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 말 론 제2부-(라)

4.2.5. 헌신으로서의 죽음
신학적 전통은 대부분 죽음의 한 면만을 얘기한다. 즉 죽음은 모든 인간이 감수해야하는 운명적 불행이라는 것이다. 죽음의 이런 부정적 특성은 종말론에서 죄의 극복을 통한 죽음의 무력화보다는 죽음과 죄의 관계를 더 분명한 주제로 삼음로써 다시 한 번 강조된다. 그러나 이렇게 해서 신학적 전통은 성서적 진술을 온전히 반영하기 못한채 머무른다고 하겠다.
성서에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선사된 죽음에 대한 승리(2.8. 참조)와 이미 세상에서 가능하게 된 “죽음에서 삶에로의 전이(轉移)”(요한 5,24; 1요한 3,14)만을 언급하지 않고, 믿고 고통받는 인간에게 죽음은 적극적 행동이라고 말한다. 예수의 죽음은 한편으로는 “수난”으로, 예수가 찾거나 원하지 않고 참아 받은 것으로서 표현되는데, 예수는 그 죽음에 대해 두려움을 지녔고(마태 14,32-41) 이 죽음은 예수를 극도로 버림받은 상태로 내몰았다(마르 15,34). 그러나 다른 한편 특별히 루가와 요한복음에서는 이 죽음을 그의 적극적 행동으로서, 아버지의 손에 내맡기는 것(루가 23,46), “아버지께로 가는 것”(요한 14,2.12.28;16,7), “헌신”과 마지막 “실현”(요한 19,30)로 해석한다.
이와 유사하게 예수를 추종하는 삶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것”(로마 6,1-11)으로, 생명을 바치는 것(요한 15,13), 자신을 버리는 것(마르 8,35; 마태 10,39; 16,25; 루가 9,24; 17,33; 요한 12,25), 자신을 변화시키는 것으로 표현된다.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아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습니다”(요한 12,24). 이렇게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것”은 단순히 삶을 끝내는 것이 아니라 살면서 온전히 실현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의미에서 바오로는 “우리가 언제나 예수의 죽으심을 몸에 지니고 다니며” “늘 예수 때문에 죽음에 넘겨진다”(2고린 4,10-11)고 말한다. 그러나 여기서 삶의 마지막 순간에 다가오는 죽음과는 전혀 다른 “죽음”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것”은 인생의 종점에서 맞이하는 죽음도 상대화시키는데, 그래서 바오로는 침착하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는 살거나 죽거나 주님의 것입니다”(로마 14,8).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것”은 삶의 능동적 실현이고 “마지막” 죽음, 즉 생을 종결하는 죽음까지도 포함한다. 그러므로 죽음은 외부에서 인간에게 닥쳐와서 인간이 단지 수동적으로 받아들여야만 하는 어떤 것이 아니다. 죽음은 능동적 행동이 될 수 있고, 그리스도인 실존의 실현이 될 수 있는 것이다.
행동으로서의 죽음이라는 생각은 특별히 칼 라너에 의해 근래의 신학에 도입되었다. 그는 죽음의 “실제-존재론적 변증법”에 대해서 언급한다: 죽음은 “외부의 개입에 의한 단절, 파멸,… 갑작스런 사건,…인간을 극도로 무력화시키는 사건”으로가 아니라 “내부로부터의 활동적인 완성, 능동적으로 자신을 완성시키는 것, 삶의 성과의 참됨을 끝까지 증거하는 것, 자신을 전적으로 소유하는 행동” K.Rahner, Theologie des Todes, Freiburg, 1957, 30.
으로 이해될 수 있다.
행동으로서의 죽음이라는 라너의 추상적인듯한 명제는 그의 제자 라디슬라우스 보로슈(Ladislaus Boros, +1981)가 “최후결단(Endentscheidung)”이라는 이론을 내세움으로써 구체화된다. 보로슈에 의하면 마지막에, 죽음의 순간에 인간은 최초로 모든 것을 결단하는 온전한 인격적 행동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사람은 죽음 안에서 처음으로 그리스도와 직접 마주 대하면서 동시에 자신의 정신적인 행동을 방해하는 육체성으로부터 해방된다. 그러므로 바로 이 순간에, 아니 비로소 이 순간에 자신의 삶에 대한 근본적인 결단과 무조건적인 신앙적 결단이 가능하게 된다.
