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이스라엘의 창조신앙-(라)

2.1.2.3 죄의 원초적인 모델(모형)
야휘스트계 저자는 온 땅에 만연되어 있는 죄에 대한 체험을 세상에 실재하고 있는 죄의 원초적인 모형으로 설명하고 있다. 여기에 4가지 이야기가 있다. 금령을 어기고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먹는 불순명, 아벨을 죽인 카인의 형제살해, 하느님의 아들들의 인간의 딸들과의 성적결합, 바벨 탑의 건설. 이러한 4가지 이야기는 어떤 공통성을 지니고 있다. 여기서 어떤 선한 것이 위반 또는 범죄에 이용되고 있다는 것을 보게된다. 여기선 하느님이 정해준 어떤 제한을 넘어서는 어떤 행위의 특징이 소개되고 있다. 어떤 악이나 악의 기원에 대해서 합리적인 설명이 제시되고 있지 않다. 다만 악의 현실을 인정하고 있을 뿐이다. 악에 대해서 모조리 알 수 없는 부조리를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 인간의 타락 이야기를 전하면서 야휘스트계 작가는 인간이 겪게 되는 모든 고통을 죄의 결과로 보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어떻든 이스라엘의 역사적 경험과, 인간의 삶에 있어서의 고통의 체험을 인간에 대한 깊은 심리적 반성과 연결하여 인간과 악의 숙명적인 관계를 설명하고 있다.
현대 신학에 있어서 이 첫번 모델은 마치 악의 기원이 악마에게로 이끄는 어떤 유혹에 떨어지는 데로 운명지워져있는 것처럼 보여주고자 하는 것 같다.여기서 유혹은 범죄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설명하기 위하여 야휘스트계 작가가 사용한 기교 일 뿐이지 핵심 주제는 아니다. 뱀은 악마의 화신이 아니다. 인간의 타락 이야기에서 뱀이 촛점이 되고 있지도 않다. 오히려 촛점은 인간이다. 뱀은 유혹의 원인을 구체화 시킨 것에 불과하다. 야휘스트게 작가는 뱀 역시 하느님에 의해 창조되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동산에서 가장 간교한 동물이었다고 말한다(창세3,1; 참조 마태 10,16). 바로 뱀이 하느님께서 창조한 것 중에서 가장 간교한 동물이었다는 점에서 유혹자로 이용되고 있을 뿐이다. 또 다른 이유가 있다면, 고대 동방세계에서 뱀에 관한 신화와 숭배의식이 널리 반영되고 있었고, 이러한 신화와 숭배의식이 이스라엘의 야훼 신앙을 위협했을 가능성에서 찿을 수 있을 것이다. 예컨대 에집트 파라오 왕의 왕관에 그려져 있는 뱀의 모습, 가나안의 풍요와 다산을 관장하는 바알신의 대표적인 상징물이었던 뱀이였기에 하느님을 거스리는 상징으로 쉽게 이용될 수 있었으리라 본다. 뱀이 어떤 신령한 힘을 가진 존재로, 또는 사탄의 화신으로 간주 된 것은 상당히 후대라고 말할 수 있다. 바빌론 유배시대 이후에 뱀을 악마와 동일시 하게 되는 사상이 유대교안에서 체계화 되었다(지혜 2,24). 그리고 이러한 사상이 그리스도교에까지 이어졌다(요한 8,4; 로마 16,20; 요한 1서 3,8; 묵시록 12,9; 20,2). 비록 창조된 선한 것일지라도 유혹의 동기가 될 수가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어떤 사물에 대한 지식, 그 자체로 좋은 것이지만 유혹을 가능케한다는 것이다. 죄의 특징으로 볼 수 있는 것은 정확한 한계가 제시 되어있는 하느님의 게명을 위반하였다는 것이다.인간들의 범죄에서 기본적인 특징들 가운데 하나는 악을 위해 악행을 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어떤 선일지라도 하느님의 원하시는 것과 대치되는 것일 경우에 발생한다는 것이다. 범죄자는 하느님이 그의 창조물을 위하여 원하신 선의 질서를 악화시킨 것이다. 이어서 자연적인 귀결로서 자기 자신과 자신이 살고 있는 환경에게까지 그 질서를 파괴하게 되는 것이다. 죄란 자체안에 자멸의 힘을 지니고 있다. 왜냐하면 그 완성을 이루도록 인간의 행동을 이끌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 자신의 죄를 반성할 때, 처음에 상상만으로 원하고, 그것을 어느 정도의 작은 행위로 옮기고, 점점 그 원하는 바를 완전하게 이루려고 행동을 시도하게 된다.