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 교회 공동체에서 평신도들의 모습-전례생활(상)

 

Ⅱ. 초대 교회 공동체에서 평신도들의 모습




1. 전례생활




제 2차 바티칸 공의회의 거룩한 전례에 관한 헌장에서 전례는 “신자들이 생활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신비와 참 교회의 본질을 다른이에게 드러내 보이고 명시함에 가장 큰 도움이 된다”라고 밝히고 있으며, 따라서 전례는 (교회)밖에 있는 이들에게는, 성교회를 “이교 백성들을 위하여 세워진 깃발”로 드러내 보이며, 흩어진 하느님의 자녀들로 하여금 이 깃발 아래 함께 모여 한 양 우리 및 한 목자가 되도록 하는 것이다(전례헌장 2항).


한국 초기 교회 평신도들은 “교회활동이 지향하는 정점이며 모든 힘이 흘러나오는 원칙”(거룩한 전례에 관한 헌장 10항)인 공동체의 전례생활을 “의식적이고 능동적이며 또한 효과적으로”(11항)살았다. 그들에게 전례적 모임은 주님을 찬미하고 감사드리며 은총을 받는 계기일뿐 아니라, 우정을 키우면서 서로 위로하고 도우며 봉사하는 사랑의 모임이었다. 또한 그것은 박해의 어려움 중에 매일의 그리스도인 생활을 영위하기 위하여 항상 더욱 굳센 믿음과 더욱 생생한 희망을 키우고 강화하는 학교였으며, 자비를 베푸는 활동과 복음화 사도직을 수행하도록 하는 애덕의 샘이었다.1)




1) 초기 교회 신자들의 기도생활




(1) 개인의 기도생활


초기 신자들의 기도생활에 관한 내용은 1801년 신유박해 때 투옥된 교우들의 심문과 조사 내용을 일지식으로 기록해 놓은 <사학징의>를 통해서 어느정도 밝혀지고 있다.2) 그들은 아침 저녁으로 조만과(朝晩課)나 삼종경을 매일 드렸으며 그 중에도 성호경, 오배례(五拜禮)3),예수도문, 천주십계 등은 조과 때 바친 내용이다. 그 외에 오상경, 묵주신공을 바치는 매괴경 등을 바쳤다. 또한 그들은 개인 묵상기도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묵상지장(黙想指掌)은 조선교회의 책임자인 북경주교 구베아가 친히 저술했다는 점에서 묵상제의, 묵상식량, 성모념주 묵상, 수난 시말과4) 같은 다른 묵상서보다 더욱 인기가 있었다. 묵주신공도 빠질 수 없는 기도생활 중의 하나인데 신자들은 주일마다 규정된 경문을 공동으로 바치는 외에 묵주신공 15단을 바쳐야 했고, 또 매일 같이 이 신공을 바친 사람도 있었다. 달레에 따르면 홍락민은 하루도 묵주신공을 궐한 적이 없었다 하며, 또한 예산의 김광옥은 형장으로 끌려가면서도 묵주신공을 그치지 않았다고 한다.


한편 초기 신자들은 성인들에 대한 공경을 통해 그들의 덕행을 본받으려 열성을 다했는데 성년광익(聖年廣益)5)과 같은 성인들의 전기를 애독하고 영세 때 주보성인으로 택한 성인을 더욱 공경했다.6)




(2) 공동기도


초기 신자들에게서 드러난 또 한가지 두드러진 특징은 공동기도였다. 엄중한 감시와 박해 속에서도 그들은 일정한 장소에 모여 주일을 지키거나 첨례를 거행하면서 공동으로 기도를 바쳤다. 즉 주일과 첨례를 지키기 위해서는 일정한 규칙과 경문의 절차가 있는데 모든 주일과 첨례에 공통되는 경문과 또한 각 주일과 첨례에 해당하는 경문을 염해야 했다. 경문이 없는 사람을 대송으로 성로선공(십자가의 길)을 해야 했고, 이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은 천주경7) 두 꿰미, 즉 66번을 염해야 했다. 이상의 경문외에도 매괴의 15단을 염해야 했고, 만일 매괴경을 모르면 성모경 세 꿰미, 즉 99번을 염해야 했다. 뿐만 아니라 주일을 거룩히 지내려면 책이 있는 사람은 마땅히 성경을 보아 도리를 밝히고 다른 요긴한 도리도 배워 손하 사람을 가르치도록 했다. 더 나아가서 파공할 본분이 없는 단순한 첨례 날일지라도 해당 첨례의 도문, 즉 연도라고도 하는 응답식 기도로 성인 열품기도, 예수수난도문, 연옥도문, 청성 호도문 등과 찬미경을 염하도록 권고하였다.8)




(3) 성사생활


성사란 용어는 오직 유항검, 황사영, 주문모 신부만이 사용 했을뿐 당시 신자들은 이를 생소히 여긴 것 같다. 이승훈과 권일신이 중심이 되어 성무집행을 담당했던 가성직자 제도에서 성사생활의 모습을 찾아 볼 수 있으나, 이들은 자신의 성무집행에 의심을 품고 급기야 밀사를 북경에 보내 성무활동의 금지를 통보받고 즉각적으로 중지하였다. 그 후 주문모 신부가 1795년 부활 성제날 아침 우리나라에 들어온 후 최초의 미사를 지내던 당시에는 성사라고 하면 세례성사와 고백성사를 칭했고, 그외 견진성사나 혼인성사 등은 프랑스 선교사들이 들어오고 난 후에 가서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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