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 교회 공동체에서 평신도들의 모습-영성생활(상)

 

2. 영성생활




교회 안에 역사하시는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의 표현이 없는 사도직은 없으며 한편 하느님 나라의 확장과 발전이 없는 영성이 있을 수 없다. 사도직과 영성은 둘다 성령으로 인하여 그리스도의 사명, 즉 자신의 봉헌인 사랑의 사명에 참여하는 것이다. 이처럼 사도직과 생활은 긴밀한 내적 연관이 있다. 사도직이 그리스도의 신비체의 유익을 위해 봉헌하고 교환되어 참여하는 그리스도적 생활의 선물이라면, 영성은 하느님의 성령으로부터 받는 힘이며 영감으로서 그것은 인간의 생활을 변화시켜 사도직 활동 안에서 목숨까지 바치도록 한다.1)


제 2차 바티칸 공의회의 거룩한 전례에 관한 헌장 제 12항 에서는 영적 생활이 오로지 전례에 참여하는 데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신자는 비록 공동으로 기도하도록 부름을 받았더라도, 방에 들어가 은밀한 곳에서 성부께 기도할 것이고, 사도들의 가르침에 따라 간단없이 기도할 의무가 있으며, 예수의 죽으심의 고난을 언제나 우리 몸에 지녀 예수의 생명이 우리의 죽을 몸에도 항상 나타나도록 해야하며, 우리 자신도 주께 바쳐지는 “영원한 제물”이 되게 하시도록 기도해야 한다고 밝히고 있다.




1) 순명정신




(1) 하느님께 대한 순명


그들은 하느님이신 천주를 부모나 군주에 우선하는 분으로 공경했으며, 또 그분은 이 세상과 우주를 창조한 조물주이며 지배자로, 초월적이고 절대적인 권위를 갖는 존재이기에 현실 세계에는 누구라도 천주에게 순명해야 한다고 이해했다. 이같은 천주께 대한 순명정신은 당시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윤리규범인 십계를 지키는 실천 생활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십계는 전통적 윤리강령과도 일치하는 점이 많았기에 초기 신자들의 신앙 내용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이처럼 당시 유교적 전통사회에서 가장 중요시되던 규범체계인 국가에 대한 충성과 부모에 대한 효도보다 천주께 대한 공경을 더 우선시 했다는 사실은 초기 신자들의 하느님께 대한 순명정신이 얼마나 철저했나를 잘 보여주고 있다.2)


    


(2) 교회에 대한 순명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은 초기의 대부분을 사목자 없이 지내는 불운 중에도 교회가 “지극히 거룩하고 공번되며, 지극히 의롭고 참되며, 지극히 완전하고 절대적으로 하나”(정하상, 상재상서)임을 고백하였다. 또한 교회 안에서의 자신들의 의무를 자각하고 그에 성실하며, 옹호, 증거하였다. 그들은 교리와 교회의 가르침에 대하여 또한 교회의 생활에 놀라울만큼 충실하였다. 이러한 자세는 가성직자단의 해체와 조상제사의 포기 결정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3) 특히 이들의 순명정신은 누구의 권유와 강제에 의한 것이 아니라 자발적인 순명이었다는데 그 특징이 있다.4)




2) 초대교회의 신관(天主觀)




하느님에 대한 칭호에 있어 마테오 리치는 천주는 상제와 동일한 존재라고 보았고 이벽 역시 그의 저서<성교요지>에서 같은 입장을 보였다. 그러나 북경 교회에서 ‘천주’라는 용어만 사용할 것을 지시받고 점차 천주란 칭호만 사용하게 된다. 이는 대군대부, 대부모, 대군주로 호칭되기도 했다. 즉 유교 문화의 충효사상과 연관되어 하느님께 대한 사랑의 표현으로 불려졌던 것이다.


당시 신자들은 천주를 조물주로, 또 초월적이고 절대적 존재로 인식하였고, 천주와의 관계는 현세를 거쳐 내세에 까지 연결되는 영원한 관계로 인식하였다. 한편 초기 신자들은 천주를 ‘은총을 주시는 분’으로도 이해했는데, 이는 이순이 루갈다의 두 번째 옥중 서신에서 잘 드러난다. 즉 자신의 순교 원의가 이루어졌음과 남편 윤요한을 만나 서로 동정을 지킬 수 있었음을 주님의 은총으로 감사하고 있다.5)


이처럼 초기 신자들은 천주를 창조주요, 초월적 지배자로 생각하면서도 인격신으로서 인간에게 은총을 내려 주시며 인간과 함께 존재하신 분으로도 이해하고 있었다.6)




3) 말씀의 증거




“평신도들은 복음 선포와 인간 성화에 힘쓰며, 현세 질서에 복음 정신을 침투시켜 현세 질서를 완성하는 활동으로써 세계 안에서 그리스도의 명백한 증인이 되고 인간 구원에 이바지하므로 그들의 사도직을 수행한다.”(평신도 사도직에 관한 교령 1장 2항) 초기 신자들은 하느님께 대한 믿음과 복음의 말씀을 생활을 통해 명백히 실천하여 증거하였다.




