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 나라 메시지의 구원론적 – 교회론적 특성

하느님 나라의 메시지의 핵심, 특히 예수의 위격안에서 드러나는 아버지의 모습은 자비로운 사랑의 아버지이시다. 이러한 면은 당시의 하느님께 대한 선포와 기다림의 형태와 대조되고 있다. 세례자 요한이나 후기 유다이즘, 참회운동, 쿰란 공동체, 등등 죄에 대한 첫점과 양심성찰 죄인들에 대한 위협들과 아울러 회개를 외쳤다. 마태 3장 7절에 의하면 세례자 요한의 설교도 심판을 중심으로 하고 있으며 회개하는 자에게 메시아적 심판에 대한 구원을 선포했지, 실현을 이야기하지 못하고 있다. 구원이 약속된 것에 불과한 것이다. 참회의 세례를 통해 미래의 분노에서 피할 수 있다고만 말할 뿐이다. 이렇게 보면 구약에서 보이는 모습과 요한의 모습은 완전히 구별되는 것도 있으나 그렇지 않은 면도 있다 하겠다.
랍비 신학은 구원을 하느님 나라와 동일시하지 않고 있다. 구원은 바로 마지막 시기에 천당에 참여하게 되는 것으로 , 구원은 하느님 나라 자체가 아니라 그 결과로서 강조하고 있다. 예수의 메시지는 이와 달리 심판에 대한 위협이 아니라 복음이었다. 여기에서 세례자 요한과 예수의 차이를 단순히 종말적 차원에서 위협적인 것에 의해서만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유대아 방식과의 대조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는 특히 스켈레벡스에 의해서 강조되고 있다. 그에 의하면 예수의 설교와 업적은 어떤 부정적인 목적을 갖고 있지 않는다. 본질적으로 긍정적인 특성을 갖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긍정적인 방향 안에서도 구원의 메시지에 일치하지 못하는 모든 것에 대항하는 부정적인 면이 내포되어는 있으나 근본적으로 긍정적인 것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여기에서부터 당시의 환경과 출동은 불가피하다 하겠다. 테이프 끝났음
예수의 이런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특히 죄인들과 버림받은 이들에게 구원의 메시지를 선포한다. 하느님의 나라는 인간을 분리시키는 어떤 경향과도 조화를 이룰 수 없다. 예수로부터 선포된 하느님 나라는 억압하는 자가 지배하는 나라가 아니다. 모든이가 모든 이를 위해 서로 봉사하는 그러한 나라이다. 여기에서 주시할 것은 예수가 인간의 죄많은 과거에 관심을 두고 있지 않은 점이다. 간음한 여인, 죄인의 지은 경우에도 관심의 대상은 다만 현재의 회개이다. 이 회개 안에서 실현되고 자리잡게 되는 ‘하느님 나라의 도래, 인간의 미래이다’라고 볼 수 있다. 이렇게 예수의 선포가 모든 이를 받아들였다 할 때 이는 사제직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가문에 의한 사제직이 아니고 가문이나 인종을 초월하여 누구나 다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은 그리스도의 제자가 될 수 있는 보편적 사제직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사제직에 있어서의 과거와 지속성, 단절성이 여기에서 보이고 있다.
예수로부터 선포된 하느님 나라는 당시 사람들에게 놀라운, 두려움마저 안겨주는 고유한 새로움, 특성을 나타내고 있으며 저주에 대한 강조가 전혀 나타나지 않음이다. 하느님 나라는 무엇보다도 구원적 사랑의 개념 안에 드러나고 있다. 이 사랑이 바로 종말적 나라의 핵심내용이었다라고 볼 수 있다. 특히 하느님의 거룩하심과 선하심, 사랑이 그 첫번째 내용인 것이다. 하느님 나라에 대한 예수의 메시지는 그 자체로 해방의 선포, 은총 사건의 선포였다. 예수는 루가 4장 18절에서 주님의 은총의 해를 선포하고 있다. 예수는 이사야를 인용하면서 61장 2절, 하느님의 복수에 대한 인용은 생략하고 있다. 바로 이러한 은총의 해가 오늘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고향 사람들에게는 스캔들이었고 동시에 경탄이었다. 보잘것없는 나자렛의 예수, 계가 이렇게 우리의 생각과는 전혀 다른 하느님의 사랑과 메시지를 선포하는데 이것이 현세에서 실제로 이루어질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하느님 나라의 현재 시간은 바로 은총의 시간이고 구원의 시간과 일치하고 있다. 바로 이러한 사랑이 인간을 변화시키고, 용서하고, 죽음에서부터 사람을 살리기까지 하는, 그러한 사랑의 힘이 계시되고 있다. 바로 사랑의 힘에 의해서 인간과 나라가 변화되고 하느님 나라의 초월적 모습이 이 세상에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카스퍼참고,)
하느님 나라는 결코 우리의 노력에 대한 결과로서 얻어질 수 있는 것이다. 하느님의 initiative없이 성취될 수 있는 것은 아닌 것이다. 사랑의 선물로서 드러나는 하느님 나라는 성서에서 보면 죄의 용서, 영원한 삶 등으로 표현되고 있다. 특히 예수님과 연관하여 보면 예수의 비유 안에서 살펴보아야 한다. 이는 특히 진복팔단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것인데 이런 것들은 오랜 해석의 과정을 통해 전달되었다. 그러나 역사적 예수의 모습으로 우리를 인도해 줄 가능성도 또한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스킬레벡스는 예수 자신도 비유라고 말한다. 이 비유 안에는 일종의 파라독스가 숨어 있다. 늦게 온 종이 같은 보수를 받는 것이다.
