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 하느님에 대한 언사(말씀)
5.1.1 사랑의 본질
“하느님은 사랑이시다”라는 이 말은 성서 말씀 (요한 1서 4,8)일 뿐 아니라, 오늘날 신학 안에서 하느님의 본질을 규정하는 조직신학적 신론이 사용하는 표제 말과도 같은 것이다. 신론에서 하느님을 이야기할 때, 이 문장은 성서적 증언에도 불구하고 그 뜻이 자명한 것은 아니다. 전통적 가톨릭 표현들에서, 토마스 아퀴나스는 ‘하느님은 있음 그 자체이시다’라고 하고, 이와 비슷하게 폴.틸리히(Paul.Tillich)는 하느님을 ‘존재의 힘’< Macht des Sein> 혹은 ‘존재자체’라는 형식으로서 하느님의 사랑을 정의한다. 역시 개신교 신학자 판넨베르그는 ‘모든 것을 규정하는 실재’로서 하느님의 본질을 규정한다.
이제 하느님의 본질에 관한 질문에서 성서적 형식의 회귀로의 정향은 1960년대 미국을 중심으로 해서 풍미했던 사신신학(死神神學,Gott-ist-tot-Theologie)과의 연관성 아래에서 찾을 수 있다. 사신신학에서는 ‘하느님은 절대적 인류애를 위한 암호이다’라고 주장한다. 바로 이런 주장을 위해서 성서문장의 도치가 이루어진다. 사신신학 안에서는 ‘하느님은 사랑이시다’라는 문장을 ‘사랑은 하느님이시다’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주장에 대해 이제 발터 카스퍼, 요셉 라찡거, 게하르트 에블링(Gerhard Eberling), 몰트만, 융엘(Eberhard Jungel)등은 사신신학의 주장에 대한 반응을 보이는데, 그들은 이런 성서말씀의 도치를 비판하기 위해 ‘하느님은 사랑이시다’라는 문장을 신학적 핵심의 주장으로 떠올린다.(사신신학의 대표자는 Paul van Buren 이나 Thomas Allizer 이고 하센휘틀은 “나를 사신신학의 유물이 아니라고 이해하기는 힘들다”라고 고백하면서, 자신도 사신신학의 영향을 입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하느님이 사랑이시다 라는 말이 신학적 중심적 테마로 떠올랐다면) ‘하느님은 사랑이시다’라는 말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이겠는가? 이러한 표현의 역설은 위에 거명된 신학자들 사이에서 강력하게 주장되고 묘사되었다. 특별히 그들이 십자가를 사랑이신 하느님의 계시로서 관찰하는 시각 안에 이 역설은 더 커다란 강도를 지니고 주장된다. 그러나 많은 경우 이러한 주장의 의미는 이미 많이 알려진 것으로서 그러한 사실이 묵시적으로 전제된다는 인상을 이 신학자들에게서 받게 된다.
그래서(이 문장의 의미를 명시적으로 규명하지 않기 때문에) 이 신학자들은 자신의 의도와 상관없이‘하느님은 사랑이시다’라는 문장이 일상성, 무미건조성의 혐의를 벗지 못하게 하는데 일익을 담당하는 셈이 되어버렸다. 우리는 이 문장이 아주 일상적이며 오해의 소지를 안고 있고 그래서 흥분하기도 분노하기도 한다.
우리가 사랑이라는 말을 언급할 때 우리는 우선 그리고 자연스럽게 우리가 잘 알고 있고 동경하기도 하는 남녀 사이의 어떤 일, 어떤 사건(무엇인가 현재 생동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일이라는 의미에서의 사건)을 생각하게 된다. 바로 이 사건에 대한 지식은 모든 시대와 모든 문화의 사랑들이 그렇게도 다양하고 낯설게 또 언제나 그 사랑에 대해 말하고 노래하기 즐겨하였다는 아주 초보적인 것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고 있다. 사랑은 고대 그리이스의 여류시인 Sappho가 노래한 것일 수도 있고 구약의 아가서에 나오는 사랑일 수도 있고, 고대 이집트의 사랑 노래, 중세의 궁정노래, 어느 민족에게서나 볼 수 있는 단순한 민속 노래나, 또는 오늘날 우리가 흔히 듣고 부르는 대중가요, 더 나아가 오늘날 선정적인 유행가 가락을 포함하는 모든 것일 수 있다.
