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 말 론 (바)

4.3. 세상 종말에 대한 내용적 진술
이상에서 언급한 해석학적 전제 하에서 세상의 미래, 역사의 진행, 그리고 이와 관련해서 인간이 지닌 가능성과 과제에 대해서 무엇을 말할 수 있는가?

4.3.1. 창조계와 구원 역사의 완성
세상의 종말은 세상의 파괴가 아니라 완성이다. 이는 이미 창조 신앙에서 나오는 결론이다. 즉 하느님께서 세상을 당신의 작품으로서 의미 깊게 계획, 창조하시고 긍정하셨다면, 세상이 전멸이나 무의미 속에 끝날 것이라고 생각하기는 어렵다. 인류의 미래에 관한 이런 전망은 계약과 약속의 신학을 통해서 재차 강화된다. 하느님께서는 인간과 계약을 맺으시면서 계약의 상대자인 인간의 행복을 약속하신다. 하느님의 다스림은 인류의 구원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다가오는 하느님의 다스림에 대한 신앙은 인류역사의 완성에 대한 희망을 포함한다.
세상의 완성은 결정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통해서 이룩된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미래 세계의 모습은 이미 예수의 삶과 부활 안에서 가시화(可視化) 되었다. 예수 안에서 이스라엘의 희망이 응집되었고, 그를 통해서 결정적인 희망의 표상들이 인류 역사 안에 반입(搬入)되었다. 이 세상이 완성에 이르게 될 때 무엇이 중요한지는 예수의 삶과 실천, 그의 희망과 약속에서 읽어서 알아낼 수 있다. 그러나 그의 예언자적 비판, 경고, 투쟁과 대결은 세상이 단순히 지금 있는 그대로 완성에로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을 분명하게 밝혀준다. 그러므로 세상의 완성에는 병자를 치유하고, 슬퍼하는 이들을 위로하며, 굽어진 이들을 바로 세우는 것만이 아니라 세상에 대한 심판도 속한다: 억울하게 억압받은 이들은 힘있는 이들에 비해서 자신들의 정당성을 인정받게 되고, 거짓된 겉모습이 벗겨지며, 이기주의는 더 이상 자리하지 못하게 된다.

4.3.2. 미래 지평에서의 현재
현재는 목표로 지향된 역사의 한 부분으로 파악되어야 한다. 인류의 역사는 단지 하느님과 개인 사이에 외롭게 진행되는 신앙적 대화를 위한 무대가 아니라 구원역사의 장(場)으로서, 구원 역사는 이 역사를 통해서 구성된다. 이스라엘의 선택과 역사, 예수의 삶, 죽음 그리고 부활은 언제든지 반복될 수 있는 사건이 아니다. 그 사건들 안에서 하나의 운동이 시작되었고, 목표가 세워졌으며, 그래서 진정한 역사가 열리게 되었다. 하느님은 약속의 하느님이 되셨고, 이 하느님께 대한 신앙은 본질적으로 희망을 의미하는데, 이는 약속된 미래를 향해 전진하는 것이다.
이런 희망의 믿음에는 선취(先取)의 사상이 속한다. 개별적인 좋은 체험, 부분적인 성공 안에서 갈망하는 미래가 예고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에집트에서의 탈출은 구원하고 요구하며 자유를 선사하는 하느님의 다가오심을 처음으로 맛보는 체험이 되었고, 동시에 새로운 희망의 근거가 되었다. 예수에게서 한 인간이 비인간적인 억압에서 해방되는 것은 미래가 이미 시작되게 하는 표징이다. “내가 하느님의 손가락으로 귀신들을 쫓아내고 있으니 그렇다면 하느님의 나라는 여러분에게 왔습니다”(루가 11,20). 이런 선취에서 “이미”와 “아직 아니”의 긴장이 체험된다. 희망은 좋은 체험들을 통해서 생성, 유지되고, 신앙은 이 체험들을 완성의 시작으로 해석한다.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대하는 데에서 그리스도교의 종말 희망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한 인물에게 집중되는 것이 나타난다. 이런 점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시작된 구원역사의 새로운 단계를 “종말”이라고 부르는 데에서도 나타난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완성이 시작된 것이다. 역사는 그를 통해서 이미 시작한 것을 “단지” 만회(挽回)하면 된다. “종말”이란 개념은 아직 미완의 역사의 길이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지만, 역사의 질(質)에 대해서는 무엇인가를 알려준다: 역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각인된 미래에로 향하는 전(前)역사이다. 현재를 이런 미래의 지평에서 보고서 그에 상응하게 행동하는 사람은 현재를 정당하게 평가하는 사람이다.

