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부터 제2차 Vatican공의회에 이르기까지 장구한 세월동안 힘을 가졌던 교회내의 교회에 대한 인식은 Trient공의회(1545-1563)이후 예수회 추기경이었던 R. Bellarmin(1542-1621)의 교회에 대한 정의에 압축되었다. “교회는 신앙고백과 성사, 그리고 교황의 통치로 결합된 신자들의 단체로, 베네치아 왕국이나 프랑크 왕국과 같은 가시적인 조직체이다.” 말하자면, 교회는 하나의 국가와 같은 조직체로서 주교는 영주, 사제는 기사, 신자는 평민이라는 식이다. 그 이후 전개된 가톨릭 교회의 신학은 하나의 호교론의 범주로 제한되었다. 교황은 무류성과 수위권을 가지며, 교회는 위계적으로 순명과 충성의 끈으로 일치를 이룬다. 교회는 완전한 사회로 거룩한 성도들의 모임인 것이며 이러한 가톨릭 교회 밖에서는 아무도 구원될 수 없다. 이러한 교회에 대한 인식은 대단히 법률적이고 제도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는데 사실 교회는 그동안 ‘충성과 순명’이라는 틀 안에 교회 구성원들을 고개도 들지 못하고 살게 하였다. 교회는 한 마디로 하나의 왕국으로서 그 자체로 완전한 사회(Societas perfecta), 죄인들이 발붙일 구 없는 거룩한 성도들의 집단으로 이해되었다. 교회는 지배 세력이었고 판관의 입장으로 사람들을 단죄하였다. 교회는 법을 만들어 선포하면 그만이었고 위법자들을 처단하면 그뿐이었다. 교회는 하나의 국가조직과 같았고 그것도 스스로 승리와 자만에 취한 거대한 제국이었다. 이것을 현대 학자들은 ‘화석처럼 굳어진 경직화’로 표현하고 있다. 그러한 교회에는 생명력이 없었다. 그것이 치명적이었다. 그리고 그 결과는 근대 말부터 서서히 그러나 분명하게 드러나게 되었다. 철옹성 같던 교회의 아성은 1789년 프랑스 혁명으로 군주제도가 무너지고 시민사회가 시작되면서 붕괴되기 시작했다. 사실 교회의 아성은 황제와의 결합 안에서만 가능했던 하나의 독특한 역사였다. 그리고 사람들은 교회를 외면하고 떠나갔다. 여기에는 근대의 계몽주의 사조가 또한 내적인 토대를 제공해 주었다. 무신론이 등장하면서 하느님은 적극적으로 거부되는 한편 불가지론이 팽배했다. 과학이 고개를 들면서 교회가 거부되고 인간이 이제 스스로 전면에 부각되기 시작했다. 이렇게 해서 18세기에는 지식층들이 19세기에는 노동자들이 20세기에는 불특정 다수의 대중이 줄줄이 교회를 떠나게 되었다. “아이고 하느님이고 교회고 지엽다. 너희끼리 잘해봐라.”
19세기에 등장한 낭만주의는 역사와 삶 그리고 진화에 대한 각성을 초래했다. 낭만주의 사조는 역사를 전체적으로 하나로 보고 스스로 개화하는 살아있는 원천과 인간 내부에 숨어 있는 신비를 깨우쳤다. 이러한 각성은 신학에도 하나의 새로운 활력을 주었는데 교회에 대한 새로운 열망과 사랑을 불러일으켰다. 이러한 정신 사조로부터 새롭게 교회론이 부흥하게 되었다. 당시의 이러한 분위기를 주도한 일련의 학자들이 독일 Tübingen학파였다. Tübingen학파를 대표하는 J. A. Möhler(1796-1838)은 특히 자신의 저서 “교회 안에서의 일치”(Die einheit in der Kirche)에서 교회를 무엇보다도 성령의 활동과 그리스도론적인 시각의 사랑안에서 파악하였다. 교회는 육화되어오신 하느님의 살아있는 활동안에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Tübingen학파의 사고는 그 당시에는 가히 혁명적인 것이었는데, 교회를 그저 눈에 보이는 조직체, 그것도 완성품으로서의 조직체로 보던 당시의 교회이해에 눈에 보이지 않는 신비나 성령의 활동 그리고 그 안에서의 그리스도의 활동 이러한 풍부한 개념을 새롭게 보기 시작했던 것이다. 또한 오랫동안 잊혀져 있던 ‘그리스도의 몸’이란 말을 재각성시켰고 교회를 성령이 활동하는 하나의 유기체로 파악하였다. 이렇게 해서 교회론은 보다 풍부한 개념으로 발전되기 시작했고 교회의 부흥이 기대되는 듯 했다.
