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 장 성서안에서의 종말론적 근거
1. 계 약 (약속)
유대.그리스도교인의 신앙의 역사는 희망의 역사에서 시작한다. 이는 영혼의 불멸성의 성찰 이전에 시작되었다. 즉 약속의 땅.자손의 번성.하느님의 보호의 약속을 받는다.
이스라엘 경신례 안에서의 오랜 신앙고백은 신명 6,6에 나온다. 야훼께서 크고 두려운 기적을 에집트에 내려 파라오와 그의 온 궁궐을 치시는 것을 우리는 이 눈으로 보았다. 이렇게 우리를 거기에서 이끌어 내신 것은, 우리 선조들에게 주겠다고 맹세하신 땅에 우리를 데려다가 그 땅을 차지하게 하시려는 것이었다.
이는 형식문이 아니라 역사에 대한 이해이다. 즉 정치역사와 함께 하느님과의 역사가 시작되고, 이 안에는 약속에 대한 희망이 있고, 이는 출애급과 관련맺고 있다. 이스라엘 역사는 약속과 더불어 시작되는 역사이다. 이 약속은 미래에 대한 약속이고 하느님은 이들을 보호하고 약속의 땅에 초대한다. 이스라엘 역사안의 핵심은 출애급사건이다. 이는 노예생활에서의 해방이고, 여기에 다시 약속과 초대가 반복되어 나타난다. 불타는 가시덤불속에서 모세에게 약속을 상기시키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묘사하고, 이로써 약속은 처음에 비해 점점 커져간다. 이런 희망없이 이스라엘 역사는 이루어질 수 없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이 역사는 바로 하느님에서 온 역사이다. 그리고 이 약속의 보증으로 아브라함과의 약속의 성취를 상기시킨다. Ex 19,4-6 ; 내가 에집트인들을 어떻게 다루었는지, 너희를 ….. 어떻게 나에게로 데려 왔는지 보지 않았느냐? 이제 너희가 ….. 계약을 지킨다면 ….. 거룩한 내 백성이 되리라.
그리하여 이스라엘은 하느님의 백성이 된다. 하느님의 약속에는 항상 의무도 동반된다. 땅.후손의 번성, 하느님과의 특별한 관계가 하느님과 이스라엘의 계약의 반복으로 나타난다. 가나안에 도착했을 때, 하느님은 계약의 궤로써 이미 이스라엘과 함께 한다. 이런 특별한 관계는 왕권으로 나타난다. 즉 다윗왕좌의 영원성으로 나타난다. 이 과정속에서도 과거의 역사를 계속 상기시킨다. 물론 이스라엘에게는 부정적 체험의 역사도 있다. 그런데 이런 부정적 체험을 통해 새로운 희망을 가질 수 있엇던 것은 바로 이스라엘의 왕이 세상의 왕으로 군림할 것이라는 희망이다. 이는 단지 다윗가문에의 약속이 아니라 이스라엘 전체와 관련되는 것이다. 이스라엘이 하느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하느님의 은총으로 자유로운 백성이 되길 희망한다(Gen 12,3; 세상 사람들이 네 덕을 입을 것이다). 다윗으로 말미암아 과거 선조들과의 약속은 거의 이루어진 것으로 보였다. 영토의 확장, 후손의 번성, 하느님과의 친밀한 관계, 솔로몬의 성전 건축.
그런데 그 다음 세대에서 모든 것이 깨지고 만다. 성서는 왕들의 권력남용을 묘사하고 있다. 종교.윤리.정치적으로 타락한 남북왕조 모두 이민족 지배하에 들어간다.
그러나 아직도 희망해야할 약속으로 남아있다. 특히 이사야는 왕에 대한 희망을 일깨워 준다. 이런 메시아에 대한 희망이 담겨 있다. 여기에는 4가지 새 희망이 담겨 있다. 이제 이방인의 통치는 필요가 없다. 메시아는 하느님의 대리자로 친절하고 열성적일 것이고, 그 분의 다스림은 끝이 없을 것이라는 것이다. 이는 나단의 예언보다도 더 높은 것이다. 이스라엘이 항상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이런 새로운 희망에 의해서이고, 이는 과거의 체험(출애급)이 바탕이 된다. 이들의 역사적 반성은 하느님과의 관계에서도 새로운 차원으로 간다. 즉 자신들의 삶이 자신들의 잘못에 의한 것임을 알고 나서 마음에서 하느님을 섬기고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하느님과의 관계를 회복시킨다. 이는 시나이의 계약을 뛰어 넘는다.
2) 약속과 희망
희망은 좀 더 확장되어진다. 이스라엘 역사는 직선으로 묘사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분명 이스라엘 역사가 성장해감을 알 수 있다. 즉 이스라엘 뿐 아닌 세계 평화로의 성장이다. 다윗왕조에 대한 약속은 세계 평화의 왕국으로 변신한다. 더 나아가 우주적 차원에서 낙원을 이야기한다. 아브라함 자신의 약속을 시나이의 계약으로, 이는 다시 인간의 마음에 새겨지는 새로운 계약으로 도약하는 희망의 차원으로 성장.발전해간다. 이렇게 확장해 가는 약속과 희망이 종말론적 요소이다.