그러나 현재 신학에서는 최후결단의 이론에 점점 더 많은 비판이 가해 진다: 죽음 안에서 특별한 결단의 상황을 맞게 된다는 가정은 성서에서는 물론 체험에서도 그 근거를 찾을 수가 없다. 이 이론은 전체적으로 그 동안에 신학에서 의문에 처하게 된 인간학적 모델(죽음은 영혼이 육체로부터 분리되는 것이다)을 바탕으로 이룩된 것이다. 또한 이 이론은 실존적-윤리적으로 위험성을 내포하는데, 죽음 이전의 모든 결단은 죽음 안에서 이루어지는 “최후의 결단”을 위해 평가 절하되고 이와 함께 현재 삶에서 진지함이 사라진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적극적 행동으로서의 죽음은 다른 방식으로 구체화될 수 있다. 죽는 순간에 아마도 아주 특별한 상황이 가능할 수도 있겠지만, 이 보다는 삶의 한 가운데서 실현되는 “죽음”에 대해서 생각할 수 있다: 가장 강도(强度)있는 삶은 사랑 안에서 이루어진다. 그런데 사랑은 자신의 생명을 걸고, 자신을 선사하며, 신뢰하고, 헌신하는 것을 의미한다. 바로 이것이 전체적인 삶 안에서 이루어지는 죽음이다: 다른 사람을 위한 사랑의 실존, 이와 함께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내용상으로는 하나이기 때문에― 하느님께 대한 헌신. 이를 바탕으로 해서 생의 마지막 순간에 맞는 죽음은 하느님께 마지막으로 자신을 내어드리는 가능성으로서 그리고 살면서 실현한 사랑의 마지막 완성의 가능성으로서 이해될 수 있다: 인간은 사랑하며 살아오는 중에 이미 자신을 하나 하나 하느님께 넘겨 드렸는데, 죽음 안에서 하느님 손에 온전히 자신을 넘겨 드린다.
그러나 구분해야 할 것이 있다. 자기를 내어주고, 자기를 버린다고 해서 무조건 다 실제로 상대방을 위하는 죽음은 아니다. 또한 모든 죽음이 헌신의 죽음은 아니다: 죽음이 단지 패배, 의미없는 단절, 손실을 의미할 수도 있다. 생명을 그냥 던져 버리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죽음은 ―바로 여기에서 의도하는 바대로― 투신의 결과, 아끼는 사람에게 자기를 내어주는 것, 그가 실천해온 헌신적인 삶의 최종적 단계가 될 수 있다. 헌신으로서의 죽음, 이것이야말로 의미 가득하고, 원래 목표로 하는 죽음인 것이다.
그러나 이런 생각이 굶주림, 전쟁, 부주의로 인한 교통 사고 등으로 어쩔 수 없이 죽어야 하는 사람들에 대한 자신의 무관심을 정당화하는데 남용되어서는 안된다. 오히려 그 반대이다. 자주 폭력이나 때 이른 죽음은 자신의 인간에게 사랑의 투신과 자유로운 헌신의 가능성을 빼앗아 간다. 바로 이런 점에서 그리스도교 신앙은 생명을 보호하고 족진해야할 또 하나의 이유를 얻게 된다.
헌신으로서의 죽음이라는 생각에 대한 논리적 전제는 죽음을 넘어서는 삶에 대한 신앙이다. 죽음에 대한 그리스도교적 이해는 항상 부활 사상에 함께 연결되어 있다. 이렇게 해서 다음의 주제로 넘어간다.

4.3. 부활
4.3.1. 성서적 희망의 역사와의 연관성에 대해서
이스라엘이 오랜 동안 개인의 부활에 대한 명시적인 신앙을 지니지 못하고 살아왔다는 사실이 덜 발전된 신앙 역사에 따르는 결핍으로 평가되어서는 안된다. 후대의 계시 역사는 그 이전의 계시 역사를 폐지하지 않고 계속 이끌어 나간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의 부활 신앙은 구약성서적 희망이 지닌 세계성과 현세성을 대신하지 않고 포함하며 확대한다. 예수의 설교의 중심에도 죽은 이들의 미래의 부활이 아니라 지금 이 시간, 이 세상에 시작된 하느님의 다스림이 자리하는데, 이는 하느님의 가까이 오심으로 가능하게 된 새로운 삶의 방식을 가르킨다: 이 삶의 방식은 이미 지금 현재의 삶에서 실현되고 체험될 수 있으며, 물론 현재 삶의 경계를 넘어서는 것이기도 하다(2.7.3. 참조).
이 새로운 삶의 힘을 제자들은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의 부활을 통해서 체험하였다. 동시에 이 체험과 함께 그리스도교적 부활 이해는 내용적으로 더 상세하게 규정되었다: 부활은 이 세상과 그안의 인간들에 대한 지속적이고 강도있게 관련을 의미한다. 신약성서에 나타난 부활 사화는 바로 이것을 증언한다: 여러 장소에서 제자들은 부활하신 주님의 생동적인 가까움을 체험한다. 부활은 기존의 것을 잊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여기서 살아온 삶을 유효하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제자들은 부활하신 분의 육신에서 그분 삶의 역사의 흔적이 계속 남아있는 것(요한 20,20 참조)을 “본다”. 부활은 세상을 포함하며, 삶아가면서 맺은 관계를 심하시키고 역사를 완성하는 “육신적” 부활이다.