(1) 형제적 사랑


초기 신자들은 한 하느님의 아들, 딸로서의 자신을 깊이 인식하였다. 이는 바로 그들이 그리스도의 제자임을 세상 사람들이 알도록 하는 표지(요한 13,34-35)였다. 분명 한국 사회 안에서도 초세기 신자들의 봉사와 애덕적 자세는 당시 외교인들의 감탄을 불러 일으켰다.


특히 을해박해 때 체포되어 7명의 다른 신자들과 함께 대구 감옥에 갇혀있던 신자들의 이야기는 이러한 사실들을 잘 알수 있게 한다. 이들은 사형이 확정되었으나 약 2년이 연기되어 옥중에서 생활하게 되었다. 더구나 1815년은 전국적으로 무서운 기근이 들었기에 이들의 처참한 생활은 짐작하고도 남는다. 그동안의 이들 공동체의 모습은 교인은 물론 외교인에게까지 감탄의 대상이 되어 있었다. 의지할 데 없이 옥에 갇힌 이들은 먹고 살기위해 낮에는 짚신을 삼았고, 밤에는 등불을 켜 놓고 모두 성서를 읽으며 큰 소리로 공동기도를 드렸다. 이를 들은 주민들이 이 이상한 광경을 구경하러 왔다가는 깊은 감명을 받고 돌아가곤하였다. 인간의 법률로 다스림을 받는 소위 이 죄인들의 기쁨과 안심과 화목은 저 외교인들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아름다운 일이었기에, “그래, 이것이 죄인들의 소굴이란 말인가?”라고 하였다. 감옥은 마치 덕을 배우는 학교요, 화목하며 말과 행동에 규율이 잡힌 가족과도 같았다. 포교와 포졸조차 가끔씩 천주교가 어떤 것인지 알아보러 왔고 그 중 학식이 많은 자를 보내어 새 교회의 근본적인 점에 대해 토론을 하게 하였다. 이들의 삶은 포교들이 퍼뜨리는 말로 점차 읍내와 도내로 퍼져 나갔으며, 배신자 전치수가 같은 옥에 갇혔을 때 음식과 옷을 나누어 그의 목숨을 구함으로 참다운 애덕이 원수를 어떻게 대하는지를 모든 외교인에게 보여주었다. 그들은 약 20개월 동안의 옥살이 후 처형되었고, 이들의 시체는 관장의 명령으로 형장 근처에 정성스럽게 매장되었고 그 위에 흙이 얇게 입혀졌으며 무덤마다 묘비가 세워졌다. 이처럼 이들의 순교와 삶은 이웃도에 까지 큰 반향을 일으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많은 외교인에게 알리는데 적지 않은 이바지를 하였다.7)




(2) 하느님께 대한 사랑


이는 초기 신자들의 신관과도 깊이 관련되어 있는 문제이다. 즉 그들의 영성을 더욱 깊이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전통문화 안에서 표현되고 살아온 하느님께 대한 사랑을 이해하여야 한다. 바로 이들의 하느님께 대한 사랑의 표현이란 가장 높은 아버지이시며 왕중의 왕이신 하느님께의 효도와 충성이다. 이것이 유교적 문화에서 전이되어 그리스도교의 가르침 안에서 거양된 것이다.8) 초기 천주교 전파에 큰 공헌을 세운  이벽은 천주공경가에서 “집안에는 어른이 있고 나라에는 임금이 있네, 내몸에는 영혼이 있고 하늘에는 천주가 있네”라고 하였다.9) 즉 하느님이 온세상의 가장 근본적이고 궁극적인 바탕임을 의심하지 않았던 것이다.10)


이러한 하느님께 대한 사랑은 한국 교회사 곳곳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이러한 하느님께 대한 사랑이 궁극적으로로 가장 확실히 드러나는 것이 바로 다음에서 다루게 될 동정생활, 독신생활과 순교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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