 7,14 ; 이사 1,2 ; 45,10 ; 63,16 ; 64,7 ; 말라 1,6 ; 시편 2,7 ; 8,8.27) 어머니에 비유되기도 한다(이사 49,15 ; 66,13 ; 예레 31,20 ; 호세 11,1이하). 더욱 놀라운 것은 이스라엘을 ‘약혼녀’나 ‘신부’로 표현하면서 하느님은 당신을 이스라엘을 극진히 사랑하시는 ‘신랑’으로 드러내신다(호세 2,16.18.21 등). 하느님의 이러한 모습에서 우리는 이미 ‘하느님은 사랑이시다’라는 신약계시의 문턱에 다가가고 있음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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