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교부들의 창조론-(가)

4. 교부들의 창조론
개 관
교부 시대에는, 신약성서에서 처럼, 창조에 관하여 어느 특정한 사고 방식에 억매이지 않고있다.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것은 교부들에게 자명한 사실이었다. 교부들에게 창조주이신 하느님께 대한 신앙은 실 생활에서 생생하게 살아있는 신앙이었다.
W. 바이너르트가 강조하고 있는 창조의 중보자로서의 그리스도의 역할도 초대 그리스도교가 고백하고 있는 “주님이신 예수”라는 정식안에 연루되어 나타나고 있다. 창조의 중보자로서의 그리스도 역할도, 신학의 역사에 있어서 이따금 뒷전에 머물기는 했지만, 교회가 행한 복음선포의 구성요소였다.
그리고 교부들이 처한 두가지 국면은 첫째로, 영지주의를 거스려 창조의 성서적 개념을 옹호하는 일이었고, 둘째는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선포하는 가운데 희랍인들의 우주론, 인간학의 용어와 정신에 맞는 창조이해였다.
다시말하면, 교부들은 첫째로 희랍의 개념을 도입해서 그 상황에 알맞게 교리를 설명하는 데 사용한다. 로마의 클레멘스는 「코린도 교회에 보내는 편지」 20,11에서 “위대한 조물주이시며 만물의 중재자께서 이 모든 것을 평화와 조화 속에 이루어지도록 명령하신다”라고 말하면서 희랍의 개념을 그대로 사용한다. 두번째 현상은 희랍사상 안에 내포되어 있는 이원적 요소, 범신로적 요소, 그리고 당시에 만연된 영지주의에 대한 배격이다. 1-4세기까지 당대의 사회는 대중 혼합 종교의 형태로 이원론적 이론을 전개하는 영지주의가 번창하였고, 플라톤 사상과 스토아적 우주론이 대중 철학의 주도를 이루고 있었다. 교부들은 이런 혼합된 사상에 대치하면서 그리스도 고유의 신학을 정립할 과제를 지니고 있었다. 이데아 세계와 현상계를 엄격히 구별하고 영과 육은 구별해서 전자를 후자보다 위에 두는 플라톤 사상은 이원론을 전제하고 있고, 신플라톤 사상과 스토아 사상은 일원론적이기는 하지만 범신론적 경향이 짙기 때문에 교부들은 양자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래서 교부들은 범신론과 이원론 사상을 거스려 반박하면서 창조론을 정립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시기에, 적어도 서방세계에 있어서 창조이론에 지대한 영향을 준 교부는 성 아우구스티누스이다.

4.1 3세기까지의 교부들의 창조이해
3세기까지의 교부들이 직면했던 창조 문제들은 구원역사 안에서의 창조의 실재, 하느님의 섭리, 무로부터의 창조였다.

4.1.1 구원사 안에서의 창조이해
2세기에 한창 성행했던 영지주의들은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대처해 나갈 커다란 과제 중의 하나였다. 영지주의는 하느님의 신성뿐만 아니라 인간의 인성까지도 그리스도교 사상과는 근본적으로 다르게 해석하고 가르쳐 왔다.
영지주의는 몇가지로 종합할 수 있다. 우선 희랍 신화와 동양사상과 대중종교가 합쳐진 혼합종교였다. 동방의 이원론을 받아들여 하느님과 세상, 영과 육, 선과 악을 대립시켜 생가한다. 그리고 거기에서 톡특한 구원론을 전개한다.
이세상은 충만한 세계, 득 선신이 지배하는 Pleroma 세계에서 쫓겨난 Demiurgos에 의해 창조되었다. 그래서 이 세상의 물질은 자체로 악한 것이고 인간을 구성하는 요소중 영은 육체에 갇혀있다. 그래서 개개인의 구원은 영혼이 육체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그런데 영지주의에서는 해방, 구원을 얻는 방법으로 깨달음, 즉 인식(gnosis)을 통해서 이루어진다고 보았다. 물질과 육체에서의 해방은 바로 이런 영지를 통해 이루어진다. 때문에 모든 인간은 영지를 열망해야 하고, 영지를 통해 데미우르고스에 의해 창조된 하급세계에서 Pleroma의 세계로 갈 수 있다.
