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의 교회상
1. 구약의 하느님 나라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교회를 ‘지상의 하느님 나라’로 규정하였다. 교회는 그리스도와 하느님 나라를 전하여 모든 민족들 가운데 건설할 사명을 받음으로써 지상에 있어서 천국의 시작과 싹이 된 것이다(교회헌장 5항). 따라서 교회는 예수가 선포한 하느님 나라와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음이 명백히 드러났다. 사실 복음에서 ‘교회’라는 단어는 마태오 복음의 두 구절(16, 18: 18, 17)에서만 등장하는데 비해 ‘하느님 나라’는 공관복음에서 극히 대조적으로 1백여 회나 나타나고 있다. 이 사실은 교회를 이해하는 데에 결정적 중요성을 지닌다. 예수는 공생활 시초에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 왔다. 회개하고 이 복음을 믿어라”(마르 1, 15)는 말씀으로 당신의 사도직을 시작하였으며, “모든 도시와 마을을 두루 다니시며 가시는 곳마다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하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셨다”(마태 9, 35). 또한 예수 자신도 하느님 나라가 세상에 왔다는 복된 소식을 선포하는 것이 당신의 사명이라고 주장하셨다(마르 1, 38: 루가 4, 43).
이처럼 ‘하느님 나라’는 예수의 공생활과 그의 메시지의 중심이었다. 그러므로 교회 이해에 결정적 중요성을 지니는 예수에 의해 선포된 하느님 나라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복음서를 중심으로 살펴보기로 한다.
우리가 하느님 나라를 다루는 예수의 말씀들을 이해하려면, 그 당시 사람들이 ‘하느님 나라’라는 표현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였는지 알아야 한다. 구약에서 ‘왕국’이라는 단어가 공간적인 의미의 영역, 즉 영토를 의미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이 말은 거의 언제나 통치, 주권, 지배, 권세를 나타낸다. 예를 들어 시편 145편 13절을 보자. “당신의 나라는 영원한 나라, 당신만이 만세에 왕이십니다.” 여기서 언급하고 있는 ‘영원한 나라’란 영원한 하느님의 통치를 가리킨다.
그런데 이 하느님의 나라는 공간적이거나 정체적인 개념이 아니며 언제나 성취되어 가는 과정에 있는 동적인 개념이다. 이것은 활동 중인 하느님의 통치를 의미한다. 이 나라의 주된 특징은 하느님께서 의(義)의 왕이라는 이상을 실현해가고 계시며 끊임없이 갈구하시지만 지상에서는 결코 완성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태고적부터 왕의 정의에 관한 유다이즘의 개념은 – 실제로 예수 당시 이스라엘이 가졌던 개념 – 냉정한 판결이 아니었다. 그것은 왕이 의지할 데 없는 자들, 약하고 가난한 자들, 과부와 고아들에게 베푸는 보호의 개념이었다.
유다이즘에 있어서 하느님의 영원한 통치는 이스라엘에 대한 하느님의 주권이었다. 하느님은 이스라엘의 왕이셨으며 이 왕국은 왕의 의지를 율법 안에 공포하심으로 설립되었다. 그래서 하느님의 통치는 사람들이 의지의 결단을 통해서 자신을 굴복시켜 율법에 복종하는 곳이면 어디에서나 볼 수 있다. 공적인 기도에서 한 분 하느님께 대한 신앙 고백인 쉐마를 바치는 유대인은 이스라엘에 대한 하느님의 통치를 선포하는 것이다.
어느 경우이든 간에 유다이즘 전체에 걸쳐서 하느님 나라의 도래는 이스라엘은 한데 모아 약속된 땅에서 오직 하느님의 통치만을 받게 할 그의 행위로 기대되었다.
2. 예수가 선포한 하느님 나라
예수의 출현으로 “세세로부터 성서에 약속된 하느님 나라”는 이제 약속이나 기대가 아니라 현실로서 나타났다. “때가 다 되어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 왔다”(마르 1, 15).
하느님 나라의 본질을 규정하는 것은 하느님의 속성에서 비롯된다. 하느님의 거룩하심, 의로움 그리고 아버지로서의 사랑이 그 본질이다. 그 나라는 인류에 관계하는 면에서 기본적으로 구원론적 개념이다. 따라서 구원하는 능력의 나라이며 동시에 생명으로 표현되는 축복의 나라이다.