4.3.2. 육신의 부활
그리스도교의 전승 역사 안에는 비록 다른 강조점이 있기는 하지만 전체적으로는 부활의 육신성에 대한 신앙을 증언한다. 그러면 여기에서 “육신”과 “육신성”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이것은 이미 바오로 사도를 숙고하도록 이끌었던 질문(1고린 15,33)으로서 신학의 역사에서 항상 새로운 착안점을 불러일으켰는데, 오늘날에도 여러 가지로 대답된다.
자주 사람들은 “육신”(Leib)과 물질적인 “육체”(Körper)을 동일시한다. 그렇다면 육신의 부활이란 죽음과 함께 궤멸하기 시작하는 물질적인 육체의 재건을 의미한다고 하겠다. 신스콜라 신학은 다소간 이런 상상을 지니고 있었다. 이와는 반대로 현대 가톨릭 신학자들의 대다수는 인격적인 육신의 이해로부터 출발한다: 인간에게는 본질적으로 세상 안에 있음(In-der-Welt-Sein), 다른 사람과의 통교 그리고 역사 안에 연루되어 있음이 속한다. 이런 세 가지 서로 관련되는 인간의 기본적 특성들이 인간의 육신성을 이룬다. 그러므로 육신의 부활이란, 온전한 인간이 자신 삶의 역사 전체와 함께, 다른 사람과 맺었던 모든 관계와 함께 미래를 갖는다는 것과 그리고 인간의 완성 안에서 세상의 일부도 완성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가톨릭 조직신학자 빌헬름 브로이닝(Wilhelm Breuning) 이렇게 이해한 육신의 부활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하느님은 죽음의 순간에 육체 안에서 발견되는 분자(分子) 그 이상을 사랑하신다. 그분은 온갖 수고의 낙인과 또한 나그네살이에서 겪는 끊임 없는 갈망의 낙인이 찍힌 육신을 사랑하신다. 이 육체는 나그네살이를 하면서 세상에 많은 흔적을 남겨 놓았고, 세상은 이런 흔적으로 인해서 더욱 인간적으로 되었다… 육신의 부활이란 이러한 모든 것 중에서 어느 하나도 하느님에게는 사라져버리지 않았다는 것을 말한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인간을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그분은 모든 눈물을 모으시고, 그분에게는 미소 하나도 그냥 지나쳐버리지 않는다. 육신의 부활이란 인간이 하느님 안에서 자신의 마지막 순간만이 아니라 자신의 역사 전체를 다시 찾는 것을 의미한다”. W.Breuning, “Gericht und Auferweckung von den Toten als Kennzeichen des Vollendungshandelns Gottes durch Jesus Christus”, in: J.Feiner/M.Löhrer(Hrsg.), Mysterium Salutis, Bd. V, Zürich, 1976, 882.

이렇게 이해된 육신의 부활이 의미하는 바는 영지주의적-유심론적-개인주의적인 구원이해와 대치시켜 놓을 때 비로소 분명해진다: 인간은 세상으로부터 구원되는 것이 아니라 세상과 함께 구원된다; 인간은 역사를 떠나서 다른 사람들과 맺은 모든 관계를 뒤로 할 필요가 없다. 삶의 역사와 그 안에서 형성된 관계들이 함께 인간의 완성 안에로 들어간다. 현재의 (세상과 연계된) 삶이 미래의 (순전한 정신적) 삶으로 대치되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삶이 변화되고 완성되는 것이다.
이렇게 이해한다면, 근대의 종교비판가들이 주장하듯이 부활신앙은 현재와 지금의 세상으로부터 눈을 돌리게 하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와 정반대다. 모든 행동과 모든 인격적 관계, 지상의 삶 전체와 인간이 형성한 역사가 영원한 미래를 갖는다고 하면, 지금 여기의 삶에 대한 관심이 더욱 고조될 수밖에 없다.
인격적인 육신 이해에서 물질은 어떤 역할을 하는가? 분자의 미래 대신에 인간 관계의 미래를 말한다면 물질은 그 의미가 없어지는가? 비록 “육신성”이라는 말을 간직한다고 해도 이런 방식으로 다시금 새로운 유심론이 주장되는 것은 아닌가? 이에 대한 대답은 물질과 정신의 관계와 그 궁극적 완성을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달려있다. 근본적으로는 두 가지만이 아니라 적어도 세 가지 입장을 생각할 수 있다.
(1) 정신만이 완성되고 물질은 소멸되거나 혹은 별 의미 없이 뒤에 남는다. 이것은 유심론적 입장이라고 하겠다. 가톨릭 신학자 누구도 이런 입장을 따르지 않는다.
(2) 정신과 물질 둘은 서로 연관된 것이기는 하지만 서로 다르게 완성된다. 이는 죽은 이들의 부활에 대한 전통적인 생각의 배경을 이룬다. 즉 마지막 날에 죽은 이들의 육신이 재건되어서 그에 속한 영혼과 합치된다는 것이다.