여기서 구원은 세상 역사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세상과 역사에서의 도피에서 이루어진다. 따라서 창조와 구원이 구분된 실재로 나타나고 있다. 영지주의자들도 지금 이 순간으로부터의 탈출을 원하고, 황홀한 도취를 원한다. 또한 그들은 그리스도를 강생하지 않은 존재로 인식하고 있다. 그리스도를 다만 영지를 찿아 나서는 사람들을 도와 주는 하나의 능력으로만 생각한다. 결국 영지를 깨달은 인간은 영적인 세계에 이르고 Pleroma 세계에서 하급 세계를 바라보는 구원된 사람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이단적 사상은 초대 교부들, 특히 리용의 이레네오에 의해 반박되었다. 이레네오의 중심교리는 구원론적 전망에 따라 구세사적으로 전개된다. 그가 주장하는 하느님은 물질을 무시하는 영적인 존재가 아니다. 즉 다른 존재와 비교될 수 없는 존재이다. 이레네오의 하느님은 당신 손으로 직접 모든 것, 물질 육적인 것까지도 만드신 하느님이다.
이레내오는 그의 주저인 「이단을 거스려」에서 하느님은 이 세상을 강제적으로 만드신 것이 아니고 당신의 자유의사로 만드셨다(II, 5,4)고 밝힌다. 아울러 하느님 이외에 어떤 창조자도 생각할 수 없고(I, 22,1), 성부와 성자와 성신께서 함께 창조사업을 실현하였다(IV, 20, 1)고 말한다. 이런 하느님의 신적 공통성은 인간의 모든 형태의 공동성의 절대적인 모델이 된다는 것이다.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것은 선한 것이다. 그래서 이레내오는 창세기 1장에 나오는 ‘보시니 좋더라’는 후렴을 다시 강조하면서 창조된 모든 것은 그 어떤 것도 불합격품으로 간주될 수 없다고 강조한다. 창조주 하느님은 자기 창조물을 사랑하신다. 비록 처음부터 죄를 지어 구속의 대상으로 운명지워졌다 하더라도 창조주 하느님은 그 창조물을 사랑하신다(III, 22,1).
그리고 세상의 창조주와 구원자가 같으신 하느님이시라는 것은 구원자이시며 창조주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온전한 계시를 말해준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모든 것이 그분의 주도하에 창조된 역사의 목적이 된다(III, 22,1). 창조의 물질적 의미, 즉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가까이 하시고 그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그 자체로 족하다. 왜냐하면 주님은 바로 엠마누엘이시기 때문이다. 이는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심을 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느님은 인간이 당신의 파드너가 되어 당신의 모든 은혜를 받을 수 있는 존재가 되길 바라신다. 하느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이유는 당신의 선을 쏟기 위한 대상을 하느님께서 만드신 것이다. 이처럼 하느님께서는 인간에게 대한 사랑 때문에 이 세상을 창조하신 것이다. 더 나아가서 이레네오에 있어서 하느님의 창조 사업은 마치 인간의 성숙을 위해, 교육적 목적을 위해 하나의 과정처럼 전개된다는 것이다. 즉 완성을 향한 개방성을 띤 창조 때문에 창조 안에슨 결정적인 완성을 지향헤서 나가는 진화적인 특성이 고찰된다고 말하고 있다(IV,38,4). 그래서 그리스도를 통한 구세사의 완성을 창조의 완성으로 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구원을 향한 성숙과 성장은 이미 옛 계약관에서도 나타나고 있다고 말한다(아담 – 노아 – 아브라함 – 시나이 계약 – 예수의 새로운 계약). 그리고 이 옛 계약은 새 계약과도 합치된다(III, 9-15). 따라서 창조는 사도적 설교의 전승과 함께 하느님께로부터 설립된 교회가 그 안에 결합되어 있는 구원의 역사의 매듭을 푸는 시작이다.
즉 창조는 구세사의 시작이다. 이처럼 창조는 구원을 전제로 하고 있고 구원을 지향하고 있다. 구세사의 어떤 일익을 담당하고 있는 교회는 영지주의 이단과는 다른 눈으로 이 세상을 바라본다. 이레네오에 의하면, “교회는 모든 이들에게 개방된 형제이고 모든 사람을 위한 조국과 같은 것이다”(V,20,20). 한편 창조된 세상은 서로 대립되어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고 본다. 그러나 이 대립관계는 그 자체가 악이 아니라 오히려 다양성을 이루고 있으며 마치 악기가 다양한 선율이 조화를 이루듯이 아름다운 총체를 이루고 있다(II, 25,2).
