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르나바의 편지

 

4. 편지


4.1. 문학 장르


외경 성서의 세번째 유형인 편지는 교부론의 기초 영역에서 그다지 상세하게 다룰 필요가 없다. 편지의 수는 그리 많지 않으며 초대교회의 문헌이나 신학에서 큰 의미를 지니지도 않는다. 모든 편지는 허구적 또는 가명(假名)편지 문헌에 속하며, 종종 어떤 작품(예를 들어 「바울로 행전」가운데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셋째 편지, 압가르 전설 가운데 예수와 에데사의 왕 압가르와의 서신 교환; 제5부 1 참조)의 일부분으로 전해진다. 그밖에 라오디체아인들의 편지는 골로사이서 4장 16절에 나오는 바울로의 진술을 기초로 씌었기 때문에 언급할 가치가 있다. “여러분이 이 편지를 읽은 뒤에는 라오디체아의 공동체도 읽도록 하고, 또 여러분도 라오디체아에서 오는 편지를 읽어 보시오.” 마지막으로 바울로와 철학자 세테카가 주고받은 편지도 중요하다. 바울로의 편지들이 “비고전적” 문체로 씌었지만 그의 편지들은 유명한 철학자의 입을 빌려 로마 청중에게 소개되었으며, 실제로 고대에 대단한 영향을 미쳤다.




4.2. 「바르나바의 편지」


「바르나바의 편지」는 전통적으로 “사도 교부”의 작품에 속하지만 외경으로 평가해야 한다. 이 편지는 고대의 많은 지역에서 경전 또는 성서로 인정받았지만 사도의 이름을 가명으로 사용하기 때문에, 에우세비우스와 히에로니무스는 이 편지를 이미 외경으로 여겼다. 유명한 시나이 사본은 이 편지를 신약성서 바로 다음에 연결한다. 문학 장르의 관점에서 보면 이 작품은 편지 형식의 논문이다. 서두의 짧고 불완전한 인사말, 서언과 결론에서만 부분적으로 편지 형식과 유사하다. 일반적으로 순수한 편지에서 사용되는 발신인과 수신인의 이름을 쓰지 않고, 편지를 쓰게 된 동기도 언급하지 않는다.


저자는 편지의 어느 대목에서도 자신의 이름을 밝히지 않는다. 그럼에도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가 저자에 관하여 처음으로 증언한 이후 전통적으로 바울로의 동반자인 유다교 출신 바르나바를 저자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편지는 저자를 이교인 출신 그리스도인으로 표명하며, 추정한 저술 연도에 따르면 바르나바는 이미 숨을 거두었다. 16장 3-4절에는 성전을 파괴한 사람들이 성전을 재건한다는 기록이 있다. 칼라우스 벵스트는 최근 이 성전 재건이 70년 티투스가 파괴한 예루살렘의 성전 재건을 가리키며,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130년 바르-코크바 폭동이 일어났다는 의견을 제시하였다. 바르나바의 편지가 이 폭동을 언급하지 않은 것에 근거하여 벵스트는 저술 연도를 130-132년으로 추정하였다. 저술 장소는 전통으로 이집트, 더 자세히 말하자면 알렉산드리아로 간주되었으나 오늘날에는 오히려 소아시아, 시리아 또는 팔레스티나로 보는 경향이 있다.


이 편지는 21장으로 구분되며, 17장 맨 뒷부분에 나오는 “(지금까지 말한 것으로) 충분합니다. 다른 깨달음과 가르침으로 넘어갑시다”라는 말은 명백히 중요한 두 부분에 중간 경계선을 긋는 진술이다. 짧은 인사 정식과 서언 다음에 나오는 첫 부분에서는 하느님, 그리스도, 하느님의 새로운 백성, 이 새로운 백성의 도덕적 의무에 관하여 성서에서 얻을 수 있는 인식이 언급된다. 둘째 부분에서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빛과 어둠의 두 가지 길 가운데 하나를 택할 것을 권유한다. 이 두 가지 길에 관한 가르침은 유다교에서 유래하였으며, 「디다케」에서 더 체계적인 형태로 두번 나온다. 21장에서는 주님의 계명을 따르라는 권고의 글, 인사말, 축북의 말로 끝난다. 외적인 관찰에서 알 수 있듯이 저자는 전승된 많은 단락을 개작하였다. 예를 들어 그는 성서를 70인역에서 직접 인용하지 않았다. 그는 성서 인용집을 가지고 있었으며 다른 사료도 사용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문장의 결합, 단절, 불일치를 설명할 수 있다. 후대에 가필한 구절도 있다는 가정은 해결된 것으로 보아도 무방하다.


「바르나바의 편지」의 신학적 의미는 처음으로 구약성서 전체를 예형적․도덕적 의미에서 그리스도와 그리스도교적 생활방식에 대한 예언으로 이해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매우 극단적인 표현도 사용한다. 편지에 따르면 하느님과 유다민족 사이에는 결코 계약이 없었으며 성서에 관한 그들의 문자적 이해는 근본적으로 그릇된 견해라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만이 계약과 성서의 수령자이며, 이때문에 그들은 성서에 감추어진 낱말을 그리스도론적․도덕적 의미로 인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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