(벨라르민-위계적, 제도적. 묄러-유기체적, 신비적)
하지만 곧이어 소집된 제 1차 바티칸 공의회(1869-1870)는 Tübingen학파에 의해 부흥된 교회이해의 풍부한 개념을 진전시키지 못하고 R.Bellarmin에 의해 대표되는 가시적인 조직체로서의 교회론을 재확인하는데 그쳤다. 다시 과거로 회귀한 것이다. 교황의 무류성과 수위권은 더욱 확립되고 하느님 백성으로서의 교회 구성원의 교계제도 내에서의 종속성이 더욱 강조되었다. 그리스도의 몸 개념은 무시되고 하느님 백성 개념을 다만 정치적·사회적 개념으로 파악하여 교회에 접목하였다. 교회론의 전개는 더 이상 진전될 수 없었다. 교회론은 그저 교황론 또는 교계제도론으로 제한되고 교회 구성원들로 하여금 교계제도의 구조와 조직에 충성과 순명을 강조하는 정도에 머무르고 만 것이다.
20세기 큰 하나의 변혁이 이루어진다. 근대의 계몽주의 사조의 특징들 즉 주관주의, 개인주의 및 다만 세계에 내재하는 범주 등은 거부되고 R. Guardini의 말대로 근대는 종말을 고하게 된다. “근대는 끝났다”
1차 세계대전(1914-1917)후 교회에 대한 강력하고도 새로운 인식이 일어나고 무수한 가톨릭 개혁운동들이 태동하게된다. 바야흐로 영혼들 사이에서 깨어나는 교회가 된 것이다. 교회이해와 교회개념에 대한 수많은 논쟁의 결론으로 나온 것이 1943년 교황 PiusⅫ에 의해 반포된 신비체 회칙이었다(Myshici corporis Christi). 잊혀졌던 J. A. Mӧhler의 교회에 대한 사상이 복원되고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표상이 교회 개념 이해의 중심내용이었다. 신비체 회칙은 한편으로, 교회를 안전한 사회로서 호교론적이고 법적으로 교회를 고찰하고 있고, 또 한편으로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영적, 신비적으로 파악하고 있다. 그러나 이 신비체 회칙의 교회에 대한 일방적인 이해, 즉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하나의 표상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에 대해 수많은 비판이 쏟아졌다. 교회는 하나의 표상으로 파악될 수 없다. 왜냐하면 교회의 본질이 여러 가지 서로 다른 차원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 비판의 골자였다. 이렇게 해서 다시 하느님 백성이라는 개념이 교회 이해의 또 하나의 중심 개념으로 부각되었다. 하느님 백성이라는 개념과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개념, 이 두 개념의 딜렘마가 제 2차 Vatican공의회의 교회론을 규정하는 기본 조건이었다.
교황 요한 23세가 제 2차 Vatican공의회의 소집을 선포했을 때 세계는 경악하였다. 도대체 무슨 현안 문제가 있어서 공의회가 필요하단 말인가. 사실 그 이전까지의 모든 공의회는 이단의 창궐이나 교회내에 중대한 문제가 제기되었을 때 소집되었다. 제 2차 Vatican공의회를 위해서는 소집을 위한 외형적인 문제는 전혀 감지할 수 없었던 것이 사실이었다. 그러나 교황은 역사의 흐름과 대세를 지켜보면서 세상이 교회를 외면하고 있다는 사실을 정확히 직시하였다. 그것은 당시 아래로부터 가톨릭 개혁운동의 막을 수 없었던 물결, K. Rahner를 비롯한 수많은 영웅적인 신학자들의 냉철한 시대분석과 전망을 토대로 교황은 이대로 앉아 있다가는 교회가 망한다는 절박한 시대정신을 예리하게 읽었던 것이다. 사실 대세의 흐름을 정확히 읽고 특정한 어느 시점에서 적절한 처방을 내린다는 것이 결코 쉽지 않다고 할 때 요한 23세는 혜안을 지닌 이 시대의 예언자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제 2차 Vatican공의회는 전혀 새로운 지평을 열었던 것이다.