3) 약속과 기대
약속은 구체적 역사의 희망에서 기대로 표현된다. 기대는 새 약속에 대한 생동이고 이전의 약속을 초과한다. 때로 약속은 인간적인 것과 모순될 수도 있다. 따라서 예언자들은 백성의 잘못된 기대, 환상을 깨우쳐 줄 필요가 있었다. 물론 광신적인 인간의 환상에 대해서도 깨우쳐 준다. 즉 하느님의 보호를 드러내는 것으로써 지도자들이 한 일은 외적인 것이고, 약자들은 보호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예언자들은 성전도 과거 실로의 성소와 같은 꼴을 면하지 못할 것임을 경고하고 있다. 그리고 도시의 장로.사제.강도.부랑배는 모두 소집하여 신랄하게 비판한다. 이는 단순한 희망 뿐 아니라 보다 나은 사회를 위한 것이었다. 이것이 바로 예언자의 임무였다. 또한 이는 인간의 구체적 역사에 중점을 둔다.
4) 미래에 대한 약속과 희망의 근거
약속은 언제나 과거의 역사를 상기시킨다. 희망의 성장의 근거 역시 역사적 경험이다. 모든 과거 역사의 체험에서 하느님의 주도권을 인식하고 마지막 역사 역시 하느님에 뿌리를 둔다. 즉 성서저자는 하느님이 누구이신지 표현하는데 중점을 둔다. 이런 하느님의 모습을 그들의 해방과 구원에 밀접한 연관을 가진 분으로, 구원자로 그 모습을 드러내리라는 희망과 밀접한 연관을 가진다. 이 하느님은 방관자가 아니라 역사에 개입하는 역사의 하느님, 희망의 동기인 하느님이다. 그러나 그 희망이 결코 추상적일 수 없는 것은 역사에 근거하면서 계속 계시되고 성장하기 때문이다. 이 신앙은 역사적 사건과 그 해석과 함게 또 다시 이스라엘 역사를 형성한다.
5) 백성을 행동하도록 초대하는 약속
희망의 근거를 하느님에서 찾는다 함은 단순한 기다림만이 아니라, 항상 인간으로 하여금 행동하도록 초대하신다. 이 약속에 대한 신앙은 구체적 행동을 요구하는 것이다. 신명기 ; 땅을 차지하거든 ~하여라 (고아, 과부의 인권)
약속은 그 자체로 부르심으로도 볼 수 있다.
2. 묵 시 (Revalation)
1) 특 징
① 묵시는 공통적으로 꿈이나 현시, 천사를 통해 드러난다. 계시는 초자연적 실재를 내용으로 한다. 즉 하느님의 신비계획을 드러내는 것이다.
② 풍부한 상징들(여인.동물.괴물.나팔.숫자 등)을 사용한다.
③ 어려운 상황을 배경으로 하기에 곧 도래할 하느님이 중심이 되고, 선과 악의 이원론적 세계관을 전제하고 악의 붕괴와 새로운 세계에서의 선의 승리를 희망하는 내용이다.
그리스도교 공동체 사고 방식 안에서 묵시는 상당히 강력한 양상으로 보인다. 세상의 종말을 해와 달이 빛을 잃고 … 무덤이 열려 죽은 자들이 일어나 심판을 준비하고… 등으로 표현한다. 이는 상당한 영향력 만큼이나 많은 문제를 지닌다. 그 상징들은 작가들에 의해서 수용된 것이고, 일부만이 교회에서 받아들여졌다. 어쨌든 아직까지 지대한 영향을 준 것 만큼은 사실이다. 즉 상징적 표현 때문에 거기에서 역사적 정보를 제공받으려는 경향이 강했고, 이는 배척되어야 하는 것이다. B.C 200- A.D 100 에 성행하였고, 이민족(그리스.로마)의 지배하에서 독립이 불가하게 되자 많은 유대인들이 떠난다. 특히 다니엘서는 그리스의 지배의 상황하에서 바빌론 지배의 상황을 배경으로 쓰여졌다.
묵시는 희망이 전혀 부질없는 것으로 보일때, 이제 전혀 다른 형태의 희망을 갖는 것이다. 즉 어떤 식으로든 하느님에 의해 역사는 이끌어지고(종말을 향하고), 그것은 일부 사람들에게만 그 비밀이 알려진다. 묵시는 과거의 기록역사를 기초로 하여 이루어지고, 그것을 현재화시켜 독자들에게 전해준다. 묵시자들은 역사가 곧 끝날 것 처럼 이야기 한다. 따라서 악의 세력을 더 이상 두려워할 것이 없다 (낙원.새로운 생명에의 기대). 이들은 마지막 시점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과거의 재앙들을 인용하여 묘사한다. 따라서 그 당시 인간들에게는 이것이 오히려 당연한 것으로, 하나의 희망으로 보여진다. 다시 말해서 다른 사람들에게는 아무 의미가 없는 것으로, 절망으로 보여진다. 이런 의미에서 묵시문학은 또 하나의 희망론이었다.