(3) 물질은 “내면화(verinnerlicht)”, 정신화되고, 정신에로의 초월을 통해서 완성된다. 이런 해석의 배경에는 진화적 세계상이 자리한다. 그레사케는 칼 라너에 의거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러므로 죽음 안에서의 인간의 완성은 육신이 없는 영혼이 육신성과 세상을 등지고 떠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정신적 주체가 세상과 육신성 안에서 궁극적으로 자기 자신을 찾는 것으로 생각해야 하는데, 이를 통해서 물질은 내면화되어 정신의 완성에 지속적인 요인이 된다”. G,Greshake, “Leib-Seele-Problematik und die Vollendung der Welt”, in: ders.,/G.Lohfink, Naherwartung-Auferstehung-Unsterblichkeit, Freiburg, 41982, 172.
다른 말로 하면: 물질은 완성되지만, “그 자체 안에서”, “그 자체로서”가 아니라 “다른 것 안에”, 즉 정신 안에서 완성된다. Ibid., 162f.


4.4. 죽음과 부활 사이의 중간 상태? 영혼의 불멸?
죽음과 부활의 관계를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오늘날의 신학에서 이 질문은 영혼의 불명에 대한 문제와 맞물려 있다. 이런 질문들에 대한 토론은 지난 수십년 간 종말론에 활기를 불어 넣었다(3.2.9. 참조).
4.4.1. 전통적 견해
신학의 전통에서 고전적으로 된 견해에 따르면 죽는 순간에 불멸의 영혼은 사멸할 육신에서 분리된다. 영혼은 죽은 후 즉시 그에게만 해당되는 특별한 심판(사심판)을 대하는데, 죄로 말미암은 벌에 대해 보속을 해야한다면 일정 기간의 정화를 거친 다음에 영원한 행복에 당도하게 된다. 혹은 즉은 후 즉시 영원한 벌을 받게 된다. 그리고 세상 역사의 마지막 날에 육신은 부활하여 영혼과 합치될 것이다. 그 다음에 모든 인간이 영혼과 육신을 함께 한 채로 다른 모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영원한 행복이나 영원한 벌에 이르는 공심판을 받을 것이다.
이 견해에 특징적인 점들은, (1) 죽음을 육신과 영혼의 분리로 이해, (2) 철학적으로 근거된 영혼의 불멸성에 대한 확신, (3) (개개인의 삶의 역사에 마지막에 오는) 죽음과 (세상 역사의 종말에 있을) 부활 사이의 중간 시기의 인정, (4) 이 중간 상태에 존재하는 육신이 없는 영혼(“anima separata”)에 대한 생각 등이다.
4.4.2. 근래의 토론
이런 견해가 형성된 길고 복잡한 전개 과정은 교의사에서 다루었다(3.2 참조). 근래에 가톨릭 신학에서는 이에 대한 토론이 두 가지 입장으로 집약된다. 기베르트 그레사케와 게하르트 로핑크가 전개한 모델인 “죽음 안에서의 부활”과 이와 대립해서 요셉 랕찡어가 내세우는 영혼 개념의 복권(復權)과 변형이 그것이다.
4.4.2.1. “죽음 안에서의 부활”
“죽음 안에서의 부활”이 내용으로 하는 바는 다음과 같다: 인간의 한 부분인 “육신”만이 아니라 전체 인간이 죽고, 죽는 순간에 전체 인간이 하느님에 의해서 부활한다. 그러므로 죽음과 부활 사이의 중간 시간을 생각할 필요가 없다. 전통적 신학이 주장하는 육신 없는 영혼(anima separata)이 존재하는 시간, 근래의 개신교 신학의 “총체적 죽음”(Ganztod) 이론에서처럼(3.2.9. 참조) 종말에 하느님께서 인간을 새롭게 창조하실 때까지 인간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 시간을 받아들일 필요가 없다.
로핑크는 이런 생각을 계속 전개하여서 극단적으로 변형시켰다. 현재와 마지막 날의 인류 역사의 완성과의 시간적 간격은 죽은 다음에는 더 이상 고려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한 사람이 죽어서 시간을 등지게 되면, 그는 나머지 전체 역사가, 설사 그 나머지 역사가 현세적 시간의 차원에서는 무한히 많이 거리를 아직 앞에 두고 있다고 해도, 그와 함께 ‘동시에’ 종말에 이르는 ‘점’에 도달하게 된다.” “이 직선상의 시간에 세상의 종말이 있느냐는 물음은 참된 신학적 문제가 되지 않는다”. G.Lohfink, “Zur Möglichkeit der christlichen Eschatologie”, in: G.Greshake/ders., Op.cit. 72.