이러한 비유는 우리 자신을 숙고하게 해 준다. 우리의 일상생활 안에서, 바로 나의 삶 안에서 우리 자신을 숙고하게 해 주는 것이다. 비유들은 우리를 다른 세상으로 인도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 안에로 우리를 인도하고 있다.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는 것과는 전혀 다른 방법으로 우리 삶과 세상을 바라볼 가능성을 제공하는 것이다. 따라서 비유들은 우리에게 선택을 강요한다고 볼 수 있다. 비유가 우리게 제시하는 그 삶으로 들어가고자 한다면 우리가 어떤 삶을 수행해야 하는지를 제시하여 주는 것이다. 이러한 삶을 발견하는 것은 한편으로 삶이 드러나는 과정이다. 마태 10장 26절에서와 같이, “그러므로 여러분은 그들을 두려워하지 마시오 가려진 것 치고 벗겨지지 않을 것이 없고 숨겨진 것 치고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참된 현실이 숨겨져 있는 내면현실에 내가 긍정적인 대답을 하여야 하는 것이다. 바로 나의 솔직한 마음을 바라보고 삶을 근본적으로 변형시키라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비유들은 각 인간의 삶의 숨겨진 현실에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 삶을 재발견하라는 것이다.
하느님이 불필요한 것으로 여겨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 나라에 관계된 이러한 비유는 각자의 독특한 상황 안에서, 그 삶 안에 어떤 독특한 삶, 그리스로부터 제시된 독특한 삶, 하느님 나라라는 독특한 삶이 있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공해 주는 것이다 따라서 이 비유는 인간의 고통, 행복, 절망, 죽음, 당혹스러움 등의 모든 상황에 모두 파고든다고 하겠다. 예수 자신이 바로 이러한 삶을 살으셨고 이런 삶 자체라는 것이다. 죄인들, 가난한 사람들, 소경들, 천시받고 무시된 사람들, 이들 안에 희망의 가능성을 제공해 주는 것이다. 이 부분은 예수의 공적인 설교의 부분으로 여겨지지 않지만, 특정 소수의 사람들, 예수께 관심을 갖고 있지만 마음의 움직임을 전혀 갖고 있지 않은 사람들, 투신하지 않는 사람들, 이런 이들을 향하고 있는 것이다. 어떤 윤리적 강연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숙고하게 한다. 윤리적 신뢰가 아니라 삶에서부터 취한 이야기이다. 따라서 이 이야기에서 청취자들은 자신의 고유한 상황으로 들어간다. 비유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이러한 비유 안에서 우리는 깨어 있음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 즉 하느님의 나라는 예수 안에 다가오고 있다. 하느님 나라는 “이미 그분 안에 작용하고 있다”(마르1,15). “이미 그분 안에 작용하고 있다”(루가 11장 20절)고 말해지며 경우에 따라서는 “미래에 도래할 것”,(11장 2절) 혹은 “그 나라에 대해서 아무도 모른다”(루까 17장 20절) 고 말하고 있다.
이 하느님 나라의 도래는 자기 자신이 스스로 하느님 앞에서 부당하다고 느끼는 사람들을 위하여 있다. 때문에 자신이 구원받았다고 여기는 자에 대한 심판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하느님 나라와 실천 사이의 관계가 여기에서 드러나고 있다. 예를 들면 돈관리에 대한 비유(루까 19장 11절 -27절)를 보면 탈렌트(하느님 나라의 순수한 은총)과 동시에 회개와 삶의 실천이 요구되고 있다. 여기에서 마지막 종은 하느님의 선물에 대한 무관심 때문에 책망을 받았다. 루가 17장 7절을 보면 종의 처지에 대한 비유가 있다. “이처럼 여러분도 지시받은 일을 모두 하고 나서도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저희는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습니다”라고 말하라 한다. 댓가를 기대하지 말라는 것이다. 즉 율법의 준수에 대한 댓가는 크리스챤의 영성에 반대되는 것임을 예수는 밝히고 있는 것이다. 모든 계산을 배제하고 댓가를 생각하지 않는 하느님과 인간의 인격적인 사랑의 관계를 강조하고 있다. 인간이 무엇을 했기 때문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먼저 하느님과 우리의 인격적인 관계가 우선하고 있는 것이다.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에서 공로를 쌓는데만 집중하는 것은 잘못이라 하겠다. 내가 무엇을 했기 때문에 하느님께 더 많은 상급을 주장할 수 없음이다.
자비없는 종의 비유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마태 18장 33절에서 보면 “내가 너를 불쌍히 여긴 것처럼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겨야 할 줄을 몰랐더냐”라고 말하고 있다.
