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의 세 견해를 도식으로 옮겨보면:
목표
희망은 부활 신앙 안에서 십자가에 못박힌 분의 미래를 본다. 그리고 그 희망은 약속과 현재의 실재 사이의 거리를 의식하며 신앙인들이 약속된 미래의 방향으로 이 세상을 변화시키도록 움직이게 한다.
4.1.5. 역사의 자기 초월 가능성
칼 라너(Karl Rahner, +1984)는 현세적 진보와 하느님 나라의 성장이 서로 얽혀있으면서도 구별된다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변증법적 진술을 숙고하면서 그리고 60년대에 있었던 그리스도교-맑스주의와의 대화에 자극을 받고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진다: “인간 스스로 만드는 세상은 그 자체로는 별 다른 의미가 없이 단지 윤리적 진실성을 증명하기 위한 ‘재료’인가, 그래서 하느님 나라가 결정적으로 도래하면 세상은 그냥 제거되는가?… 아니면 이 세상은 비록 알 수 없게 ‘변형’되더라도 본래적인 종말의 것에 들어가는가?… 우리는 궁극적인 것 자체의 실행자인가?… 물질적이고 육신적인 역사는 비록 죽음과 철저한 변화를 겪더라도 궁극적인 것 안에로 들어가는가?”(“Über die theologische Problematik der ‘Neuen Erde’”, in: Schriften zur Theologie 8, Einsiedeln, 1967, 586f.). 라너는 두 가지 대답의 가능성 중에서 간단히 어느 하나를 택하지 않고 변증법적으로 말한다: 한 편으로는: 하느님 나라는 하느님의 업적이다. 즉 하느님 나라는 도래하여서 역사를 종결짓고 “지양”(止揚, aufheben)할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 편으로는 이런 하느님 나라의 도래는 “역사의 자기 초월”로 간주될 수 있다(589). 하느님 나라가 하느님의 업적이라고 해서 반드시 인간 역사가 제거될 필요는 없다. 오히려 역사는 자기 스스로를 초월해서 (오늘날의 시점에서는 전혀 그려낼 수 없는) 미래로, 즉 전적으로 하느님의 미래이면서도 동시에 인간의 역사가 전적으로 보존되고 지양되며 영원화되는 미래로 들어갈 수도 있다.
종말론적 전망과 (인간이 개척하는) 미래적 전망의 상호 연관과 차이는 라너가 사용하는 두 개념 “세계 내적인 미래(innerweltliche Zukunft) ― 절대적인 미래(absolute Zukunft)”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라너에게 “세계 내적인 미래”란 특정한 시대에는 아직 미완의 것이지만 역사 내에서는 근본적으로 도달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도달할 수 있는 것이란 항상 부분적이며 개별적인 것, 세상의 구성요소와 구조에 관한 것이다. 이에 비해서 “절대적 미래”란 더 이상 부분적인 것이 아니라 전체적으로 모든 것을 포괄하는 완성, 즉 전체로서의 세상의 초월적인 완성을 의미한다. 라너은 하느님 자신을 절대적인 미래라고 부른다. 세계 내적인 미래와 절대적인 미래가 뒤바뀌어서도 않되지만, 그렇다고 간단히 별개의 것으로 갈라 놓아서도 안된다. 세계 내적인 미래가 항상 인간적 계획과 창조적 활동의 소산이지만, ―순수 경험적인 측면에서도― 계속해서 불명료하고 미완의 열린 형태로 남아 있다. 왜냐하면 진보는 계속적인 진보를 위한 새로운 전제, 이전에 예상하지 못했던 전제를 수반하기 때문이다. 라너는 바로 이렇게 원칙적으로 완전히 제거할 수 없는 불명료함과 개방성에서 모든 세계 내적 미래가 인간이 좌우할 수 없는 절대적인 미래를 가르키고 있다고 본다. 역으로 모든 미래를 위한 갖가지 설계를 하면서 항상 생각하고 목표로 삼는 절대적인 미래는 세계 내적인 미래를 위한 온갖 노력의 원동력이 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의 종말론은 두 가지 (사회적 실천을 위해 중요한) 과제를 지닌다. 한 편으로 절대적인 미래에 대한 희망은 구체적이고 세계 내적이며 역사적인 이상향을 요구하는데, 이 이상향은 현재의 것을 비판하고, 역사를 불안하게 만들며 계속 전진하게 한다. 다른 한편 종말론은 온갖 완벽주의적 이상향에 반대해서 “미래에 대한 무지의 앎”(docta ignorantia futuri)을 수호해야 한다. 어떤 세계 내적인 미래의 목표도 절대화 되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교는 자신이 지닌 절대적인 미래에 대한 희망을 통해서 세계 내적인 미래를 위한 정당한 노력을 과도하게 힘으로 밀어부치려는 유혹에서 보호해야 한다. 즉 모든 세대는 무조건 다음 세대를 위해 존재하고, 연거푸 희생되며 그래서 미래는 몰록 신이 되어서 그 앞에서 실제 인간이 실현되지 않고 계속 기다려야 하는 인간을 위해서 살해되는 것을 방지해야 한다… 그리스도교는 비록 세계 내적인 미래에 근접하는 데에 아무런 기여도 할 수 없는 사람도 자신의 품위와 침해할 수 없는 중요성을 지니는 까닭을 이해하도록 만든다”(Marxistische Utopie und christliche Zukunft des Menschen, 156).