제 2차 Vatican공의회는 근본적으로 교회를 ‘하느님 백성’과 ‘그리스도의 몸’으로 이해하고 있다. 이 두 가지 중심용어를 토대로 공의회는 교회를 인류를 위한 구원의 성사로 종합하고 있다. 오랫동안 역사 안에서 오해되어 왔던 교회 이해의 여러 불균형들이 이제야 비로소 균형을 잡게 되었다. 이제 공의회와 더불어 사람들은 교회에 대한 이해를 바르게 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즉시 낙관주의가 도래했다. 교황과 공의회를 주도했던 추기경, 주교, 신학자들은 이제 새로운 희망에 젖어 있었다. 교회개념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함께 새로운 가톨릭의 일치와 진일보를 기대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공의회 이후 전개된 일련의 시기는 가톨릭 교회에 극히 부정적으로 진행되었다. 일치 대신에 분열이 찾아오게 되었고 새로운 감격이 기대되었는데 무력감에 빠져 버리게 되었다. 일보 전진이 기대되었는데 드러난 것은 붕괴의 과정이었다. 개방이라는 구호아래 저마다 자기 준거점에 따라 각자가 자기 목소리를 내게 되면서 진보와 보수니, 좌파와 우파니, 개방과 전통이니 하는 각자의 관점으로 서로 대립하게 되었고, 2000년 동안 유지되어온 가톨릭 교회의 일치 자체가 뿌리째 흔들리게 되었다. 과거에는 교황청의 결정이 즉시 일사분란하게 각 지역교회로 전파되어 적어도 외형적인 일치는 견고하게 유지되었는데 이제는 지역교회들도 저마다 자기 목소리를 내면서 외형적인 일치를 유지하는 것도 간단치 않게 되었다. “교회가 영혼들 사이에서 깨어나고 있다”는 Guardini의 희망찬 구호는 오히려 정반대가 되었다.“교회가 영혼들 사이에서 사라지고 있고 공동체 안에서 파괴되고 있다.”
이러한 공의회 이후의 노선은 뚜렷이 세 가지 경향을 띠고 있다. 첫째로, 진보(개방)주의 : 공의회는 한물간, 그래서 더 이상 현대에는 적합치 않은 과거지사이다. 우리는 또다른 공의회를 원한다.(H.Küng) 둘째로, 전통(보수)주의 : 공의회는 현대교회 붕괴의 원인이 되었고 제 1차 Vatican공의회와 Trient공의회를 파괴시켰다. 무분별한 개방과 변화에로의 성급한 시도가 교회의 전통을 파괴해 버렸다.(르페브르 대주교와 그 추종자) 셋째로, 중도:성서와 교부에 근거해서 전통을 토대로 현대세계의 요구를 수용하고 적응하려는 노선(Rahner를 비롯한 제 2차 Vatican공의회를 가능케 했던 주류)
현대는 인간의 정신적 가치가 현저히 퇴조하고 물질세계가 전면에 등장하게 되었다. 가히 신 유물주의가 되었다. 더구나 60년대 말부터 정신사조를 지배해온 Post-Modernism은 강력하게 인간 삶의 형태를 바꾸어 놓고 있다. 이 와중에 가치체계의 혼란은 신앙 자체와 교회를 뿌리째 흔들고 있다. 교회 내의 많은 신자들이 교회를 통해 제시되는 가치체계와 세상이 내어놓는 가치체계 사이에서 긴장과 갈등을 겪고 있다. 교회는 오늘날 완전히 새로운 위기를 맞고 있다. 이 위기는 점차 그리고 확실히 가톨릭 신앙의 정체성을 위협하고 있다.
이러한 공의회 이후의 혼란을 독일 주교회의 의장이었던 Julius Döpfner 추기경은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공의회 이후의 교회는 하나의 거대한 건축 공사장과 같다. 교회는 건축 공사장, 그러나 설계도를 잃어버린 공사장, 그래서 각자가 자기 생각대로 계속 작업해 나가는 공사장과 같다.”
이러한 혼란된 상황은 가톨릭 내부에 잠재해 있던 다원적이고 원심적인 여러 긍정적인 힘이 해방을 통해 일시에 전면에 부각되는 과도기라 할 수 있지만, 갑작스런 무분별한 개방, 여과되지 않은 개방, 절제되지 않은 개방, 저마다 자기 준거점에 따른 개방에 더 큰 원인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적어도 한가지는 분명하게 되었다. 공의회가 의도했던 참된 정신은 아직 구현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우리는 어려운 상황에 직면해 있다. 이것이 우리 시대를 규정짓는 무대요 주어진 조건이라 할 수 있다. 교회에 대한 정확한 이해 그것은 교회에 대한 그 다음 이야기의 전제조건이 된다. 교회에 대한 정확한 이해없이 하는 모든 교회 내에서의 활동은 매우 임의적이고 자의적이 될 수 있고 금방 수많은 문제를 일으키게 된다. 현재의 교회 위기는 교회에 대한 그릇된 이해, 교회의 신원에 대한 그릇된 이해에서 보다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여기에서 우리는 두 가지를 먼저 전제하고자 한다.
① 균형 감각 : 현재상태 직시, 분석 – 미래에 대한 바른 전망(고르바쵸프와 교황)
② ‘논리적’ : 논리를 잃지 말아야 한다. 학문은 논리를 토대로 한다.
(그렇지 않으면 문학이나 소설)
ex)‘교회에 대한 고찰은 구약까지 소급된다.’왜?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에 근거한다. 예수의 가르침과 행적은 이스라엘의 신앙이라는 공간 안에서 이루어졌다. 나아가 이 이스라엘은 아브라함으로부터 비롯되었다. 이렇게 해서 교회에 대한 고찰은 구약까지 소급된다는 말이 가능하게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