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양으로서의 부활 -부활과 승천

먼저 1고린 15,3-5 “나도 전해 받았고 또 여러분에게 제일 먼저 전해 준 것은 이것입니다. 곧, 그리스도께서는 성경 말씀대로 우리 죄를 위해서 죽으시고 묻히셨으며, 또 성경 말씀대로 사흘만에 일으켜지시고, 게파에게, 다음에는 열두 제자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첫구절 안에서 그리스도가 죽었다는 사실을 이야기한다. 그 다음에 구원론적 의미가 표현되어 있다. 우리죄 때문에 죽으셨다는 것이다. 우리죄 때문에 죽으신 것은 성서의 약속을 성취하는 것으로 제시되고 있다. 무덤에의 안치, ‘묻히셨으며’는 인간 편에서 죽었다는 것에 대한 유대아 방식에 의한 구체적 확인을 나타내고 있다. 그 다음(4절)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부활의 역사적 사실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고 구원론적 해석을 제시하고 있다. 그 다음에 성서에 따른 성취, 그 다음에 발현을 통해서 이 사건을 확인해 주고 있다. 중심적 자료는 죽음과 부활이다. 무덤에 묻히심은 십자가 사건과 연결되고 십자가 사건을 확인해 주며 발현은 부활 사건과 연관되고 부활 사건을 구체적으로 확인하고 있다.
세째날, 일반적으로 Lehmann의 경우 빈무덤의 발견, 첫번째 혹은 두번째의 발현, 이러한 연대기적 순서를 완전히 무시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이런 것이 중요한 것은 유대아 신앙을 나타내고 있기 때문이다. 유대아 사고방식에 의하면 야훼께서는 항상 세째날에 구원하시는 것으로 제시되고 있다. 예를 들면 호세 6,20. 이런 의미에서 셋째 날이라는 것은 사건을 확인해 주고 있다. 하느님은 올바른 사람이 죽은 다음 그를 그대로 버려두지 않고 구원하셨다 라는 것이다. 구원론적 의미가 신학적으로 표현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고 순수한 의미에서 사건으로서의 부활이 사라지거나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여기에서 확인하고 있는 것은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 안에서 역사적 새로운 출발점을 갖고 있는 사건,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현실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 자체로 역사적 자료가 아니라 새로운 현실에 속하는, 새로운 출발점을 나타내는 새로운 시대의 현실을 확인해 주고 있다. 바로 이런 맥락 안에서 현양이란 개념이 성서 안에 삽입될 수 있다.
스킬레벡스의 경우에 전승의 다양한 형태를 제시해 주고 있다. 신약 Text는 다양한 모델의 흔적을 보여 주고 있다. 즉 부활 대신 현양을 쓰고 있다. 죽은 부활의 즉각적인 결과로서의 현양, 그리고 hypsoo(들어올리다, 높이다)라는 두가지 의미(십자가와 부활)를 갖고 있는 개념. 어떻든 간에 신약성서 마지막 편집 안에서의 현양은 부활과 긴밀한 관계를 갖고 있다. 그리고 죽음의 상태와 대조를 이루고 있다. 여기서 우리가 알아두어야 할 것은 현양이라는 개념이 후기 유다이즘에 이미 잘 알려져 있는 개념이란 것이다. 후기 유다이즘에서 이미 고통받는 의인과 거양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따라서 이런 범주 안에서 우리 가운데 살았던 한 사람의 종말적 의미를 표현할 수 있다. 이런 범주를 부활하신 그리스도에게 적용시키면서 변형해서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예수의 현양에 대해서 이야기하면서 종말론적인 맥락이 남아 있었고 따라서 예수부활 사건의 의미가 그대로 살아남아 있게 되었다. 신경에서 ‘성부 우편에 좌정하시고’ 여기에서부터 ‘심판하러 다시 오실 것이다’라는 것을 연결시켜 주는 맥락을 볼 수 있다. 즉 현양된 그리스도는 종말적 메시아로서 다시 오실 것임이 강조되고 있다.