절대적
z1
z2
z3
미래
절대적 미래로서의 하느님께 대한 신앙은 항상 새로운 세계 내적인 미래에 대한 희망을 요구하는 동시에 이를 상대화시킨다.
4.1.6. 희망의 역사와 고난의 역사
라틴 아메리카의 해방 신학은 초반의 희망에 가득 찬 출발 이후에 어두운 전망에 맞부닥쳐야 했다. 비단 해방 신학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교 신학 전체가 60년대에 왕성하게 자라났던 정치적, 사회적 희망이 실망을 거듭하고, 70년대 이후에 미래에 대한 전망이 점점 더 어두워지는 상황에 직면해서 새롭게 도전을 받게 되었다. 그래서 이제는 희망의 역사와 고난의 역사의 연결이 더욱 강하게 드러나게 되었다. 예를 들어서 몰트만과 멧츠는 십자가를 더욱 강조한다. “그리스도교의 희망은 눈이 먼 낙관주의가 아니라, 눈이 달린 희망으로서, 이 희망은 고난을 보고 그러면서도 자유를 믿는다. 희망은 비로소 고난과 희생을 통해서 현명한 희망이 된다”고 몰트만은 1970년에 쓰고 있다(Umkehr zur Zukunft, München, 1970,14). 또한 1972년에는 “Der gekreuzigte Gott”(십자가에 달리신 하느님)이라는 제목으로 자신의 십자가 신학을 제시한다. “내가 제시하려는 십자가 신학은 그리스도교적 희망의 신학의 뒷면일뿐이다…”(10), “왜냐하면 부활의 희망은 단지 앞을 향해서 알려지지 않는 새로운 것을 비출 뿐만 아니라, 동시에 뒤를 향해서 역사가 만들어 낸 죽은 이들의 묘역(墓域), 특히 그 가운데 있는 저 십자가에 못박힌 분을 비춘다”(150).
멧츠가 기획한 독일 교구 시노드(1975)의 문헌 “Unsere Hoffnung”(우리의 희망)은 이 세상에서 더 이상 제거할 수 없는 고통과 불의에 대해서 기억한다. “어떤 후손의 행복도 선조들의 고난을 보상하지 못하고, 어떤 사회적 발전도 죽은 이들이 겪었던 불의를 달래지 못한다”(I,3). 그리고 같은 본문에서 희망의 역사는 고난의 역사로 파악된다.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가 보여준 희망의 역사는 부서짐이 없는 성공의 역사, 우리의 기준에 따른 승리의 역사가 아니다. 그 역사는 오히려 고난의 역사로서, 오직 이 고난의 역사 안에서, 그를 통해서 우리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아들이 ‘아버지’와 ‘하느님 나라’의 메시지에서 우리에게 약속한 그 행복과 기쁨, 자유와 평화를 말할 수 있는 것이다”(I,2). 이에 대한 윤리적 결론은: “우리의 ‘선진’ 사회에 암암리에 내려진 고난 금지령을 부수고서” 우리 자신이 다시 “고난을 당할 수 있도록” 만들어서, 다른 이들이 당하는 고난에 민감하게 되어 “그들의 삶이 변화되도록 함께 그리고 대신 고난을 당해야 한다”(I, 2f.).