악이라고 하는 것, 악의 분열의 능력을 갖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도 존재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 것은 인간이 본질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고 인간의 자유의지에서 나오는 것이다(IV, 37,1). 이미 아담이 잘못을 범해 죄와 죽음으로 덮인 이 세상(III, 23,3)이 역사안의 모든 죄를 능가하는 것은 창조주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응답이다. 그 분은 점차적이기는 하지만 언제나 당신의 은총을 통해 악을 정복하시고 계속해서 계약을 맺으신다.
이처럼 이레네오의 세계관은 성서의 세계관과 같이 낙관적이다(IV, 9,3). 바로 구원이란 인간이 죄 때문이 아니고 하느님 당신 사랑의 표출에 의한 것이다. 구원을 전제로 창조하신 것은 이미 창조안에 구원의 의지가 내포되어 있다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이 구원사의 마지막에 가서 모든 사람과 생물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일치하게 될 것이다. 즉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만물은 총괄 갱신하게 될 것이다( IV, 34,4). Recapitulatio(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모이게 됨) 이론의 주창자. 이처럼 이레네오는 바오로적 사상, 그리스도론적, 교회론적 사상을 받아들이고 있을 뿐만 아니라, 2차 바티칸 공의회가 말하고 있는 바를 미리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됨으로써, 일치로써 이루어지는 구원”. 이러한 이레네오의 구원관은 죄와는 상관이 없다. 만일 이 세상에 죄가 들어 오지 않았더라도 구원을 가져다 주심은 이루어졌을 것이라는 것이다.다시 말해 하느님께서 인간이 되신 육화는 죄가 없었어도 이루어졌으리라는 것이다. 이런 학설을 둔스 스코뚜스가 지지하고 있다.

4.1.2 하느님의 섭리에 대한 이해
섭리라는 개념은 초세기 신학자들이 희랍 개념 중에서 받아들인 하나의 개념이다. 이것은 본래 스토아 사상의 개념이다. 존재에 대한 스토아 사상의 설명에 의하면 세계의 근거는 세계 자체 안에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세계는 영원하고 그리고 잴 수 없는, 무한한 것으로 설명한다. 그렇지만 그것을 설명하기에 충분한 원리를 자체 안에 갖고 있다는 것이다. 이 원리는 내적인 것으로 세계의 근원적인 힘이 되며, 세계의 영혼이라고 불리기도 하며 동시에 세계의 법익으로 불리기도 하며, 또는 섭리, 운명이라고도 일컬어지는 것이었다.
그런데 교부들은 이 pronoia 개념을 섭리에 대한 성서의 사상을 표현할 수 있는 개념으로 생각했다. 섭리에 대한 성서 귀절로는 마태오 10,29-31; 6,25-34; 로마 8,28-30을 들고 있다.
“참새 두마리가 단돈 한 닢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그런 참새 한마리도 너희의 아버지께서 허락하시 않으시면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 아버지께서는 너희의 머리카락까지도 낱낱이 다 세어 두셨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말아라. 너희는 수많은 참새보다 훨씬 더 귀하다”(마태 10,29-31).
“ 너희는 무엇을 먹고, 무엇을 마시고… 내일 걱정은 내일에 맡겨라 하루의 괴로움은 그날에 겪는 것만으로 족하다”(마태 6,25-34).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들 곧 하느님의 계획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모든 일이 서로 작용해서 좋은 결과를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미 오래 전에 택하신 사람들이 당신의 아들과 같은 모습을 가지도록 미리 정하셨읍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는 많은 형제 둥에서 맏아들이 되셨읍니다. 하느님께서는 미리 정하신 사람들을 불러 주시고 부르신 사람들을 당신과 올바른 관계에 놓아 주시고, 당신과 올바른 관계를 가진 사람들을 영광스럽게 해 주셨읍니다”(로마 8,28-30).

