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의 원천-20C의 시대적 상황 분석(종말론적 문제)

 

2.1.3. 종말론적 문제




20세기초 프랑스 신학자 Alfred loisy(1857-1940)는 교회론의 한 중요한 테마를 제기하였다. “예수는 하느님 나라를 선포했지만 도래한 것은 교회였다.” 즉 예수의 복음은 하느님 나라였는데 그리스도교적인 실재는 교회의 모습이었다는 것이다. Loisy의 의도는 그리스도교 본질 문제는 아직 충분히 전개되지 않았고 교회라는 테마 또한 많은 가치 있는 논쟁의 소지가 있음을 알리는데 있었다.


예수가 선포한 것은 교회가 아니라 하느님 나라였다는 것은 사실이다.


Mk 1.15은 예수 복음의 핵심을 “하느님 나라가 다가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예수의 복음이 하느님 나라였음에 비해 도래한 것은 교회라는 사실, 즉 ‘약속과 성취’ 사이에 서로 다른 실재가 존재한다. 어떻게 이 딜렘마를 설명할 수 있을 것인가?


해결 : 하느님 나라는 이미 이 세상안에 와있다. 예수가 선포한 하느님 나라는 단순히 내적인 실재나 정신적인 실재가 아니라 보다 구체적이고 역사성을 띤 요청이다. 하느님 나라는 전체 인간과 역사, 세상을 해방시킨다. 이 하느님 나라는 ‘하늘나라’가 아니라 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하느님의 통치라는 새로운 사건이다. 예수의 설교는 하느님 나라의 실재적인 도래를 말하고 있으니 하느님 나라는 지금 그리고 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실재인 것이다. 여기에서 선포된 하느님 나라는 이 세상에서 하느님의 활동을 의미하고 있으며 정적인 개념이 아니라 동적인 개념인 것이다.


Augustinus – Thomas  ‘순수한 거룩함, 순수히 정신적임’, ‘하늘나라와 지상 인간 세계’


‘βασιλεια’ : 장소개념으로서의 나라 또는 통치 공간으로서의 나라를 의미하지 않는다. 이 말은 기능, 사실의 실재화, 즉 통치권, 또는 임금이 가지고 있는 권능의 실행을 의미한다. 따라서 하느님 나라라는 말은 하느님의 통치, 이 세상을 다스리는 하느님의 살아있는 힘을 뜻한다.


‘θεος βασιλεια’ : 하느님이 당신 손안에 권능을 가지고 계신다, 하느님의 통치권, 하늘에 있고 또 지금 이 세상 안에 완전한 권능을 실현하는 하느님의 통치권이라는 의미이다.


여기에서 그렇다면 도대체 이 세상 어디에 하느님 나라가 있는가라는 질문이 제기된다.




의심없이 신약 성서는 세상의 종말과 주님의 내림이 곧 있을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조금더 있으면 오실 이가 지체없이 나타나리라.”(히브리 10,37) 기원후 60년경 네로 황제에 의해 사실 예루살렘이 멸망하는 것을 보고 주님 재림이 임박했다는 생각이 만연하였다. 교회는 주님의 재림을 고대하지만 재림은 자꾸만 지연되고 있음을 경험하였다. 세상은 비웃는다. “교회 너희들이 말하는 재림은 도대체 정말 오는 것이냐. 너희들은 재림이라는 말을 무기로 세상을 위협하고 있다. 그게 선교냐? 그게 교회의 생존 방식이냐?”라는 두가지 문제가 생겨난다. (하나는 예수가 말하는 하늘나라라는 게 이 세상 어디에 있느냐, 또 하나는 교회가 얘기하는 예수가 다시온다는 재림은 왜 안 오느냐. 이 두가지 문제의 해결은 ‘종말적’이라는 말마디이다.