헤르베르트 포그리물러(Herbert Vorgimler)는 이 주장을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이런 주장은 “아직 남아 있는 역사를 무가치하게 만든다. 인간의 자유로운 행동에 의한 미래의 결정들을 무가치하게 만든다. 또한 실제적이고 현실적인 모든 곤경이 개인의 죽음에서 이미 사라진 것처럼 생각하기 때문에 현재의 상황을 개선하려는 모든 노력을 무가치하게 만든다”. H.Vorgrimler, Der Tod im Denken und Leben des Christen, Düsseldorf, 21982, 125f.

이와는 달리 그레사케는 죽음 안에서의 부활을 과정적인 사건이라고 생각한다. “죽음 안에서의 부활과 마지막 날의 부활은 시간적으로 앞서고 뒤따른 두 가지 사건이 아니라, 역동적이고 전진적인 과정을 통해서 서로 결부되어 있다: 개개인의 삶, 죽음, 부활을 통해서 비로소 모든 이가 완성될 때에야 비로소 충만에 이르는 ‘육신’의 한 지체가 늘 완성되는 것이다”. G.Greshake, “‘Seele’ in der Geschichte der christlichen Eschatologie. Ein Durchblick”, in: W.Breuning(Hrsg.), Seele. Problembegriff christlicher Eschatologie, Freiburg, 1986, 152.

4.4.2.2. “대화적 불멸성 (Dialogische Unsterblichkeit)”
요셉 랕찡어도 처음에는 그리스도교의 부활희망과 그리스적 영혼불멸성의 사상을 내용적으로 서로 반대된다는 데에서 출발해서 그리스적 사고를 수용하는 신학의 역사를 비판적으로 평가하고, 그리스적 육신-영혼 이원론을 성서적인 창조주와 피조물의 상대(相對)관계로 대치하였다. 즉 인간은 그 자체로서 불멸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대화 상대로서 불멸한다는 것이다. “하느님의 기억 속에 존재하는 것이 인간을 영원히 살도록 한다”. J.Ratzinger, Die sakramentale Begründung christlicher Existenz, Freising, 1966, 16.
랕찡어에게 하느님과의 이런 관계가 인간의 정의에 속한다. “인간에게서 이 관계를 삭제하면 인간 대신에 단지 고등 동물만 남게 된다”. Ibid.
그리스도교적 이해에 따른 ‘영혼’ 개념은 바로 이것을 말하고자 한다. “우리가 다분히 실체론(實體論)적 언어로 ‘영혼을 갖는다’라고 부르던 것을 좀더 역사적이고 현실적으로 ‘하느님과의 대화상대가 된다’라고 표현하려는 것이다”. J.Ratzinger, Einfuhrung in das Christentum. Munchen, 1968, 296.
이렇게 해서 랕씽어는 마침내 “금기로 여겨진 ‘불멸성’과 ‘영혼’ 개념의 복권” J.Ratzinger, “Jenseits des Todes”, in: IKaZ(1972), 241f.
을 위해 노력하는데, 물론 이 개념들은 대화적-관계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랕찡어는 “죽음 안에서의 부활”이라는 견해를 분명하게 거부하는데, 왜냐하면 이 견해는 이를 주장하는 사람들의 설명과는 달리 다시금 영혼에 비해서 육신을 업신여기는 이원론으로 흐르기 때문이다. 물질은 그 자체로서가 아니라 내면화되어서 정신 안에서 완성에 이르른다는 주장은 “창조물을 갈라 놓는 것이고, 그런 의미에서 궁극적으로는 물질계 전체를 창조의 목표에서 제외시켜서 이차적 단계의 실재로 만드는 이원론을 뜻한다”. J.Ratzinger, Eschatologie ― Tod und ewiges Leben, Regensburg, 61990, 159.

이런 맥락에서 랕찡어는 사람이 죽음 안에서 자신의 역사와 함께 하느님께 나가더라도 아직 완전한 부활에 이르지 못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자신의 주장에 대한 다른 근거로써 인간이 역사 속에 남긴 죄의 자취를 내세운다. “한 사람이 자신 때문에 아직도 고통을 당하는 이가 있고, 그가 지은 죄가 아직 세상에 계속 남아서 사람들을 괴롭게 한다면, 그 사람이 다 완성되어 목표에 도달했다고 할 수 있을까? […] 계속 남아 있는 죄는 내 자신의 일부이며, 내 자신 안에까지 미치고 그래서 내버려진 내 자신의 한 부분으로서 시간 속에 계속 남아 있다. 이 시간 속에서 사람들이 나 때문에 실제로 계속 고통을 당하고 그럼으로써 그 시간을 나에게까지 미치게 된다”. Ibid., 155.

마침내 이에 관한 토론은 그레사케와 로핑크가 종말에 관한 “다양한 모델의 병립” G.Lohfink, “Zeitproblem und die Vollendung der Welt”, in: G.Greshake/ders., op.cit., 152.
혹은 “상호보완적 모델들” G.Greshake, “‘Seele’ in der Geschichte der christlichen Eschatologie”, 158.