하느님 나라의 실천은 자비에 의한 것이다. 여기서 제일 먼저 나타나는 것은 조의 용서이다. 율법과 복음 사이의 변증법적 관계를 잘 나타내고 있다. 복음에 의하면 탕감받은 그 종은 자신도 그러한 용서를 주어야 했으며 율법의 정의를 그대로 자신의 동료에게 적용시키고 있다. 이와같이 율법의 정의와 하느님 나라의 실천 사이에는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약혼식에 초대받은 손님들의 비유(루가14장 16절 이하)에서는 하느님 나라를 거절하는 순간을 나타내고 있다. 하느님 나라는 잔치와도 같다. 여기에서 결국에 초대받은 이들은 길위에 있는 사람들이었다. 이를 통하여 여기에서는 다음의 사항을 말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먼저 볼 것은 근본적인 회개가 요구되고 있음이다. 하느님 나라에 있어서는 핑계가 용납되지 않는다. 두번째로 특권을 누리는 자들이 오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단순한 사람들, 그들이 하느님의 나라를 차지하게 됨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러한 비유 이야기들의 역사적 구체적 상황은 많은 편집과정 때문에 제대로 알기가 어렵다. 예수의 가르침과의 가르침과의 연결 하에서 역사적 예수의 모습을 우리에게 드러내 보여주고 있다, 비유들은 예수님에 대하여 이야기 할 때, 비유를 들은 사람들이 이 사람이 대체 누구인가하는 질문을 제기하게 한다. 함축적 잠재적 그리스도론을 내포한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예수의 메시지 안에서 고찰해야 할 것은 행복선언(루가 6장, 20절 이하)에서 보이는, 가난한 사람들 굶주린 사람들, 우는 사람들(이를 특히 마태오는 영성적인 면에서 해석하고 있다)에 대한 것이다. 현재와 미래 사이의 특정직인 긴장이 그것이다. 이 행복선언은 무엇을 의미하는 가 ?
가난한 이들에 대한 개념은 구약에서도 이미 있었다. 사실 약속된 땅으로 들어가기 전에는 가난한 사람들이 없었다. 똑같이 가난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약속된 땅을 소유한 시기부터 특권층이 생겨나게 되었고 소유자와 가난한 백성들 사이에 구별이 생겨나게 되었다. 이에 이전 시기의 정신으로 되돌아야 가야 한다는 예언적 비판이 있게 되는 것이다. 특히 야훼사상에서 그러한 것이 발전하게 된다. 강한 자의 권리와 야훼께 대한 사상과 서로 양립될 수 없다는 것이다. 특히 여기에서 강조되는 것은 권리의 남용이다.
이어서 구약은 야훼의 가난한 사람들이라는 개념이 태어나게 되고 그러한 개념 하에서 가난한 사람들의 영성이 발전하게 된다. 그리고 이렇게 하느님으로부터 모든 것을 기다리고, 모든 것을 맡기는, 신심이 두터운 사람(가난한 이들)이라는 맥락 안에서 행복선언이 삽입되어 있는 것이다.
하느님 외에는 아무것도 기대할 수 없다는 것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 예수 안에 하느님의 나라가 도래한다는, 기다리던 하느님의 나라가 도래한다는, 기쁜 소식이 선포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에블링은 지금과 미래 사이의 대조를 받아들이고 있다. ‘지금 가난하지만 후에 풍요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 두가지를 가급적이면 일치하여 이해하고자 한다. 지금 부자가 아닌 그들이 이미 복된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여기에서는 현세적 상태의 변화가 강조되지 않고 그 사람의 정체성이 강조되고 있는 것이다. 마음으로 가난한 이들, 순박한 이들, 자비로운 이들, 이들이 어떤 보상에 의해 가난한 사람들이 갑자기 부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가난한 사람들로 받아들여지는 그 순간에 이미 행복한 사람으로서의 정체성의 변화를 갖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행복선언들은, 인간적으로 어떤 도움을 받을 수 없고, 멸시받고, 누구에게도 도움받지 못하는 이들에게도 행복선언은 적용된다. 그러나 종교적 색채 속에서, 불의 속에서 자신을 숨기는 것에로 빠지는 것은 피해야 한다고 말한다. 스킬레벡스는 하느님이 가난, 기아, 인간의 눈물을 야기시키는 모든 형태의 악을 근본적으로 원하지 낳는다고 말한다. 영신적 과정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나 현실적 변화도 받아들여져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여기에 해방실천이라는 과제가 있어야 한다고 그는 말하고 있다.
그러나 그 변화에 있어서 보다 근본적인 변화는 하느님으로부터 이루어지는 것이고 이러한 표지가 여러 기적들 안에서 하느님 나라의 도래로서 이루어지는 현실 안에서 증거되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 문제되는 것은 우리가 앞으로 현세 안에서 변화될 상황은 바로 끊임없이 연구되고 발전되어야 할 것이라 하겠다. 왜냐하면 아무리 변해도 이 세상에는 고통과 눈물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의 전체 삶 그분의 운명을 함께 고려해야 한다고 말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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