그래서 일찌기 욕심은 죄를 낳고 죄는 사망을 낳는다는 말을 하게 되는데, 거기엔 어떤 진리가 있다. 창세기 3장에 대한 정당한 그리스도교적 해석은 불순명의 행위, 하느님의 뜻에 대한 항거, 하느님으로부터의 도피로 간주한다. 욥기 15,8; “하느님의 회의를 엿듣기라도 하였단 말인가? 지혜를 독점이라도 하였단 말인가?”의 귀절은 바로 선과 악을 알게 되는 나무를 상기시키기고 있다. 시편 51,4: “당신께 오로지 당신께만 죄를 얻은 몸”이란 귀절은 어떤 죄든지 하느님을 거스리는 것이라는 점을 인식하고 있다.사실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따먹는 그자체가 나쁜 건 아니다. 여기서 죄가 되는 것은 하느님의 뜻을 어긴 데 있고, 그 열매를 따먹으려는 동기가 하느님과 같은 존재로 행세하고 싶다는 한계 없는 욕심과 교만에 있다고 본다. 또 한가지가 있다면 뱀의 거짓을 진실로 받아들이는 한편, 진실하신 하느님을 거짓말 장이를 만드는 불의에 있다고 하겠다.
사실 유혹을 전하는 대목 없이도 하느님의 명령을 위반하는 사건을 이야기할 수도 있다. 그런데 왜 야휘스트계 작가는 그것을 유혹이라는 뱀의 이야기를 삽입한 것일까? 그 의도는 분명하다. 하느님의 명령을 어기는 상황이 인간에게 언제나 어디서나 벌어지고 있다는것을 잘 알고 있다.그런데 이러한 불순명이 어떤 인간적 상황으로 말미암은 것으로 보이는 것들이 많다. 다시말해서 인간에게는 어떤 잘못을 자기 의도와는 상관없이 주변환경, 또는 다른 사람, 어떤 제도에 의해 불가피하다고 핑계를 대고 싶은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인간은 어떤 특정한 상황 속에서 어떤 꾐에 빠져들 수 있는 그런 존재라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이 지닌 한계, 또는 인간의 조건을 말해준다. 그것은 윤리나 종교, 정치적 권력으로도 이 한계를 벗어나게 할 수 없는 인간상황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죄는 인간 자신이 책임을 지는 것이지, 어떤 상황이 결코 핑계가 될 수 없다는 것을 보여 주고자 한다. 그리고 앞서서 보았지만 뱀을 유혹자로 진술하는 것은 신화적인 단계, 아니면 신화의 영향을 받고 있다는 것을 드러낸다. 실제로 동화나 신화에서 종종 뱀이 비슷한 동기로 이야기 되고 있는 것이 발견 되기 때문이다. 예컨대 길가메쉬가 애써 구해 놓은 불노초를 훔쳐 달아나는 자가 뱀으로 묘사되어 나타나기도 한다. 이런 신화의 단계, 아니면 신화 이전의 단계를 차용하고 있다는 것은 악의 기원에 대하여 완전히 파헤치기가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말하고자 한다. 다시말해 악의 기원을 설명해 줄 원인은 알 수 없는 신비라는 것을 말한다.
뱀이 내건 유혹, “하느님과 같이 된다”는 것은 인간이 본능적으로 생명과 지식에 대한 강한 충동을 지닌 존재로 창조 되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사실은 뱀이 아니라, 인간의 이러한 생명과 지식에 대한 강한 충동이 하느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갈등을 야기하는 근원이라는 것이다. 인간은 생명에 대한 강한 애착을 갖고 있지만, 분명히 죽음과 맞닿아 있다. 여기서 벗어날 길은 전혀 없다. 그런데 다른 가능성이 남아 있다. 자신의 지식의 충동을 통해서 자신의 존재 자체를 뛰어 넘고자 하는 것이다. 마치 지식을 통해서 하느님과 같이 되는 가능성이 열리듯이 보였고, 이점이 유혹의 핵심이었다는 것을 야휘스트계가 내세우고 있는 것이다. 물론 모든 것을 알고자 하는 지식이 하느님을 거스리는 것은 아니다. 이미 언급하였듯이 그 자체로는 좋은 것이요, 선이다. 그러나 인간이 지식을 통하여 자신의 한계를 넘어설려고 할 때, 하느님과 인간사이의 합당하고 정당하게 이루어진 관계가 방해받거나 파괴당하는 이유로 유혹일 수 있는 것이다. 야휘스트계는 인간이 하느님의 명령을 어김으로써 자신의 한계, 그것이 인간을 보호하는 것이었는데, 그것을 넘음으로써 자신의 근거를 잃어버리고 만 것임을 이야기 한다.