4.3.3. 희망과 완성을 위한 인간의 협력
완성에 대한 희망은 체험에 의거하고, 궁극적으로는 하느님의 약속에 근거를 둔다: 하느님 스스로 당신이 시작하신 것이 성공할 수 있도록 보장하신다. 그렇다고 해서 인간은 단지 역사를 방관(傍觀)하는 것에 그친다는 말은 아니다. 신앙이라는 개념에는 무엇이 옳다고 인정하는 것만이 자신을 관계하도록 하는 실존적 요소가 포함되듯이, 희망도 하느님의 약속를 신뢰하는 것만이 아니라 고대(苦待)하는 미래를 능동적으로 실현하고 함께 형성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맥락에서 성서에 나타난 많은 약속들이 동시에 행동에 대한 호소를 내포하고 있음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참조: 2.1).
성서에 나타난 희망의 표상들은 동시에 행동 방향을 정해준다. 즉 이 표상들은 어떤 방향에서 하느님 나라를 찾아야 하는지를 알려준다: 자유가 가능하고 생활할 수 있는 터전이 마련되는 곳, 정의가 실현되고 민족들이 서로 평화를 찾는 곳, 인간이 치유되고 병적인 자기 집착이 해소되는 곳, 화해와 사랑이 감행되는 곳,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줄어드는 곳, 바로 여기에서 완성을 향한 도정에 진보가 이루지는 것이다. 그러나 희망의 표상은 궁극적인 미래를 결정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아니고 항상 자신을 넘어선 무엇을 가르키기 때문에, 어떤 구체적인 목표도 절대화되어서는 안된다. 어떤 정치적, 사회적, 종교적인 계획과 목표도 절대시될 수 없다. 모든 목표는 기껏해야 부분적 목표가 될 수 있을 뿐이다. 다시 말해서 종말에 대한 희망은 인간을 행동에로 불러서 구체적인 미래의 목표를 설정하고 행동하기를 촉구하지만, 다른 한 편으로 이 목표는 항상 잠정적이기에 절대적인 것으로 삼아서는 안되다는 것이다. ‘절대적인 미래’는 인간의 협조를 배제하지는 않지만, 궁극적으로는 하느님에 의해서 도래되는 것이기 때문이다(종말론적 유보!).
하느님만이 세상의 완성을 보장한다는 신앙은 인간을 성공에로의 강박에서 해방시켜주고, 실망적인 체험과 상황도 소화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십자가에 못박힌 분의 부활을 기억하는 것은 부분적인 혹은 총체적인 실패에 직면해서도 희망과 이 희망에 근거를 둔 더 나은 세상을 위한 투신을 견지할 수 있도록 힘을 준다. 또한 이 기억은 두 가지 절망의 형태, 즉 체념과 폭력을 통한 문제 해결를 피하도록 도와준다.

