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의 이해지평 안에서의 은총과 자유-하느님의 사랑

 

4.3  하느님의 사랑


이상과 같은 은총의 본질을 규정하고 그 내용을 이해하려는 조직신학적 과제가 이상의 서술로 종결된 것은 아니다. 그 이유는 아래의 두가지, 내용적이고 역사적인 이유에서이다. 우선 내용적인 이유는 오늘날 이해지평과 관련된 은총개념의 모든 개별적 요소들(하느님과의 관계, 구원, 선물, 필수불가결적, 믿음, 쇄신하는 작용)을 통한 설명에도 불구하고, 이런 설명들은 아직도 형식적이요 조금은 아니 많은 부분에서 추상적이다. 도대체 하느님과의 관계이며, 구원의 필수불가결성, 그리고 쇄신하는 작용들이 무엇이냐는 그런 내용에 관한 질문이다.


현대인의 이해 지평의 전제 아래에서 꼭 맞아떨어지는 해석 언사를 찾는다는 것이 쉽지 않지만, 바로 그것을 성공적으로 찾을 수 있을 때 비로소 은총이 담고 있는 내용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그렇게 해서 찾아진 은총의 형상적 해석언사들은 오늘날의 이해구조(칸트의 경우 ‘범주’)만을 의미하기보다는 오히려 특별히 그보다 우선하는 것은 먼저 하느님의 은총에 대한 성서적 선포의 핵심적 내용에 귀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그리고 나서 오늘날 이해 전제를 참작해서 그러한 성서의 선포 내용을 새로운 형상의 개념 안에(즉, 오늘날 이해 지평의 형식 안에서 잘 이해할 수 있는 언어 안에) 표현할 수 있는지를 우리는 숙고해야 한다. 이제 이런 숙고는 자동적으로 역사적 이해에 대한 성찰과 맞물리게 된다.


은총이 성서 안에 나타난 바와 같이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구원행위 전체를 총체적으로 포괄하는 상위개념이란 것이 역사변천 과정을 겪으면서 늘 그대로 유지되는 것만은 아니다. 시대에 따라 각기 특징적 강조점을 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렇다면 궁극적으로 성서적 증언에 따른 하느님의 은총은 무엇일까?  도대체 은총의 개념을 하느님의 구원행위의 총체적 개념으로 만드는 포괄적 실재는 무엇일까?


원천의 말씀을 그대로 표현하면 한마디로 “하느님은 사랑이시다”(요한 1서)라고 할 수 있다.   인간 즉 신앙인은 하느님의 은총을 체험하고 받아들이며, 또 소유한다(조심스러운 표현이다). 그는 하느님의 은총 안에서 살고 존립하며 행동한다. 이런 사실들은 결국 하느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표현 외에 다른 것일 수는 없다. 이것에서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생각들은 그렇다면 어떻게 하느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가를 설명하는 것이다. 그 이유는 하느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 바로 그것이 그의 은총인 까닭이기 때문이다.


이제 2고린13,13을 인용하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하느님의 사랑과 성령의 친교가 여러분 모두와 함께 하시기를” 이라고 하는 말은 사도 바오로가 하느님의 은총을 정의해주는 말이기도 하다.


Augustinus는 “하느님의 사랑은 죄인들 안에 있는 거역하려는 의지를 버리도록하고, 동시에 그 죄인 자신의 새로운 삶의 구심점이 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이는 자신의 체험에서 나온 말이다. Thomas Aquinas는 “하느님의 사랑은 본성상 창조적인 것이고 그래서 인간 편에서 어떤 조건이나 전제를 가질 필요도 없는 까닭에 또 은총은 인간 안에 가지고 있는 피조적 실재이기에 그 은총의 인간학적 영향이 질문되어질 수 있는 가능성을 마련해준다. 토마스가 은총이 인간 안에 있는 피조적 실재라고 보는 것, 즉 은총을 질, 상태로 말하는 것은 인간이 스스로 무엇인가 할 수 있다는 여지를 마련해준다. 그리고 후기 스콜라신학의 견해는 죄인들에게 아직 부수적으로 하느님께 대한 무한한 사랑의 행위를 할 수 있는 가능성이 남아 있는 것은 인간의 교만한 과대평가가 아니라,하느님이 인간을 자유 안에서 (하느님이 인간을 어떤 전제 없이 사랑 안에서)받아들였다는 확신을 표현하는 것이다.


루터는 하느님의 정의를 “하느님은 은총이요,사랑이다”라고 설명하였다. 트리덴트 공의회는 이런 것을 총체적으로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어 세상에 온 것은 죄인에 대한 영원한 하느님 사랑의 감춰진 계획’이라고 죄인의 의화에 대한 가르침에서 표현한다. 바오로에게서 시작하여 트리덴트 공의회 까지의 이러한 견해들은 전통적 견해에 다시 한번 귀를 기울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전통적 견해의 공통된 주장들은 우리가 이제 살펴볼, 즉 오늘의 이해지평에서 알아들을 수 있는 문장인 “하느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에 대한 예표들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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