여기서 ‘원죄’에 대해서, 또는 ”하느님과의 결별“에 대해서, 또는 에제키엘 28,11-19에 다시 반복하고 있는 원죄론을 언급하는 것은 적당하지 않다고 본다. 원죄론에 대해선 나중에 보기로 하자. 아무튼 여기서 야휘스트계 작가는 하느님의 명령을 따르기를 거부하고, 하느님께 전폭적인 신뢰를 의도적으로 거부했다는 점에 촛점을 두고 있다.여기서는 어떤 죄의 원초적인 모델로서 죄가 자유를 자기 소유로 하고자 했다는 데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죄를 짓는 사람은 어떤 형식이나 장소에서든지 인류의 원조들이 범했던 것과 같은 유형의 잘못을 범하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이런 의미에서 원조 아담과 에와가 범한 행위가 원죄로서 규정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범죄가 유전이라는 생식의 법을 따라 자손들이 인간인 한 본성적으로 그 후손들에게 전해지는 것이라는 것은 정당하지 못하다. 이러한 이론은 유대교 전승에서 유래하는 것으로 본다. 구약의 외경으로 취급되는 에즈라 제 4권 7,11에는 “아담아, 너 무슨 짓을 저질렀는가? 너의 죄로 말미암아 망하게 된 것은 너 혼자가 아니라 너의 모든 후손들 역시 망하게 되었다”라는 기록이 있다. 이런 사상이 바울로에게 이어져 신약과 연결되었다 (로마서 5,12-14 참조). 원죄에 관한 중요한 귀절이 되고 있다.이러한 바울로 사상을 아우구스티누스이 확고히 하였다. 하지만 아담이 어떤 특정한 개인을 지칭할 뿐만 아니라 보편적 집합명사일 가능성이있기 때문에 그의 죄를 단순히 한 개인의 죄로 국한시키거나, 또는 죄가 유전된다고 주장하는 데는 무리가 있다. 원죄란 오히려 인간이 본성적으로 지닌 한계성과 나약함 때문에 주어진 삶에서 잘못을 저지를 수 있는 원초적인 가능성이라고 보는 게 더 가깝다고 말할 수 있다.
또 왜 여자가 먼저 유혹에 빠져 죄를 범하고 남자를 끌여들였을까?- 남자는 그러지 않을 수 도 있었다. 그러나 아담은 쉽게 동의하고 만다. 여기에서 또 다른 면이 드러나고 있다. 인간은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처지에서 너무도 쉽게 자신이 결정을 내리기를 회피하고 다른이로 하여금 대신 자신을 위한 결정을 내려주도록 허용하고 있는 것이다. 가끔 고백성사를 보러 들어와서 ‘신부님 이게 죄입니까?“ 하고 묻는 사람들을 만난다. 과연 우리 인간은 죄라면 안하고 죄가 아니라면 행할 수 있는 의지의 인간들인가? 죄는 신부가 이건 죄고 이건 아니고 그렇게 결정해 줄 수 있는 것일까? 죄를 인식하게 하는 것은 누구보다도 자신의 양심이 아닐까? 또 한가지 에와와 아담의 범죄는 공동범죄의 형태로서 다른 사람을 꼬임에 빠트릴 수 없는 수동적인 사람, 대세에 따라 움직이는 사람들이 행하는 범죄형태가 드러난다. 그리고 알몸으로 표현되는 이 범죄는 남녀간의 성적인 범죄를 의미하는가? 그것보다는 알몸-나뭇잎- 가죽옷- 인간의 역사, 의복사를 반영한다고 보여진다. 부끄러움은 어디서 발생하는가? 자신이 노출되는 것에서 비롯된다. 옷을 벗는 것도 부끄러움이지만, 자신의 내면을 노출당하는 것이 더욱 부끄러울 수 있다. 또 부끄러움은 양면성을 지닌다. 죄로 인해서, 부족한 자신의 열등감에서 비롯되는 부끄러움과 아울러 뻔뻔 스럽지 않다는 긍정적인 부끄러움도 생각해 볼수 있다.