스토아 사상에서 pronoia는 세계를 만들고 지탱시키는 자의 고유한 특성을 의미했고, 그 특성을 지닌자를 우주의 아버지 또는 만물의 유지자라는 칭호를 받기에 합당한 자로 생각하였다. 때문에 그는 모든 것이 존재하기 이전에 이미 모든 것을 바라보고 알고 있는 상태에 있으며 자신의 예견을 통해서 모든 사건을 계획하는 상태에 있는 자이다. 따라서 이 pronoia를 통해 우주가 정돈되어 있다는 것이다. 스토아 학파에서 pronoia는 예정과 운명을 포함하고 있다. 때문에 구약의 지혜문학에서 조심스럽게 두번(지혜서 14,3; 17,2)사용하고 있다. 이런 개념 사용의 조심성은 로마의 클레멘스 교부에 와서 이완되어 나타난다. 「코린토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클레멘스는 특별히 스토아적 개념과 가까운 pronoia의 개념을 사용하고 있다. 그는 “하느님은 내재적 세계의 창조주이고 온 세계의 아버지로 당연히 불리워지는 분이시다”(PG, 19,2). 또는 세기의 아버지, 창조자등의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하느님의 부성애로부터 세계 안에 현존하는 아름다움과 질서까지 설명될 수 있다. 그래서 단순한 밀씨알을 관찰해서 자연에 대한 시적인 명상에까지 이르게 된다. 즉 세계안의 내적인 힘이 있는데 이는 하느님의 섭리에 의한 것이고, 이 것을 Pronoia라고 부를 수 있다고 설명한다. 이런 명상은 마태 13,3의 씨 뿌리는 자의 비유, 또는 코린 전 15,35-38( 그러면 ‘죽은 사람이 어떻게 다시 살아나며 어떤 몸으로 살아 나느냐?’하고 묻는 사람이 있을 지도 모릅니다. 어리석은 질문입니다. 심은 씨는 죽지 않고서는 살아 날 수 없읍니다. 여러분이 심는 것은 장차 이루어질 그 몸이 아니라 밀이든 다른 곡식이든 다만 그 씨앗을 심는 것 뿐입니다. 몸은 하느님께서 당신의 뜻대로 지어 주시는 것으로 ‘씨앗 하나 하나에 각각 알맞는 몸을 주십니다.)등에서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바로 땅에서 썩은 씨앗이 결실을 맺는 것은 주님의 위대한 섭리에 의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초대 호교론자들은 스토아 사상의 운명론을 비판 할 수 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운명론자에 의하면 운명이 전능하다고 하기 때문이다. 스토아 사상가들에 의하면 운명이란 우주의 법칙으로서 이 법칙에 따라서 세상의 모든 사건들이 이루어지고, 그리고 앞으로 다가올 모든 것도 이 법칙에 의해 계획되고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이 운명은 인간의 힘으로 이겨낼 수도, 억제할 수도, 방향을 돌릴 수도 없다는 것이다. 이 운명은 세계의 이성이며 보편적 로고스로 이해하고 있다. 그런 이유로 호교론자들은 이런 운명론을 배척하면서도 그들이 사용한 개념에 대해서 포용적인 자세를 보였다. 그리고 이 개념을 하느님의 섭리를 표현하는 데 사용하였다.
예를 들면 유스티누스는 하느님의 섭리에 대해 말하면서 인간들이 특히 그리스도인들이 새로은 계약에 초대된 섭리와 그리고 이 세계가 자신의 질서에 보장받는 우주적 섭리를 구분해서 이야기 한다.
아테나고라스는 이 우주 안에서 일어나는 위대한 것은 직접 하느님께서 섭리하시고 사소한 일은 천사를 시켜 섭리하신다고 말한다. 그는 하느님이 천사를 창조하신 이유는 당신이 창조하신 사물을 섭리하는 데 있어서 만물의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배려는 당신이 직접하시고 지엽적이고 부분적인 배려는 천사에게 맡기시기 위함이라 한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는 창조물의 지속적인 창조를 말하고, 만물의 주재와 섭리를 창조 안에 포함시켜 말한다. 특별히 그는 섭리의 과업을 이행하신 분을 로고스라고 한다. 이 로고스는 인간을 구원하는 역할 뿐 아니라, 인간을 교육하고 마지막 완성을 위해 인도하는 것까지 담당한다.
바실리오는 인간을 슬프게 하는 문제까지도 하느님의 섭리하에서 개방적으로 생각하는 자세를 보인다. 그리고 신체적, 생물학적 과정도 섭리 안에서 고찰하려 했다. 예를 들면 무화과 나무의 성장, 태아의 성장까지도 섭리안에서 고찰하였다.