4.3.4. 완성에 이르는 역사적 도정의 불확실성
종말론적 유보는 신학이 무엇에 대해서 확고한 진술을 할 수 없는가를 분명하게 말하도록 명한다. 즉 창조계의 완성에 대한 신앙에서 역사가 앞으로 어떻게 전개되리라는 예상을 도출해낼 수는 없다. 우리가 사는 세상과 인류의 역사가 점진적으로 완성되어서 조화 속에 약속된 미래로 성장하리라는 진화적 상승 모델은 그리스도교가 간직한 희망의 전망과 잘 어울리고, 이 희망의 전망에 어떤 구체성까지도 부여한다. 그러나 완성에 대한 희망은 진화적 생각에 종속되거나 이를 요구하지도 않는다. 성서가 수용한 묵시문학은 역사가 파국적으로 몰락하는 경우를 위해서도 좋은 결말에 대한 희망을 드러내었다. 즉 하느님은 파국을 거쳐서도 완성을 이룩하실 수 있다는 희망이다. 그러나 역사가 파국을 거쳐서 완성에 이르리라는 상상이 종말 희망에 반드시 포함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종말 희망의 본질적인 내용은 파국이 아니라 완성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완성이 정확히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지는지를 알 수 없다고 하더라도 그리스도교의 희망은 현재의 행동과 미래의 세계가 관련되어 있다고 믿는다. 오직 하느님만 약속된 세상의 도래를 보장한다고 하지만, 인간의 행동도 약속된 세상 안에로 수용된다. 오늘 실행된 사랑은 미래의 완성을 이룩하는 데에 함께 기여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적 희망은 (완성은 하느님을 통해서 이룩되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삶의 조건을 개선하기 위한 온갖 노력이 불필요하다는 생각과 합치할 수 없다. 또한 이와는 극단적인 반대의 생각, 즉 구체적인 역사 내적 미래의 목표(예를 들어서 특정한 사회 구조)를 역사의 최종적 목표로 삼을 수 있고, 삼아야 한다는 생각과도 합치할 수 없다.
새로운 도시라는 성서적 주제를 이용해서 설명하자면: 희망은 약속된 새로운 도시를 눈 앞에 두고 있다. 그리고 그 희망은 말하기를, 우리는 이 도시를 건설하는 데에 협력하도록 불리움을 받았다. 우리는 건설 작업이 어떻게 마지막까지 진행될지 정확하게 미리 말할 수는 없다. 아마도 우리가 건설한 많은 것, 어쩌면 모든 것이 붕괴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노력이 헛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 도시는 이룩될 것이다. 하느님께서 이를 돌보실 것이다. 우리는 마지막 건설 계획을 아직도 정확히 알지 못한다. 마침내 우리가 완성된 도시, 그 도시의 도로, 광장, 집과 문들을 보게 되면, 아마도 모든 것이 우리가 오늘 상상했던 것과 비교해서 얼마나 많이 달라졌는지에 대해서 놀랄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우리 작업의 결과를 그냥 치워버리시지 않고 당신 자신의 작업으로 대치하셨는지를 보게 될 것이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이룩하신 도시 안에서 우리가 제작했던 돌들을 (아마도 기초까지도) 다시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 도시는 우리의 도시가 될 것이다.

이 글은 카테고리: theology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고유주소를 북마크하세요.

종 말 론 (바)에 1개의 응답

  1. guest 님의 말:

    4.3. 세상 종말에 대한 내용적 진술
    이상에서 언급한 해석학적 전제 하에서 세상의 미래, 역사의 진행, 그리고 이와 관련해서 인간이 지닌 가능성과 과제에 대해서 무엇을 말할 수 있는가?

    4.3.1. 창조계와 구원 역사의 완성
    세상의 종말은 세상의 파괴가 아니라 완성이다. 이는 이미 창조 신앙에서 나오는 결론이다. 즉 하느님께서 세상을 당신의 작품으로서 의미 깊게 계획, 창조하시고 긍정하셨다면, 세상이 전멸이나 무의미 속에 끝날 것이라고 생각하기는 어렵다. 인류의 미래에 관한 이런 전망은 계약과 약속의 신학을 통해서 재차 강화된다. 하느님께서는 인간과 계약을 맺으시면서 계약의 상대자인 인간의 행복을 약속하신다. 하느님의 다스림은 인류의 구원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다가오는 하느님의 다스림에 대한 신앙은 인류역사의 완성에 대한 희망을 포함한다.
    세상의 완성은 결정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통해서 이룩된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미래 세계의 모습은 이미 예수의 삶과 부활 안에서 가시화(可視化) 되었다. 예수 안에서 이스라엘의 희망이 응집되었고, 그를 통해서 결정적인 희망의 표상들이 인류 역사 안에 반입(搬入)되었다. 이 세상이 완성에 이르게 될 때 무엇이 중요한지는 예수의 삶과 실천, 그의 희망과 약속에서 읽어서 알아낼 수 있다. 그러나 그의 예언자적 비판, 경고, 투쟁과 대결은 세상이 단순히 지금 있는 그대로 완성에로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을 분명하게 밝혀준다. 그러므로 세상의 완성에는 병자를 치유하고, 슬퍼하는 이들을 위로하며, 굽어진 이들을 바로 세우는 것만이 아니라 세상에 대한 심판도 속한다: 억울하게 억압받은 이들은 힘있는 이들에 비해서 자신들의 정당성을 인정받게 되고, 거짓된 겉모습이 벗겨지며, 이기주의는 더 이상 자리하지 못하게 된다.