하느님 나라는 그리스도의 말씀과 업적과 현존으로써 사람들에게 밝히 드러난다. 예수를 둘러싸고 인간은 구원과 해방을 체험한다.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과 억눌리고 병든 자들이 예수로부터 자신들이 수락됨을 체험하며, 율법의 단죄와 노예의 사슬에서 벗어난 행방을 체험한다. 인간들 사이에서 하느님의 영역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홀연히 나타난다. 소외된 처지에 놓여있는 인간에게 가까이 다가와서 인간이 가까움을 느끼며 살게 되는 그것은 하느님의 것이며 하느님에 의해 발생한다는 성격을 지닌다.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다가와 인간이 하느님 가까이에서 생활하게 되는 것, 인간이 예수에게서 하느님을 체험하는 것이 하느님 나라로 해석된다. 즉 하느님 나라는 예수에게서 발해지는 하느님의 사랑의 통치로 이해된다.
하느님 나라의 근본적인 역설은 이것이다. 즉 하느님 나라는 하나의 인격이며, 그 인격체를 중심으로 해서 건설된다는 것이다. 예수 안에 하느님의 충만함이 머물러 있고 하느님 나라의 기원이 들어 있기 때문에 예수는 곧 하느님 나라이다. 예수가, 하느님 나라는 이미 사람들 가운데에 와 있다고 선포한 것은 자신이 이미 그들 가운데에 있었기 때문이다.
예수는 그 당시 다양했던 하느님 나라의 표상을 거슬러 당신과 함께 도래한 하느님 나라를 사랑과 구원의 나라로 해석하였다. 즉 바리사이파인들처럼 인간이 이룩해야 하는 완전한 율법준수로 이해하거나 열성당원들처럼 일종의 신정체제(神政體制)로 이해하지 않았으며, 또한 이 현세의 세상이 종결되고 새하늘 새땅이 도래하는 이차적 세계로서의 묵시문학적으로도 해석하지 않았다. 하느님 나라는 예수에게서 하느님 사랑의 통치(統治)로 이해된다. 하느님 나라가 인간들에게서 외부로부터 해방시키는 선물로서 다가온다고 일컬어진다는 한에서 이 해석은 정당한 것이다.
구약성서에서도 하느님 나라는 기쁜 소식, 죄의 용서, 평화, 하느님과의 친교의 회복, 하느님의 정의(구원)의 도래라고 말하고 있다. 구약의 예언자들은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는데 그쳤지만 예수는 하느님 나라를 선포했을 뿐만 아니라 기적을 행하여 그 말씀의 권위를 뒷받침하였다. 신약성서는 예수의 복음과 구세사적 기능이 예수의 인격 자체와 일치되고 있음을 증언한다. 예수는 자신의 생애가 전적으로 성부로부터 유래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으며 동시에 그분께 대한 전적인 순종과 인간을 위한 봉사로서 이해한다. 그는 온전히 이타적 존재이며 하느님 나라의 현존 그 자체인 것이다. “무엇보다도 먼저 하느님의 아들이시며 사람의 아들로 태어나신 그리스도, ‘사람들에게 봉사하시며 많은 사람의 구원을 위하여 당신 목숨을 바치러 오신’(마르 10, 45) 그리스도 자신 안에서 천국을 발견할 수 있다”(교회헌장 5항).
예수 안에서 하느님의 권세와 예수의 인격은 온전히 일치한다. 예수는 그냥 선포자가 아니라 하느님 권세의 실질적인 대리자인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의 인격을 수용하거나 받아들이는 것은 하느님의 종말론적 심판에 결정적인 중요성을 지닌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를 받아들이면 하느님 나라를 받아들이는 것이고 예수를 거부하면 하느님 나라를 거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느님 나라의 도래에 직면해서 인간에게 요청되는 것은 새로운 생활자세, 곧 ‘회개’이다. 하느님 나라는 ‘회개하라’는 외침과 결합되어 있다. “회개하라. 하늘나라가 다가왔다”(마태 4, 17). 회개란 인간이 자신의 지배욕과 소유욕을 포기하고 하느님만을 오직 하나의 확실한 의지로 맞아들이는 것이다. 인간이 하느님의 주권 속에 들어가는 것, 하느님의 소유가 되어 사는 것이 바로 천국의 시작이다. 그러므로 예수를 따른다 함은 예수께서 선언한 결정적인 하느님 나라 이외에는 어떤 지배에도 자기의 삶을 내맡기지 않음을 뜻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