안에서 생각할 필요성을 인정함으로써 가라 앉게 되었다.
4.4.3. 토론의 결과
지난 수십년간에 있었던 죽음과 부활에 관한 토론에서 어떤 결과가 나왔는가? 우선 이 토론은 다시 한 번 앞에서 언급한 해석학적 원칙을 분명하게 했다: 종말론적 희망이 목표로 하는 미래의 것은 정확하고 정보적이며 명확한 언어로 진술될 수 없고, 단지 표상과 상상의 모델로 표현될 수 있을 뿐이다.
“영혼의 불멸”과 “죽음과 부활 사이의 중간 상태”라는 말은 문제성이 있게 되었는데, 왜냐하면 이것들은 육신을 업신여기는 이원론적 경향으로 흐르기 쉽기 때문이다. 또한 관심을 죽은 모든 이들의 부활과 세상의 완성에서 개개인의 사후의 운명에 대해 돌려 놓음으로써 그리스도교적 희망을 개인화시키고, 죽음을 넘어서는 희망의 근거를 신학적으로 하느님을 통한 부활에 두지 않고 단지 철학적으로 영의 불가분성에 둔다는 인상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서 “온전한 죽음”과 “전적으로 새로운 창조”라는 말은 부활한 사람과 죽음 사람의 일체성에 관한 문제를 숙제로 남겨놓고 있고, 창조와 완성의 신앙과 제대로 조화를 이루지 못한다.
“죽음 안에서의 부활”과 “대화적 불멸성”은 서로 연결된다면 두가지 위험을 피할 수 있게 된다. 그러면 다음과 같은 결과가 나온다.
(1) 인간의 한 부분이 아니라 총체적으로 죽는다. 인간이 감수해야 하는 죽음은 인간을 철저히 무력화시킨다. 썩어가는 주검만이 아니라 죽기 전에 다가오는 육신적, 정신적 약화(弱化)는 전체 인간, 정신과 육체이 당하는 무력화를 체험적으로 알아볼 수 있는 표지이다. 바로 이런 점에서 “온전한 죽음”의 부분적인 정당성이 있다고 하겠다.
(2) 죽음 안에서 인간은 바닥이 없는 듯한 심연으로 추락한다. 그러나 하느님의 구원 행동에 힘 입어서 이런 추락이 무로 끝나지는 않는다. 무력화가 극도에 이르렀을 때 하느님은 인간을 붙잡아서 새로운 삶에로 부활하도록 하신다. 그러므로 죽음은 완전한 섬멸이 아니라 통과이며 변화이다: 자신을 잃어버리는 체험을 통한 통과이며 새로운 삶에로의 변화라는 것이다. 완전한 섬멸을 뜻하는 “완전한 죽음”은 이런 점을 표현하기에 적합하지 못하다고 하겠다.
(3) 인간이 죽음 안에서 하느님에 의해 부활하리라는 희망은 하느님의 창조 행동과 그분의 신의에 대한 신앙과 밀접히 연결되어 있다. 이 두 가지 주제는 이미 성서적 부활 신앙의 시초에도 자리하고 있었다(2.5.2. 참조). 인간이 하느님의 대화상대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창조주는 인간을 죽음 속에 멸망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으실 것이다. 그러므로 부활은 무에서의 새로운 창조가 아니라 당신의 피조물을 대상으로한 하느님의 구원 행동이다. 그러나 인간이 하느님과 맺은 관계와는 별도로 인간에게 속한 “본성”이 인간을 불멸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신의에 찬 보살핌이 그렇게 만든다. 관계가 존재를 만든다. 이런 의미에서 “대화적” 혹은 “관계적 불멸성”이라고 표현할 수 있겠다.
(4) 하느님을 통한 구원도 총체적 인간에게 해당된다. 그는 자신이 맺은 세상과의 관계, 자신의 삶의 공동체, 다른 사람과의 관계와 함께 부활한다. 이렇게 그의 부활에서 인류와 세상 전체의 구원이 시작된다. 이것을 “죽음 안에서의 부활”이라는 정식으로 묘사할 수 있다.
(5) 그러나 부활한 사람이 계속해서 세상과 관련되어 있고 다른 사람의 역사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자신의 완성에 세상과 역사의 완성을 필요로 한다. ―몇몇 교부들이 마지막 날을 “기다림”이라는 표상으로 표현한― 이런 측면은 “과정적인 부활”이라는 개념으로 강조될 수 있다: 개개인의 부활은 비로소 세상 역사의 완성과 함께 완성된다.