    4.3.2. 미래 지평에서의 현재
    현재는 목표로 지향된 역사의 한 부분으로 파악되어야 한다. 인류의 역사는 단지 하느님과 개인 사이에 외롭게 진행되는 신앙적 대화를 위한 무대가 아니라 구원역사의 장(場)으로서, 구원 역사는 이 역사를 통해서 구성된다. 이스라엘의 선택과 역사, 예수의 삶, 죽음 그리고 부활은 언제든지 반복될 수 있는 사건이 아니다. 그 사건들 안에서 하나의 운동이 시작되었고, 목표가 세워졌으며, 그래서 진정한 역사가 열리게 되었다. 하느님은 약속의 하느님이 되셨고, 이 하느님께 대한 신앙은 본질적으로 희망을 의미하는데, 이는 약속된 미래를 향해 전진하는 것이다.
    이런 희망의 믿음에는 선취(先取)의 사상이 속한다. 개별적인 좋은 체험, 부분적인 성공 안에서 갈망하는 미래가 예고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에집트에서의 탈출은 구원하고 요구하며 자유를 선사하는 하느님의 다가오심을 처음으로 맛보는 체험이 되었고, 동시에 새로운 희망의 근거가 되었다. 예수에게서 한 인간이 비인간적인 억압에서 해방되는 것은 미래가 이미 시작되게 하는 표징이다. “내가 하느님의 손가락으로 귀신들을 쫓아내고 있으니 그렇다면 하느님의 나라는 여러분에게 왔습니다”(루가 11,20). 이런 선취에서 “이미”와 “아직 아니”의 긴장이 체험된다. 희망은 좋은 체험들을 통해서 생성, 유지되고, 신앙은 이 체험들을 완성의 시작으로 해석한다.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대하는 데에서 그리스도교의 종말 희망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한 인물에게 집중되는 것이 나타난다. 이런 점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시작된 구원역사의 새로운 단계를 “종말”이라고 부르는 데에서도 나타난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완성이 시작된 것이다. 역사는 그를 통해서 이미 시작한 것을 “단지” 만회(挽回)하면 된다. “종말”이란 개념은 아직 미완의 역사의 길이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지만, 역사의 질(質)에 대해서는 무엇인가를 알려준다: 역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각인된 미래에로 향하는 전(前)역사이다. 현재를 이런 미래의 지평에서 보고서 그에 상응하게 행동하는 사람은 현재를 정당하게 평가하는 사람이다.

    4.3.3. 희망과 완성을 위한 인간의 협력
    완성에 대한 희망은 체험에 의거하고, 궁극적으로는 하느님의 약속에 근거를 둔다: 하느님 스스로 당신이 시작하신 것이 성공할 수 있도록 보장하신다. 그렇다고 해서 인간은 단지 역사를 방관(傍觀)하는 것에 그친다는 말은 아니다. 신앙이라는 개념에는 무엇이 옳다고 인정하는 것만이 자신을 관계하도록 하는 실존적 요소가 포함되듯이, 희망도 하느님의 약속를 신뢰하는 것만이 아니라 고대(苦待)하는 미래를 능동적으로 실현하고 함께 형성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맥락에서 성서에 나타난 많은 약속들이 동시에 행동에 대한 호소를 내포하고 있음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참조: 2.1).
    성서에 나타난 희망의 표상들은 동시에 행동 방향을 정해준다. 즉 이 표상들은 어떤 방향에서 하느님 나라를 찾아야 하는지를 알려준다: 자유가 가능하고 생활할 수 있는 터전이 마련되는 곳, 정의가 실현되고 민족들이 서로 평화를 찾는 곳, 인간이 치유되고 병적인 자기 집착이 해소되는 곳, 화해와 사랑이 감행되는 곳,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줄어드는 곳, 바로 여기에서 완성을 향한 도정에 진보가 이루지는 것이다. 그러나 희망의 표상은 궁극적인 미래를 결정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아니고 항상 자신을 넘어선 무엇을 가르키기 때문에, 어떤 구체적인 목표도 절대화되어서는 안된다. 어떤 정치적, 사회적, 종교적인 계획과 목표도 절대시될 수 없다. 모든 목표는 기껏해야 부분적 목표가 될 수 있을 뿐이다. 다시 말해서 종말에 대한 희망은 인간을 행동에로 불러서 구체적인 미래의 목표를 설정하고 행동하기를 촉구하지만, 다른 한 편으로 이 목표는 항상 잠정적이기에 절대적인 것으로 삼아서는 안되다는 것이다. ‘절대적인 미래’는 인간의 협조를 배제하지는 않지만, 궁극적으로는 하느님에 의해서 도래되는 것이기 때문이다(종말론적 유보!).
    하느님만이 세상의 완성을 보장한다는 신앙은 인간을 성공에로의 강박에서 해방시켜주고, 실망적인 체험과 상황도 소화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십자가에 못박힌 분의 부활을 기억하는 것은 부분적인 혹은 총체적인 실패에 직면해서도 희망과 이 희망에 근거를 둔 더 나은 세상을 위한 투신을 견지할 수 있도록 힘을 준다. 또한 이 기억은 두 가지 절망의 형태, 즉 체념과 폭력을 통한 문제 해결를 피하도록 도와준다.