”아담아, 너 어디 있느냐?“ 는 하느님의 찿으심은 무엇을 연상 시키는가? 마리아와 요셉이 소년 예수를 찿아 헤매다가 성전에서 에수를 만나자, 마리아가 예수를 질책할 때를 연상시킨다. “너 도대체 어디에 있었느냐? 나와 아버지가 애간장을 태우며 찿았는데…” 또 다른 측면, 더 문맥에 맞는 것은 재판과정에서 대질 심문으로서 인간은 자신의 행위에 대해 대답해야 하는 존재라는 것을 말해준다. 하느님은 책임을 면하려고 도망치는 그런 인간을 창조하고자 하시지 않았다는 것이다. 책임만이 아니라 변명할 기회도 주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책임회피의 장면에 대해서 오히려 스스로 책임을 지고 핑게를 대지 않았더라면 하느님의 판결은 어떻게 내려졌을까? 상황이 달라졌으리라 본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인간의 현실을 반영하고 있다. 아담은 에와에게, 에와는 뱀에게 핑계를 댄다. 누구나 잘못을 다른 사람에게, 또는 환경에게 전가시키고자 하는 인간의 일반적인 성향을 지적하고 있다. 그런데 뱀은 핑계의 기회를 주지 않는다. 심문이 없다. 죄의 근원에 대한 신비가 그대로 보존되고 있다. 인간은 설명될 수 없는 어떤 것에 대해서도 책임을 지지 않으면 안되는 존재라는 것을 의미한다.
낙원으로부터의추방- 하느님으로부터 분리되어 단절된 인간의 실제적 상태를 지시한다. 또 인간은 하느님을 멀리 떨어져 계신 분으로 체험한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에덴의 동쪽 역시 하느님으로부터 격리된 곳을 말한다.
벌로서 내려진 선고- 인간의 한계를 드러내고 있는 실존의 실상이다. 따라서 현 인간 실재, 남자의 실상과 여자의 실상을 원인론적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남자와 여자의 관계도 실생활을 반영해 주고 있다. ”남편을 주무르고 싶겠지만”이란 표현은 남편에 대한 갈망, 동경을 드러낸다. 이것은 남자와 여자의 신체적 구조에 토대를 둔 것이고, 남자에 의한 지배,즉 여자의 복종은 변화될 수 있는 어떤 사회적인 현상이다. 이 두가지가 혼합되어 있다.

원초적인 죄에 대한 두번째 모델은 형제 살해이다(4,1-16). 여기서 우선 우리는 카인이 전적으로 악한 사람이었고, 아벨은 선한 인간이었다고 단정지어 말할 수는 없다. 이 이야기가 보여 주는 것은 이러한 사회적 차원의 죄는 전쟁과 죽이려는 의도하에 형제들간의 합법적인 경쟁(여러 가지 상이한 직종)을 악화시킨다는 것을 보여 주고자 한다. 자기 자신만의 이익을 추구하는 이기주의적 욕심은 사회적이고, 인격적 교류관계를 파괴하는 전쟁으로 이끌어 간다는 것이다.
카인과 아벨의 이야기는 원역사의 다른 설화들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근본문제를 담고있다. 이 이야기는 본래 원조의 타락 설화와는 다른 전승이었으며 그 분량도 더 길었으리라 추정된다. 예컨대 카인이 다른 사람의 복수를 두려워 했다면 또 다른 인간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카인은 어떻게 아내를 얻었을까? 이런 점을 고려한다면 카인과 아벨의 이야기는 원래 복잡한 내용을 가진 카인에 관한 독립된 설화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설화의 배경에는 고대의 농경문화와 유목문화의 갈등이 반영되어 있는 것으로도 생각된다.
그러나 야휘스트계 작가는 이 설화를 압축시켜 낙원 설화 뒤에 놓음으로써 특수한 문화나 종족의 단순한 배경사에서 인간의 근원적이고 보편적인 문제를 담고 있는 이야기로 그 성격을 변화시켰다. 야휘스트계 작가는 인간의 첫 범죄이후에 다양하게 드러나는 또 다른 인간의 죄악상을 ‘형제살해’라는 극단적인 예를 통하여 선명하게 보여준다. 카인과 같이 평범한 직업을 가지고 종교생활을 하는 보통사람도 살인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은 범죄의 보편성을 나타낸다. 이렇게 볼 때, 카인은 낙원 설화의 아담과 하와와같이 인간이 보편성의 한측면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다.