(6) 부활한 사람이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죽은 그 사람이라는 일체성은 다양한 은유를 통해서 표현될 수 있다. 단지 그 은유가 어떤 연상을 불러일으키는가를 조심해야 한다. (a) “영혼”이라는 단어는 이런 일체성을 가장 강하게 강조한다. 이 단어는 창조신학, 신학적 인간학 그리고 종말론을 서로 연결하는 데에 특별히 적합하다: 인간은 처음부터 하느님의 대화상대로 창조되었고, 그의 존재에는 하느님께서 당신의 피조물을 죽음에서도 멸망하지 않게 하신다는 그런 보살핌이 속하여 있다. 이렇게 인간에게 처음부터 선사되어 인간 존재에 각인된 하느님과의 관계를 “영혼”이라고 부를 수 있는데, 바로 이 영혼이 인간을 불멸하게 만든다. 영혼을 이렇게 이해함으로써 고대 그리스에서 유래하는 영혼 개념이 재해석되었다. 즉 영혼개념이 실체적이 아니라 관계적으로 파악되었고 철학적이 아니라 신학적으로 밑받침된다. 이에 상응해서 신학적으로 영혼에 관해서 언급할 때 두 가지 오해를 막아야 한다. 첫째는 영혼을 단지 인간의 한 부분으로 이해하면서 육체를 업신여기는 해석이고, 둘째로는 하느님을 도외시한 해석, “영혼의 불멸”개념을 내세워 “부활”개념을 사실상 불필요하게 만드는 해석을 피해야 한다. (b) 부활한 사람이 바로 죽은 사람이라는 일체성은 인간이 “하느님의 기억 안에” 존속한다는 것에 근거를 둔다는 표현법은 불멸성과 부활이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서 이루어진다는 점을 강조하는 데에 적합하다. 하지만 이런 표현법에서 하느님과의 관계가 단지 인간 외적으로 머무를 뿐 인간 존재를 각인하지는 않는다는 인상을 주어서는 안된다. (c) “대화적 불멸성” 혹은 “관계적 불멸성”이란 개념은 앞의 두 측면을 연결할 수 있다. 즉 인간은 하느님께서 인간을 사랑하면서 돌보시기 때문에, 또 그러는 한에 있어서 불멸한다. 이 개념은 영혼 개념과 연결되지만, 그러나 필연적으로 거기에 매이지는 않는다. (d) 그러나 부활 개념은 포기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이 개념 자체가 성서에서 사용되는 개념일뿐만 아니라 특별히 하느님의 행동을 강조하고 개개 인간의 구원, 완성을 피조계 전체의 구원, 완성과 연결하기 때문이다.

4.5. 심판
그리스도교의 종말 이해에 따르면 완성에는 심판도 속한다. 세상 역사만이 아니라 개개 인간되 심판을 받는다. 하느님과의 만남은 진리의 시간이고 삶의 수확을 의미한다.
집단적 종말론에서 성서를 고찰하여 얻는 결과(I.2.5.)을 간단히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복음 선포는 결단의 상황을 초래한다. 심판의 말씀은 무엇보다도 이 결단의 심각성과 그 결단이 미치는 영향을 가르쳐주고자 한다. 책임에의 호소를 의미하는 심판의 말씀은 간접적으로는 자신의 자유로운 판단의 가능성을 믿도록 호소한다. 심판자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1) 예수께서 알려주신 세상은 장래성이 있다. (2) 그분의 말씀과 행동은 의미있는 삶에 대한 기준으로 인정되었다. (3) 심판의 목표는 복수와 섬멸이 아니라 구원, 귀향(歸鄕), 완성이다.
4.5.1. 다양한 견해들
인류전체를 대상으로 하는 “일반 심판”과 개개인을 상대로 하는 “특별 심판”과의 관계를 어떻게 상상하느냐는 4장에서 다룬 여러 모델 중에 어느 것을 택하느냐에 따라서 차이가 난다. 죽음과 부활 사이의 중간시간을 인정한다면 두 가지 심판, 즉 죽은 즉시 받게되는 사심판과 마지막 날의 공심판을 말하게 된다. 하지만 죽음 안에서의 부활을 인정하고 (게하르트 로핑크처럼) 죽음과 마지막 날을 하나로 생각한다면 “특별 심판”과 “일반 심판”을 하나이며 동일한 심판의 두 측면으로 이해하게 된다. 이와는 달리 (기베르트 그레사케처럼) 죽음 안에서의 부활을 과정적으로 생각한다면 심판사건도 마찬가지로 과정적으로(개인적인 심판이 전체적인 심판 안에로 확장되는 것으로) 혹은 두 단계로 이해하게 된다.
심판에 대해서 이런 다양한 견해 중에 어느 것을 선택하느냐는 문제와는 무관하게 두 번째의 질문이 제기된다. 즉 심판을 심판관의 행위로서, 외부로부터 인간에게 선고되는 판결로서 생각할 것인가, 아니면 “자기심판”, 말하자면 그리스도와 만남으로써 저절로 실현되는 인간의 자신에 대한 인식으로 생각할 것인가? 근래에 아주 강하게 인격적인 측면에 바탕을 둔 종말론은 두 번째의 생각을 선호한다. “심판관은 아무 행동도 할 필요 없이 단지 있기만 하면 된다”. H.U.von. Balthasar, “Gericht”, in: IKaZ 9(1980), 232.
