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바씨아누스-생애

 

18. 노바씨아누스




노바씨우스는 초기 로마교회에서 히뽈리뚜스 다음가는 학자이며, 라틴어로 저술한 최초의 신학자라는 점에서 역사적인 의미가 크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그는 가교황(假敎皇)이 되는 오점을 남겼다.




18.1. 생애


노바씨우스의 생애에 관한 대부분의 사료(史料)들은 그의 적대자들에의해 씌어진 것들이어서 그 신빙성에 있어서 문제가 있다. 에우세비우스의 「교회사」6권 43장은 노바씨아누스에 관해 서술하고 있는데, 노바씨아누스는 중병에 걸려 누워있었기 때문에 정식으로 침수세례를 받지 못하고 대신 이마에 물부음을 받는 약식 세례만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주교로부터 도유예식 즉 견진성사를 받지 못하였는데, 다행히도 그는 건강을 회복한 다음 로마교회 안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교황 파비아누스(236-250년 재위)가 그에게 사제품을 주려고하자, 로마의 많은 사제들과 평신도들은 견진성사를 받지않은 사람에게 사제품을 줄 수 없다고 반대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교황은 그의 재능을 아껴 사제품을 주었다. 250년 이전에 노바씨아누스가 로마교회 안에서 중요한 인물이었다는 사실은 카르타고의 주교 치쁘리아누스와 주고 받은 2통의 편지를 통해 알 수 있다.카르타고의 주교 치프리아누스는 박해동안에 배교하여 파문받은 신자들이 다시 교회에 들어오려 하는데 이를 어떻게 처리했으면 좋겠느냐고 문의하였다. 마침 로마교회에서는 교황이 순교하여 아직 공석중이었기 때문에, 노바씨아누스는 「로마의 사제들과 부제들」 이름으로 답장을 보내면서 최종적인 결정은 새 교황이 선출될때까지 유보해야 하겠지만, 배교자들이 교회와 화해할 수 있도록 어떤 조처가 있어야 할 것이라고 조언하였다. 그러나 215년 3월에 고르넬리우스가 로마의 주교로 선출된 다음 배교자들에게 관용과 용서를 베풀자 노바씨아누스는 자신의 태도를 바꾸어 배교자들은 영원히 단죄된 자들로써 어떤 방법으로도 교회와 화해를 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그는 남부 이탈리아에 가서 3명의 주교들을 꾀어 주교서품을 받음으로써 가교황이 되고 자기의 교회를 따로 세웠다. 따라서 노바씨아누스의 이단은 교리적 관점에서라기 보다는 개인적인 감정에서 생긴것이라 할 수 있다. 알렉산드리아의 디오니시우스 주교는 그에게 편지를 보내어 로마교회와 화해할 것을 권하였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후의 노바씨아누스의 행적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별로 없지만, 어떤 사료에 의하면 발레리아누스 황제(253-260재위)의 박해 때에 순교하였다고 하며, 예로니무스의 순교록에는 6월29일의 순교자명단 가운데 노바씨아누스의 이름이 들어 있고, 또 1932년 로마에서 발견된 묘비에 「지극히 복되신 순교자 노바씨아누스를 기념하여」라고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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