요한 크리소스토무스는 악이라든지 고통의 의미와 같은 구체적인 문제를 논하기에 앞서서 보편적이고 보다 넓은 전망에서 하느님의 섭리 문제를 다룬다. 그의 촛점은 무엇보다도 전능하신 분, 우주를 다스리고 지탱하시는 하느님에 집중되고 있다. 우주의 역사 안에 계속되는 창조적 활동으로 말미암아 세계는 자기 법칙의 질서와 자기 아름다움을 유지하면서 발전하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섭리로 모든 것을 보장하신다. 때문에 일상 생활에서 확인 되는 부정적인 요인들을 불합리한 것으로 간주할 수 없다고 본다. 즉 모든 고통과 악은 그 마지막 의미를, 질서를 생기게 하고, 그 질서를 유지하게 하며, 우주 전체를 행복에로 인도하시는 그분안에서 찿게 된다는 것이다.
결국 교부들은, 특히 호교론자들은 희랍의 개념을 받아들이지만 희랍의 범신론, 이원론을 거부하면서 구세사 안에서의 창조와 섭리에 대한 이론을 정립하여야 했다.

4.1.3 무로부터의 창조( Creatio ex nihilo)
희랍사상과 대결하는 그리스도교적 창조론은 무로부터의 창조라는 점에서 뚜렷하게 드러난다. 신.구약성서에서 두가지 자료를 볼 수 있다. 마카베오 하 7,28( 하늘과 땅을 보아라. 그리고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살펴라. 하느님께서 무엇인가를 가지고 이 모든 것을 만들었다고 생각하지 말아라. 인류가 생겨난 것도 마찬가지다)와 로마서 4,17( 성서에 ‘내가 너를 만민의 조상으로 삼았다’고 하지 않았읍니까? 그는 죽은 자를 살리시고 없는 것을 있게 만드시는 하느님을 믿었던 것입니다.)이다. 물론 이 성서 귀절들에서 어떤 철학적, 형이상학적 성찰을 찿아볼 수 없다. 로마 4,17에서 “없었던 것들”에 대해 말하는 것은 죽는다는 것과 부활한 존재 사이의 대립관계를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철학에서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테마로서 다루고 있지만 여기서는 부분적으로만 다루고 있을 뿐이다. 다시말해 로마 4,17은 세상 창조 안에서 무와 존재사이의 관계를 형이상학적으로 표현 하려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창조주 하느님, 죽은 자마저도 생명으로 되돌아 오도록 하시는 유일한 창조주 하느님께 희망을 갖도록 격려하고자 한 것이다.
무로부터의 창조에 대한 내용을 형이상학적으로 성서 시대 이후에 구체적으로 다룬 것은 「헤르마스의 목자」라는 교부 저서이다. 여기서 무로부터 창조라고 하는 형이상학적 창조를 언급하고 있다. “한분이신 하느님이 모든 것을 창조하셨고, 모든 것을 끝장 내신다. 그분은 존재하는 것들을 무로부터 만드셨다”(PG 2,193). 헤르마스 이후에 무로부터의 창조라는 정식이 일반화된다. 이레네오는 헤르마스를 인용하고, 오리게네스 역시 헤르마스를 인용한다. 이렇게 해서 희랍 우주론적 개념이 창조에 대한 그리스도교 신학으로 들어 오는 것을 보게된다. 무로부터의 창조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철학적, 형이상학적 규명을 시도하진 않는다. 다만 여기에서는 이런 개념을 통해 표현하려 했던 교부들을 이해하고자 한다. 교부들은 신적인 전능과 창조주의 단일성을 동시에 강조하기 위해서 바로 부정적인 정식을 이용한 것이다. 다시말하면, 세상을 창조하는 데 있어서 어떠한 도움도 필요하지 않은 하느님, 어떤 데미우르고스의 도움도 필요하지 않고, 나아가서는 선재하는 어떤 질료까지도 필요로 하지 않는 하느님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하느님 홀로 창조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하느님은 유일하신 분이다.
플라톤이 말한 것처럼 비형태적인 물질을 가지고 창조하신 것이 아니다. 만일 하느님께서 어떤 비정형의 물질로서 이 세상을 창조하셨다면 물질은 그 자체 내에 하느님과 같은 영원성을 지닌 것임에 틀림없다. 또 자신안에 어떤 신적인 요소를 지닌 것이라고, 범신론자와 같은 이야기를 할 수가 있게된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의 하느님은 당신의 창조 사업을 역사하실 때 어떤 것에도 의존하지 않고, 어떤 것을 재료로 삼지도 않았다. 이런 의도를 나타내기 위해 교부들은 Creatio ex nihilo라는 정식을 내세운 것이다. 교부들의 이러한 의도는 사실 성서적 계시 자체 여부를 반영해 주는 표현이다. 즉 이 정식은 뛰어난 유일신적 고백이지, 신 플라톤적 사상에서 볼 수 있는 무, 허구성에 대한 관념적 고찰이 아니다. 나중에 신플라톤적 사상에 영향을 받은 존재론적 의미를 아우구스티누스에게서 찿아볼 수있다.

