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레멘스의 첫째 편지,안티오키아의 「이냐시우스의 편지,스미르나의 「폴리카르푸스의 편지

 

사도시대 이후의 문헌


1. 서론


경전 신약성서는 초대 그리스도교 문헌에 속하지 않고 교부론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에, 오늘날 대부분의 교부론 학자는 교부론을 성서의 외경이 아니라 이른바 “사도 교부”문헌부터 서술한다. 연대상 성서의 외경들은 당연히 나중에 다루어져야 한다. 그렇지만 성서가 그 특성상 초대 그리스도교 문헌이면 경전이라는 특별한 의미 때문에 외적인 이류로 교부론에서 배제된다 하더라도, 교부론은 성서의 생성 및 성서와 밀접히 관련된 성서의 외경에서 시작해야 한다. 물론 이러한 배치는 연대기적으로 적합하지 않다. 외경들은 5세기에 걸쳐 저술되었으며, 이 기간에 교부문헌은 다양한 형태로 발전하여 전성기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금은 교부들 최초의 작품으로 돌아가 연대순으로 취급해야 할 필요가 있다.


사도시대 이후의 문헌은 신약성서와 같은 환경과 신학에서 생겨났다. 더욱이 고대교회는 이 작품 가운데 일부를 경전으로 여겼기 때문에, 이 시대의 문헌에 속하는 작품의 범주를 결정하는 것은 쉽지도 않으며 분명하지도 않다. 복음서, 사도행전, 묵시록의 장르만 신약성서 문헌에 포함하는 유형사적 기준은 사도시대 이후의 문헌을 분류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성서의 작품 가운데 네번째 장르인 편지는 원시 그리스도교의 모든 문헌에 두루 나타나고, 외경 편지는 모두 가명문헌에 속한다. 따라서 교회의 전통만이 이를 결정하는 기준이라고 할 수 있다.


대략 90년부터 160년까지의 시기에 해당하는 사도시대 이후의 문헌은, 더러는 신약성서의 형태를 계승하고 더러는 새로운 형태를 발전시킨 네 가지 문학 장르로 특징지어진다. 먼저 모든 공동체에 공개적으로 낭독할 것을 전제한 순수한 편지가 생겨났고, 그밖에 전례와 공동체 생활이 가르침, 설교, 그리스도교 최초의 시에 대한 새로운 형태를 만들어냈다. 사도들의 제자 또는 시대적으로 사도들과 그리 멀지 않은 시대에 산 사람들이 저술한 이 작품들은 아직도 원시 그리스도교의 정신으로 가득 차 있었으며, 사도전승을 직접적인 증거로 내세우고 공동체의 구조, 생활의 표현, 신학, 언어면에서 신약성서의 작품과 매우 유사하다. “저자들은 그리스도 안에 나타나는 구원의 의미를 이해하기 쉬운 말로 신자들에게 설명하고, 그들에게 주님의 재림에 대한 희망을 확신시키려고 노력하였다. 그들은 공동체의 목자들에게 순명할 것을 요구하였으며 이단과 교회의 분열을 경고하였다. 2세기의 호교가들이 시도한 것처럼 그리스도교나 개별적인 교의론에 대한 학문적인 논증은 그들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이 가운데 전통적으로 일곱 명의 저자 또는 작품이 사도 교부 또는 그 문헌에 속한다. 장-밥티스트 코틀리에는 1672년에 “사도시대에 꽃피운” 교부들의 모음집을 출간하였는데, 모음집에는 「바르나바의 편지」, 로마의 클레멘스, 안티오키아의 이냐시우스, 스미르나의 폴리카르푸스의 편지와 「헤르마스의 목자」가 실려 있다. 후대에 히에라폴리스의 파피아스의 단편들과 「디오그네투스에게 보낸 편지」, 때때로 「디다케」와 「콰드라투스 단편」도 첨가되었다. 이 모음집에 실려 있는 사도 교부의 작품들은 이미 20세기 초부터 활발히 논의되어 작품들을 한정하고 정확한 의미로 규정하려 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사도 교부”가 문헌사의 범주에 따라 하나의 작품군을 형성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그 작품 가운데 더러는 외경에 속하고, 한편으로는 사도시대 이후의 문헌에는 이 작품들 외에도 매우 많은 작품이 있기 때문이다.