우리는 이처럼 늘 사랑이 무엇을 말하는지 매우 노력을 들여 분석하고 그것을 재종합함으로써 명료함 분명함으로는 아니지만 자연스럽게 알아듣는다. 이 사랑의 사건은 마치 번개불처럼 갑작스럽게 사람을 사로잡기도 하고 혹은 처음에는 무엇이 일어나는지 알아채지 못했으나 시간이 지나가면서 그것이 천천히 무르익어 가기도 한다.이 사랑의 사건에 대해 여러 학문 분야에서 파악하고 진술하는 바처럼 우리는 그 사건을 하나의 신비라고 할 수 있다. 누구도 이 사랑의 사건을 생산해 내지는 못한다. 그밖에도 사랑의 체험이 실제로는 오로지 지나가는 정적인 느낌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사랑이라는 인상을 받도록 하는 것이라면 그 사랑의 체험은 당사자를 바보로 만든다. 어떤 경우에든 그러한 사랑의 사건은 우리를 지속적으로 변화시킨다. 그 사랑의 사건은 그 체험을 통해서 우리 자신을 새롭게 알아차리게 하고 또 자기 자신을 새롭게 선사받는 것으로 체험하게 한다. 그러나 이 사랑의 사건은 우리에게 늘 과제를 부여한다. 그것은 우리가 그 사랑의 체험을 보호하고 진전시켜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한 한에서 그 체험은 처음처럼 지속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랑의 사건은 또 구체적인 모양을 얻어야 한다. 즉 구체적인 행동으로 드러나야 한다. 그 대표적인 모양을 성서는 그것을 ‘남자는 여자와 결합하고 둘이 한 몸을 이룬다’(창세 2.24 ;에페 5,31)라고 표현한다. 이것이 우리가 생각하는 사랑의 우선적 측면이다. 그 사랑은 그러나 늘 성공적인 것만은 아니고 실패될 수도 있는 것이다. 사랑은 미리 예측할 수 없는 완전하게 치유될 수 없는 상처를 남기고 쓴 고통 아래 무너져 내릴 수도 있는 것이다. 그리고 또 사랑에는 이러한 지속적인 신뢰가 결여된 즉흥적 사랑도 있다. 어쩌면 거의 사랑에 대한 세기적 회의라 할만큼 지속적으로 불가능한 사랑도 있다.
현대는 ‘바쁨’이라 특성 지워져 있는 쫓기는 삶의 리듬과 컴퓨터로 대변되는 이성적으로만 추구하는 데서 오는 피로와 강박관념 등으로 느낌이 메말라 가는 시대(불감증 시대)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에서 사랑은 느낌, 감성의 마지막 보루처럼 여겨지고, 피로와 강박관념에서부터 도피처 내지는 지친 심신의 치유처 정도로 여겨진다. 이렇게 될 때 자연적으로 이어질 수 있는 현상은 사랑은 그냥 단순히 성적행위, 또는 육체적 긴장해소로 전락해버리고 만다. 사람들은 사랑을 지속적으로 여기지 않고 흥미를 지닐 수 있을 때까지만 지속하는 것으로 여기게 된다. 그래서 사랑은 상품화되고 물질화되어 버렸다. 그런 예로서 매춘으로부터 시작하여 텔레비젼 광고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성서적이고 그리스도교적인 사랑의 역사, 모든 시대에 걸쳐 모든 신앙인들은 성서의 이 귀중한 말씀을 해학이나 단순한 조롱으로 여기지 않게 하기 위해 사랑 이해에 있어서 본래의 의미를 지키려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