4.2 아우구스티누스
아우구스티누스는 성서적 증언들을 유비적 형식으로 심화시키고 있다. 또 철학적 언어로써 신플라토니즘적 흔적과 아울러 스토아적 영향의 흔적도 보이고 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창조 이론과 더불어 죄의 행위에 대해서도 다루고 있다.

4.2.1 창조
창조문제는 교부들에게 있어서 “시간”, “존재“라는 철학적 용어를 고찰하는 가운데 전개되고 있다. 물론 한분이시며 세 위이신 하느님이 창조된 모든 것에 대해 절대적 권한을 지니신 분으로 이해되고, 세상의 모든 만물은 그분의 주재하에 있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창세기가 보여주는 것처럼 성서의 근거가 기원의 역사로 제시되고, 아우구스티누스은 심화된 성서해석을 시도하고 있다.

4.2.1.1 시간
아우구스티누스은 무엇보다도 인간학적 용어에 있어서 창조된 실재는 어떤 것이든지 시간적 성격을 지니고 있음을 분명히 한다. 시간이란 우리 인간적 시간으로서 경험하는 바로서,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의 연쇄적 실재이다. 우리의 이성적 영혼은 ”흐르다“, 또는 ”지속하다“라는 현상을 인식하며, 시간의 체험을 증언한다. 이처럼 영혼과 시간은 상호 관련속에서 인식된다. 우리의 인격적 체험을 위해 가치가 있는 것은 하느님의 창조로서 세상 전체를 위해서도 가치가 있다. 인간적 세상으로서 의미되는 세상을 의미한다면 시간적 방법으로 개념되어야 한다. 그 세상을 위해서는 과거, 현재, 미래의 연속성이 본질이다. 왜냐하면 시간과 더불어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세상이 있을 때부터 거기에 시간이 있었다. ‘비 시간성’은 필연적으로 ’비 세상성‘(비 세속성)을 의미한다. 그와 비슷한 것을 생각한다는 것은 우리들의 정신적 능력 밖의 것이다. 인간, 창조물로 부터 출발해서, 창조는 시간적 순간의 연속으로부터 분리해서는 존재할 수도 없고, 이해할 수도 없다. 반대로 창조 없이는 시간 역시 존재할 수도 없고, 이해 할 수도 없다. 이러한 ’시간‘과 ’창조‘의 상호 연관성에서 창세기는 창조의 기원을 “시간 안에’(in tempore) 발생하는 사건으로 고려하고 있다. 한편 창조주의 눈에는 그러한 사건들은 ‘시간과 더불어’(con tempore) 이루어 진 것들이다. 영원하신 하느님에게 창조는 그분의 영원성과 견고하게 결합된 하나의 시간적 실재다. 그와같이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세상은 ”시간과 더불어서 창조된 것이지 시간안에서 창조된 것은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그 개념을 더욱 분명하게 하기 위해서 앞이라든가 뒤라든가, 과거라든가 미래, 또는 우리가 살고 체험하는 순간과 장소, 거기서 우리들의 시간은 하느님의 창조적 영혼성으로에 의해서 연루되고, 유지되고, 전진하게 되고, 지탱되는 바 모든 것을 고려해야 한다.
창조 ‘이전에’ ‘우리가 존재한다’는 것에 대한 이야기들은, 또는 역사의 결론 ’이후에‘ ’우리가 존재할 것이라‘는 것에 대한 이야기는, 그리고 하느님의 아들, 인간 예수의 ’선-실존‘, ’후-실존‘에 대해 이야기 하는 것은 시간의 조건속에서, 지극히 인간적인 이야기들이고, 신적이고 영원의 친교와 연루되어 있는 신비에게는 적당하지가 못하다. 만일 하느님으로부터 출발한다면 성자는 영원한 존재일 수 있다. 즉 자신의 공동 창조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우리들의 시간을 포용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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