여기에 연결되고 있는 개념이 maranatha이다(고린 16,22; 묵시 22,20). 특히 Kyrios 칭호의 기원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할 때 maranatha에 대한 것을 살펴볼 수 있다. maranatha는 ‘주님이 오셨다’라는 것을 의미할 수 있고 혹은 ‘주님이 가까운 장래에 오실 것이다’라는 뜻이다. ‘주님이 오셨다’ 라는 것은 첫번째 경우 고백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고 두번째 경우는 성체 성사 거행과 연결된 기도에 기원을 갖고 있다고 일반적으로 이야기한다. maranatha안에 삽입된 해석에 대해서 Schnackenburg가 Mysterium Salutis에서 얘기하고 있는 것은 원래 마라나타에 대한 해석은 두가지로 나눌 수 있다는 것이다. 첫번째 모델은 예수는 십자가에서 죽은 후 현양되었다는 것으로 지금 하느님 곁에 계시다는 것이다. 그분의 재림을 기다리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종말적 시간이 이미 현존하여 있고 공동체는 성령이 내림에 의해서 종말적 시간이 다가왔다는 것을 확인하고 있다. 즉 재림 없는 현양(거양)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특히 영국 계통의 학자들, 로빈슨 같은 사람이 주장하였다. 다른 한가지 해석은 공동체는 그리스도의 재림을 아주 열렬히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현양이 필요없다. 죽음과 재림 사이의 이 짧은 기간에 당신의 왕직이 수행되고 확인될 필요가 있겠는가 하는 것이다. 그분이 재림 때에 메시아로서 구체적으로 드러나고 왕직의 기능을 수행하실 것이다. 이것은 거양(현양)없는 재림에 대한 이론이다. Schnackenburg에 의하면 이 두가지는 모두 잘못되었다. 공동체는 처음에 재림 때까지 예수가 인간과 아무런 관계없이 존재했다고 믿었다는 것은 신빙성이 없다는 것이다. 즉 발현, 부활이 초기 공동체 신앙의 출발점이라면 거기에는 예수의 현양도 이미 암시되어 있다.
발현은 하느님으로부터 예수께 주어진 당신의 품위, 혹은 당신의 새로운 상태를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성체성사 거행 안에서도 바로 거기에 처음부터 주님의 형언할 수 없는 현존을 확신했고 아무런 異論없이 그대로 그리스도께서 실천하시는 대로 그 말씀에 따라서 실행했고, 생할함으로써 그리스도의 현존을 확신하면서 이런 식으로 전해 주었다. 우리가 신앙에 대해서 얘기할 때 사도 시대를 되돌아보아야 한다 라는 것, 교회를 구성하는 본질적인 사도 시대와 우리가 살고 있는 교회의 시기와는 본질적 차이가 있다. 이때는 교회가 본질적인 모든 것이 구성되는 시기이다. 이때는 어떤 새로운 것을 구성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 다만 이때에 구성된 모든 것을 주님의 현존 안에서 실천하고 깨달은 교회의 본질을 더욱 발전시키고 더 올바로 이해하는 것뿐이다. 여기에서 교회가 새로운 것을 첨부해 내는 것이 아니다. 이미 교회는 이때에 구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거기에서 우리가 믿고 있는 모든 것은 다 마찬가지이다.