즉 먼저 하느님 나라라는 말은 종말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종말적’이라는 말의 가장 쉬운 설명은 ‘역사를 넘어가는’, ‘역사가 전부가 아니라 이것을 초월하는’, 그러면서도 동시에 역사안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인간적인 역사체험이라는 일반적인 구조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이러한 인간 역사에 구원역사(구세사)는 인간 역사 시간의 마지막에 가서야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벌써 지금의 시간 중에서 일어나는 사건이다. 이렇게해서 ‘이미 그러나 아직’이라는 도식이 유행하게 되었는데, 이 도식은 구체적인 역사적 체험을 드러내주는 도식으로서 하느님 나라는 바로 인간적인 존재의 중심, 지극히 구체적이고도 일상의 평범한 역사와 관련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하느님 나라는 하느님의 통치권, 예수에 의해서 이미 드러났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은 통치권, 교회의 신앙 안에서 현존하며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하느님의 통치권인 것이다. (☆‘하느님 나라’는 우리의 일상 생활과 동떨어진 어떤 것, 또는 장차 어떤 때에 도둑처럼 갑자기 나타나는 어떤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인간역사, 개개인의 구체적인 역사, 즉 “개개인의 평범한 일상 생활 안에서 일어나고 실현된다”는 말에 깊이 명심, 주목해야한다.)


우리는 하느님 나라가 우리의 지극히 평범한 일상 생활과는 동떨어진 저 하늘 위의 거룩한 어떤 것이라는 사고 방식에 알게 모르게 젖어있다. 그리하여 우리 일상의 작은 역사들을 아주 하찮게 여기는데 익숙하다. 우리 개개인의 작고 하찮은 개인의 역사, 개인의 일상생활들, 이것들이 우리 개인에게 있어서 실현되고 실현되어야 하는 하늘나라가 되어야 된다는 말을 잊어서는 안되겠다.


소화 데레사 : “순애의 일순간은 모든 선업을 합쳐 놓은 것보다 교회와 하느님을 위해 더 유익하다.”


작고 하찮은 것은 작지만 전부를 말해준다. 어떤 아주머니 한분이 아이하나를 동창신부인 계산동 보좌 신부에게 데리고 와서 복사단에 넣어달라고 부탁을 했다. “신부님, 우리 아이는 착합니다. 공부도 잘하고 엄마, 아빠 말도 잘 듣습니다.” 이렇게 한 10분 동안을 그 아이가 복사를 하기에 틀림이 없다는 것을 얘기했다. 동창신부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복사단 모집 기간이 아니지만 특별히 복사단에 넣어 주어야겠다고 속으로 생각하는 순간 아주머니가 아이를 잘봐달라는 뜻으로 한마디 덧붙였다. “신부님, 우리 아이 아버지가 이문희씹니다. 신부님도 아실 겁니다.” 이 마지막 말 한마디가 그 아주머니의 전부가 정상이 아니다는 것을 말해 주었다.


아주 작고 하찮은 일상생활.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할 때, 만지고 쓰다듬고 껴안을 때, 앉고 일어서고 걸어가고, 눕고 기대고 다리꼬고할 때, 말할 때, 열받고 미워하고 속상할 때, 기쁘고 즐거울 때, 일어나고, 세수하고, 이불개고, 방청소, 쓰레기 치우고, 빨래할 때, 시장보고, 음식 준비하고, 마늘까고 파 다듬을 때…


자동차 운전할 때, 동창모임, 계모임, 차한잔, 초인종 누를 때, 노크할 때, 옷벗고 양말벗고 씻고 이불깔고, 잠자리에 들 때, 이모든 일상의 구체적인 일들, 개개인의 작고 하찮은 역사가 바로 하느님 나라가 실현되고 드러나는 무대이다. 그리고 이 하느님 나라는 종말적이라는 것, 구체적인 역사 안에서 실현되지만 동시에 역사를 넘어가는 것이며 완성을 지향하고 있다는 것이다.


    슬리퍼도 제대로 못신고 다니는 사람


    문을 제대로 열고 닫지 못하는 사람


    양말이나 속옷을 제대로 못벗는 사람


    머리를 제대로 감지 못하고 이를 제대로 닦지 못하고 냄새 피우며 다니는 사람


하느님 나라는 공중에 붕붕 떠다니다가 어느날 갑자기 지상으로 도래하는 것이 아니다. 지금 우리의 일상 생활, 개인의 구체적인 역사 안에서 실현되고 드러나야 하는 것이다.


둘째로 ‘재림’이란 말은 말 그대로 직접적인 재림의 신속한 실현으로 알아들어서는 안된다. 복음서에 나타나 있는 예루살렘의 멸망(기원후 60년경 네로 황제; Mt 24, Mk 13, Lk 21)이 즉시 주님의 재림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예루살렘의 멸망은 주님의 재림을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방인의 시대가 열린다는 의미로 이해될 수 있다. 이제 하느님의 구원 역사는 이스라엘이라는 한 민족적 차원이 아니라 전세계로 확대되었고 이스라엘의 임무는 여기서 달라지게 되었다. 구세사는 본격적으로 전 인류를 포함하게 되었다고 해석한다.