2. 편지


2.1. 「클레멘스의 첫째 편지」


성서 이외의 교회 문헌 가운데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작품은 「클레멘스의 편지」이다. 본문에 저자의 이름이 나오지 않지만 수사본들과 로마 교회의 믿을만한 전승에 따르면 이 편지의 저자는 클레멘스이다. 이레네우스의 주교 목록은 클레멘스가 베드로의 세번째 후계자로 로마의 주교였다고 전한다. 로마 공동체가 고린토에서 일어난 소동에 관여하기를 지금까지 자제해 온 “갑작스러운 … 불행과 반목”이라는 편지의 언급과 도미티아누스의 통치 말기에 로마에서 일어난 그리스도인에 대한 박해를 고려하면, 이 편지는 96/97년에 씌었다고 할 수 있다. 그밖에 저자에 관해서는 더 이상 알려진 것이 없다. 오리게네스와 에우세비우스가 증언하듯이 저자가 필립비서 4장 3절에 나오는 바울로의 동반자인 클레멘스와 동일 인물인지는 불확실하다. 여하튼 「클레멘스의 편지」는 저자가 자신을 대부분 복수-인칭으로 말하고 로마 공동체 전체가 발송자이지만 한 사람이 저술한 작품이다.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첫째 편지처럼 고린토 공동체의 논쟁이 저술의 동기였다. 곧, 고린토 공동체의 몇몇 장로가 젊은 사람들로 대체되었는데 몇 사람이 이에 동의하지 않았고, 다른 사람들은 이 논쟁에 관해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할지 결정하지 못하였다. 로마 공동체는 논쟁 소식을 듣고 이에 관여하기로 결정하였다.


총 65장에 이르는 편지 가운데 비교적 적은 단락만이 논쟁과 관련이 있다. 이 단락은 하느님께서 의도하신 전례 규범과 교계제도의 질서에 근거하여 장로들이 면직되었다는 사실과 소동의 주동자들에게 회개를 요구하는 내용을 다룬다. 편지를 쓰게된 동기를 짧게 언급한 다음, 첫째 주요부를 소동의 원인인 시기와 질투에 대한 긴 훈계, 겸손, 평화, 애호, 일치와 조화를 위한 권고등 다양한 내용으로 채운다. 이러한 권고는 그리스도인의 종말론적 목표를 실행하는 데 성서의 본보기, 그리스도의 모범, 우주, 사회와 인간의 질서에 따를것을 요구한다. 편지는 기도와 내용의 요약, 조언과 마침 인사로 끝난다.


편지의 근본적 특징, 특히 개별적인 사건을 해결하기 위하여 일시적으로 쓴 편지인지 또는 교회의 원칙적인 문제와 교의문제를 토의한 편지인지는 이견이 분분하다. 발터 바우어는 고린토 교회의 투쟁을 정통신앙과 이단 사이의 일반적인 논쟁의 틀로 분류한다. 「클레멘스의 편지」는 2세기에 이단을 논박하는 문서로 이해되고 사용되었으며, 로마 공동체의 자발적인 관여를 잘 드러내고 있다는 사실이 이를 대변한다. 후자의 경우 베드로의 후계자라는 로마 공동체의 권위의식에서 영향력을 늘리려 하였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일 수 도 있다. 그러나 이 편지에는 단일 주교직이나 이를 위해 반드시 따르는 관할권에 대한 언급이 없기 때문에, 이 편지가 로마 공동체의 수위권 요구에 관한 첫 증언이라는 견해는 사실상 옳지 않다.