근래에 들어서 그리스도교의 종말론은 파국을 기대하면서도 하느님의 다스림에 대한 희망을 선포할 수 있었던 묵시문학을 새롭게 주목하게 되었다. 예를 들어서 라너는 1984년 명시적으로 인간이 모든 능력을 동원해서 막아야 할, 그러나 배제할 수 없는 “두렵고 끔찍한” 가능성, 인류가 비참함의 심연에로 추락할 가능성을 생각하면서도, “이 추락이 궁극적으로는 무한히 선하시고, 무한히 전능하신 하느님의 품 안에서 끝나리라”는 것을 희망하였다(Erinnerungen im Gespräch mit Meinold Krauss, Freiburg, 1984, 126). 그래서 새로운 종말론은 더욱 강력하게 그리스도론적으로 정향되어 있다: 예수의 죽음과 부활의 모형은, 있을지 모르는 세상의 “죽음”과 하느님에 의한 바로 이 세상의 구원에 대한 모델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시 묵시문학에 주목하는 새로운 경향과 함께 떼이야르 드 샤르뎅 이전의 체념적이고 비관적인 신스콜라 신학의 세계관에로 되돌아 간다고 생각한다면 오해이다. 이 경향이 목표로 하는 바는, 비록 가시적인 성공이 아직 멀리 있고, 현재 진행 중인 상황이 낙관적 전망을 보여주지 않더라도 하느님 나라의 도래에 관한 믿음과 불의와 고난에 대항한 싸움을 견지하는 것이다.
새로운 세상에 대한 희망, 비록 비록 세상이 낡은 세상의 “죽음”을 통해서 형성되야 하더라도: 비록 고난의 역사라도 궁극적으로는 희망의 역사이다.
4.2. 해석학적 관점
지난 수십년간에 있었던 종말론의 변천에 해석학적 성찰이 결정적으로 기여하였다. 해석학적 성찰은 대부분의 내용적 진술을 이해하는 데에 열쇠 역할을 한다.
4.2.1. 종말론적 진술의 근거와 의도
묵시문학에로 강하게 정향된 종말론은 일종의 목격증인 보고에 근거를 두고 있다는 인상을 줄 수가 있다. 즉 하느님은 몇몇 선택된 사람들(“幻視者”, “예언자”)이 마치 멀리 있는 어떤 나라처럼 미래를 보도록 하셨고, 지상 예수는 자신의 신적인 본성의 힘에 의해서 미래에 대해 무한하게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리스도교의 종말론은 이 증인들에게서 정보를 얻어서 서로 연결하여 전체를 서술하였다는 인상을 줄 수 있다. 새로운 종말론은 이런 생각에 반대해서 여러 가지 통찰을 제시한다.
(1) 성서 저자들은 바로 이 점에서 묵시문학을 변형시킨다: 마지막 사건이 일어나는 때를 정확히 계산할 수 없고, 미래를 정확하게 묘사할 수 없다. 성서 저자들이 중요하게 여기는 바는, 현재 깨어있는 것이고, 하느님께서 시작하신 것의 완성에 대해 희망하며, 낡은 시대와 새로운 시대의 세력들의 다툼에서 단호함을 유지하는 것이다 (참조: 2.2.).
(2) 성서에 나타난 희망의 표상은 역사가 경과하면서 변화한다. 이 표상들은 그것이 형성된 시대의 체험과 희망으로 각인되었고, 그래서 퍼즐 게임의 조각들처럼 꿰어 맞추어서 전체 그림을 완성할 수 있는 것과 같지는 않다 (참조: 2.1.).
(3) 예언은 불가사의하게 미래에 대해 아는 것이 아니다. 예언자들은 하느님께 특별히 가까이 있는 사람으로서 미래에 대해 특별히 깨어있는 시각을 지니고 주위 사람들에게 그들이 어디에 있는지, 어떤 기회와 위험이 그들에게 다가오는지, 그들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하느님께 무엇을 기대해야 하는지를 선포한다. 예언자들의 사명은 객관적으로 미래를 서술하는 데에 있지 않고, 동시대 사람들을 일깨우고 경고하며, 용기를 북돋아주고 그에 상응하는 행동에로 인도하며, 바로 이렇게 해서 (항상 열려있는) 역사를 함께 형성하도록 하는 데에 있다.