이러한 고찰을 토대로 결론을 말할 수 있다.


약속과 드러나는 새로운 실재 사이의 긴장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근본적인 양태라 할 수 있다. 하느님의 숨은 실재는 항상 구세사 전체를 관통함으로써 어느 정도 인식할 수 있게 된다. 예수는 하느님 나라라는 복음을 동시에 현존하고 드러나는 실재로서 선포하였다. 형성되어가는 교회는 스스로 처음의 복음을 깊이 알고 있었고 예수를 하느님 나라의 현존하는 모습으로 선포하였다. 초기 교회는 부활하신 분의 모습에서 벌써 실현된 하나의 재림을 체험하였고 이것은 현재에서의 실현을 의미하는 것이며 약속이 이미 현재화되었다는 것을 인식하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현재화는 또한 완전한 완성이 아니라 희망인 것이다.


오늘날 이러한 종말적인 문제가 다시 대두되고 있다. 종말론 문제는 교회가 제도로서 존재하는가의 문제, 하나의 법적이고 행정적인 제도로서 존재하고 있는가의 문제, 이러한 종말론이 제기하는 근본적인 문제는 그리스도교의 본질, 하느님 나라라는 약속의 성취를 지향하고 있다. 교회를 탐구하는 작업에서도 우리는 이러한 ‘종말적인 자세’-두가지; 현재안에 실현되는 것, 그러나 이 현재를 초월하는 것-를 명심해야 하겠다.


그리스도인의 기본자세 : 현세를 살면서도 현세에 완전히 마음을 두지 않는 자세 – 종말적


– 사소한 일에 목숨거는 사람


– 이것 아니면 절대로 아니다. 반드시 이렇게 해야한다.


상대적이다는 말, 절대적인 것이 세상에 얼마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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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의 원천-20C의 시대적 상황 분석(종말론적 문제)에 1개의 응답

  1. guest 님의 말:

     

    2.1.3. 종말론적 문제


    20세기초 프랑스 신학자 Alfred loisy(1857-1940)는 교회론의 한 중요한 테마를 제기하였다. “예수는 하느님 나라를 선포했지만 도래한 것은 교회였다.” 즉 예수의 복음은 하느님 나라였는데 그리스도교적인 실재는 교회의 모습이었다는 것이다. Loisy의 의도는 그리스도교 본질 문제는 아직 충분히 전개되지 않았고 교회라는 테마 또한 많은 가치 있는 논쟁의 소지가 있음을 알리는데 있었다.

    예수가 선포한 것은 교회가 아니라 하느님 나라였다는 것은 사실이다.

    Mk 1.15은 예수 복음의 핵심을 “하느님 나라가 다가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예수의 복음이 하느님 나라였음에 비해 도래한 것은 교회라는 사실, 즉 ‘약속과 성취’ 사이에 서로 다른 실재가 존재한다. 어떻게 이 딜렘마를 설명할 수 있을 것인가?

    해결 : 하느님 나라는 이미 이 세상안에 와있다. 예수가 선포한 하느님 나라는 단순히 내적인 실재나 정신적인 실재가 아니라 보다 구체적이고 역사성을 띤 요청이다. 하느님 나라는 전체 인간과 역사, 세상을 해방시킨다. 이 하느님 나라는 ‘하늘나라’가 아니라 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하느님의 통치라는 새로운 사건이다. 예수의 설교는 하느님 나라의 실재적인 도래를 말하고 있으니 하느님 나라는 지금 그리고 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실재인 것이다. 여기에서 선포된 하느님 나라는 이 세상에서 하느님의 활동을 의미하고 있으며 정적인 개념이 아니라 동적인 개념인 것이다.

    Augustinus – Thomas  ‘순수한 거룩함, 순수히 정신적임’, ‘하늘나라와 지상 인간 세계’

    ‘βασιλεια’ : 장소개념으로서의 나라 또는 통치 공간으로서의 나라를 의미하지 않는다. 이 말은 기능, 사실의 실재화, 즉 통치권, 또는 임금이 가지고 있는 권능의 실행을 의미한다. 따라서 하느님 나라라는 말은 하느님의 통치, 이 세상을 다스리는 하느님의 살아있는 힘을 뜻한다.