사도 시대에는 Dogma가 없었고 있을 필요도 없었다. 예수가 가르쳐 준 그대로 믿고 따르고 실천했을 뿐이다. 그것이 전부이다. 그러나 이렇게 전해져 내려오면서 여기에 희랍사상 등이 전파되면서 여러 가지 의구심이 생기고, 다른 철학적 개념이 들어오고, 따라서 인간의 언어로 표현하다보니 언어적 모순, 시대 환경의 변화 등을 통해서 이단이 생긴다든지 혹은 잘못 이해될 염려가 있을 때 사도 시대로부터 이어오는 삶, 혹은 예수가 가르쳐 준 사도들이 이해한 의미는 이런 것이다. 이를 이렇게 발전시켜야 한다는 것이지, 새로운 것을 이야기하거나 발전시킬 수 없다. 때문이 순수한 교회 삶을 생활하지 않고, 사도 시대에 살았던 것을 어떻게 표현할 수가 있느냐 하는 것이지 이론적으로 따지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되면 교회의 가르침을 단순히 이론적인 논쟁을 위한 것으로 받아들일 때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삶이 없이는 절대로 이해할 수가 없다. 더구나 그것이 세상의 철학적 문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신비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두가지 서로 상반되는 모델에 대해서 Schnackenburg는 둘 다 받아들여질 수 없다는 입장을 취한다. 그는 발현과 함께 부활 사건이 초기 공동체 신앙의 출발점이라고 볼 때 거기에는 이미 예수의 현양도 암시되고 있는 것이라고 보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발현들은 하느님으로부터 예수에게 주어진 존재의 상태, 어떠한 품위를 나타내는 표현이라고 본다. 뿐만 아니라 성체 성사 거행은 처음부터 현양되신 주님의 현존을 나타내고 있었다. 따라서 이런 maranatha의 외침 안에서도 이미 현존하는 주님을 생각하고 있는 것이라고 본다. 따라서 거양 없는 재림, 또는 재림 없는 거양 모두 받아들여질 수 없다. 실제로 현양에 대해서 말할 때 신약성서의 자료는 현양과 부활과의 관계, 현양의 종말적 의미를 강조해야 된다.
현양으로서의 부활에 대한 것은 우리가 흔히 이야기하는 그리스도의 승천에 대해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러한 승천, 현양은 첫째 비가시적이지만 현실적인 현양을 나타낸다. 즉 여기에서부터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아버지에게 넘어간다는 것을 나타낸다. 그 다음에 승천과 관계되는 것은 둘째로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지상에서의 마지막 발현이다. 바로 이러한 두가지 사실에 의해서 승천이라는 개념이 의미하는 바가 나타난다. Act 1,3에 보면 성령의 내림을 위해서 사십일간의 간격을 제시한다. Jn 20,22에는 성령의 내림이 빠스카날, 예수의 부활 즉시 성령이 내린 것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이렇게 볼 때 이러한 승천이라는 사실이 순수한 역사적 연대기적인 언급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성서적 이야기, 신경들에서, 전례 주년 안에서 의미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신비를 나타내는 것이고 그것을 여러가지 색채의 프리즘처럼 핵심적인 유일한 근본적인 광채에 의해서 여러가지 색채로 드러나고 있다. 그러한 유일한 신비를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역사적으로 볼 때 사실의 연대기적인 순서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Luke 안에서 제시하고 있는 이러한 사십일은 예수의 시기와 교회의 시기 사이의 관계를 제시하고자 하는 신학적 의도를 갖는다. 사도 시대의 교회와 사도 이후 시대의 교회의 간격을 나타낸다. 중요한 것은 승천이라는 의미가 사도적 시기와 사도적 증거자들 위에 기초하고 있는 교회 사이의 간격을 나타내고 있다. 따라서 승천에 대해서 생각할 때 – Kasper가 말하는 대로 p.270 – 하늘은 어떤 장소를 나타내는 것보다도 예수가 도달하게 되는 종착역이 아니다. 그분이 계시는 곳이 바로 하늘이다. 구원된 모든 인류와 함께 그분이 계시는 곳. 따라서 예수가 하늘에 오르셨다고 말하기보다는 예수가 하느님 아버지로부터 취하여진 바로 그것이 하늘이 되었다 라고 말할 수 있다.

이 글은 카테고리: theology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고유주소를 북마크하세요.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