낙원설화와 카인과 아벨이 설화는서로 보완적인 관계를 지니고 있다. 낙원설화는 남녀로 대표되는 가장 기본적인 가정 공동체가 축복 속에 창조된 모습과 죄를 범하는 한계성을 동시에 보여 주었다. 여기에 비해서 카인과 아벨의 설화는 또 다른 기본 공동체, 형제- 동료의 관계에서 다양하게 일이 분화되는 긍정적인 모습과 함께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경쟁관계 등의 부정적인 측면을 묘사함으로써 인간의 양면성을 보여 준다.
카인설화도 역시 낙원설화와 마찬가지로 ‘범죄’와 ‘처벌’로 구성되어 있다. 카인의 범죄를 기술하면서 야휘스트계 작가는 카인과 아벨이 서로 형제 였다는 사실을 강조함으로써 하나의 범죄가 단순히 하느님을 거스리는 죄에 그치지 않고 사회적인 연대성이 있음을 드러낸다. 동시에 야휘스트계 작가는 아우를 살해한 카인을 처벌하면서도 보호 해주는 하느님을 서술함으로써 죄인까지도 감싸 주시는 하느님의 자비를 표현하고 있다. 카인을 죽이지 못한게 한 것은 복수의 악순환으로 죄가 확산 되는 것을 막으려는 근본적인 의도가 깔려있다고 보겠다.

<제사>
두형제가 제사를 지낸다. 야휘스트계는 야훼신앙과 연결시키려고 한다. 우리는 원시시대부터 모든 인간이 제사를 지내왔음을 안다. 우리나라도 옛적에 동맹이니 부여니 하는 일종의 추수감사게가 있었고 오늘날 추석이라는 형식으로 남아 있다. 어떻든 왜 하느님은 아벨의 제물만을 받아들였을까? 이것은 아마도 농경문화권의 가나안 제사보다도 이스라엘의 유목문화권의 제사를 우월한 것으로 보려했던 의도를 본다. 후대 유대인들이 카인이 사악했기 때문이다. 혹은 아벨이 선한 인간이었다 하는 해석을 붙인 것이지, 창세기 본문에는 아무런 언급이 없다. 그 해답은 해명될 수 없고, 다만 추정할 뿐이다. 성서 전반적 경향을 보면 상당히 작은자, 약자를 선호하시는 하느님으로 그리고 있다.(에사우와 야곱, 요셉, 다윗, 제자들, 어린이들, 죄인들, 보잘 것없는 사람들, 가난한 자들, 둘째 아들.) 이처럼 약자를 선호하시는 하느님의 경향을 여기서도 보게 되는 셈이다.

원초적인 죄의 세번째 모델은 6,1-4에 나타나는 신화적 내용을 취하고 있다. 신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을 아내로 맞이했다는 내용이다. 신의 아들이란 표현은 어떤 상징적인 표현으로서 인간 실재에 있어서 기형화된 어떤 범죄와 지나친 과잉을 다루고자 한듯이 보인다. 지상에 인간들의 증가와 더불어 인간들의 악한 행위 역시 늘어났다는 6,1의 귀절과 더불어 대를 거듭함으로써 하느님과 인간들을 적대시하는 악한 행위들이 축적되는 것을 나타내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게 함으로써 6,6에서 보듯이 하느님으로 하여금 인간을 만든 것을 후회하고 모든 창조물을 땅위에서 쓸어버리려는 결심을 하게 만드는 동기로 부여 한 듯 싶다.
홍수설화에 앞서 거인족을 다룬 하나의 고대 신화를 기술한다. 동방의 고대 신화는 자주 신과 인간사이에서 놀라운 힘이나 신적 능력을 지닌 영웅이나 거인들이 태어나 신에게 도전하는 모습들이 그려진다. 환웅이 한울님으로서 인간이 된 웅녀와 결혼했다는 우리나라 건국설화도 예외가 아니다. 어쩌면 가나안 바알신과 아스다롯의 성적관계를 모방하는 신전에서의 매음행위를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도 보인다.