2.2. 안티오키아의 「이냐시우스의 편지」


에우세비우스는 이냐시우스가 이교인 출신의 그리스도인이며, 베드로의 두번째 후계자로 시리아에 자리한 안티오키아의 주교였다고 전한다. 그는 죄인으로 로마로 압송되는 도중에 일곱 통의 편지를 썼다. 이 편지들은 서로 다른 세 개의 긴 수정본에 전해지며, 수정본에 그밖의 가假-이냐시우스 편지들이 첨가되었다. 이러한 전승상의 문제로 이냐시우스가 몇 통의 편지를 썼는가에 관한 토론이 최근까지 이루어졌으나 아직도 명확히 해결되지 않았다.


이냐시우스는 소아시아 해안을 따라 북쪽으로 킬리키아나 팜필리아까지 당시의 연안 뱃길을 따라, 그 뒤에는 육로로 압송되었다. 그는 도중에 필라델피아에서 얼마 동안 체류하였는데 이러한 여정이나 체류는 호송원들이 결정하였다. 이들은 스미르나에서 다시 배를 타고 다음 체류지인 트로아스와 그리스의 필립비 근방 네아폴리스를 향해 떠났다. 이냐시우스가 스미르나에 오래 머무르는 동안 에페소, 마그네시아, 트랄레스의 주교들이 공동체의 대표단과 함께 그를 방문하였을 때, 이냐시우스는 그들 각각의 공동체에 보내는 편지를 그들에게 주었다. 그밖에 그난 아티오키아에서 직접 로마로 가는 사절 편에 로마 공동체에 보내는 편지에서 순교자로 죽는 것을 가로막지 말라고 미리 부탁하였다. 이냐시우스는 그리스로 넘어가기 전 트로아스에서 필라델피아, 스미르나 공동체, 스미르나의 주교 폴리카르푸스에게 편지를 보내면서 그들의 후대에 감사하였고, 그 사이에 박해가 끝난 안티오키아 공동체를 방문하거나 편지를 써 보내줄 것을 부탁하였다. 폴리카르푸스, 오리게네스, 에우세비우스가 확실히 증언하듯이 이냐시우스는 로마에서 순교하였다.


이냐시우스의 인물과 생애에 관해서는 더 이상 알려진 것이 없다. 비잔틴의 성인은 그를 예수가 제자들에게 본보기로 보여준 어린이로, 히에로니무스는 사도 요한의 제자로 여겼다. 이 두 보고는 가설에 불과하나, 이냐시우스의 신학이 보여주듯이 그가 사도시대에 살았던 인물이라는 시실은 틀림없다. 에우세비우사가 전하듯이 이냐시우삭 트라야누스 황제의 통치 기간에 안티오키아에서 일어난 국부적인 박해 때문에 107-110년경 순교하였다는 것이 오랫동안 확실한 연도로 인정되었다. 그는 그리스도의 이름을 고백하였기 때문에 원형경기장에서 사형선고를 받았으며, 사형 집행을 받기 위해 로마로 압송되었다. 최근의 연구는 이 해석에 의심을 품어 그가 로마로 압송되는 시기와 사망한 시기를 다소 모호하게 105-135년경으로 추정한다. 그가 재판을 받은 이유도 그리스도인에 대한 박해 때문이 아니라, 공동체 내부에서 일어난 논쟁이나 황제가 최종 판결을 내릴 수 있는 대역죄 때문일 것으로 본다. 재판은 아직 끝나지 않았지만 사형선고가 결코 번복될 수 없기 때문에 그는 로마 공동체의 어떤 도움도 완곡히 사양하였던 것 같다.


역사적 상황에서 이해할 수 있듯이 특정한 동기로 간결하게 씌어진 이냐시우스의 편지들은 짜임새가 비체계적이고 내용이 방대하지는 않지만 고대의 편지쓰는 방식과 수사학적 규칙에 따라 작성되었다. 편지의 주된 주제와 관심사는 다음과 같다.


1) 유설, 특히 그리스도 가현설에 대한 경고. 성찬 안에 현존하는 그리스도처럼 그이 육화, 죽음, 부활은 단지 외적인 허구의 형태를 통해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아들이 인간이 되었다는 실재 안에서 일어난 것이다.