(4) 이런 점은 계시 역사의 정점이며 동시에 예언자 자체인 예수 그리스도에게도 해당된다. 예수는 그와 함께 시작된 하느님의 다스림을 알려 주고, 이를 기반으로 시대의 징표를 해석한다. 본질적으로 하느님 나라에 미래의 완성에 대한 측면이 포함되었기 때문에 예수는 필연적으로 미래에 대해서 언급하는데, 결코 현재의 사건에서 동떨어진 채로가 아니라 현재를 미래의 시작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렇게 예수는 다가오는 세상의 시작을 살도록, 세상의 완성을 희망하면서 살도록 인도한다.
그러므로 종말론적 진술은 몇몇 환시자들이 미래를 미리 앞당겨 본 데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역사에서의 체험에 근거하는 것으로서, 동시에 그 체험을 미래로 확대시킨 것이다. 종말론은 여타(餘他)의 신앙 진술에 근본적으로 새로운 것을 추가하는 것이 아니라, 그 신앙 진술의 미래적 차원을 밝히는 것이다: 종말론적 진술은 창조와 구원역사가 하나의 시작으로서, 이 시작은 완성을 향해 간다는 것을 말로 표현한다. 이 완성의 실체는 무엇인지에 대해서 그리스도교 종말론은 이스라엘의 체험과 희망 그리고 무엇보다도 예수 그리스도, 그의 선포와 운명에서 읽어 낸다. 그러나 이런 방식으로 완결된 미래에 대한 개관적이고 전체적인 그림을 그려내는 것이 아니라, 다양하고 서로 겹치는 그림들로 구성되는 열려진 희망의 전망을 보여줄 뿐이다.
4.2.2. 종말론의 언어
근래의 신학은 은유, 상징, 표상이 지니는 특별한 표현력과 모든 신앙 언어의 유비적 성격을 다시 발견하게 되었다. 종말론에서는 정확함을 요구하는 정보적 언어와 열려 있는 표상 언어(Bildersprache) 사이의 구별이 특히 중요하다. 사물이 아닌 인간과 관련되는 내용을 얘기할 때, 무엇보다도 역사의 미래나 희망에 대해 표현하는 데에는 표상 언어가 적합한 언어이다. 한 편으로 표상 언어는 구체적이고, 그래서 현재의 체험과 기대와 연결지을 수 있다. 다른 한 편으로 표상 언어는 어느 정도 열려져 있다. 즉 표상은 다른 것으로 바뀔 수 있고, 스스로를 초월하기도 하는데, 왜냐하면 희망과 약속의 역사의 지속성은 유지된 채로 그에 대한 기대는 확대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성서에 나타난 희망의 표상들이 변화되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예를 들어서 목장지(牧場地)에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변하고, 첫 번째 탈출(출애급)은 더욱 웅대한 두 번째 탈출에 의해서 능가되며, 첫 번째 계약은 새로운 계약을 통해서 능가된다(참조: 2.1).
계시 역사의 오래되고 초보적인 형태만 표상적 특성을 지니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종말론 전체가 이런 특성을 지닌다. 독일 교구 시노드의 문헌은 이런 점을 잘 설명해준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느님 나라의 완성과 함께 새로운 인간, 새 하늘, 새 땅이 도래하기를 기대한다. 우리는 이 하느님 나라에 대해서 단지 신,구약성서 안에서, 특히 예수 자신을 통해서 이야기되고 증언된 표상과 비유로 말할 수 있을 뿐이다. 하느님 면전에서 인간과 자연이 누리는 큰 평화, 사랑의 식탁공동체, 고향, 아버지, 자유와 화해 그리고 정의의 나라, 닦여진 눈물, 하느님 자녀들의 웃음이라는 표상과 비유들, 이 모든 것은 딱 들어 맞고, 다른 것으로 대치할 수 없다. 우리는 이것들을 간단히 다른 것으로 ‘번역’할 수 없다. 우리는 이 표상과 비유들을 보호하고, 그에 충실히 머물면서 개념과 논증이라는 메마른 언어로 대치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 개념과 논증의 언어는 우리의 필요와 계획을 표현할 수 있지만, 우리의 갈망과 희망을 표현 할 수는 없다”(Unsere Hoffnung I,6).
4.2.3. 종말론적 진술의 범위
우리는 앞에서(1.2) “세상의 완성”이라고 할 때 “세상”은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물었다. “지상의 동물과 식물의 미래에 대해서도 얘기하는가? 은하계와 그 안에 존재할지도 모르는 인간 존재에 대해서 얘기하는가? 혹은 근본적으로 이 지상의 인간의 미래에 한정하면서 인간을 둘러싼 세계, 인간 역사의 한 부분이 되는 세계를 다룰 뿐인가?”