하느님의 아들들이란 유다교 전승에 따라 하느님의 아들을 천상적 존재인 ’천사‘로 보기도 한다. 또는 사람의 딸들을 타락한 카인의 후예로 해석하기도 한다. 베스터만은 하느님의 아들들이란 어떤 신적인 존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남보다 우월한 권력을 가지고 있는 특권층의 인간을 가리킨다고 해석한다. 예컨데 파라오같은 자들이 남다른 힘을 가지고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지 않고 여자를 자기 마음대로 취하는 등, 자기 욕망대로 움직일 때, 하느님이 개입하여 자신의 한계를 스스로 깨닫도록 처벌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이스라엘 사람들도 율법의 금지(신명 23,18- 19: 이스라엘의 딸들은 아무도 성소에서 몸을 파는 여자가 되지 못한다. 이스라엘의 아들들은 아무도 성소에서 몸을 파는 남자가 되지 못한다)에도 불구하고 가나안 신전 창녀들과 어울렸으며(호세 4,14:사내들이 성소의 창녀들을 찿고, 제물을 드리며, 으슥한 데를 찿는데, 너희 딸들이 바람을 피운다고 벌하겠느냐?; 열왕 상14,23-24:그들 역시 높은 언덕과 우거진 나무 아래마다 산당을 짓고 거기에댜 돌로 남신을 만들고 나무로 여신을 만들어 세웠다. 게다가 전국 곳곳에 남창이 우글거렸다; 22,46: 여호사밧은 부왕 아사의 시대에까지 남아 있던 남창들을 전국에서 쓸어 버렸다). 솔로몬의 개방정책이후 이러한 경향은 더욱 확대 되었다는 것을 보게된다. 창세기 6,4에 나타나는 느빌림이라는 거인족이야기는 신화에 나타나는 신들과 인간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들인 반신적 존재로서 초인간적인 힘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러한 자신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인간의 한계를 뛰어 넘으려다 하느님의 처벌을 받았다는 암시를 전해준다. 민수기 13,33에서도 아나킴과 다른 거인족이 있었다는 것을 전해주는데, 후기 유대교 전승에서는 거인들이 제 힘만을 믿고 하느님께 대항했다가 홍수 에 휩쓸려 멸망하는 어리석은 자들로 묘사되기도 했다(지헤 14,6; 집회16,7; 바룩 3,26-28 참조).
결국 이 설화는 신화적인 표현을 사용하여 땅위에 사람이 불어나면서(6,1) 인간이 제 힘만을 믿고 신들 처럼 행세하려는 타락한 모습과 그 결과를 알려 주고자 했다고 본다. 낙원 설화와 카인과 아벨의 설화가 인간의 개별적인 타락상을 보여 주는 반면에 홍수설화 관련된 거인족 설화는 다음에 보게될 바벨탑 설화와 마찬가지로 집단적인 인간의 타락을 보여주고자 한다. 이설화는 이어서 나타나는 홍수설화를 전해주는 배경으로서 인간 집단의 죄가 다양한 방법으로 전개되어 나갔다고 하는 것을 보여주려고, 본래의 독립된 설화였던 것을 홍수설화와 연결시키고 있는 것이다. 다시말해 홍수가 하느님의 처벌로 결정된 이유로서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원초적인 죄에 대한 4번째 모델은 바벨 탑의 붕괴다(11,1-9). 바벨탑 이야기 역시 집단적인 인간의 타락에 관한 이야기다. 기술적인 면에서 우리에게 제공되는 가능성의 욕망안에서 솟아날 수 있는 거대한 야망을 보여 주고 있다. 이것 역시 야휘스트계 작가가 다른 귀절에서 보여 주는 것처럼, 그 자체로는 좋은 것으로 소개된다. 그러나 인간의 천재성은 역시 인간의 소질을 거슬러, 업적의 위대성은 그 것을 이룩한 인간을 박살 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업적에 대한 교만함은 위험한 모험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민족이 상이하다는 것 역시 좋은 것이다. 그 것은 창조의 목적과 상응한다. 그 목적은 풍부한 조화를 이루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것을 획일하에 예속 시키려는 제국주의적 경향이나 통합주의적 목표를 방해하고 위협한다. 언어가 여럿이라는 것은 역시 하나의 풍요로움이기도 하지만, 인간들을 격리하는 장벽들을 많게 할 때 , 하느님의 창조를 위하여 어떤 손해를 주는 무엇이되기도 한다.