    ‘θεος βασιλεια’ : 하느님이 당신 손안에 권능을 가지고 계신다, 하느님의 통치권, 하늘에 있고 또 지금 이 세상 안에 완전한 권능을 실현하는 하느님의 통치권이라는 의미이다.

    여기에서 그렇다면 도대체 이 세상 어디에 하느님 나라가 있는가라는 질문이 제기된다.


    의심없이 신약 성서는 세상의 종말과 주님의 내림이 곧 있을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조금더 있으면 오실 이가 지체없이 나타나리라.”(히브리 10,37) 기원후 60년경 네로 황제에 의해 사실 예루살렘이 멸망하는 것을 보고 주님 재림이 임박했다는 생각이 만연하였다. 교회는 주님의 재림을 고대하지만 재림은 자꾸만 지연되고 있음을 경험하였다. 세상은 비웃는다. “교회 너희들이 말하는 재림은 도대체 정말 오는 것이냐. 너희들은 재림이라는 말을 무기로 세상을 위협하고 있다. 그게 선교냐? 그게 교회의 생존 방식이냐?”라는 두가지 문제가 생겨난다. (하나는 예수가 말하는 하늘나라라는 게 이 세상 어디에 있느냐, 또 하나는 교회가 얘기하는 예수가 다시온다는 재림은 왜 안 오느냐. 이 두가지 문제의 해결은 ‘종말적’이라는 말마디이다.

    즉 먼저 하느님 나라라는 말은 종말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종말적’이라는 말의 가장 쉬운 설명은 ‘역사를 넘어가는’, ‘역사가 전부가 아니라 이것을 초월하는’, 그러면서도 동시에 역사안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인간적인 역사체험이라는 일반적인 구조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이러한 인간 역사에 구원역사(구세사)는 인간 역사 시간의 마지막에 가서야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벌써 지금의 시간 중에서 일어나는 사건이다. 이렇게해서 ‘이미 그러나 아직’이라는 도식이 유행하게 되었는데, 이 도식은 구체적인 역사적 체험을 드러내주는 도식으로서 하느님 나라는 바로 인간적인 존재의 중심, 지극히 구체적이고도 일상의 평범한 역사와 관련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하느님 나라는 하느님의 통치권, 예수에 의해서 이미 드러났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은 통치권, 교회의 신앙 안에서 현존하며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하느님의 통치권인 것이다. (☆‘하느님 나라’는 우리의 일상 생활과 동떨어진 어떤 것, 또는 장차 어떤 때에 도둑처럼 갑자기 나타나는 어떤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인간역사, 개개인의 구체적인 역사, 즉 “개개인의 평범한 일상 생활 안에서 일어나고 실현된다”는 말에 깊이 명심, 주목해야한다.)

    우리는 하느님 나라가 우리의 지극히 평범한 일상 생활과는 동떨어진 저 하늘 위의 거룩한 어떤 것이라는 사고 방식에 알게 모르게 젖어있다. 그리하여 우리 일상의 작은 역사들을 아주 하찮게 여기는데 익숙하다. 우리 개개인의 작고 하찮은 개인의 역사, 개인의 일상생활들, 이것들이 우리 개인에게 있어서 실현되고 실현되어야 하는 하늘나라가 되어야 된다는 말을 잊어서는 안되겠다.

    소화 데레사 : “순애의 일순간은 모든 선업을 합쳐 놓은 것보다 교회와 하느님을 위해 더 유익하다.”

    작고 하찮은 것은 작지만 전부를 말해준다. 어떤 아주머니 한분이 아이하나를 동창신부인 계산동 보좌 신부에게 데리고 와서 복사단에 넣어달라고 부탁을 했다. “신부님, 우리 아이는 착합니다. 공부도 잘하고 엄마, 아빠 말도 잘 듣습니다.” 이렇게 한 10분 동안을 그 아이가 복사를 하기에 틀림이 없다는 것을 얘기했다. 동창신부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복사단 모집 기간이 아니지만 특별히 복사단에 넣어 주어야겠다고 속으로 생각하는 순간 아주머니가 아이를 잘봐달라는 뜻으로 한마디 덧붙였다. “신부님, 우리 아이 아버지가 이문희씹니다. 신부님도 아실 겁니다.” 이 마지막 말 한마디가 그 아주머니의 전부가 정상이 아니다는 것을 말해 주었다.