코페르니쿠스 전환 이전의 신학은 비교적 별 문제없이 창조계와 전체 우주의 완성에 대해서 말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근대의 시작에 있었던 코페르니쿠스의 전환과 그 결과로 나타난 인간중심적 신학은 오직 인간에게 주의를 집중하는 방향으로 흐러갔다: 인간의 완성에서 창조계는 완성에 이른다. 그러나 이런 인간에게 집중된 신학은 “우주를 잊어버린” 신학이라는 비판을 받으면서 우주에 대한 질문이 제기되었다: 인간을 지향하지 않는 창조계의 거대한 부분이 고유하고도 긍정적인 목표를 지니지 않는가, 그래서 “세상”의 완성은 인간 안에서, 오직 인간만을 위해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완성과 “나란히” 일어나지는 않는가?
성서가 이해한 바에 따르면 인간과 세계는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창세 1,1-24은 의도적으로 인간의 창조를 우주의 창조라는 더 큰 맥락 안에 위치하게 한다. 구약성서는 대부분 하느님이 당신 백성 그리고 인류와 함께 한 역사에 대해서 말한다. 그러나 이와 함께 인간 외의 다른 피조물에 대한 하느님의 배려에 대해서도 언급한다(참조: 창세 1,22; 시편 104). 이스라엘의 종말론적 희망은 이스라엘 백성의 미래와 (나중에는) 의로운 이들의 구원에 집중되지만, 다른 피조물이 다가오는 구원 실재에 참여하는 것도 포함한다(참조 이사 11,6-8). 바오로는 이 생각을 받아들여서 계속 이끌어 나간다: 단지 우리 인간만 탄식하면서 구원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다. “피조물 자신도 부패의 종살이로부터 하느님 자녀들의 영광과 자유를 위해 해방될 희망”이 있는데, 왜냐하면 “모든 피조물은 지금까지 다 함께 탄식하며 진통”을 겪고 있기 때문이다(로마 8,19-23). 하느님은 “삼라 만상의 주인”(지혜 6,7)으로서 마지막에는 “모든 것 위에서 그리고 모든 것 안에서”(1고린 15,28; 참조: 에페 4,10; 골로 1,20) 다스리실 것이다. 제3 이사야와 요한 묵시록은 갈망하는 미래를 “새 하늘과 새 땅”(이사 65,17; 66,22; 묵시 21,1)이라고 표현한다. “모든 것”이 새롭게 될 것이다(묵시 21,5). 그러나 여기서 현재의 세상이 변화되어 완성된다고 생각하는지, 혹은 현재의 세상이 파괴된 후에 철저히 새롭게 창조된다고 생각하는지는 분명하지가 않다.
다른 한 편 ―위에서 제시된 텍스트에도 불구하고― 성서에서 인간 외의 창조계의 미래에 대한 관심은 분명히 이스라엘과 인류의 미래에 대한 관심의 뒷전에 머물러 있다. 이런 관찰은 근래의 신학이 계시의 의미와 한계에 대해서 언급하는 것과 일치한다: 성서적 계시는 인식 가능한 모든 범위에 대한 포괄적인 정보가 아니라 계시의 수신인들의 구원을 목표로 한다. 그림으로 표현한다면: 계시의 빛은 이 계시가 선포되는 인간의 집단을 향해 비추면서, 그 집단의 주위와 그 앞에 놓은 길도 비추지만, 변두리에서는 빛이 약해지고 많은 것이 어둠 속에 놓여 있다. 그래서 종말론적 진술의 범위 제한, 적어도 그 진술의 명확성의 정도 차이를 말하게 된다. 성서에 근거한 신앙은 인간 외의 것의 미래에 대해서 보다는 인간의 미래에 대해서 더 많이 안다고 하겠다.
전체적으로 종말론은 두 가지 잘못을 피해야 한다: 한 편으로는 종말론이 세상 전체를 설명하고 미래에 대해서 객관적으로 서술하려고 한다는 인상을 주어서는 안된다. 다른 한 편으로 종말론은 물질을 업신여기는 과도한 유심론(唯心論)적 태도, 인간 외의 세상을 무의미하게 간주하는 과격한 인간중심주의를 피해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