2) 삼위일체적 유일신론과 교회론 및 이 편지에서 처음으로 증언된 단일 주교직에 관한 신학의 일치. 지상교회의 조직은 하늘나라의 모상을 반영한다. 교회는 삼위일체의 전형에 따라 교계적으로, 주교의 지도하에 하위 등급인 장로와 부제로 조직된다. 바울로의 편지에서 알 수 있듯이 공동체의 합의 지도, 곧 두 등급의 교직(주교/장로-부제)과 카리스마 교직(사도, 예언자, 교사)이 시리아의 안티오키아에서 실제로 이미 시대에 뒤진 것으로 간주되었는지, 아니면 이냐시우스가 이 교직제도를 단지 발전 단계에 있는 교계제도의 이상형으로 제시한 것인지는 아직도 밝혀지지 않았다. 그에 따르면 전 교회는 몸인 그리스도에게 종속되고, 그리스도가 성부에게 순명하듯이 공동체는 교회의 우두머리인 주교에게 순명해야 한다. 최고의 이상은 모든 사람의 일치이다. 주교는 세례와 성찬, 혼인에 관한 직무를 거행하며 정통신앙을 보호해야 한다. 특히 모범적인 생활을 영위할 의무가 있으며, 합법적인 직무의 실행에서는 아무에게도 종속되지 않는다.


3) 순교신학과 순교에 대한 갈망, 이냐시우스가 그의 순교를 가로막는 어떤 시도도 하지 말아달라는 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는 그리스도교의 첫 2세기 동안에 널리 퍼진 순교에 대한 전형적인 갈망을 나타낸다. 이러한 갈망은 완전함에 대한 금욕적이고 윤리적 지향에만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따름이라는  신학에 기초를 둔다. 더욱이 이냐시우스의 순교에 대한 갈망은 성찬의 특징을 지닌다. “저는 하느님의 밀이며, 제가 그리스도의 순수한 빵이 될 수 있도록 동물의 이빨이 저를 갈 것입니다”.


이냐시우스의 편지는 급속히 보급되었다. 이냐시우스가 죽은 뒤 곧바로 필립비 공동체는 스미르나의 폴리카르푸스에게 그가 가지고 있는 이냐시우스의 편지들을 베껴서 보내줄 것을 부탁하였다. 폴리카르푸스가 필립비 공동체에 이냐시우스의 편지를 보낼 때 덧붙인 짧은 첨서(添書)는 오늘날 남아 있다.




2.3. 스미르나의 「폴리카르푸스의 편지」


리용의 이레네우스는 스미르나의 주교 폴리카르푸스가 여러 통의 편지를 썼다고 전한다. 그럼에도 전승사에 따르면, 오늘날 남아 있는 폴리카르푸스의 서간은 14장으로 이루어진 필립비인들에게 보낸 편지뿐이다. 그러나 편지의 9장에서 이냐시우스의 죽음을 전제하는 반면, 13장에서는 필립비인들에게 이냐시우스의 운명에 관한 새로운 소식을 묻고 있다. 따라서 이 편지는 두 통의 편지로 이루어져 있으며, 13장은 필립비인들에게 보낸 첫째 편지로 폴리카르푸스가 필립비 공동체의 요청에 따라 이냐시우스의 편지들을 그 공동체에 보낼 때 쓴 짧은 첨서이다. 피셔에 따르면 첫째 편지와 둘째 편지의 역사적 연관성은 다음과 같다. 이냐시우스는 로마로 압송되어 가면서 필립비인들에게 박해가 끝난 안티오키아 교회에 편지를 써 보내줄 것을 부탁하였다. 필립비인들은 곧바로 편지를 쓴 다음 그 편지를 스미르나의 폴리카르푸스에게 보내면서 폴리카르푸스가 지니고 있는 이냐시우스의 편지들을 베껴서 그들에게 보내줄 것을 부탁하였다. 폴리카르푸스는 필립비인들의 요청을 받아들여 자신들에게 보낸 첨서에서 안티오키아 교회로 편지를 보내줄 것을 약속하였으며, 이냐시우스에 관한 그밖의 소식에 관하여 물어보았다. 이러한 사건의 진행에 따르면, 필립비인들에게 보낸 첫째 편지는 이냐시우스의 순교 여정과 시간적으로 매우 근접해있다. 이 경우 필립비인들에게 보낸 둘째 편지는 필립비인들의 답신에 대해 이냐시우스의 운명을 물어보는 폴리카르푸스가 보낸 상세한 답신이다. 폴리카르푸스가 쓴 두 통의 편지는 시기적으로 그리 멀지 않다. 최근의 연구는 이냐시우스의 사망 연도를 107-110년경으로 여기지 않기 때문에, 사망 연도를 135년경으로 추정하는 해리슨도 이 추이에 동의한다. 내용은 일반적인 권고 서간으로, 본문에 들어가기 전에 쓴 머릿글과 필립비 공도체를 칭찬한 다음에 신앙과 올바른 품행을 권고하며, 공동체의 여러 직무의 의무를 환기시키고, 이단자들을 조심하라고 말한다.