2) 묵시문학과 계약의 대조적 차원 (희망의 관점에서)
예언자의 약속은 역사안에서의 미래에 대한 희망이었다. 인간의 죄에도 불구하고 역사안에서 하느님의 구원이 실현됨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하느님의 자비는 이스라엘에 하나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또한 약속은 행동에의 초대를 동반한다. 반면에 묵시문학은 역사의 종말 이후의 희망을 이야기한다. 그들은 예정론자이므로 비관적이고, 그리고 하느님은 이 악한 세대의 저 건너편에 계시는 분으로 새 세상을 위해 이 악한 세대를 파멸시킨다. 따라서 하느님의 자비는 재앙을 통해 옛 세대를 파멸시키는 것이다. 여기서는 의로운 자와 악한 자가 대조된다.
3) 묵시운동의 성서적 수용
성서에서는 아주 작은 부분만 차지한다 (다니 2장,7-12장). 하느님에 의해서만 변화가 이루어짐을 보여준다. 다니엘서의 묵시적 특징은 ①저술연대를 앞당기며 가명으로 하고, 현재를 바빌론 시대에 이미 예언한 것으로 하였다. ②역사에 대해 비관적이다. ③현재의 사건을 마지막의 사건으로 확대시킨다. ④사라질 세대와 도래할 세대의 대조가 나타난다. ⑤옛 세대의 파멸은 새로운 은총으로 이해된다. 이런 대전환은 하느님에 의해서 가능하다. 이런 전환이 곧 다가올 급박한 것으로 묘사한다 (일부 학자는 다니엘서가 일부 유대인만을 위한 것이라고 본다). 하느님 나라와 지상세계를 이원론적으로 보지 않고, 하느님 나라는 하나의 지상세계, 역사의 세계로 간주된다. 어떤 실재를 묵시적 관점에서 유연하게 다룬다.
마르코 복음의 묵시적 표현은 다니엘서와 비슷하다. 이런 재난은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신 때 부터 지금까지 없었고 또 앞으로도 다시 없을 것이다 ; Mk 13,19b ; 다니 11,31
“흉측한 우상이 있어서는 안 될 곳에 선 것을 보거든”(Mk 13,14a; 다니 9,27), “사람의 아들은 천사들을 보내어 땅 끝에서 하늘 끝까지 사방으로부터 뽑힌 사람들을 모을 것이다”(Mk 13,27; 다니 7,13;11,31). 다니엘서는 이것이 안티오쿠스 4세가 성전을 세속화 한 것을 말하고 마르코 복음은 로마에 의해 그것이 다시 이루어짐을 묘사한다. 人子에 대해서 묘사하는 부분도 상통한다 (Mk 13,26-27; 다니 7,14). 마르코 13장 역시 공포와 위험에 있는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격려하기 위해 쓰여졌다. 다시말해 고통의 상황은 하느님이 가까이 와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마르코 13장이 묵시와 다른점도 있다. ①마지막 시기는 아무도 알 수 없다. ②선포의 목적은 재앙이 아니라, 바로 깨어 있는데 초점이 있다. ③역사의 내면을 관찰하도록 요구한다 (모든 민족에의 복음전파,성령의 파견). 이런 관점에서 마르코는 묵시문학의 기본적 입장을 배제하고, 하느님의 능력은 바로 고난받는 상황안에서도 체험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2테살에서도 마지막 시기의 도래가 상당히 완화되어 있다 (2데살 2,2-3 ; 2베드 3,10-). 이들의 근거는 항상 예수 그리스도였다.
요한 묵시록 ; 그리스도교가 박해받는 상황에서 쓰여졌다. 따라서 기존의 묵시의 상징들을 많이 받아들이고 있다. 독자들은 이 묵시록에서 그 상징들을 쉽게 알아들을 수 있었다. 한편 상징들은 독자들이 알아듣는다 하더라도 다의성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묵시는 정보제공이 아니고, 보다 깊은 것과 관련되어 있다.즉 독자들이 박해 상황에서 그리스도를 바라보도록 하는 것이다. 그 분은 희망을 주는 어린 양으로서 마지막 승리는 이미 십자가 죽음에서 시작되었다. 즉 자신의 생명을 봉헌하고 희생함에서 이루어진다.
성서가 묵시적 요소들을 인용하면서 표현한 그리스도적 희망은 ①세상의 모든 능력을 초월하시는 하느님에 대한 믿음이 절대적이다. ②세상을 뒤엎는 재앙에서마저 그리스도가 절대적 희망이고, 이는 죽음을 넘어서도 가능한, 부활과 연결된 희망이다. ③이스라엘을 뛰어넘어 모든 인류에게 적용된다.
묵시문학을 이용해서 새롭게 신자들에게 주의를 환기시키는 점은 ①종말을 시간적으로 계산하지 말라. ②세상을 자꾸 경시하지 말라. ③상징과 정보제공을 혼동하지 말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