이 바벨탑 이야기는 두가지 내용을 지니고 있다. 하느님의 축복으로 간주되었던 민족들의 번영에 관한 내용이 그 첫번째 주제를 이룬다. 그러나 바벨탑 이야기에서 백성들의 갈라져 나간다는 것이 축복으로 보기는 커녕 오히려 저주 내지는 하느님의 처벌로 설명되고 있다. 두번째 주제는 언어의 분화이다. 다른 나라 신화에서는 홍수 이후 인류가 분산되고 언어가 나뉘어 졌다고 말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야휘스트계 작가는 특이하게 이 두가지 주제를 통합하는 이야기로서 탑을 쌓는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그리고 이 탑 이야기는 창세기 11,1-9에서만 나타나지 다른 것에 전혀 언급되고 있지 않다.
이 세상에 여러 나라와 여러 언어가 있게된 원인론적 설명으로서, 이름 바벨이 보여주듯이 바빌론의 당시의 문화를 반영해 주고 있다. 돌대신 벽돌을 사용하고, 흙 대신 역청을 쓰게 되었다는 표현은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놀라운 문화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구어서 만든 벽돌은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대표적인 도구였다. 이들은 그들의 상형문자를 벽돌에 새기기도하고 건물을 짓는 데 사용하기도 했다. 또 역청을 발라 쌓아올린 건물은 오랜 세월을 지탱하였다. 4절에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게 하자‘라는 것이 있는데, 이것은 메소포타미아의 지구라트를 배경으로 한 것으로 보인다. 지구라트는 구운 벽돌로 쌓아 오린 피랏밋식 구조의 층계식 대형 건축물로서 바빌론의 모든 도시 마다 있었던 것으로 맨 꼭대기에는 신전이 자리잡고 있었다. 말하자면 중세 교회가 성당을 지을 때 높이 짓고 뽀족탑을 세우는 것과 같은 의미를 지닌다. 종교적 의미로서 산, 높은 곳은 인간이 신을 만날 수 있는 장소, 신과 연락이 되는 곳으로 간주했던 것은 변함이 없다. 희랍의 역사가 헤도도투스가 경탄하며 기술하고 있는 지구라트(하늘의 언덕, 신의 산이라는 뜻)의 규모는 탑의 높이 90미터, 탑의 저변 은 정방형이었고 각변의 길이는 똑같이 90미터 였다. 제일 아랫 부분은 33미터의 기부를 이루고, 그 위에 여섯 계층이 솟아 있으며, 제일 위층에는 제신의 거실이 있다. 그러나 도시에 따라서 규모가 작은 것도 있다. 고고학자들의 발굴 작업에서 이런 점이 사실이라는 것이 드러났지만 그 년대에 대해서는 아직도 밝혀지고 있지 않다. 추정하기를 기원전 2000년경으로 보고 있다.
성서는 바벨이라는 이름을 ‘혼란시키다’라는 히브리어 ’바릴‘과 연결시키고 바벨탑의 붕괴를 말하고 있다. 바빌론의 어원 ’바빌리‘는 신의 문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으며, 내용상 바빌론 문화와 연결되어 있는 바벨이라는 이름은 그 어원이 분명하지 않다. 성서작가는 이 탑을 죄악의 상징물로 놓고 있다.
사실 바벨탑 설화의 중심은 탑이 아니라 인간이다. 자기가 속한 도시나 국가의 명예를 위한 인간의 노력은 긍정적이며 자기 자신의 이름을 높이고자 노력하는 것도 결코 나쁜일이 아니다. 그러나 문제가 되는 것은 인간이 하느님의 뜻을 전혀 개의치 않고 스스로의 능력으로 한계를 초월하여 이름을 떨치려는 오만이다. 이 이야기는 낙원에서 아담과 에와의 범죄와 유사성을 지닌다. 여기서 민족의 분산, 그리고 언어의 분화는 이러한 오만에 대한 하느님의 처벌이면서 동시에 보호조치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총화단결이라는 미명아래, 대동아 통영이라는 제국주의적 통합이 우리에게 준 역사적 교훈을 보면 그것이 사실이라는 것을 배우게 된다. 일치란 똑같은 유니폼을 입는다고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다양성, 개성을 존중하는 가운데 진정한 일치는 그 내용에 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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