폴리카르푸스의 생애에 관해서는 이냐시우스가 그에게 보낸 편지, 이레네우스와 에우세비우스의 기록과 그의 순교에 관한 보고에서 잘 전해지고 있지만, 정확한 연도는 다음 다섯 가지 요인으로 확증하기가 어렵다.


1) “사도의 제자”라는 개념을 어떻게 국한시켜 이해할 것인가? 곧, 폴리카르푸스의 스승인 요한을 사도 요한과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장로 요한 가운데 누구와 동일시해야 하는가?


2) 이냐시우스의 순교 연도를 105년 또는 135년 사이에서 어디에 가깝다고 볼 것인가?


3) 로마의 주교 아니체투스는 그의 재임 기간 중(155-166) 몇 년에 폴리카르푸스를 만났는가?


4) 「폴리카르푸스 순교록」 9장에 나오는 폴리카르푸스가 86년 동안 그리스도를 섬겼다는 진술이 전 생애를 의미하는가 아니면 그가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이후의 햇수를 의미하는가?


5) 폴리카르푸스가 순교한 날짜인 “크산티쿠스 달의 둘째날, 3월 초하룻날 7일 전, 대 안식일에”와 에우세비우스의 연도(167년) 가운데 어느 것이 정확한 진술인가?


“대 안식일”을 일요일로 해석하여 2월 23일로 산정하는 브렝다무르의 가설은 논증력이 약한 것 같다. 로르도르프는 “대 안식일”을 정기축제로 해석했지만, 이 날을 같은 날짜로 계산한다.


폴리카르푸스가 로마로 가서 아니체투스 조교와 교회의 여러 문제, 특히 부활축일의 날짜에 관해 논의한 것은 교회사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다. 이른바 “부활절 논쟁”에서 의견이 일치되지 않자, 로마의 주교 빅토르는 전 세계 모든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부활축일을 춘분 이후 첫 만월 다음에 오는 일요일로 정하려고 하였다. 이때 소아시아의 그리스도인들은 니산 달 14일이 평일이라는 사실을 고려하지 않은 채 유다인과 같은 날에 부활절을 거행하는 사도 요한의 전통에 바탕하여 이를 반대하였다. 이때문에 그들을 “14일파”라고 부른다. 그들은 이미 폴리카르푸스와 아니체투스가 이에 관해 합의를 이루어내지 못하였지만, 교회의 일치와 평화가 깨지지 않았다고 주의를 환기시켰다. 같은 이유로 리용의 이레네우스도 빅토르를 독려하여 평화를 유지하도록 권고하였기 때문에 이 논쟁은 궁극적으로 해결되지 않았다. 니체아 공의회가 니산 달 14일에 행하는 부활절 관습을 최종적으로 금지시킴으로써 이 관습은 실질적으로 실행하기가 점점 더 어려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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