근본적으로 인간은 자신의 실제적인 삶을 통해서 이미 스스로를 심판하였다. 한 인간의 삶의 진실은 진리 자체이신 분과 만나면서 명백하게 드러나게 된다. 그래서 “자기심판”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인간이 스스로를 심판한다고 해서 인간 스스로가 최종적 기준이 된다는 의미는 아니다. 우리 스스로를 올바로 보도록 하는 빛은 우리 자신에게서 나오지 않는다. 비로소 그리스도를 마주 대하면서 인간은 자신 안에 무엇이 있는지를 분명하게 깨닫게 된다. 심판을 자기심판으로 해석하는 것은 요한복음의 종말론(2.9. 참조)에 근거를 둘 수 있다.
심판을 이렇게 해석하는 데에 상응해서 “죄에 대한 벌”이라는 개념도 해석할 수 있겠다. 즉 “벌”은 외부로부터의 처벌, 즉 (일반 사회의 재판처럼) 법정에서 피고인에게 형량을 확정해서 선고하는 처벌이 아니라 죄 자체에서 결과로 나오는 고통이라는 것이다. 즉 벌이란 잘못된 행동의 내적인 귀결로서의 고통, 궁극적으로는 사랑을 거부함으로써 야기되며, 자신을 불행하게 만드는 자기 경직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아담은 범죄 이후에 하느님의 판결을 듣기 이전에 이미 그분께 대한 두려움에서 자신을 숨기고, 카인은 동생 아벨을 죽인 직후 다른 사람이 자신을 죽이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 사로잡혀서 고통을 당한다(창세 4,13-14 참조).
4.5.2. 심판에 담긴 희망적인 내용?
미래에 심판을 받는다는 사실을 공포와 두려움이 아닌 희망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특별 심판”에서보다는 “일반 심판”에서 더 쉽게 긍정적으로 대답할 수 있겠다. 이 세상에서 불이익을 받아온 사람들, 불의와 폭력의 희생자들에게 세상 마지막 날에 있을 “일반 심판”은 분명히 희망의 근거가 된다. 그 때에는 살인자가 영원히 그에게 희생된 사람 위에 군림하지는 못하고, 거짓과 사기가 낱낱히 밝혀지리라는 것, 마침내 정의가 불의를 이기리라는 믿음은 오늘날 억울하게 권리를 박탈당하고 모욕당하는 이들에게 희망의 빛을 던져주며 동시에 행동의 방향을 제시해 준다. 즉 이런 믿음은 그리스도 신자가 세상에게 과연 어느 편에 서야하며, 누구의 편을 들어야할지를 보여준다. 그러나 다른 사람에 의해서 야기된 불의가 아니라 자신 안에 있는 불의, 죄, 거짓이 밝혀지는 “특별 심판”을 생각하면서 두려움과 공포에 떨지 않을 수 있을까?
“특별 심판”을 두려움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희망으로 보는 데에는 세 가지 생각이 도움을 준다고 하겠다. 첫째, 앞에서 언급한 바대로 심판을 자기심판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즉 심판은 인간에게 어떤 낯선 것으로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어떤 상태에 있는지를 밝히는 것을 뿐이다. 두 번째, 이렇게 이해된 심판에는 처음부터 정화의 측면이 속하게 마련이다. 진리가 드러나는 시간은 그 자체로써 어떤 해방적인 요소가 아닐까? 모든 부정직함, 자신의 흉함과 악의를 가리는 모든 가면은 다시금 인간을 본래의 자신에게서 멀어지게 만들어 괴로움을 주는 요인으로 작용하지 않을까? 그렇다고 할 때 자신을 가리고 있던 가면이 벗겨지는 순간에 비록 온갖 부끄러움과 두려움이 엄습하겠지만 결국은 구원의 시간이 아닐까? 이런 방식으로 심판을 생각한다면 내 자신이 온전히 본래의 내 자신이 될 수 있다고 희망할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이런 희망은 어렵더라도 좀더 정직하게 살 수 있도록 용기를 주지 않을까? 세 번째, 진리가 밝혀지는 시간에는 숨겨져 있던 악을 드러내는 것만이 아니라 살아오면서 행하였던 선에 대해서 인식하는 것도 속한다. 사실 악과 그 결과도 숨겨진 경우가 많지만, 선과 그 결과도 숨겨진 경우가 많은 것이다. 이렇게 해서 “특별 심판”이라는 말도 희망의 표현이 될 수 있다고 하겠다. 즉 “특별 심판”은 자신을 소외시키는 부정직함에서 해방되리라는 희망, 자신이 정화되리라는 희망, 살면서 행한 선행의 결과를 볼 수 있는 희망의 표현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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