    아주 작고 하찮은 일상생활.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할 때, 만지고 쓰다듬고 껴안을 때, 앉고 일어서고 걸어가고, 눕고 기대고 다리꼬고할 때, 말할 때, 열받고 미워하고 속상할 때, 기쁘고 즐거울 때, 일어나고, 세수하고, 이불개고, 방청소, 쓰레기 치우고, 빨래할 때, 시장보고, 음식 준비하고, 마늘까고 파 다듬을 때…

    자동차 운전할 때, 동창모임, 계모임, 차한잔, 초인종 누를 때, 노크할 때, 옷벗고 양말벗고 씻고 이불깔고, 잠자리에 들 때, 이모든 일상의 구체적인 일들, 개개인의 작고 하찮은 역사가 바로 하느님 나라가 실현되고 드러나는 무대이다. 그리고 이 하느님 나라는 종말적이라는 것, 구체적인 역사 안에서 실현되지만 동시에 역사를 넘어가는 것이며 완성을 지향하고 있다는 것이다.

        슬리퍼도 제대로 못신고 다니는 사람

        문을 제대로 열고 닫지 못하는 사람

        양말이나 속옷을 제대로 못벗는 사람

        머리를 제대로 감지 못하고 이를 제대로 닦지 못하고 냄새 피우며 다니는 사람

    하느님 나라는 공중에 붕붕 떠다니다가 어느날 갑자기 지상으로 도래하는 것이 아니다. 지금 우리의 일상 생활, 개인의 구체적인 역사 안에서 실현되고 드러나야 하는 것이다.

    둘째로 ‘재림’이란 말은 말 그대로 직접적인 재림의 신속한 실현으로 알아들어서는 안된다. 복음서에 나타나 있는 예루살렘의 멸망(기원후 60년경 네로 황제; Mt 24, Mk 13, Lk 21)이 즉시 주님의 재림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예루살렘의 멸망은 주님의 재림을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방인의 시대가 열린다는 의미로 이해될 수 있다. 이제 하느님의 구원 역사는 이스라엘이라는 한 민족적 차원이 아니라 전세계로 확대되었고 이스라엘의 임무는 여기서 달라지게 되었다. 구세사는 본격적으로 전 인류를 포함하게 되었다고 해석한다.


    이러한 고찰을 토대로 결론을 말할 수 있다.

    약속과 드러나는 새로운 실재 사이의 긴장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근본적인 양태라 할 수 있다. 하느님의 숨은 실재는 항상 구세사 전체를 관통함으로써 어느 정도 인식할 수 있게 된다. 예수는 하느님 나라라는 복음을 동시에 현존하고 드러나는 실재로서 선포하였다. 형성되어가는 교회는 스스로 처음의 복음을 깊이 알고 있었고 예수를 하느님 나라의 현존하는 모습으로 선포하였다. 초기 교회는 부활하신 분의 모습에서 벌써 실현된 하나의 재림을 체험하였고 이것은 현재에서의 실현을 의미하는 것이며 약속이 이미 현재화되었다는 것을 인식하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현재화는 또한 완전한 완성이 아니라 희망인 것이다.

    오늘날 이러한 종말적인 문제가 다시 대두되고 있다. 종말론 문제는 교회가 제도로서 존재하는가의 문제, 하나의 법적이고 행정적인 제도로서 존재하고 있는가의 문제, 이러한 종말론이 제기하는 근본적인 문제는 그리스도교의 본질, 하느님 나라라는 약속의 성취를 지향하고 있다. 교회를 탐구하는 작업에서도 우리는 이러한 ‘종말적인 자세’-두가지; 현재안에 실현되는 것, 그러나 이 현재를 초월하는 것-를 명심해야 하겠다.

    그리스도인의 기본자세 : 현세를 살면서도 현세에 완전히 마음을 두지 않는 자세 – 종말적

    – 사소한 일에 목숨거는 사람

    – 이것 아니면 절대로 아니다. 반드시 이렇게 해야한다.

    상대적이다는 말, 절대적인 것이 세상에 얼마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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