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신도의 신원과 영성-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평신도의 생활윤리

 

5.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평신도의 생활윤리




결국 평신도가 살아가면서 꼭 지켜 내야 할 생활윤리들이 필요하다. 이것은 세속 안에 살아가면서도 그것을 정화하고 성화해야 할 사명이 있기에 그를 위한 기본적인 윤리가 나오는 것이다.


  먼저 이야기돼야 할 것은 志向에 대한 것이다. 인간의 모든 행위에는 지향이 따른다. 그것이 선한 것이든지 그렇지 않든 행위에는 지향이 있기 마련인데 평신도로서 가져야 할 지향은 언제나 그리스도의 모범에 따르는 것이어야 한다. 행위에 대한 평가와는 달리 지향은 그 행위를 그리스도적인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구별하는 기준이 된다. 똑같은 봉사를 하고 똑같은 결과가 온다고 할지라도 그 봉사의 지향이 다르면 그 의미 또한 다르다. 나보다 더 가난한 이를 돕는 일을 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한 지향을 가지고 있는지 아니면 그렇지 않은지 – 예를 들어 다른 사람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라거나 다른 이들이 하니까 따라서 하는 것이라든지 – 에 따라 그 의미는 엄청나게 달라지는 것이다. 그리스도교적인 행위와 그리스도교적인 결과에 앞서 행위의 지향은 모든 평신도들의 행에 앞서는 중요한 생활윤리이 된다.


  두 번째로 언급될 것은 意志이다. 아무리 옳은 지향을 가졌다고 해도 항구한 의지가 없으면 평신도로서의 사명을 다할 수 없다. 세속 안에서 살아가고 행동해야 하는 평신도들에게는 많은 어려움과 반대가 따르기 마련이다. 세상에 평화를 주러 오신 것이 아니라 불을 주러 오셨다는 말씀처럼 쉽고 편안한 지름길이 없이 다른 많은 사람의 반대를 무릅쓰고 살 수 있는 의지가 필요한 것이다. 가정에서도 직장에서도 교회 안에서도 그리스도의 삶을 뒤따르는 일이 쉬운 것이 아니다. 옳은 지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끝까지 지켜 내지 못하는 평신도들을 우리는 주위에서 쉽게 볼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의지를 가지는 것은 평신도의 생활에서 중요한 생활윤리라 할 수 있다.


  手段도 빠질 수 없는 중요한 생활윤리이다. 아무리 좋은 지향과 의지를 가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수단이 옳지 않으면 그 의미가 사라져 버린다. 낙태에 대한 문제를 예로 들 수 있다. 낙태는 여러 가지 이유에서 행해지지만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저항해야 할 문제이다. 생활의 풍요로움을 위해서 낙태를 하는 것은 물론 논외의 대상이고 예를 들어 어머니의 자궁암을 고친다는 지향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태아의 죽음이 그 수단으로 사용되어서는 안된다. 이 문제는 너무나 민감한 문제이지만, 이 외의 많은 경우에서도 평신도로서 옳은 양심에 따르는 수단을 강구해야 할 것이다. 사형제도에 대한 것도 이것과 맥을 같이 한다. 죄를 저지른 사람을 다른 사람들에게 경각심을 주고 그 죄를 처벌하기 위해 목숨을 빼앗는 것은 옳은 것이 아니다.


  마지막으로 언급하고픈 것은 協力이다. 인간은 본성적으로 사회적이기 때문에 세속 안에 살아가는 평신도들을 끊임없이 협력해야 한다. 물론 평신도로서 옳은 지향과 항구한 의지 그리고 정당한 수단을 가지는 일에서이다. 평신도 사도직은 언제나 협력을 필요로 한다. 협력이란 외적인 도움뿐만이 아니라 내적인 동의가 있어야 하고 다른 사람의 행위를 직접적으로 지향하고 있어야 한다. 우리는 쉽게 대중심리에 동요되고 만다. 자신의 의향과는 관계없이 어떤 일에 끌려 다니는 일이 많은 것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협력이야말로 결단과 투신을 요구하는 또 하나의 생활윤리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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