    4.3.4. 완성에 이르는 역사적 도정의 불확실성
    종말론적 유보는 신학이 무엇에 대해서 확고한 진술을 할 수 없는가를 분명하게 말하도록 명한다. 즉 창조계의 완성에 대한 신앙에서 역사가 앞으로 어떻게 전개되리라는 예상을 도출해낼 수는 없다. 우리가 사는 세상과 인류의 역사가 점진적으로 완성되어서 조화 속에 약속된 미래로 성장하리라는 진화적 상승 모델은 그리스도교가 간직한 희망의 전망과 잘 어울리고, 이 희망의 전망에 어떤 구체성까지도 부여한다. 그러나 완성에 대한 희망은 진화적 생각에 종속되거나 이를 요구하지도 않는다. 성서가 수용한 묵시문학은 역사가 파국적으로 몰락하는 경우를 위해서도 좋은 결말에 대한 희망을 드러내었다. 즉 하느님은 파국을 거쳐서도 완성을 이룩하실 수 있다는 희망이다. 그러나 역사가 파국을 거쳐서 완성에 이르리라는 상상이 종말 희망에 반드시 포함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종말 희망의 본질적인 내용은 파국이 아니라 완성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완성이 정확히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지는지를 알 수 없다고 하더라도 그리스도교의 희망은 현재의 행동과 미래의 세계가 관련되어 있다고 믿는다. 오직 하느님만 약속된 세상의 도래를 보장한다고 하지만, 인간의 행동도 약속된 세상 안에로 수용된다. 오늘 실행된 사랑은 미래의 완성을 이룩하는 데에 함께 기여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적 희망은 (완성은 하느님을 통해서 이룩되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삶의 조건을 개선하기 위한 온갖 노력이 불필요하다는 생각과 합치할 수 없다. 또한 이와는 극단적인 반대의 생각, 즉 구체적인 역사 내적 미래의 목표(예를 들어서 특정한 사회 구조)를 역사의 최종적 목표로 삼을 수 있고, 삼아야 한다는 생각과도 합치할 수 없다.
    새로운 도시라는 성서적 주제를 이용해서 설명하자면: 희망은 약속된 새로운 도시를 눈 앞에 두고 있다. 그리고 그 희망은 말하기를, 우리는 이 도시를 건설하는 데에 협력하도록 불리움을 받았다. 우리는 건설 작업이 어떻게 마지막까지 진행될지 정확하게 미리 말할 수는 없다. 아마도 우리가 건설한 많은 것, 어쩌면 모든 것이 붕괴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노력이 헛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 도시는 이룩될 것이다. 하느님께서 이를 돌보실 것이다. 우리는 마지막 건설 계획을 아직도 정확히 알지 못한다. 마침내 우리가 완성된 도시, 그 도시의 도로, 광장, 집과 문들을 보게 되면, 아마도 모든 것이 우리가 오늘 상상했던 것과 비교해서 얼마나 많이 달라졌는지에 대해서 놀랄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우리 작업의 결과를 그냥 치워버리시지 않고 당신 자신의 작업으로 대치하셨는지를 보게 될 것이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이룩하신 도시 안에서 우리가 제작했던 돌들을 (아마도 기초까지도) 다시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 도시는 우리의 도시가 될 것이다.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